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입 매일 철학 - 일상의 무기가 되어줄 20가지 생각 도구들
황진규 지음 / 지식너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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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싶다면, 철학책을 읽어라! 한해 한해 나이를 먹으면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현실과는 상관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하는 학문이 '철학'이라 생각했던 적이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나이를 주었고, 더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한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삶을 살아가면서 느릿느릿 깨달았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깨닫는 나에게 철학책은 어려운 책이었다. 도올 김용옥, 강신주 라는 철학자를 만나면서 철학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닫는 속도가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팟캐스트 '철학 한입(철학흥신소)'를 통해서, 황진규라는 철학자를 만났다. 철학에 빠져 7년 동안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철학에 빠져사는 그는, 니체, 푸코, 칸트....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자들의 말들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황진규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다는 행운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한입 매일 철학'이라는 책을 펼쳤다. 철학이라는 '지혜의 학문'을 안내해줄 황진규의 '한입 매일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나의 삶을 철학하다.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철학으로 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한입 매일 철학'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이론만을 나열하기 보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러 나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그 몇가지를 살펴보자.

  나는 미셸 푸코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책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책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혜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 글도 그러한 글귀중에 하나이다.

 

  "19세기 정치적 권리에서 발생한 가장 대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주권의 이 오래된 권리, 즉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새로운 다른 권리에 의해 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됐다는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주권의 권리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입니다. 그런 뒤에 새로운 권리가,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가 정착하게 됩니다."-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323쪽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방법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으로 억압의 방법이 정교화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체벌)' 방법의 기억이 많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을 많이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몸으로 학습되어 교사가 되고 나서 학생들을 지도할때 많이 사용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이 얼마나 비교육적인지는 교사로 성숙되어 가면서 깨달았다. 지금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과거 폭력적인 방법으로 훈육되어온 나는, 또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은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가 성숙되었기에 체벌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의 훈육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 방법의 교육은 강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교복과 두발을 학생통제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야간 자율학습 참여율을 중요시하며, 담임 교사를 쪼는 교장들이 있다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해야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리자들에 의해서 학교현장은 아직도 참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나의 자녀들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연애도 결혼도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고, 교사로 발령받고 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연애와 결혼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결혼하라", "결혼은 언제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개팅을 하고 데이트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데이트를 하면서 여성을 리드하는 일이었다. 약속장소를 물색하고, 사전 답사를 가서, 데이트 코스를 결정한다. 계획된 장소에 계획된 일정에 따라서 여성을 리드하지 못하고 버벅되다가는 여성에게 퇴자를 맞기 쉽상이다. 여성에게 결정권을 주고,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가도록 하는 '민주적'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성들은 '민주적' 데이트를 원치 않았다. 왜? 내가 만난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는 '민주적 데이트'를 싫어할까? 남자에게 리드 당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자 황진규는 라캉의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황진규는 남자는 대체로 강박증적이며, 여성은 대체로 히스테리적이라고 규정했다. 강박증자는 "내 맘데로 할꺼야!"라는 구호를 외치는 반면, 히스테리 환자는 "네 맘대로 해"라는 구호를 외친다. 상당수의 남성과 여성이 강박증적이며,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민주적 데이트'는 설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강박증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치밀한 계획과 사전답사를 했고, 계획이 치밀해질 수록 데이트가 귀찮아졌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혼자살아야했을 것이다. 이제는 변해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미 젊은 세대는 변했는지도.... 여성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원하는 데이트를 남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더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원하는 데이트를 당당히 대화를 통해서 찾아가야한다. 강박증적 남성과 히스테리적 여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변화해야한다.

  초임 교사에 발령 받았을 때, 교무부장님은 자상하게 학교일을 알려주셨다. 너무도 자상하셨고, 친절히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셨다. 교무부장에서 밀려나 짐을 꾸리는 부장님을 도와드리며 쓸쓸한 그분의 뒷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 신봉하는 신문은 조선일보이며, 가장 믿는 언론인은 조갑재였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수구 정당을 지지하는 그분과 말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하곤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그분이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흄이 "절대불변의 진리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은 그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화를 할 수 없는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저자 황진규는 비트겐 슈타인의 '언어게임'이라는 이론을 소개하며, 대화할 수 없는 존재와의 대화방법을 제시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역적 문화적 연령적 창이에 따라서 다른 언어규칙을 사용한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규칙을 버리고 상대방의 규칙으로 들어가야하다. 교무부장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북녘땅에 지주로 살다가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땅을 빼앗기로 남으로 내려와야했던 그분의 가정사를 알고 공감해야한다. 친일파보다 공산당을 싫하는 지주의 심정을 이해해야한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대화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황진규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려할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상대가 미워질 때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삶을 철학하려 할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철학, 진정한 삶은 이뤄질 수 없다.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손을 떠시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신다.

