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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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요약하지 마라. 함부로 지껄이지 마. 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

 

작가는 정체와 이탤릭체의 문장들이 충돌하며 흔들리는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이라고 말했다이탤릭체는 기억과 생각이다. 정체(正體)는 드러나 있는 사실이다. 진실은 곧 사라질 것 같은 이탤릭체-죽은 자의 말과 산 자의 마음-에 있다. 정체로 다시 써야 할 엄연한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산 자의 일이다.

 

촉망받던 화가 인주의 죽음 이후 그를 후원했던 강석원은 미술정신서인주 추모 특집을 싣는다. 함께 올려진 작품 사진들을 통해 그가 인주의 유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정희는 가슴에 불이 당겨지는 것 같았다. ‘서인주 추모 특집을 읽은 이정희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여류 화가가 자라온 가난하고 어두운 환경-유복자로 태어나 모친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을 소개하는 글은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어둠의 진앙, 피안의 주술이라 제목 붙여진 그림들은 죽음의 경도에서 나왔다는 것을 상정하고(13p)“ 있었다.

 

정희는 인주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정희는 인주의 유품을 찾고 강석원이 출판하게 될 서인주 평전의 내용을 바로 잡기위해 그를 만난다. 그는 재능 뿐 아니라 젊은 나이, 아름다움, 압도하는 그림, 불행한 개인사, 자동차 자살이라는 극적인 최후까지(136p)” 신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서인주를 불멸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강석원의 말과 태도, 서인주를 신화화하는 데서 분노를 느낀다.‘여성의 신화화혹은 숭배를 이끌어내는 기저에 폭력성이 존재함을 본다. 여성을 소유하고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폭력적 야만의 다른 형태가 아닐까? 누군가에게 힘을 행사하는 것이 때로 산 자 보다 죽은 자에게가 더 쉬울 때가 있다. 그것이 타인의 삶을 요약하고 신화화하는 행위일 경우.


함부로 요약하지 마라함부로 지껄이지 마그 빌어먹을 사랑으로 떨리는 입술을 닥쳐.(41p)”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정희는 진실을 밝혀내고, 강석원의 평전 작업에 맞서 인주의 삶을 책으로 쓰고자 한다. 주변 인물들을 만나, 소식을 끊고 살았던 죽기 직전 인주의 행적을 탐문해간다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며 거기에는 오랜 시간 속 여러 사람의 죽음과 고통이 지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로스코의 도록에서 시작된 회상은 인주의 흉터, 인주의 외삼촌, 어머니에 대한 단서들이 이어지고,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인주와 정희의 가정사, 결혼 등 대물림과 사건의 지층이 드러난다. 강석원 식으로 말하면 달의 뒷면이다. 참 근사하고 상징적인 단어이긴 하지만 타인의 보이지 않는 삶을 유추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하게 된다.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219p)

 

강석원이 특집 기사에 썼던 달의 뒷면은 인주의 달력에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이 정희가 쓴 희곡의 대사였다. 강석원은 알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희곡의 제목은 닥쳐이다. 무대에 올린 정희의 첫 번째 희곡이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희곡에 등장하는 닥쳐게임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 중 한사람이 이야기하면 거기에 닥쳐라는 말로 응수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리 와. 내가 사랑해줄게

닥쳐.(조그만 목소리로, 겁먹은 듯이)

내가 돌봐줄게, 부드럽고 아늑하게.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돼

닥쳐.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닥쳐.

너는 인형이야.

닥쳐.

……

나에게 너무하는 구나.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닥쳐

……

너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닥쳐!“

247p

 

닥쳐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떤 고통과 상처를 갖고 있는지 또 다른 사람이 어떤 가해를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화들이어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런데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관객은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게 되지 않을까? 나에게 있는 달의 뒷면을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고 달의 뒷면과 같은 상징어를 함부로 인용하는 폭력성에 대해서도!

 

인주는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53p)”

라고 말했다.

 

그렇게 회상과 추적과 탐문을 해가며 정희가 도착한 인주의 고통의 근원은 미시령이 있었다. 그곳에 오래전 인주 어머니의 소외와 아픔,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었다. 그녀와 연루된 한 남자의 오랜 고통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었다.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채.

