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잠복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에도 잠복기가 있다. 이때에는 자신이 그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서도 전혀 자각하지못한다. 또한 그 사상이나 감정이 외계와의 관계로 의식의 표면에 드러날 기회가 없으면 평생 그 사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은 결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이런 거라며 줄기차게 반대의 언행을 해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 언행은 모순되어 있다. 스스로 미심쩍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미심쩍다는 것은 모르더라도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한다. - P62

앞에서 말한 대로 내 영혼은 숙취에 시달리는 몸처럼 한없이 흐리멍덩했다. 그런데 역을 나서자마자 예고도 없이 명료한, 맹인에게조차 명료한 그 경치에 딱 맞닥뜨린 것이다. 영혼만큼은 놀라지 않으면안 되었다. 실제로도 놀랐다. 놀란 것은 틀림없지만 지금까지 흐리멍덩해서 마지못해 배회하고 있던 타성에서 일변하여 진지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일종의 묘한 기분은영혼이 몸을 뒤치기 전, 그러니까 경치가 참 명료하구나 하고 깨달은직후의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마음이었다. 그처럼 느긋하고 명백한 경치는 지금까지의 내 정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위세가 좋은것이었는데, 내 영혼이 아니, 이런, 하고 생각하여 진지하게 이 외계를대하기 시작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무리 환해도 아무리 한가롭게 있어도 완전히 실세계의 사실이 되어버렸다. 실세계의 사실이 되면 그 어떤 후광도 고마움이 없어진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 영혼이 어떤 특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즉 환한 외계를 환하게 느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실감이라고 자각할 만큼 작용이날카롭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곧은길, 그 곧은 처마를 사실과 다름없는 환한 꿈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세계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명료한 정도와 그에 따르는 확실한 쾌감으로 타계의 환영을 접한 기분이 들었다. - P79

기울기 시작한 해에서 눈을 옮겨 그 푸른 산을 바라보았을 때저 산은 홀로 서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쪽으로 쭉 이어져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조조 씨와 나란히 점점 산 쪽으로 걸어가자 아무래도저편에 보이는 산 깊은 곳의 더 깊은 곳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그산들은 모조리 북쪽으로, 북쪽으로 이어져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가 산을 향해 걸어가지만 그저 걸어갈 뿐 좀처럼 산기슭에 다다르지 않아 산이 안쪽으로, 안쪽으로 계속 물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가 점점 기울어 그늘진 쪽은 푸른 산의 윗부분과 푸른 하늘의 아랫부분이 서로의 본분을 잊고 적당히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내 눈에도 산과 하늘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고,
따라서 산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길 때 그만 산을 벗어났다는 의식을망각하고 하늘을 여전히 산이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하늘은 무척 광활했다. 한없이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나와 조조 씨는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 P81

해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올려다보았으나 양지는 어디에도 보이지않았다. 다만 해가 진 쪽이 희미하게 밝았고, 그 밝은 하늘을 등지고있는 산만이 눈에 띄게 검푸른 빛을 띠어갔다. 5월이었으나 추웠다.
이 물소리만으로도 여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는 해를등으로 받고 정면은 그늘진 산의 색이란, 대체 무슨 색이라 해야 할까? 단순히 형용할 뿐이라면 보라색이라고, 검은색이라고, 푸른색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 색의 느낌을 쓰려고 하면 잘 안 된다. 어쩌면 그 산이 당장 움직이기 시작하여 내 머리 위로 와서 왕창 뒤덮지않을까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추웠을 것이다. 실제로 앞으로 한두시간 안에 전후좌우 사방팔방이 모조리 그 산과 같은 불길한 색이 되어 나도 조조 씨도, 이바라키 현도, 완전히 한 가지 색의 세계 안에 휩싸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두 시간 전에 석양의 한 부분의 색으로, 한두 시간 후에 나타날 전체의 색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를 부추겨 당장 그 산의 색이 퍼져가겠구나 하는 예감이 마음 한구석에 들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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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8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갱부,,,도전 할지 말지 고민 중 ㅋㅋㅋㅋ

그레이스님 추석 연휴 1일 1소세키 옹 응원합니다~~

〃∩ ∧_∧
 ⊂⌒( ・ω・)
  \_ っ🌖c해피 추석~~

그레이스 2021-09-18 01:04   좋아요 1 | URL
좋은데요~~!

희선 2021-09-18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소세키 책 거의 다 보시겠네요 그레이스 님 주말이랑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18 09:48   좋아요 1 | URL
현암사 전집은 다 보는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희선님도 잘 보내세요
 
꿈 (2021 서울국제도서전 리커버 특별판)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신신 디자인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가 곤충으로 변한 자신의 몸을 보며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그의 글은 꿈속인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독과 괴로움이 묻어있다. 꿈에서 일어난 일에서조차 죄의식을 느끼는 그, 꿈에서도 사유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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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7 2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다른 평들도 찾아 보니까 이 책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꿈과 같은 글이라니 ^^

그레이스 2021-09-17 21:20   좋아요 5 | URL
꿈에 대한 글이예요
카프카의 글을 보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때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의 무의식의 세계가 꿈이라는 소재로 많이 등장하죠
그는 꿈에서조차 고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mini74 2021-09-17 21: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배수아작가님? 이 번역하셨군요. 오 뭔가 다를 것 같은 *^^*

그레이스 2021-09-17 21:45   좋아요 4 | URL
^^
특별판이라 커버도 폭신폭신해요^^
무슨의미일까 잠깐 생각했어요
어렸을때 꿈에서 높은곳에서 떨어져도 구름위에 떨어진듯 다리만 쭈뼛하고 만 것을 재현한것일까? 하는 생각?

