메르카데는 투기자다. 주식 가격이 떨어졌을 때 사뒀다가 오르기 시작하면 매입자를 속여 되팔아 넘기는 수법으로 돈을 번다. 그의 투기 형태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았다. 자신의 경제 상황과 사업 능력을 포장하고 은행과 채권자에게서 끌어온 자본으로 거대한 투기장에서 이익과 자리를 획득한다

 

메르카데 : ……오늘날 하나의 주식은그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당장 수익이 보장되는 종목이라면 할 만한 거야! 사람들은 미래를 팔아, 불가능한 행운의 꿈을 복권으로 팔 듯이. 그러니까 증권 시장 회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날 도와주게, 거기서 그 꽉 막힌 속을 뚫어 보세! 이보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주 어렵게 그걸 찾아내, 하지만 노리지 못하면 결코 찾지 못한다네.(194p)”


그가 하는 투기는 현대의 프로젝트 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오늘날에는 그것이 법으로 보호되고, 더 규모가 크고계획적이며, 실물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금융 경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PF는 사업의 미래 가치만으로 수천억원의 자금을 모을 수 있다. 이것이 메르카데의 시대로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방향이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윤리적인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 경계들이 존재한다. 메르카데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법과 윤리의 경계들이 서로 별개인 것처럼 보인다.

 

메르카데는 채권자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그의 파산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과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드 라 브리브와 딸 쥘리를 결혼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그 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돈의 권력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나타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결혼은 돈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문명 뒤에 감춰진 야만성이다.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먼에서 돈은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늙은 것을 젊게만들고, 심지어 문둥병조차 사랑스러워 보이도록만들며,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오게 만든다(아테네의 타이먼43)”고 말한다. 돈의 능력을 저주한 타이먼의 말을 인용하며 맑스는 화폐의 본질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고병권은 화폐, 마법의 사중주에서 이것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의 돈에 대한 예속을 말한다.


메르카데와 그의 친구들은 고도가 다시 돌아오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믿고 기다린다. 고도는 메르카데의 동업자였다. 그는 도망치듯 떠났다. 그후 메르카데는 고도로 인해 이익을 보기도 했다. 그들의 기다림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메르카데는 고도는 전설에 불과하고 허구”, “유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248p) 고도는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그를 본 사람들은 없지만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서 돌아왔다. 고도의 귀향은 그들의 상황을 회복시킨다.

 

한편, 고도는 직접 등장하지 않음으로 이 소설에서 다중적인 상징을 갖고 있다. 고도는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권력)이다. 투기를 하는 그들에게 호황과 불황을 가져오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그 부침은 고도의 도주와 귀향처럼 갑작스럽다. 고도는 캘커타에서 돌아왔다. 이것은 당시 유럽이 식민지로부터 배를 불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발자크의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발자크는 메르카데의 가정과 그의 딸 쥘리와 가난한 아돌프의 사랑 이야기를 배경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의 자본주의를 그려가고 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이들처럼 돈이라는 큰 권력 앞에서 굴복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힘은 자본주의이다. 또한 메르카데를 속이고 정략결혼을 하려는 드 리 브리브의 욕망은 돈과 언론과 정치가 한몸처럼 묶여 있는 시대의 부조리를 시사하고 있다.


곱세크는 고리대금업자다. 화자는 곱세크의 소송대리인으로서 목격하고 경험했던 것들을 이야기한다. 곱세크와 고리오 영감』에서 드 레스토 백작의 가정사를 다루고 있다. 곱세크에게 돈을 빌리는 백작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담보로 취한 물건들로 방을 가득 채우고 죽어간 곱세크와 같은 인간이 있다. 두 유형 모두 돈의 지배를 받는다. 돈은 그 사람들의 욕망, 거짓을 드러내어 파괴하고 냄새를 풍기게 한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당시 모든 인물들이 겪는 문제들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화폐에 새겨진 숫자의 가치를 믿는 믿음, 오늘날로 말하면 통장에 적혀진 숫자와 마그네틱 카드를 판독기에 넣음으로 지불했다는 믿음은 이상하고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린 이 믿음만으로 무엇을 지불하기도 하고, 내게 이만큼의 재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밀튼 프리드먼은 모든 화폐제도는 어떤 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것을 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듯 그 허구는 쉽게 깨지지는 않는다.