 

강석원의 구타와 방화로 인해 구급차에 실려 인공호흡기를 쓰고 정신을 잃어가던 정희는 산소 호흡기 속에서 쒜엑쒜엑 숨을 몰아쉬던 인주의 부은 얼굴(67p,384p)”을 떠올린다. 두 사람이 호흡기를 쓰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삶은 폭력을과 단절될 수 없음이다. ‘호흡기는 삶에 드리워진 폭력의 극단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쒜엑, 쒜엑 소리가 인주의 얼굴에서 터져 나왔다. ……마침내 의사가 나에게 빠르게 말했다.

 

환자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쉰 겁니다.

그게 인공호흡기가 넣어주는 숨과 부딪친 겁니다.

일단 호흡억제제를 투여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부딪치면 호흡기를 뗍니다.(384p)

 

세계는 나를 때려눕힐 주먹을 갖고 있다. 어떤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실체적이고 관념적인 모든 폭력에 노출된 삶을 산다. 특히 가난이나 질병과 같은 불행을 대물림하는 경우 그것은 노골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의 삶에서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친절을 가장하고 완곡한 어법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도에 의해 우리는 피를 흘린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삶을 거부할 수는 없다. 살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인주에게도 정희에게도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생명으로 진실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연설문 <빛과 실> , 2024.12.7.

 

작가는 다음 작업을 위해 이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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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2-24 10: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으로 횡으로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어서 저도 리뷰 쓰기가 까다로웠어요.

2rjfnr 2025-02-24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어머나 ᆢ 이런 책도 있었는지 몰랐는데요? 독특한 소재에 ᆢ 구조도 그렇고
다른 작품과는 다른 소설인가봐요 .. ..

그레이스 2025-02-24 18:03   좋아요 0 | URL
^^
저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었어요.
한강작가가 노벨 강연때 장편 5개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했는데, 채식주의자 다음 순서로 나와요.
저는 이 책 처음 읽을때도 이번에 읽을 때도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2rjfnr 2025-02-24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씩이나 좋았다고 하시니 ᆢ 호감이 가는데 ᆢ 언제 읽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
기회가 오면 소년이 온다 읽은 후에 ᆢ ᆢ 아마도 그럴것 같아요. ♡♡


페크pek0501 2025-03-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의 뒷면을 여기서도 보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여자없는 남자들‘에 담긴 한 단편소설에서 달의 뒷면,이라는 표현을 봤고 그것이 두 번째로 본 것 같은데, 첫 번째로 본 것이 어느 책에서였는지가 생각이 안 나는군요. 위의 글에서 세 번째로 보는, 달의 뒷면, 이라는 표현이 인상에 남아요. 누가 가장 먼저 썼을까요?
닥쳐 시리즈의 글, 새롭게 읽힙니다.
누구의 삶이든 함부로 요약할 수 없을 듯요.^^

그레이스 2025-03-15 15:38   좋아요 1 | URL
^^
글쎄요
더 앞의 표현이 있을듯요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숨을 멈추고 모든 삶의 행위들을 생각하게 된다. 뻗었던 팔을 안으로 거두게 되고, 함부로 걷던 걸음의 보폭을 줄이게 되고, 말의 단어들을 고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주변인들 혹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호흡을 안으로 들이마시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전신을 움츠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적시던 두 부부. 아파트가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아내의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내 여자의 열매24p)”, 남편은 두 손에 가득 받고 있던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낸다.

 

오래전 지인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대학생인 딸아이와 가볍게 언쟁을 하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말고 있던 쌀알크기의 휴지조각을 던지고 일어났는데, 그게 우연히 딸의 머리에 맞았고, 화가 난 아이를 달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쌀알 만 한 휴지조각이고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남편에게 돌을 들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했다는 지인의 말에 웃으면서, 딸이 서운했던 것은 그 휴지조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서슬에 담겨있는 분노와 행위의 폭력성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말라가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던 아내는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어버린다. 남편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이 시들고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단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란다 사건은 인간의 작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를 담을 수 있으며,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 여자의 열매채식주의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보인다. 이 단편이 미완성이라든가 습작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과 거부하는 심리가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위원회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몇 개의 질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 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침이 고이는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는 영혜의 꿈이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채식주의자42p)

 

