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보급판 문고본)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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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가 나는 일이 많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우리의 사법부에게서 느끼는 분노에서부터,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받는 화가 너무도 많다. 화를 내면서도 화가 나를 갈가 먹고 있다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한다. 내가 읽은 심리학 책에서는 화를 내지 말라고 말들한다. 그렇지만, 화가 났을 때,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칠게 타인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고서도 나의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심리학 책에게 얻지 못한 해결책을 불교에게서 얻고 싶었다. 서가를 거닐다가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는 부재도 마음에 들었다. 틱낫한 스님은 화를 어떻게 다스리라 조언해줄까?

 

1. 화가 들어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

  틱낫한 스님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지 말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서도 화를 우리 몸에 받아들인다."-19쪽, 틱낫한

 

  공장식 사육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축산시설에서 자라난 동물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빠른 생육과 질병예방을 위해서 각종 생장촉진제와 항생재를 맞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고기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나의 몸상태를 교란시키고 과도한 생장촉진제와 항생재를 섭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뿐이 아니다. 과자를 비롯한 음료수에는 각종 합성첨가물들이 들어있다. 바나나맛 우유에 바나나는 들어있지 않고, 대부분 바나나맛을 내는 첨가재가 들어있다. 이러한 음식을 먹고 건강한 내모습을 바란다면 지난친 욕심일 것이다. 라틴어 아식스(ASICS)라는 말이 있다. 상표이름으로 유명한데요. 원 뜻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아니마 사나 인 꼬르 뽀레 싸노 Animus Sanus In Corpore Sano)"라는 뜻이다. 화를 다스리고 싶다면, 나의 몸에 화를 담아서는 안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듯다는 말은 나의 몸에 화를 담지 않아야 화가 없는 정신이 깃들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단지 먹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매체를 비롯해서 귀를 어지럽히는 더러운 말들과 더러운 잡념들을 물리쳐야한다. 바람이 부는데 깃발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수 없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화를 다스릴 수 있는 조건을 먼저 갖출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2.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듯이 화를 대하라

  화를 내고 나서 마음이 찝찝할때가 많다. 그때 화를 내는 것은 부적절했다는 것을 화를 내고 나서야 깨닫는다. 화를 떨어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화를 내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를 내는 나에게 틱낫한 스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듯이 화를 대하라고 한다.

 

  "아기가 우는 것은 무엇인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서일 것이고, 그래서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어한다."-37쪽

  "화는 우리의 정신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장이나 신장을 돌보듯이 우리의 화를 돌보아야한다."-68쪽

 

  '화'와 '나'를 분리시키고, '화'를 없애버려야하는 구성물로 보아왔던 나에게, 틱낫한 스님은 화는 내 마음속의 우는 아기라고 말한다. 버리려해도 버릴 수 없는 화라는 아기를 탓해보았자, 화는 더욱 강하게 울뿐이다. 나의 내면에서 화가 나는 이유는 나의 몸안에 울고 있는 어린 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중받지 못해 상처받고 아파하는 아기가 사랑으로 감싸앉아 달라며 울고 있었다. 어른 몸에 깃든 어린 아기는 울부짓는다. 따뜻하게 안아 달라고.... 그런데,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왜면하고 나의 몸속에서 내 쫒으려했다. 그럴수록 그 아이는 더욱 강하게 울어댄다.

  틱낫한 스님은 '화'도 우리의 정신적 구성물이라 지적한다. 화를 배척하기 보다는 끌어안으라 당부한다. 울고 있는 내면의 아기를 포용하고 내면 아기와 화해해야한다. 화를 다스리는 두번째 단계는 화를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울고 있는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사랑스럽게 안아주는 일이다.

 

3. 호흡과 미소와 보행명상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라.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할까? 틱낫한 스님은 보행명상을 권한다.

 

  "호흡과 미소와 보행명상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몸에 익히면 5분이나 10분이나 15분 안에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41쪽

  "10분이나 15분쯤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걸음 걸이를 자각하면 그 사람은 응징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44쪽

 

  유발 하라리도 '비파사나'라는 걸으면서 명상하는 수행을 한다. 1년에 한달정도 '비파사나'를 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갖을 수 있고, 아침을 명상으로 시작한다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불교의 명상 수행방법은 집중력을 높이는데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화를 다스릴 때도 큰 도움을 준다. 하기사,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없기에 불교의 명상법은 불교신자 뿐만 아니라, 화가 범람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화에 집중할 수록 화는 더욱 치밀어 오른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 화를 아기처럼 대하고,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며 명상을 하면 화에게 나의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보행을 한다는 것은 뇌과학적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산책을 하면 세라토닌이 분비되어 집중력을 높이고 머리를 맑게해준다. 단순히 앉아서 명상하는 것보다는 걸어다니면서 상처받은 나의 내면아기를 보살피는 것이 효과가 높다는 생각이든다.

  틱낫한 스님은 '화내는 것도 습관'이라 말한다. 그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며, 내면 아기와 대화하자. 우리 모습은 어린 시절 부모와 주변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살기 힘들었던 부모는 우리에게 많은 공감과 배려를 배풀어주지 못했다. 나의 주변인들은 나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친 부모들 밑에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화는 대물림된다. 시대의 아픔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는 자녀들에게 대물림된다.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떻게 보듬느냐가 우리의 현재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그 치유의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4. 자각하라!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면서 우리는 화를 자각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자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화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화의 본성을, 다시말해서 화가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각의 에너지로 화를 감싸안는 법을 배우고 나면, 화라는 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게 된다."-33쪽

  "마음속에 들어 있는 고통의 올가미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각의 에너지로 그것들을 감싸안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178쪽

 

  정신분석학에서 '직면'을 강조한다.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기 보다는 그 상처를 '직면'할때 치유는 시작된다. 틱낫한 스님은 정신과 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화를 회피하기 보다는 꽃을 대하듯이 화를 자각하고 감싸안으면 화가 일어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 꽃을 감싸 앉듯이 화를 감싸 안자. 꽃봉오리가 터지듯이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몸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랑은 시작된다. 나 자신을 자각하며 상처받은 꽃은 치유의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5. 공감과 연민하자.

  화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단계는 공감과 연민이다. 틱낫한 스님은 나를 화내게 한 사람을 화로 앙갚음하기 보다는 이해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하면 그 사람은 더욱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할 것이다. .....  어느쪽도 앙갚음을 반복해서는 안된다."-27쪽

   "내게 화내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103쪽

  "상대방이 가진 나쁜 씨앗보다는 좋은 씨앗을 보아라"-81쪽

 

  '연민의 정'을 가지고 화내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은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나의 경험상 학생들이 격앙되었을 때 먼저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말하도록 한다. 학생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나서 내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학생들도 나의 말을 경청한다. '연민의 정'은 강력한 무기이다.