 

화폐는 일종의 허구이다.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왜 우리는 삶의 조건으로서 그런 허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왜 우리는 그런 허구적 존재에 지배받고 있는가.(화폐, 마법의 사중주고병권 23p)“

 

어쩌면 우리는 모두 사기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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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6-17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곱세크, 빌려서 결국
못 다 읽고 반납한 기억이...

비트코인이 허구라는 건 확실
히 알겠는데...
말씀해 주신 대로 통장에 숫자
로 기록된 무언가가 자신의
자산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
다.

그레이스 2024-06-17 13:09   좋아요 1 | URL
^^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우상이고 고도와 같이 보이지 않는 무엇,,,,
우리는 그것에 사기를 당하기도, 스스로 사기꾼이 되기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곱세크는 스크루지를 연상하게 해요!
 
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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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외모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노력해서 나아질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는 아이는 체 게바라를 형님이라 부르고 혁명을 동경할 수밖에! 청소년은 난쏘공을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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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예술인가
아서 단토 지음, 김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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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읽고, 예술이란 무엇일까? 화가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시각은? 관람자의 시선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서 단토의 이 책을 들었다. 중간쯤에서 다시 메를로퐁티를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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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뷔페, 그의 그림들은 그 앞에 오래 머물게 하는 자력이 있다. 그가 화판에 그어놓은 선들은 작가의 지문이다. 여러 개의 날카로운 선들이 반복적으로 오고가며 형태를 이루고 그 선들은 살아서 저마다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기하학적 직선과 단색으로 그려진 그의 꽃들은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화려하다. 핍진한 인물들의 얼굴과 몸은 공허와 슬픔과 불안과 고통을 전달하고, 다채로운 도시 풍경 속 간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그 장소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한 작품 한 작품 머물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주제의 공간으로 들어와 있고, 여러 개의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된 화가의 사인이 머릿속에 박힌다. 고독한 자화상인 <광대의 얼굴>만약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라고 한 말, 그리고 그의 최후는 작가의 실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단테의 지옥, 지옥에 떨어져 얼음에 갇힌 사람들>(1976), 캔버스에 유채, 250×430㎝

이어지는 전시 공간으로 들어서다 맞은 편 벽 전체를 덮고 있는 그림과 마주치고, 그 앞으로 자석처럼 끌려갔다. “단테신곡이다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지옥의 밑바닥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 떨어진 영혼들이 몸을 비틀고 증오와 고통으로 뒤엉켜있는 그림이었다. 그는 어떤 맘으로 하필이면 신곡 중 지옥의 밑바닥으로 그렸을까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있었다. 그가 그려온 인물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면 이런 지옥 군상과 주제의 그림이 자연스럽다.


신곡을 다시 읽고 있는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던 내가 아니었다. 단테와 신곡역시 같은 사람 같은 책이 아니었다. 단테가 통과해간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나눈 신학적 베이스와 그가 창조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지나쳐버린 역사와 인물들과 의미들을 주워 올렸다.

 

단테 신곡 강의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신곡 연구를 강의한 내용이고, 학자나 예술가들의 대담도 함께 담겨 있다. 신곡 안에 키워드가 되는 단어의 원어 연구와 다른 작품들 안에서 용례 비교를 통해 작가의 의도에 가까운 의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본의 문학이나 사회 문화에서 비슷한 상황을 들어 비교하고 있어 그 부분은 공감이 어렵다. 그럼에도 나같이 단천(短淺)한 독자에게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를 먼저 살피고 비교한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알아야하고 베르길리우스를 알려면 서양의 근본적인 서사시의 전통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의 기원이 트로이아로부터 오는 배경도 그 이유가 된다. 그런 기원을 갖고 있지만 단테의 신곡은 그들과 대립적이기도 하고, 창조적이다.

 

50년 동안 단테에 천착해온 저자의 강의와 질의응답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준 높은 질문과 이마미치의 답변은 신곡을 보는 눈을 몇 단계 높여 주었다. 14,15세기의 이탈리아와 라틴어, 역사, 단테학회 자료 등을 자료로 신곡을 풀어 놓은 양과 학문적 깊이는 내게 벅차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천구의 체계를 천국편에 적용하고 있으며, 아리스토 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긴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알면 알수록 단테의 지식과 글로 표현해내는 천재성에 감탄하게 된다.