그녀의 반복되는 악몽들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개에 물리고,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누린내의 기억에서 그 꿈은 생겨났다. 불고기를 먹던 남편이 칼 조각을 입에서 뱉어낸 사건은 영혜가 일련의 꿈을 꾸게 된 트리거가 되었다. 아마도 그 칼 조각은 영혜 안에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의 꿈,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꿈은 어린 시절 먹었던 개고기가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다. 영혜가 육식과 섭식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간 종이길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먹는 행위는 에로스(eros, 성적충동)만큼이나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과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육식은 도살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몽고반점에서 영해의 형부인 화자는 성적 충동과 예술가의 양심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몽고반점으로 촉발된 욕망은 예술가의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 있는 폭력성을 구별하는 경계가 모호한 까닭에 더욱 많은 폭력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채식주의자50p)”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를 향해 하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애원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의해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하는가?

 

영혜와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그 시간은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통은 진행형이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지방 병원을 찾아간 언니는 죄의식을 느낀다. 유독 아버지의 손찌검의 대상이었던 영혜는 자매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냥 돌아가지 말자고 했다. 산길을 내려와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을 향하던 길에 저녁 빛에 불타던 미루나무를 말없이 바라보던 영혜를 떠올린다.(192p) 영혜의 고통을 모른 척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 역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영혜를 실은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221p)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외면했었던가, 요구 받은 정의를 얼마나 많이 회피했던가를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폭력이 내재 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 아래 놓여 있고, 폭력을 습득하고, 행사하는가를 생각한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문을 쾅 닫고, 서류를 사납게 낚아채고, 볼펜을 탁탁 거린다. 내뱉는 단어, 휘젓는 손짓은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식물이 되기 전 온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가 나오고 점점 나무로 변해간다. 그녀를 멍들게 하는 것은 도시의 주거 형태의 폭력성과 그녀가 추구하는 삶에 무심한 반려라는 이름의 타자, 그리고 짜증 섞인 말과 행동들이다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직접적이며 주관적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인 폭력과 사회체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런 폭력을 행사하게 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한 한강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서 인간 종이길 거부했던 영혜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어 있었든 학습된 것이든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생각이다. 나무 불꽃은 유년시절의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고, 이제 영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하는 언니가 바라보는 풍경이다. 세계와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밀어내고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표지는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다. 그는 날카로운 선들로 야위고 핍진(乏盡)한 자화상과 피멍 투성이의 육체를 그렸던 화가다. 노을진 하늘과 땅, 나무들조차 병든 육체의 멍을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점과 선들이 섞여 있다. 사랑이 육체에 남긴 폭력적 질병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은 화가의 삶과 작가의 질문들이 겹쳐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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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2-08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여자의 열매가 그런 의미였군요 ㅋ 한강작가님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는 너무 강렬한거 같아요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는~!!

그레이스 2025-02-08 18:52   좋아요 2 | URL

단편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폭력, 빛 등의 주제들인듯요.
맞아요 공감!

stella.K 2025-02-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좀 당혹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일견 그렇구나 싶은데 아마 저는 채식주의자 이후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회의스럽더군요.ㅠ

그레이스 2025-02-13 12:14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 노벨위원회 강연과 관련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해져요.
작가가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글을 쓰고, 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가서 불편한게 아닌가 했어요.
사실 채식주의자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처음엔 저도 불편했어요.^^

2rjfnr 2025-02-0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블로그 글에서 한강 작가의 .책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가라앉고 착잡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ᆢ ᆢ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드너요 ~~!!

그레이스 2025-02-09 10:1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흰> 정도 가면 조금 밝아지긴 해요
조금요^^
뭔가 희망적 메시지가 보이는...!

페크pek0501 2025-02-13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를 읽고서 한동안 고기가 싫더군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고 행사할 때가 있어요.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육식도 죽여서 먹고 생선도 죽여서 먹는데 식물처럼 남을 해치지 않고 그저 햇볕과 비, 만으로도 살 수 있으니 식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동생을 끝까지 돌보는 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습니다.^^

stella.K 2025-02-13 12:08   좋아요 2 | URL
그게 그뜻일 수도 있겠군요. 전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괜히 광합성이나 생각하고. 내내 멍하기만 하더군요. 😂