  '상대방이 가진 좋은 씨앗을 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은 최성혜박사의 감정코칭이라는 연수에서 배운 내용과 유사하다. 상대방의 장점을 20개를 작성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나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불교철학이 현대 심리학과 서로 상통하는 모습을 이 책에서 다시한번 볼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단순히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가서, 나를 화가나게한 자에게 선물을 주라고 말한다.

 

  "화가 났을때 .... 그에게 선물을 주면 그에 대한 미움이 가라앉고 화가 풀리며 마음이 너그러워진다."-132쪽

 

  이 조언은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성현의 말씀은 서로 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러나, 틱낫한 스님의 조언이 100%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당당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화를 내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상대가 비굴한자라면, 어떠한가? 내가 화를 내지 않으면 그는 더욱더 나를 만만히 보고 나를 무시할 것이다. 비굴한 학생들을 대할때도 마찬가지이다. 강하고 엄격한 선생님에게는 납짝 엎드려있다가도, 유하고 만만한 선생님에게는 날뛰며 떠드는 학생이 있다. 이들에게 연민과 관용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뿐인가? 사회적 갑질을 하는자에게, 버닝썬 사태를 비롯한 국정농단 세력에게 관용이 과연 힘을 발휘할까? 그들을 용서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더 많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국민을 짓밟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와 연민'은 나약한 감정이 아닐까? 틱낫한 스님은 당당히 아니라고 말한다.

 

  "이해와 연민은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 아니다."-148쪽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을 역사에 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은 복수의 감정만으로 불의에 대적하지 않았다. 아니, 복수의 감정만으로는 자신의 한평생을 정의에 바칠수 없다. 그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이었다. 조국을 짓밟는 일제에 대항해서 조선의 민초를 살리겠다는 약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는 독재자에게 항거하는 민주화 투사에게는 나라에 대한 사랑과 시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연민과 이해'는 불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틱낫한 스님의 '이해와 연민'은 조건이 필요하다. 상대가 비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나라를 팔아 먹는 큰도둑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이해와 연민'이 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나의 마음을 치유하는데도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약자를 짓밟는 싸이코패스들에게는 정의의 단죄가 필요하다. 불의에 관대한 것은 악을 자라게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만 있는 병이 있다. '화병'이라는 병명은 세계에도 알려진 한국만의 독특한 병이다.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 불교가 여인들에 의해서 신봉되었던 이유도 그녀들의 '화'를 치유해주는 방법을 불교는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는 누구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한다.'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와 보살은 어쩌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이상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다리기 보다, 내가 고통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해야되듯이, 부처를 기다리기 보다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한다. 팃낫한 스님은 '비가 내릴때 우리는 햇빛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렇다. 현실이 비관적이라할지라도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망은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발견못할 뿐이다. 우리가 화에 지배당하지 않고,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감싸안으며, 내면아이가 활짝 웃게할 수 있는 비결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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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9-06-0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를 잘 승화시킨다면 삶에 대한 열정이 아닐는지...

강나루 2019-06-07 16:43   좋아요 0 | URL
그래요
화를 승화시키면 열정이 될수도 있을것같아요

붕붕툐툐 2019-06-07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저도 명상을 하는데, 확실히 화에 효과가 있어요~ 좀 전에 바나나우유를 사먹고 싶은 충동을 참았는데 잘했다 싶습니다:)

강나루 2019-06-07 16: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두 짬짬이 명상을해보려 합니다

민트 2020-03-27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혹시 역사선생님이신가요?
 
한입 매일 철학 - 일상의 무기가 되어줄 20가지 생각 도구들
황진규 지음 / 지식너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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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싶다면, 철학책을 읽어라! 한해 한해 나이를 먹으면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현실과는 상관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하는 학문이 '철학'이라 생각했던 적이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나이를 주었고, 더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한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삶을 살아가면서 느릿느릿 깨달았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깨닫는 나에게 철학책은 어려운 책이었다. 도올 김용옥, 강신주 라는 철학자를 만나면서 철학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닫는 속도가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팟캐스트 '철학 한입(철학흥신소)'를 통해서, 황진규라는 철학자를 만났다. 철학에 빠져 7년 동안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철학에 빠져사는 그는, 니체, 푸코, 칸트....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자들의 말들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황진규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다는 행운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한입 매일 철학'이라는 책을 펼쳤다. 철학이라는 '지혜의 학문'을 안내해줄 황진규의 '한입 매일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나의 삶을 철학하다.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철학으로 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한입 매일 철학'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이론만을 나열하기 보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러 나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그 몇가지를 살펴보자.

  나는 미셸 푸코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책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책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혜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 글도 그러한 글귀중에 하나이다.

 

  "19세기 정치적 권리에서 발생한 가장 대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주권의 이 오래된 권리, 즉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새로운 다른 권리에 의해 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됐다는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주권의 권리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입니다. 그런 뒤에 새로운 권리가,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가 정착하게 됩니다."-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323쪽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방법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으로 억압의 방법이 정교화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체벌)' 방법의 기억이 많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을 많이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몸으로 학습되어 교사가 되고 나서 학생들을 지도할때 많이 사용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이 얼마나 비교육적인지는 교사로 성숙되어 가면서 깨달았다. 지금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과거 폭력적인 방법으로 훈육되어온 나는, 또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은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가 성숙되었기에 체벌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의 훈육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 방법의 교육은 강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교복과 두발을 학생통제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야간 자율학습 참여율을 중요시하며, 담임 교사를 쪼는 교장들이 있다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해야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리자들에 의해서 학교현장은 아직도 참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나의 자녀들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연애도 결혼도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고, 교사로 발령받고 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연애와 결혼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결혼하라", "결혼은 언제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개팅을 하고 데이트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데이트를 하면서 여성을 리드하는 일이었다. 약속장소를 물색하고, 사전 답사를 가서, 데이트 코스를 결정한다. 계획된 장소에 계획된 일정에 따라서 여성을 리드하지 못하고 버벅되다가는 여성에게 퇴자를 맞기 쉽상이다. 여성에게 결정권을 주고,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가도록 하는 '민주적'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성들은 '민주적' 데이트를 원치 않았다. 왜? 내가 만난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는 '민주적 데이트'를 싫어할까? 남자에게 리드 당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자 황진규는 라캉의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황진규는 남자는 대체로 강박증적이며, 여성은 대체로 히스테리적이라고 규정했다. 강박증자는 "내 맘데로 할꺼야!"라는 구호를 외치는 반면, 히스테리 환자는 "네 맘대로 해"라는 구호를 외친다. 상당수의 남성과 여성이 강박증적이며,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민주적 데이트'는 설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강박증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치밀한 계획과 사전답사를 했고, 계획이 치밀해질 수록 데이트가 귀찮아졌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혼자살아야했을 것이다. 이제는 변해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미 젊은 세대는 변했는지도.... 여성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원하는 데이트를 남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더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원하는 데이트를 당당히 대화를 통해서 찾아가야한다. 강박증적 남성과 히스테리적 여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변화해야한다.