 

지난번에 읽었던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단테도 다시 읽고 참고했다. 이 책들 역시 새롭게 얻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은 도판이 그리 좋진 않다. 항상 명화(그림)로 보는 ○○○○제목의 책들을 보면 도판이나 내용에서 조금 실망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신곡에 담긴 구스타프 도레의 판화가 더 인상적이었다연옥의 탄생은 연옥의 기원과 발전된 계기, 사람들 사이에 인식되기까지의 과정 등에 관한 내용으로 흥미로웠다. “12세기 말까지 연옥이 명사로 일반화되지 않았고 사용되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14세기의 시인 단테가 그곳을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연옥이라는 어휘가 생겨나고 불과 백 년쯤 후에 단테가 이를 묘사한 것이다. 이는 실로 선험적이고 위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단테 신곡 강의333p)”고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말한다.

 

 

문학과 예술을 읽고 감상하다보면 도처에서 신곡을 만나게 된다. 미술관 전시실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아 벽에 걸린 지옥풍경과 조우하는 것처럼. 단테가 인간의 연약함과 고귀한 정신, 절망과 소망, 빛과 그림자 등 삶의 보편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는 보편성에 공감한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은 그에 조응한다. 조금 더 오랜 시간 조금 더 깊고 자세히 읽어 보면, 그 공감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지식의 지평이 펼쳐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처럼 평생을 바쳐야 얻어지는 것들이다. 스스로 일천함을 깨닫는 독서였다. 신곡을 읽는다는 것은 예술과 문학 속에 남겨진 그 유물을 찾을 수 있는 시야를 얻는 유익이 있다. 그러기에 재독에 재독을 더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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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5-3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파일명 정리규칙만 보아도^^ 얼마나 진심으로 읽으시는지...

[신곡]은 언어의 벽을, 번역된 텍스트여도, 느끼며 읽다가 포기하게 됩니다. 저는 그랬어요. 그레이스님처럼 읽고 또 읽고로 돌아가야 뭔가 얻을 수 있겠네요^^

그레이스 2024-05-30 22:29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처음 읽을땐 지옥, 연옥, 천국 편으로 나누어서 했는데,,, 이번에는 더 세분화 했어요 ^^

레삭매냐 2024-06-1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먼 모양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번역하신 단테의 <신곡>
이 좋다해서 일단 사두기는 했는데...
어느 순간 읽다 말았네요.

분발해서 다시 도전을...

그레이스 2024-06-17 13:42   좋아요 1 | URL
도전! 응원합니다 ~~♡
 
부닌 단편선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29
이반 부닌 지음, 이상철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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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자체가 러시아어라는 사실만 알아볼 정도로 러시아어에 문맹이다. 아마도 남편이 들여왔을 이 손바닥 보다 작은 책이 러시아어로 된 시집이라는 짐작만 했다. 장식품으로 놓여있던 책의 표지에 우연히 스마트폰 번역기 화면을 갖다 대고서야 И. Бунин이 이반부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집의 제목 Холодная весна』차가운 봄이라고 번역된다. 곧 이 시집의 위치는 몇 안 되는 이반 부닌의 작품들 곁으로 정해졌다. 사실 작품들이라고 말했지만 부닌 단편선아르세니예프의 인생두 권뿐이다. 그 외에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기도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으로 부닌 단편선을 뽑아 읽게 된 나의 사정은 잊었다. 부닌의 명징한 글에 사로잡혔고 복잡한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이 단편들의 과거의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맑고 간결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시리게 아름답고 깨끗한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라는 배경이 주는 정서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다른 부수적이고 복잡한 사건들이 희미해져 사라진 한 줄기의 선명한 느낌일 테다.

 

이 책은 원래 첫 번째에 위치한 소설의 제목 어두운 가로수길로 출간되었던 단편집에서 선별 수록한 책이라고 한다.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부닌 단편집의 주제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하는 화자들의 생각에 달려있고,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글이 될 수 없기에 지나간 사랑보다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하고 싶다.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화자의 사회, 종교,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상황에 좌우되겠지. 그 총합이 작가의 사유일테고.