그레이스 2025-02-13 12:13   좋아요 2 | URL
ㅎㅎ
식물이 폭력적이지 않으니까요.
경작문화보다 육식, 수렵문화가 더욱 남성위주이고 폭력적이라고 하죠?!
<내여자의 열매>에서는 여자의 몸에 든 멍에서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는 걸 보며, 그 상징성 때문에 감탄했어요.
다프네를 떠올리기도 했구요.^^

2025-02-1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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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인터뷰 기사에서 본 내용이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써야 하는 아들에게 "어느 정도의 개별 지도를 했고, 꼭 고려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고 했다. 아들은 에세이를 제출했고 점수는 C+이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들의 선생님이 아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가 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다고 한 작가의 말을 읽으며 혼자 웃었다. 흐흐

 

아들의 선생님이 동의하지 못한 것은 사실 작가의 관점이다. 독자가 읽어내는 메시지는 작가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에피소드이다. 그것이 문학의 재미고 탁월성이지 않을까? 이언 매큐언은 한 작품 안에 사랑, 젠더, 죽음, 정치, 언론, 예술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추리를 요구하는 플롯 안에 씨와 날로 엮어 놓는다. 그 중 한 두 가지 틀로 읽어도 생각할 많은 논제들이 생성된다.

 

그의 작품 암스테르담안에서 역시 많은 사회적 담론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이언 매큐언의 작품에는 그만의 반전이 있다.

 

몰리 레인은 팜므 파탈이었던 듯하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남자들은 거의 몰리와 관계가 있었다. 그중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 저널리스트 버넌 핼리데이,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는 그녀와 동거했거나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었던 남자들이다. 이 장례의 조문을 받고 있는 출판업자 조지 레인은 그녀가 죽기 전 결혼한 남편이다.

 

클라이브는 조문객들을 바라보며 자신과 몰리 세대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그 가사 “Talking about my generation”을 인용하며 그의 세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행운의 세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랐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 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였다. 신설 대학, 화사한 페이퍼백들, 로큰롤의 전성기, 적당한 이상 추구.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가 부서지고 정부가 느닷없이 젖을 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구색을 갖추느라 취미와 가치관,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세대는 ‘68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히피 세대임을 추측하게 한다. 몰리와 그들이 젊은 시절 함께 했던 자유로운 삶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클라이브, 버넌, 줄리언, 조지 네 사람은 몰리를 중심으로 서로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비판하고 증오하는 관계이다. 친구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의 죽음으로 인해 심리적 동요를 겪는다. 교향곡을 작곡중인 클라이브는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기 위해 열중하지만 악상은 떠오르지 않고 초조해한다. 그는 긴장감 속에 왼손 통증을 느끼고 몰리와 같이 치매로 죽게 될 미래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이 자살을 실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 들었을 경우 조력사망을 할 수 있도록 버넌에게 부탁한다. 버넌 역시 클라이브에게 같은 부탁을 한다. 버넌은 장례식에서 돌아와 부재감을 느낀다. 자신이 죽어 사라졌을 때의 세계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

편집국장인 버넌의 조지 가머니와 몰리의 사진을 공개하려는 시도는 언론이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산행 중 막 떠오른 악상을 붙잡아 작업에 열중하던 중, 성폭행의 위험에 처한 여자를 모른 척하고 악보를 그리고 있는 클라이브에게서 예술가의 이기심을 본다. 이와 관련해 클라이브와 버넌은 설전을 벌이고 서로의 행위를 비난한다. 두 사람은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서로를 향한 감정의 실체를 드러낸다.

 

부유했던 클라이브는 버넌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준 친구, 도움을 받은 친구 사이에 우정과 고마움만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졸렬하다. 둘 사이에 있었던 몰리라는 존재 역시 관계를 복잡하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애증은 미움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감정 때문에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도구로서 언론이 얼마나 자주 유용하게 사용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도덕성을 잃은 매체는 살인도구이다. 저널리즘을 신뢰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기 힘든 혼란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경우 그 글의 진위나 의도를 의심하면서 보게 된다. 반면, 스캔들은 왜 그렇게도 빨리 믿고 퍼지는지!