  초임 교사에 발령 받았을 때, 교무부장님은 자상하게 학교일을 알려주셨다. 너무도 자상하셨고, 친절히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셨다. 교무부장에서 밀려나 짐을 꾸리는 부장님을 도와드리며 쓸쓸한 그분의 뒷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 신봉하는 신문은 조선일보이며, 가장 믿는 언론인은 조갑재였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수구 정당을 지지하는 그분과 말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하곤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그분이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흄이 "절대불변의 진리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은 그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화를 할 수 없는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저자 황진규는 비트겐 슈타인의 '언어게임'이라는 이론을 소개하며, 대화할 수 없는 존재와의 대화방법을 제시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역적 문화적 연령적 창이에 따라서 다른 언어규칙을 사용한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규칙을 버리고 상대방의 규칙으로 들어가야하다. 교무부장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북녘땅에 지주로 살다가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땅을 빼앗기로 남으로 내려와야했던 그분의 가정사를 알고 공감해야한다. 친일파보다 공산당을 싫하는 지주의 심정을 이해해야한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대화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황진규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려할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상대가 미워질 때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삶을 철학하려 할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철학, 진정한 삶은 이뤄질 수 없다.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손을 떠시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신다.

  "손이... 안떨려고 하는데도, 손이 떨린다."

  불안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다. 급히 파킨슨병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매'는 병명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치매'는 증상일뿐 병명이 아니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헌틴텅 무드병 등의 다양한 병들이 심각해지면, '치매'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어머니가 손을 떠는 이유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으로는 오래사신 것을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나이드셨음을 두려워해야한다.(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저자 황진규는 "자기의식은 기억이기에,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이고 '나'다."라고 말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에게 자아란 없다. 자아를 잃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가족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간다.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같은 기억,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아를 만들어 간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자아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팟캐스트를 듣가다가 한 개그우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이번 주제는 '이번생은 글렀어'입니다."라는 개그우먼의 말은 '이번생은 글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라'라는 말로 들렸다. 천박한 개그우먼의 말이 한동아 귓가를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리셋하길 원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황진규는 '삶을 리셋하기 보다 삶의 아장스망을 바꿔보자'라고 제안한다. 들뢰즈가 사용한 아장스망은 '배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생의 모든 것의 관계를 재배치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단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재배치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재배치할 수도 있다. 돈을 인생의 일순위에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인생의 일순위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새롭게 아장스망을 한다면,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 '이번생을 글렀으니,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리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사람은 다음생에서도 이번생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 척박한 황무지를 탓하기 보다는 금이 이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키자.

 

2. 주인으로 살수 있는 방법을 철학하다.

  '다상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강신주의 책에서 강조하는 말은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거머쥐지 못한 우리가 주인으로 살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주인으로 살라했을까?

  마르크스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143쪽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야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아리스토켈레스보다 감동적인 마르크스의 말에 눈물이난다. 내가 상관으로 모시는 존재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와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킬 각오를하며 산다면 나는 나의 상관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라는 강신주의 말이 이해된다.  당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결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주인으로 살려면 사회적 관계를 달리할 수있는, 때로는 사회적 관계를 단절할 결기가 필요하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저자 황진규는 니체의 '힘의 의지'를 당연시하지 않고 그 의도(꿍궁이)에 의문을 던질 때 '우리가 세상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휘둘린'다고 말한다. 즉, 나를 억압하려는 사회구조, 국가, 회사 상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힘의 의지'는 '힘 싸움으로써의 관계 맺음'의 결과다. 우리가 '힘의 의지'에 순응한다면 히틀러가 독일인들 위에 굴림하며 유럽을 전쟁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었듯이, 권력자는 우리를 암흑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들의 '힘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의 꿍꿍이를 파악하고 저항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촛불 혁명'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수동적으로 나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인이 되려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우리는 '주인의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인정투쟁' 때문이다. SNS에 집착하는 이유도,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도 황진규가 지적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이유는 태생부터 부모라는 존재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 보다는 내 자신의 양심에 귀기울여야한다. 나의 양심과 나의 욕구에 귀기울일때 우리는 타인에 휘둘리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 저자 황진규는 "기쁨을 주는 타자는 악작같이 찾아나서야한다. 동시에 슬픔을 주는 타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써야한다."고 충고한다. 기쁨을 주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여야한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쁨을 주는 유쾌한 존재라면, 내주변에는 유쾌한 사람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도 유쾌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주는 타자도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바뀌지 않을까?

  저자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계획은 우리의 믿음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브리콜뢰르는 '손재주꾼'이나 '맥가이버'로 번역할 수 있다. 철저히 계획된 준비물을 토대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주어진 것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브리콜뢰르'이다. 브리콜뢰르에 계획은 필요없다. 계획을 신봉하며 계획된 데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당황하며 급속히 무너지는 '일본인'과 임기응변에 강하지만 계획성은 다소 부족한 '한국인'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를 강조하며 계획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나는 계획과 무계획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째즈와 같은 삶을 제안한다. 계획성과 무계획성을 횡단하며 아무리 촘촘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구조에 주목하자. 소쉬르의 말을 살펴보자.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 인간은 결정된다."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든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말과 글을 빼앗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된다면, 언어라는 구조를 바꾼다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된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 혹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독재정권이 '보도지침'을 내려서, '교통비 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교통비 현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 이유도 언어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권력자가 파놉티콘을 만들어 우리를 일망감시하려한다면, 우리는 역파놉티콘으로 그들을 주시해야한다. 모두가 중앙에 있는 권력자를 감시한다면, 파놉티콘은 다수의 감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만나는 길이 너무도 어렵다. 난해한 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이 보통의 노력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황진규 덕분에 나는 철학자들의 글들 사이를 비교적 쉽게 헤집고 다니며 깨달음의 보석들을 발견했다. 그중에 하나가 흄의 말이다. 