미미 2021-09-17 21: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배수아님 믿고 찜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7 21:48   좋아요 4 | URL
자칫 모호하기 쉬운 상황의 문장들을 잘 전달한것 같아요
배수아님 글은 안 읽어봐서 잘 모르는데 의미전달은 잘되고 있어요
100자평만 쓰고 리뷰는 언제쓸지...^^;;

그레이스 2021-09-17 23:10   좋아요 2 | URL
배수아 작가는 번역으로만 봤네요
페터 한트케의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도...^^

미미 2021-09-17 23:13   좋아요 2 | URL
저는 페소아의 <불안의서> 배수아님 번역으로 샀어요. 워낙 많은 분들이 좋다고들 해서요ㅎㅎ

그레이스 2021-09-17 23:17   좋아요 2 | URL
저도 그 책 리뷰 여러 번 봤어요.
이제 믿고 보는 번역가가 되겠네요^^

독서괭 2021-09-17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찜합니다!! 그레고르랑 연결시켜 주시니 더 궁금하네요.

그레이스 2021-09-17 23:08   좋아요 2 | URL
사실 <소송>과 다른 작품들도 연상됩니다. 꿈에 대한 기록은 편지나 일기 형식이고 , 이 내용은 그의 작품속에 나타납니다.

희선 2021-09-18 0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글을 알기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읽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하네요 카프카 평전만 봤어요 그걸 쓴 사람이 한국 사람이어서 신기했습니다 그것도 몇해 전이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18 09:47   좋아요 3 | URL
저는 다른 작가가 쓴 평전 봤어요
명절연휴, 행복하세요~
 
그 후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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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정신과 메이지의 사상이 충돌하는 가정,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아들은 전통적 권위에 침묵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경도된 삶은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다. 놓쳐버린 것을 바로 잡기는 어려운 법. 예민한듯 보이는 주인공의 고뇌와 방황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청각과 시각적 미학이 돋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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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17 09: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그레이스님 빠른 속도로 소세키 독파중이신가요??

그레이스 2021-09-17 09:44   좋아요 6 | URL
^^
얼마전 읽었는데 100자평 안한게 생각 나서요~

초딩 2021-09-17 09:57   좋아요 3 | URL
광속!!! 행복한 광속 중이신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1-09-17 09:4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그후는 100자평을 안했네요^^
쓰면서 평가 별점이 높아짐!^^

초딩 2021-09-17 09: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짧은 씨리즈 좋네요
(그래이스님 글이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17 10:32   좋아요 4 | URL
^😀^
초딩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scott 2021-09-17 12:4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후 ! 넘 ㅎ 좋아합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는
눈감고도 쓸수 있을 정도로 ㅋㅋㅋ

그레이스님 1일 1소세키옹!
전 그의 마지막 작품 부터 거슬러 올라 가
(´ᴗ ·̫ ᴗ`)💭💕볼까 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7 11:39   좋아요 5 | URL
어디선가 만나겠네요~~♡

mini74 2021-09-17 12: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뭔가 막연하게 좋았던 그 후의 느낌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100자평입니다 *^^* 저도 공감 ~~

그레이스 2021-09-17 13:09   좋아요 4 | URL
감사×100!

서니데이 2021-09-17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부터 추석연휴 시작입니다.
즐거운 명절과 좋은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9-17 20:4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명절 되시길...
감사합니다
 
마음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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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가 말했듯, 그의 작품에는 권선징악이 있다. 평상심을 깨는 이기적이고 발 빨랐던 한 순간! 그 기억은 마음 안에 죄의식으로 은밀하게 자리잡고, 행복을 따라다니는 검은 그림자가 된다. 강한듯 무심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연약한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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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6 20: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안되는 소세키 읽은 책들 중 <마음> 정말 좋더라구요~!! 폭풍 소세키 읽기 👍

그레이스 2021-09-16 21:08   좋아요 4 | URL
나쓰메 소세키는 서사위주의 작법을 넘어 마음의 현상을 씀으로 근대소설의 문을 연 작가라고 읽었어요.
그 마음에 대한 탐구는 우리에게 적용해도 자연스러운듯!
인간은 그대로이고 마음의 기울기는 비슷하니...!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읽었다는 도장찍는 의미로 100자평 올리고 있어요^^

mini74 2021-09-16 20: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음 좋아해요. 몇 권 안되지만 ㅎㅎ저는 민음사걸로 갖고 있는데 ㅠㅠ 역시 현암사가 표지며 분위기며 예뻐요 *^^*

그레이스 2021-09-16 20:51   좋아요 4 | URL
저는 문예(전자책), 웅진 갖고 있는데 또 샀죠 ㅋㅋ

scott 2021-09-16 21: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옹의 마음 이제서야 조금씩 이해 하고 있습니다 ^ㅅ^

그레이스 2021-09-17 11:54   좋아요 3 | URL
^^
사람의 마음은 정말 ... 어렵죠!?
 

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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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9-16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 저는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갖고 있어요. 안 읽었고 갖고만 있어요. ㅋㅋ
읽을 게 많아 올해 안으로 읽는 걸 목표로 해야 할 듯싶어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너무 좋아서 구매한 게 <마음>이에요.

그레이스 2021-09-16 12:19   좋아요 1 | URL
읽고 있는데 그림 같은 장면이 쓸쓸함을 전하네요
나쓰메 소세키 글의 특징인듯요^^
<마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