 

수록되어있는 작품의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이고 상류층이다. 한 작품만이 주인공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 간다. 남자들이 젊은 시절 사랑한 여인들은 대부분 하녀, 농민의 딸, 가난한 집 출신들이다. 그들은 신분의 격차, 아버지,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삶 때문에 그녀들을 떠날 수밖에 없다. 여인들은 남겨진다. 이후 그녀들의 실존적 삶이 불행했음이 당연하지만 화자(혹은 주인공)의 기억만 존재할 뿐이다. 몇 편의 작품에서 해후가 이루어지지만 그녀들의 삶은 발화되지 않기에 남성의 회환만이 남는다. 그 회환은 시적이고 사랑의 기억은 아름답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되돌아보며 그 순간의 선택이 달랐다면 하고 생각한다. 어두운 가로수길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는 춥고 비오는 어느 가을날 지친 여행길에서 들른 주막에서 사랑했던 나데지다를 만난다. 그녀는 이 주막의 여주인이고, 그가 버리고 떠난 농노 신분의 소녀였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아버지가 농노 해방증을 주었다는 말에서 부모의 개입으로 그녀와 헤어져 떠날 수밖에 없던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자신도 불행했다고 용서해달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무덤에서 시신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점이다. 기차역을 향하는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선택했더라면 지금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욕망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한 어느 공작의 후회와 교훈의 발라드는 한 편의 전설이다. 기차가 멈춘 곳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우울함은 그를 바라보는 부인조차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루샤) 차가운 가을의 화자는 여성이다.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화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차가운 가을날 그녀의 약혼자는 전선으로 떠나 한 달 후 전사한다. 그가 떠나기 전 산책길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시()이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고 피난하고 크림의 내전에서 홀로 남아 조카의 어린 딸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불가리아, 세르비아, 체코, 벨기에, 파리, 니스 등을 유랑한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질문한다. ‘대체 내 삶에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오직 그 차가운 가을 저녁만이 있었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처음 사랑했던 그와의 약속을 기억한다. 단편 전체가 시().

 

모래시계를 뒤집어 모래가 밑으로 흐르면 그 속에 파묻힌 것들이 드러나듯,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은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살 희망을 잃게 만든다. 그 때 어떻게 사랑했는가가 기억하는 현재의 마음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이 저버리거나 때론 어쩔 수 없이 빼앗긴 혹은 떠나버린 사랑, 한 순간 불태우고 버린 범죄와 같은 욕망들을 말하는 화자들에게 판결봉을 두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왜 여성들은 실존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자신의 과오조차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들 사회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닌의 소설은 시적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단어, 문장, 그것들이 모여 그리는 풍경 모두 그림이고 시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으며 나의 마음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으로 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반 부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서 더욱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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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4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러시아 특유의 감성 너무 좋습니다 ~!! 전 아르세니예프보다는 부닌 단편집이 더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4-05-04 17:40   좋아요 1 | URL
아!
전에 새파랑님 리뷰를 본 듯도 하네요.
부닌 단편선 좋아요~
아르세니예프도 좋은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5-0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한두개가 아니지만 ㅎㅎ)
어떤 러시아의 느낌을 줄지 궁금해요^^

그레이스 2024-05-05 17:50   좋아요 2 | URL
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ㅠㅠ

서니데이 2024-05-07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어린이날 연휴 잘 보내셨나요.
작은 크기의 시집은 러시아어 원서로 된 책이군요. 러시아어 배우기가 어렵다는데, 원서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5-07 06:4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러시아어로 문학을 읽는 것 저도 넘 부럽네요.
무슨 언어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린이가 없어서 어제는 어버이날을 대체했습니다.
비가 계속 오네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자운영 2024-05-1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번역이나 독해는 독서와 똑같이 편리하고 쉬운 일인 시대입니다.

yamoo 2024-05-14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 단편선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아르셰니에프의 인생을 새롭게 봅니다. 원래 있던 책인데, 그레이스님이 가치를 새롭게 불어넣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05-14 15: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작품 하시느라 바쁘셨나봐요.
감사합니다 ~~

젤소민아 2024-06-06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4-06-06 13: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