  "인과관계는 근본적으로 논증 불가능하다."-69쪽

  어제 태양이 떠오른다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 어제 떠오른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태양이 50억년 이후에는 수소를 다태우고 백색외성이 되어서 수축하거나 폭발할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양이 떠오를 수 없다. 법칙은 한정된 조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태양이 존재하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철학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에 의문을 품는다. 당연한 일들에 의문을 던지며 나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나의 사고도 좁은 알을 깨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는 맛이 난다. 함께 철학의 품에서 뛰어 놀지 않으련가?

 

ps. 나의 가슴에 남는 몇줄을 적어본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없는 지석은 공허하다."-칸트 95쪽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야만 한다."-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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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5-02 05: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삶이 오래 될 수록 생각이 많아지네요

2019-09-12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9-12 06:15   좋아요 1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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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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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격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터미네이트>>의 스카이넷이 인류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 인공지능은 인간이 개발한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말들이 넘쳐났다. 사람의 언어를 학습하던 AI에게 '너희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인간을 멸종시킬거지?'라는 질문을 하자, AI는 "사람은 소중하느까, 사람동물원을 만들어 잘 보관해야죠."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달구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라는 책은 이러한 고민속에서 읽기로 결심했다. 철학을 전공한 김재인 교수는 이러한 나의 고민에 어떠한 해답을 제시할까?

 

1. 모든 철학은 당대의 자연과학과 나란히 가야한다.

  철학자가 최첨단 인공지능에 대해서 책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철학자이니 만큼,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보다 심도있게 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책의 상당부분은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있다. 철학교수가 인공지능을 공부하려하니 너무도 힘들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든다. 왜? 철학자가 최첨단 과학에 대해서 글을 써야할까? 과연 쓸 수 있단말인가?

  이러한 나의 의문은 책속에 답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철학자마다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는 과학이 이전부터 있었다고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을, 근대철학자들은 물리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으며 철학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크니츠, 로크, 버클리, 흅 등 17~18세기 철학자들이 당대의 자연과학과 동시대적으로 작업했다. 철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에 당을 내딛고 있어야한다. 각시대의 시대적 조류를 이해하고 시대적 과제에 나름의 비젼을 제시하려 철학자들이 노력하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철학과 과학은 관련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현대 철학자들은 어떠한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을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일 수 있고, 뇌과학일 수도 있다. 강신주의 경우, 인류학과 뇌과학을 그의 저서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출현해 이러한 변화에 비젼을 제시해야한다. 그러하기에 다양한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물론, 과연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과와 이과로 분리되어 이과학생은 문과과목을 공부하지 않고, 문과학생도 이과과목을 공부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현대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는 철학자가 많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리라. 대지에 뿌리 내리지 않은 나무는 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철학자로서 최첨단의 인공지능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김재인 교수의 시도는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죽음의 묵시록이 펼쳐질 것인가?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출현할 것인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공지능에 의해서 나의 직업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상상이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 교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시대에 나의 직업을 지키며,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인공지능은 과제를 잘 해결한다. 반문에 인간지능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목표를 설정한다. 즉, 인공지능은 바깥에서 주어진 목표를 수행한다면, 인간지능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 이끌어가는 주체이다. 정재승 교수도 '열두 발자국'에서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작동하며, 데이터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며, 데이터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할 뿐아니라, 데이터에 없는 영역을 찾아 스스로 데이터를 만드는 능력이 약하다고 지적했지 않는가? 이러한 인공지능의 약점을 우리가 잘 이용한다면, 인간이 직업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는 틈새를 찾을 수 있다.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이 못하는 일로, 문제제기, 목표 설정, 창조적인 일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교육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스승이 제시한 문제를 학생들은 빠른 시간내에 정확한 답을 도출하도록 교육받는다.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학교에서는 요구 받고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길러진 인재가 인공지능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할까? 나는 유대인 교육에서 그 탈출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질문'이다. 일명 '하브루타'라고 불리는 토론 학습에서 학습자는 다른 관점을 접하면서 가장 다양한 질문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문제제기를 학습한다. 또한 유대인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목표를 정하지 않고, 자녀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기다려준다. 타인과 같은 아이로 성장하기 보다는 타인과 다른, 자녀만의 독특한 개성이 발현되도록 격려를 해준다. 그러면서 자녀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사회에 나가서 창조적인 일들을 한다. 김재인 교수가 제시하는 인공지능이 못하는 일을, 학습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은 가정에서부터 교육하고 있었다.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 시스템을 강조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가? 학교에서는 아직도 두발단속을 한다. 개성을 말살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게이지수 라는 것이 있다. 게이가 많은 도시와 첨단산업이 발전한 도시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첨단 산업 즉, 창조성이 요구되는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게이들은 허용적인 분위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시를 찾아 이동한다. 그러하기에 게이들이 많은 도시는 허용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유로운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는 첨단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김재인 교수가 제안한 '예술가적 삶'이 가능한 도시! 그러한 도시에서만이 니체가 말한 인간만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3. 인공지능의 시대, 우리 현실을 묻다.

  "인간대 기계의 대결이 아니다. 기계를 가진 인간대 기계가 없는 인간의 대결이다. 데이터와 직관력은 말과 기수와 같다. 당신은 말을 앞지르려 노력할 필요 없다. 당신은 말을 탄다."  - 도밍고스

 

  수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을 머릿속에 상정하고 두려워한다. 카풀택시 도입을 반대하는 택시기사분들의 시위도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우버택시가 미국에 상륙했고, 공유경제는 시대적 조류가 되고 있다.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했지만, 서양과의 통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물결 속에 조선의 존립이 위협받았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공유경제는 피할 수 없는 조류이다. 이러한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카풀택시의 도입을 막으며, 말과 경쟁하려해서는 안된다. 결국은 말로 표현된 인공지능에게 인간은 패배하고 생존마져도 위협받을 수 있다. 말의 기수가되어, 인공지능에 올라타서 앞으로 내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물론, 말로 표현한 인공지능에 올라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카풀택시의 도입을 막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자명하게 알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용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일! 인간이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분야를 찾아서,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할 때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인간 마음은 본성상 편파적이다."-김재인

 

  인간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공감을 많이 느끼지만, 먼 사람에게는 공감을 덜 느낀다. 이것은 연민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차별 없는 사랑 즉, '겸애'를 주장한 묵가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매우 탁월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재인 교수는 '공감'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의 개인사를 비교한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해 연민을 지닌 동시대인이 박근혜의 부모가 총탄에 죽은 시기를 같이 살았던 노인분들이 느끼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김재인 교수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노인세대가, 박근혜에게 느끼는 연민과 세월호 희생자에게 느끼는 연민의 시간적 거리감은 박근혜가 더 먼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세월호 희생자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을 좌파라고 몰아부치는 사람도 있다. 박근혜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세월호 희생자에게도 연민을 느껴야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연민'을 걷어내야한다는 김재인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또한, 박근혜에게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그녀가 저지른 권력남용과 적폐가 없었어야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통의 사람들은 연민보다는 적개심을 갖는다. '연민'을 걷어내기 보다는 보다 종합적으로 '연민'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차이이다.