 

멀리서 목격한 범죄현장을 외면하고 서둘러 돌아오는 클라이브에게서 도시의 익명성과 유폐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을 보게 된다.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들은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 이 부작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죄되지 않기에 잠시 죄책감에 혼란스러웠던 양심은 곧바로 회복된다. 그는 곧바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안락사는 우리에게 닥친 시급하지만 오래 숙고하게 되는 문제다. 자신이 죽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뇌사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은 몰리처럼 되기 싫어서 클라이브와 버넌은 서로에게 조력사망을 부탁했지만, 조력사망은 청부살인이 되어버린다. 환각 상태에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닥친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한다. 몰리의 죽음과 차이가 없다. 아이러니다.

결국 모든 것을 눈치 챈 버넌의 이 마지막 말이 나의 뇌리에 남았다.

 

저것들이 산통 다 깨는군.”

 

질문들이 연속해서 떠오른다. 자연사보다 안락사가 더 친절할까? 스스로를 향한 살의와 타인의 살의 중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죽는다면 그 죽음을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다. 언제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버넌이 자신의 부재감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 사실이 제일 공포스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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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27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댓글쓰다가 중간에 바로 업로드가 되어버렸네요ㅎㅎ 이언 매큐언의 소설로 들어가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친밀함 속에 숨겨져 있던 본심과 실체가 드러나는 내용이 담겨져있는 것 같기도하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여러가지 사회적 담론들이 들어가있는 소설인 것 같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부작위는 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것, 정말 와 닿아요. 해야되는 것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것을 규정지으려 하면서,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책임감이나 기준을 적용하진 않죠. 부작위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들도 많이 보게 되는데 역시 그레이스님께서 잘 짚어주셔서 나중에 이언 매큐언 소설 읽을 때 꼭 참고할게요! 멋진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ㅎㅎ

그레이스 2025-01-27 18: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부족한 리뷰 잘 읽어주시고 이렇게 긴 댓글도 정성스럽게 달아주셨네요.
이언 매큐언은 항상 생각할 많은 지점을 갖고 있는듯요^^
반면 내용은 술술 읽히구요.
전야제님 명절 잘 보내세요~~

전야제 2025-01-27 18:20   좋아요 1 | URL
부족하다니요! 넘치게 훌륭해요. 짚어주신 포인트들 항상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있는걸요ㅎㅎ
그레이스님도 설 연휴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말문이 막힌 상황들을 보고 있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95p

이 대비를 지금 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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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2-06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문장에 밑줄을 쫙~ 그었어요.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나쁜 일을 집단 속에 있으면 함께 저지르기가 쉬워지지요.^^

그레이스 2025-02-06 13:52   좋아요 1 | URL

요즘 상황을 보면 아주 동의하게 됩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아프리카인 라티프 라흐무드는 거리를 걷다가,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에게 히이죽거리는 블랙어무어라는 말을 듣는다. 모퉁이를 세 번 돌면 한 번쯤은 듣게 되는 혐오의 말이다. 사전에서 블랙을 찾아본 그는 한 페이지에서 그렇게 많은 의미의 블랙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미움 받고 있다는 기분, 그러한 연상에서 오는 일종의 공포에 갑자가 나약한 느낌이 든다. 그는 OED(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 블랙어무어를 찾아본다. 거기서 영문학의 대가들에게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은 그의 기분을 돋우어주었다고 한다.

그 모든 고난의 시기 동안 내가 잊히지 않고, 밀림의 늪지에서 먹을 것을 뒤지면서 씩씩거리거나 벌거벗은 채 나무 사이를 건너다닌 것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존재하면서, 수세기 동안 정전(正典)사이에서 히죽거리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바닷가에서압둘라자크 구르나 125p)”

그가 말하는 영문학의 대가들 중에 셰익스피어가 있다. 그 정전은 오셀로일 것이다.

 

오셀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오셀로의 뒤에서 무어인이라 부른다. 그는 피부색이 어두우며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군인이다. 그만큼 그의 개인사는 파란만장하다. 데스데모나는 그의 인생역정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땜에 절 사랑하였고, 전 그녀가 그걸 정말 동정해서 사랑했죠.(1.3.168-169)”라고 말하는 오셀로의 말에서 불안을 감지한다. 투르크의 키프로스 침공이라는 베네치아의 위기가 아니라면 두 사람의 사랑은 반대 앞에서 좌절될 뻔했다. 그의 주변인들은 그의 성공과 사랑이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극을 이끌어가는 이아고의 역할과 비중은 필연성처럼 보인다. 그는 악마의 화신인 듯하고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작정하고 달려들면 그의 계략에 다 걸려 넘어질 것 같다. 놀랍도록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꿰뚫어본다. 그는 이 지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파멸시키는데 능란하다. 이아고의 오셀로를 향한 증오의 원인은 알 수는 없으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그에서 생겨나는 부정적 감정과 그것을 실행하는 사악한 인격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셀로의 파멸이 단지 이아고의 간계에 의한 것일까?