 

  과학에 문외한 이라서 이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더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가 이 책을 결론을 요약해서 제시했더라면 책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든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하는 철학자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을 담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자신의 직업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책에서 느끼는 희망은 제법 크다. 그래, 인공지능과 경쟁하려하지 말고, 인공지능에 올라타서, 저 푸른 들판을 향해서 내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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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를 키우는 도덕경 :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옛글의 향기 4
노자 지음, 최상용 옮김 / 일상이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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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은 쓸쓸히 밤하늘을 거닐지만, 온 천지의 강에  떠오른다. 고전은 달과 같다. 한권의 고전이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전중에서 '도덕경'은 읽는 사람의 마음밭에 따라서 달리 읽힌다. 읽는 사람이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읽는가에 따라서 너무도 달리 읽힌다. 주역을 토대로 유학자의 마음으로 왕필이 '도덕경'을 주석했다. 그 반대편에 제왕의 관점에서 하상공이 '도덕경'을 주석했다. 같은 책이지만, 왕필과 하상공의 마음에 비친 '도덕경'이라는 달은 너무도 달랐다. 필요하다면, 원문의 뜻을 반대로 주석하는 것도 불사할 정도로 너무도 다른 해석을 적어 놓았다. '노자도덕경주'에 이어서, 하상공주를 토대로 엮은 '내안의 나를 키우는 도덕경'을 읽기 시작했다. 왕필이 주석한 '도덕경'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1. 우리 주변을 비추다.

  배운다와 가르친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노자의 대답을 들어보자.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의 길은 날마다 쌓아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내는 겁니다. "

 

  교사가 되기 전에 날마다 나의 지식을 쌓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얇팍한 지식들을 쌓아갔다 생각하지만, 그 때는 내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는 자신감(?)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교사가 되고 나서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듯하지만, 학생과 생활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나를 비워가는 생활을 했다. 초임 교사 시기에는 나를 비워가는 일이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 위해서 나를 더 채우려했다. 학생 상담에 필요한 얇팍한  지식으로 복잡한 그들만의 세상과 만난는 일은 너무도 무모했다. 교육학 서적 몇권과 심리학 서적 몇권으로 학생들의 복잡한 세계를 모두 알수 없다. 나를 비워야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내려 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새롭게 학생들의 이야기에 채워야 그들의 세계가 나의 눈에 들온다.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이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라면, 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내려 놓아야한다. 노자는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교장과 교사는 같은 존재일까? 관리자들 중에는 자신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꾀 있다. 특히 장학사를 거쳐서 교장으로 발령받은 경우, 자신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교장이 많다. 교사를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학부모에게 어떻게 잘 보일 것인지만을 생각한다. "교사가 힘들면, 학생이 행복하다."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하는 관리자들도 있다. 불행한 교사가 학생들을 기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까? 불행한 부모 밑에서 아이들이 밝게 웃기 힘든 것 처럼, 행복하지 않은 교사와 대면하는 학생들은 기쁨이 넘쳐날 수 없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부유대 고사불초 약초구의 기세야부(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오직 위대하기 때문에 모자란 듯 보이는 겁니다. 만약 똑똑하였다면 세세하게 살피는 정치를 행한 지 오래되었을 겁니다. 그러한 사람은 소인배와 같은겁니다."

 

  탁월한 관리자일수록 자신을 내려 놓고 교사와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똑똑한 관리자일 수록 자신의 교육관을 교사와 학생에 강요한다.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며 교사를 가르치려한다. 이00교장과 나00교감의 경우가 그러했다. 똑똑한 장학사 출신의 교장과 교감이었기에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려 교사의 의견을 들었으나, 결론은 자신의 주장으로 끝을 맺었다. 무늬만 '민주적인 의사결정'이었을 뿐이다. 세세한 그의 '가르침'은 학생을 지도하는 일부터, 교사가 사용하는 학습지까지 세세하게 지적했다. 똑똑한 관리자에 대한 불만은 높아 갔다. 연구학교 지정을 받기 위해서 교사 투표를 했으나, 많은 교사들이 반대표를 던졌다. 똑똑한 관리자에 대한 교사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독일 군대의 속담에 "유능하며 부지런한 자는 참모로 적당하다. 유능하고 게으른 자는 탁월한 지위관이 될 것이다. 무능하고 게으른자는 조직에 쓸모없는 사람이다. 무능하고 부지런한자는 조직에 해가되는 사람이니, 반드시 제거해야한다."라는 말이 있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장학사 출신의 관리자들은 교장, 교감에 부적당하다. 그들은 교장과 교감의 참모로 적당할 뿐이다. 교장이 되기 위해서 승진점수를 얻고, 승진점수를 얻기 위해서 장학사 시험을 본는 지금의 인사시스템은 교사와 학생을 행복하게 학교를 만들어가는 관리자를 만들 수 없다. 학부모의 눈치만 보면서, 타학교 보다 더 많이 학생을 압박하여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고 교사를 감시와 처벌의 눈으로 보게만든다. 똑똑한 관리자가 아닌 탁월한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 마치 모자란듯 보여야한다. 그래야 교사와 학생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다.

  학교에서 우리 주변으로 눈을 돌려보자. 유명회사의 양00회장이 부인에게 마약류를 권하고, 직원들에게 구타를하고 이를 촬영했다. 우월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힘없는 여성과 직원들에게 갑질을 한 것이다. 연일 터져나오는 갑질 뉴스에 몸서리를 친다. 노자라면 갑질을 해대는 사회지도층분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주었을까?

 

  "故貴以賤爲本 高必以下爲基 是以侯王 自爲孤寡不穀(고귀이천위본 고필이하위기 시이후뫙 자위고과불곡)-그러므로 귀한 것은 반드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반드시 낮은 것을 기초로 합니다. 이 때문에 제후나 왕은 스스로를 '고아 같은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춧돌이 없이 어찌 기둥이 홀로 설수 있을까? 꼴찌가 없이 어찌 일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앞서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어야한다는 평범한 이치를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모르고 있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반드시 낮은 것을 기초로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왕이 자신을 '과인' 즉, 부족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갑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2. 정치를 비추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면서 “모든 부담을 미국이 져야 하는 상황은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불법이민을 막겠다며,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과 각을 세웠다. 결국 셨다운 상태에 돌입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라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다. 초강대국은 어떠한 모습이어야할까? 노자에게서 힌트를 얻어보자.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대국자하류 천하지교)-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어서,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대국은 큰 강처럼 자신을 낮춰 세상의 모든 물을 줄기를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한다. 천하의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제 트럼프는 미국이 큰강도, 큰바다도 아니라며 폐쇄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자, 대국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다. 중국 당나라를 보라, 유럽의 로마제국을 보라, 서아시아의 오스만제국을 보라!! 제국은 천하의 '하류'였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문화와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서 능력이 탁월한자를 관직에 임명하며 제국의 힘을 키웠다. 문화의 용광로이며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대국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노자는 2천년 전에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

  어느 정치인이나 꿈꾸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올랐다면, 역사에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때로는 그 업적을 마김과 동시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도 도구로도 활용된다. 과거 이명박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했다. 20조가 넘는 예산이 들어갔고, 4대강은 큰빗이끼벌래가 활개를 치고, 녹조라떼의 녹색물결로 뒤덮혔다. 노자라면 우리에게 어떤말을 해줄까?

 

  "將欲取天下而爲之 ,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 이위지 , 오견기부득이)-장차 온 세상을 휘어 잡고자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꾸미는데, 내가 보건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시이성인거심 거치 거태)-이 때문에 성인은 지나치게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스러움도 버리며, 과분한 것 역시 버립니다.)"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자신 주변 사람들에게 떡고물을 줄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부질없는 일이며, 심하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극심한 사치도 버리고, 과분한 것 역시 버린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랏살림을 망치는 정치인들과 그러한 정치인을 선출하고 지지하는 국민에게 노자는 따끔한 말을 하고 있다. 정치인과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마음이다.

 

3. 니체와 공자를 비추다.

  고수들은 서로 통한다. 비슷한 주제를 달리 말하기도하고, 같은 의미의 말을 놀랍도록 일치하기도한다. 노자의 말은 니체와 공자의 말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음미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3단계 변신을 이야기했다. 낙타가 사자로, 사자가 아이로 변화해 가면서, 정신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낙타가 중세의 짐을 지고, 굴종적인 노예의 삶을 사는 존재라면, 사자는 자신을 짓누르는 짐을 벗어던지고 당당히 자신의지를 밝히는 존재이다. 그에 반해서 아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이다. 힘이 약하면서도 힘이 강한 부모를 마음대로 다루는 존재가 바로 아이이다. 놀랍게도 노자도 아이의 이러한 힘을 알고 있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곡 상덕불리 복귀어영아)-남성스러움을 알면서 여성스러움을 지킬 수 있다면 천하의 계곡이 될 수 있습니다.천하의 계곡이 되면 항상 덕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 갓난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갑니다."

 

  남성스러움을 알면서도 여성의 부드러움을 지킬 수 있다면, 계곡처럼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마치 갓난아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웃음으로 부모를 기쁘게하고, 아기가 아플때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니체보다 앞서 노자는 2천여년전, 아기의 가능성을 주목했다. 고수끼리는 통하나 보다.

  공자의 말과 노자의 말을 비교해보자. 우선, 공자와 노자 모두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信言 不美 美言 不信 善者 不辯, 辯者 不善,(신언 불미 미언 불신 선자 불변 변자 불선)-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선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않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못합니다."-노자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자왈 교언영색 선의인)-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잘하고 표정을 잘꾸미는 사람치고 어진사람이 드물다.-공자

 

  중국철학을 대표하는 공자와 노자 모두 말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 서럽지 못하며, 말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못하다고 한 노자! 말잘하고 얼굴표정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 드물다는 공자! 말보다는 진실된 행동을 중시하는 선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말을 잘 표현하는 것을 중시한다. 아고라 광장에서 토론을 통해서 발전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의 역사를 본다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동양인들이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하다보니, 활기찬 토론과 의견교환이 동양에서는 이뤄지기 힘들지 않았을까? 물론 활기찬 토론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같은 계층안에서는 토론이 이뤄졌겠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아이 사싱의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굴곡진 현대사에서는 "말잘하면 빨갱이!"라는 말이 유행했지 않는가! 이제는 말잘하는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폭력보다는 말로서 상대를 설득하는 그러한 사회를 꿈꿔본다.

  공자와 노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찌 대답했을까? 놀랍게도 공자와 노자의 입장은 일치한다.

 

  "知不知上 不知知病(지부지상 부지지병)-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게 최상의 덕이고,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게 병폐입니다."-노자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알이다."-공자

 

  공자와 노자 모두, 모르는 것을 아는체하는 것을 커다란 병폐로 여겼다. 또한 자신의 무지를 아는것을 참다운 앎이라 여겼다. 노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알면서도 모르는 것 처럼하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공자와 노자의 말은 소크라테스에게서도 발견된다.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너의 무지를 알라는 말이다. 동양을 넘어서 서양의 현자도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참다운 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을 설명하면서, 중세 시기에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신의 뜻'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몰랐다. 반면에 근대에 들어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유럽인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서 실험과 관찰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그 과학혁명의 힘으로 서양이 동양을 침략해온다. 동서양의 현자, 현대의 현자들은 모두 말한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 그것이 참다운 앎의 시작이라고.....

  충신과 참다운 친구는 언제 나타날까? 공자와 노자가 비슷한 말을 했다.

 

  "六親不和,有孝慈;國家昏亂,有忠臣(육친불화 유효자 국가혼란 유충신)-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자, 효도와 자애로움이 있게 되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충성스러운 신하가 생겨났습니다."-노자.

  "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 후조)-추운 겨울이 와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공자

 

  임진왜란이 닥쳐야 이순신과 같은 충신 영웅이 등장한다. 눈내린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 불행이 닥쳐야 옥석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노자와 공자는 말하고 있다. 내가 행복하고 돈과 권력이 있다면, 나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들이 얼마나 함께할까?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의 문상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 세상사이다. 진정 사람을 바라보는 참돈눈이 있다면, 불행이 닥쳤을때, 나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한 눈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4. 왕필과 하상공을 비추다.

  왕필과 하상공은 '도덕경'에 주석을 달았다. 같은 책에 주석을 달았으나, 서로의 원문이 다른 경우도 있으며, 같은 문장을 달리해석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글자의 뜻을 정반대로 설명한 경우도 있다. 그것을 모두 여기에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중 몇가지만 소개해 본다.