 

셰익스피어(아르떼)의 저자 황광수는 많은 해석자들이 마치 등록상표라도 얻으려는 사람들처럼 저마다 특이한 해석을 특수한 언어로 포장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19세기 영국의 평론가 콜리지는 악당 이아고에 주목하여, ‘무동기의 악이라는 표현을 남겼다. 빅토르 위고는 오셀로는 밤이고. “거대한 운명적 인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많은 경우 타당하지 않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인 것은 사랑 때문일까? 작품 안에서 데스데모나의 시녀이자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질투란 스스로 생기고 태어나는 괴물(3.4.155)”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질투의 근원을 찾으려 해봤자 소용없다고, 한번 일어난 의심은 잠재울 수 없다고 한다. 그 분노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라고 충고하는 것 같다.

 

켄지 요시노는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에서 18세기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말을 빌어 법(재판)에 있어 정의를 말한다. “사실관계를 확정짓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가 좌지우지(166p)” 된다는 의미다. 오셀로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 비극적 엔딩 후 진실이 밝혀진다. 주인공들과 그와 연루된 인물들의 죽음 이후, 사건의 진상이 알려진다. 베네치아 귀족이면서 데스데모나의 삼촌인 로도비코와 오셀로 전임 총독 몬타노와 장교들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실체가 드러나고 이아고는 체포된다.

 

그들이 세운 정의는 무엇인가?

 

오셀로의 주변에 악의를 막아줄 선의가 부재함을 본다. 오셀로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적 통념조차 회의할 줄 모르는 단순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을 무어인이라고 지칭하는 말들과 데스데모나의 부친 브라반시오의 경고에도 묵묵하다. 반면 질투를 일으키는 이아고의 충동에는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한 모습을 보인다. 의심하다가 후회하고 격정에 휩싸이다가도 뒷걸음질 친다. 미끼로 던져진 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즉시 간파하고, 증거를 찾으면서 그런 자신을 책망한다.

 

비극의 원인을 이아고의 사악한 간계와 오셀로의 허약한 사랑에서만 찾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가 이아고의 악의적 계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은 지속적으로 무어인이라는 말로 수많은 잽을 날린 사회적 폭력과 관계있다는 생각이다. 무반응으로 일관했지만 그의 자의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인간의 보편성을 생각할 때 당연한 귀결이다. 그를 키프로스로 보내던 귀족들의 통념 속에 자리 잡은 은밀한 혐오, 이것이 드러날 때에야 비로소 정의의 실마리를 잡는 것이다.

 

히죽거리는 블랙어무어

모퉁이를 세 번 돌면 꼭 한 번은 뒤에서 그를 향해 짖고 그를 멸시하는 언어, ‘블랙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던 20세기의 라티프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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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5-01-13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질투에서 비롯된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지 조금
궁금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마음 수양 혹은
수련이 필요한 시절이 아닌가 싶습
니다.

그레이스 2025-01-13 09:15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한번 그 감정에 빠지면 걷잡을수 없거나, 사라졌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죠.ㅠㅠ
자존감, 관계에 있어서 신뢰 이런 문제들도 있는듯 합니다.
오셀로 입장에서만 본다면 질투가 사랑에서 비롯된것이고, 어쩔수 없다면, 그 감정을 표출하는데 있어 데스데모나를 대상화하고 폭력으로 반응했다는게 문제겠죠.

모든 감정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인듯 싶습니다.

페넬로페 2025-01-15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저 글 생각납니다.
오셀로에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 이아고가 가장 악하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아고의 말이 맞지 않나요? ㅎㅎ

그레이스 2025-01-16 12:5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같은 생각!
이아고의 악의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자주 마주치는 상황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증오심이란게 뭐든 할수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