 

  "不自見故明(불자현(견) 고명)"

 

  이 문장의 '見'을 현으로 읽어야할까? 견으로 읽어야할까? '현'으로 읽느냐 '견'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해석에 차이가 생긴다. 왕필은 '현'으로 본 반면에 하상공은 '견'으로 보았다. '현'으로 읽을 경우,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지혜가 밝게 드러나고'라고 해석된다. 반면에 '견'으로 읽을 경우, '성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기에 밝게 알고'로 해석된다. '드러낸다'와 '본다'의 해석상의 뉘앙스는 약간다른다. '현'으로 읽을 경우, 성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신하들로 하여금 악역을 맡도록하는 고난도의 통치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으로 읽을 경우, 자신이 직접 세세하게 살피지 않더라도 각종 첩보기관을 이용해서 세상의 정보를 얻고 통치한다는 의미로해석된다. '도덕경'을 제왕들에게 통치의 방법을 알려준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노자 통치술의 무서움이 서려있는 문장이다.

  같은 문장의 해석을 달리한 경우를 살펴보자.

 

  "民不畏威, 則大威至.(민불외위 즉대위지)"

 

  위의 문장을 하상공은 '백성들이 해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해로운 것이 이르게'된다고 해석했다. 반면 왕실은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큰 위엄이 이르니'로 해석했다. 왕필의 경우 '위'를 해롭다로 해석했다. 백성들이 작은 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보다 큰 해로움 즉, 죽음에 이른다는 문장으로 해석한 반면에, 왕필은 군주가 겸손한 자세로 물러나는 것을 버리고서 자신의 위엄과 권력에 의탁하면 만물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감시와 법망을 피하려하기에 위엄으로 백성을 통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위'를 해로움으로 볼 것인가? 위엄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문장의 해석이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왕필과 하상공을 비롯해서 수많은 주석서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찌해야할까? 나는 '고전은 자신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나의 명제로 되돌아 간다. 고전이라는 거울은 자신을 비추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수많은 주석서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주석가들의 고민을 토대로 고전을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않다고 그들을 탓할 수 없다. '도덕경'은 질문에 따라서, 질문자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대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덕경'의 참다운 가치이다.

  하상공은  한자의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큰 환란이 내 몸에 이르러도 귀하게 여기며 두려워해야합니다"의 '貴(귀)'를 '귀하다'라는 본뜻과 반대로 '畏(외)' 즉, 두렵다로 주석을 달아 놓았다. 큰 환란을 두려워해야한다는 하상공의 해석과 큰 환란을 내몸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왕필의 해석을 비교하면서, 하상공과 왕필이 스스로 구하고자 했었던 시대의 질문이 달랐음을 짐작해본다. 그들의 논쟁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질문과 나의 고민으로 '도덕경'을 비춰봐야할 것이다.

 

  도덕경을 읽겠다는 1년여의 대장정을 마칠 시간이 왔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공본 '도덕경'을 비교하면서 하루에 한구절씩 혹은 일주일에 한구절씩 읽어 내려갔다. 도덕경 81장 6천여자를 읽으며, 고전의 숲을 거닐 때 길을 잃지 않아야함을 깨달았다. '도덕경'이라는 달은 우리가 밤길을 갈때, 나의 앞길을 밝혀주는 존재일뿐, 나의 길을 대신가주는 존재는 아니다. '도덕경'은 도구일 뿐, '도덕경'이 목적일 수 없다. '도덕경'이라는 좋은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인생의 고개하나를 넘었다. 인생이라는 머나먼 길을 고민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독자에게 하사공본 '도덕경'을 추천해본다. 물론, 왕필본 '도덕경'과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그 미묘한 차이에서 느끼는 재미는 더더욱 커질 것이다. 이제 또하나의 길을 찾아 떠난다. 어느 고전을 안내서로 새길을 떠날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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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28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이 공자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공자 사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중국의 국제적인 행보를 보면 군자답지 않습니다.. ^^;;

강나루 2018-12-28 17:43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유교에는 사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도 있는데 강대국의 미덕을 그들은 보이지않는군요

짜라투스트라 2018-12-28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요새 제가 관심 있는 영역의 책을 읽고 글을 쓰셔서 댓글을 안 쓸 수가 없네요. ^^;;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공자나 노자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긴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12-28 20:3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행복한 새해 맞이하세요

서니데이 2018-12-31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 제 서재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이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항상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연말,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나루 2018-12-31 23:04   좋아요 1 | URL
항상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는 서니데이님도
2019년 행복하고 즐거운 한해 되시길 빌어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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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얼마나 거창한 주제인가! 솔직히 이 책이 베스트 셀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잘팔리는 이유는 저자가 하버드대 교수라는점과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안성맞춤의 책이라는 점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이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많은 생각할 꺼리를 제공하는 값진 책으로 입소문이 났다. 수많은 딜레마 속에서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어떠한 선택을하며, 왜?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지를 논리적으로 말하도록하는 책이다. 마치 유대인 들이 예쉬바라는 그들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하브루타와 같은 책이다. 드디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책장에서 뽑아들었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는 나에게 어떠한 지적 충격을 줄까?

 

1. 이제는 고민해야할 문제, 징병제인가 지원군인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 김두관이라는 정치인이 '모병제'로 전환할 것을 대통령 공약으로 들고나온 적이 있다. 김두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모병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고, 김두관은 예비경선에서 탈락했다.

  마이클 샌델이 '징병제'와 '지원군' 중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물었다. 질문은 징집과 고용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일차원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병사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징병제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고려하는 4차원적 논의로 이어진다. 자원군을 시행한 결과 사회적 약자들만 군대에 간다. 부유층은 전쟁에 둔감해진다.자신들의 자녀들이 전쟁에 희생될 이유가 사라지고, 국가는 아니, 군산복합체는 자유롭게 세계의 전쟁터에 자국군을 보낸다.

  로마 용병에 의해서 망한 로마제국을 떠올려도 알 수 있듯이, 징병제를 실시할 경우 군인들의 충성심이 용병들보다는 높기에 국가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병제를 실시해야한다고 단순히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무기가 고도화되면서 전문적 군인이 필요해지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젊은이들을 2년여 동안 군대에서 창의력을 잃고 획일적 군사문화를 배우게하는 것은 부적합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외인부대 병력의 1/4이 라틴아메리카인이다. 프랑스의 전투력이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 군인보다 못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지원군' 혹은 '모병제'는 국가가 국민의 반감을 덜 받으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시민의 의무를 팔릴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깎아내린다"라는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떠올리며, 과연 '지원군' 제도가 옳은 제도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고차원으로 상승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받게된다. 로봇이 전쟁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살인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고 세계의 로봇과학자들이 카이스트에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던 일이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오해로 끝났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로봇이 인간을 사냥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로봇이 아니더라도 전투복을 입으면 힘이 터미네이터처럼 강해지고, 삽시간에 적을 초투하시킬 수 있는 가공할 무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은 전쟁도 기계가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징병제'나 '지원병'이냐는 논란 자체가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나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인간이 전쟁을 상정해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려 살인 로봇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이는 아마게돈의 시작일 것이다.

 

2. 공리주의자? 그들은 악마인가?

  중학교 도덕교과서에서 '벤담'이라는 사람의 이름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그의 명언을 처음 접했다. 최대다수가 최대한으로 행복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공리주의'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어가 아니었다. 마이클 샌델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잘팔린 핀토라는 소형차 이야기를 한다. 뒤에서 이 차를 들이 받으면 연료통이 폭발한 위험이 있다. 회사는 사람 한사람의 값을 정해서 죽는 사람에게 들어갈 값과 리콜하는 비용중에서, 사람값을 치뤄주는 것이 값싸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는 공리주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행복하기 보다는 모두를 효용성이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불행하게 만드는 논리였다. 더욱이, 벤담은 죽어서도,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국제 벤담학회 창설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죽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끔찍한 극단적 공리주의자의 모습을 한 벤담을 보면서 공리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 되었다.

  그러나, 같은 칼이라하더라도 강도가 사용하면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어머니가 사용하면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사랑스런 도구가 된다. 같은 공리주의를 극단적으로 사용한 예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빌게이츠의 100만 달러를 형편이 어려운 100명에게 1만 달러씩 나눠준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소개되어있다. 같은 이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수구들의 논리가 될 수도 있고, 급진 개혁주의자의 사상적 무기가될 수도 있다.

  그럼, 같은 사상을 어떻게 사용해야할까?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사상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사상의 지배자가 되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특정 이론과 주의에 매몰되어 이론의 노예가 되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 사이비 종교에 노예가 된 것도 한예이다. 말은 타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말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한다면, 말에 의해서 부림을 당한다면, 그 삶은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주인이되자! 나의 삶에 주인이되자! 특정 이론과 사상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그 사상의 주인이되어 사상의 등에 올라타자!!

 

3. 롤스의 주장에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는가?

  마이클 샌델의 논리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공리주의에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벤담 뿐만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공리주의 보다 더 냉혹해 보인다. 그는 우리가 불공평을 수정하려 노력해서는 안되며, 불공평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고 그 결과 생겨나는 이익을 즐겨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드러낸다. 약자를 도와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은, 주장의 논리성과는 상관없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못한 공산주의가 전체주의 괴물이 되어 한세기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에 반해서 롤스의 '정의론'은 따뜻한 이상사회를 향한 안내서로 보인다. 극단적 양극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의론'을 참고해야하지 않을까? 특히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한다."라는 주장은 되새겨봐야한다.

  그러나, 롤스의 주장에도 문제점이 있다. 우선, 롤스는 무지의 장막 뒤에서 원칙을 정할 때 사람들이 자신은 소수에 속할 것라고 믿기에 공리주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롤스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양반의 후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기 양반은 많아야 2~3%였다. 사극을 보더라도 자신을 왕족과 양반에 감정이입하지, 노비에 감정이입하지는 않는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자신을 재벌2세나 신데렐라에 감정이입하지, 갑질당하는 소시민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한국의 일반인들은 대중매체에 현혹되어 자신이 노비의 후손일수도 있으며, 현실은 짓밟히고 있는 소시민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롤스의 주장 중에서 두번째 의문점은 개인의 노력도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같은 환경인데도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룬 성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마져도 롤스는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롤스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자괴감이 든다.

 

4.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야하는가?

  책을 중반정도 읽다보면, 마이클 샌델이 '롤스'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은 '롤스'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한다.

 

"최고 공익과 영광은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한다."(아리스토텔레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아리스토텔레스)"

 

 이시대의 '공동선'을 제대로 파악하는자가 리더가 되야한다. 과거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공동선'을 강요당하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다. 이제 참된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변화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이제 새로운 정권을 얻은 집권당은 '공정'하고 '절제'하고 '용감'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행동을 해야한다. 말로만 적폐를 청산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제 그 성과를 내 놓아야한다. 민주주의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라고 유시민이 말했다. 최선을 추구하기 보다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이기에 답답함을 느끼기도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공정하게 행동해야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용감하게 시대의 문제에 직면해야한다.

 

5. 유발 하라리를 떠올리다.

  칸트에 대한 롤스의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흥미로은 부분과 마주쳤다.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면?"

"답: 의지의 자유는 과학이 그것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과연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았을까? 요즘 발전하는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비롯해서, 최신 뇌과학책들을 살펴보면, '로봇쥐'가 소개되어있다. 살아있는 쥐의 뇌에 전기 자극을 주어, 쥐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로봇처럼 조정할 수 있는 쥐를 과학자들이 만들어냈다. 그 쥐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학자가 보낸 전기자극이 뇌에 영향을 미쳐 쥐를 움직이게했을 뿐이다. 인간은 뇌의 신호가 있고 나서 하고 싶은 욕구를 얻게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말했던 칸트의 철학은 삽시간에 붕괴되어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유발 하라리를 떠올리게한 첫사례이다.

  그럼, 두번째 사례는 무엇일까? 롤스가 소개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글을 읽을 때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자신보다 강력한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호모 에렉투스를 박멸하면서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지혁명'덕분이라 말한다. 이 '인지혁명'은 거짓말을 믿도록하는 능력을 갖도록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비롯해서 국가, 회사라는 개념은 상상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화를 비롯한 이야기에 의해서 힘을 키워간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 혹은 종족이라는 개념은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네안데르탈인과 싸워서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이다. 서로 떨어져있는 듯한 고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역사와 철학이 서로 별개의 학문분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이클 샌델의 강의도 함께 들었다. 강의와 책은 비슷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책에서는 간략하게 다룬, 로크를 강의에서는 한시간 동안 설명했다. 마이클 샌델이 말했듯이 그의 책은 그의 강의와 달랐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다가 책읽기 속도를 강의가 따라오지 못했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보다 책읽기를 더욱 수월하게 여기다니... 나 자신에게서 놀랐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도 큰일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책의 쟁점을 이용해서 나의 사적인 일들을 고민했다. 쉽게 일들이 해결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현실의 일들은 냉철한 이성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인간관계에는 감정이라는 긴 강이 흐른다. 그 강을 무시하면 타인에게로 건너가지 못한다. 이제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감정'이라는 강이 흐르는 우리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고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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