  "손이... 안떨려고 하는데도, 손이 떨린다."

  불안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다. 급히 파킨슨병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매'는 병명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치매'는 증상일뿐 병명이 아니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헌틴텅 무드병 등의 다양한 병들이 심각해지면, '치매'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어머니가 손을 떠는 이유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으로는 오래사신 것을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나이드셨음을 두려워해야한다.(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저자 황진규는 "자기의식은 기억이기에,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이고 '나'다."라고 말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에게 자아란 없다. 자아를 잃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가족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간다.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같은 기억,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아를 만들어 간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자아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팟캐스트를 듣가다가 한 개그우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이번 주제는 '이번생은 글렀어'입니다."라는 개그우먼의 말은 '이번생은 글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라'라는 말로 들렸다. 천박한 개그우먼의 말이 한동아 귓가를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리셋하길 원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황진규는 '삶을 리셋하기 보다 삶의 아장스망을 바꿔보자'라고 제안한다. 들뢰즈가 사용한 아장스망은 '배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생의 모든 것의 관계를 재배치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단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재배치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재배치할 수도 있다. 돈을 인생의 일순위에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인생의 일순위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새롭게 아장스망을 한다면,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 '이번생을 글렀으니,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리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사람은 다음생에서도 이번생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 척박한 황무지를 탓하기 보다는 금이 이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키자.

 

2. 주인으로 살수 있는 방법을 철학하다.

  '다상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강신주의 책에서 강조하는 말은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거머쥐지 못한 우리가 주인으로 살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주인으로 살라했을까?

  마르크스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143쪽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야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아리스토켈레스보다 감동적인 마르크스의 말에 눈물이난다. 내가 상관으로 모시는 존재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와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킬 각오를하며 산다면 나는 나의 상관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라는 강신주의 말이 이해된다.  당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결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주인으로 살려면 사회적 관계를 달리할 수있는, 때로는 사회적 관계를 단절할 결기가 필요하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저자 황진규는 니체의 '힘의 의지'를 당연시하지 않고 그 의도(꿍궁이)에 의문을 던질 때 '우리가 세상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휘둘린'다고 말한다. 즉, 나를 억압하려는 사회구조, 국가, 회사 상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힘의 의지'는 '힘 싸움으로써의 관계 맺음'의 결과다. 우리가 '힘의 의지'에 순응한다면 히틀러가 독일인들 위에 굴림하며 유럽을 전쟁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었듯이, 권력자는 우리를 암흑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들의 '힘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의 꿍꿍이를 파악하고 저항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촛불 혁명'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수동적으로 나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인이 되려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우리는 '주인의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인정투쟁' 때문이다. SNS에 집착하는 이유도,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도 황진규가 지적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이유는 태생부터 부모라는 존재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 보다는 내 자신의 양심에 귀기울여야한다. 나의 양심과 나의 욕구에 귀기울일때 우리는 타인에 휘둘리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 저자 황진규는 "기쁨을 주는 타자는 악작같이 찾아나서야한다. 동시에 슬픔을 주는 타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써야한다."고 충고한다. 기쁨을 주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여야한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쁨을 주는 유쾌한 존재라면, 내주변에는 유쾌한 사람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도 유쾌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주는 타자도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바뀌지 않을까?

  저자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계획은 우리의 믿음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브리콜뢰르는 '손재주꾼'이나 '맥가이버'로 번역할 수 있다. 철저히 계획된 준비물을 토대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주어진 것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브리콜뢰르'이다. 브리콜뢰르에 계획은 필요없다. 계획을 신봉하며 계획된 데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당황하며 급속히 무너지는 '일본인'과 임기응변에 강하지만 계획성은 다소 부족한 '한국인'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를 강조하며 계획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나는 계획과 무계획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째즈와 같은 삶을 제안한다. 계획성과 무계획성을 횡단하며 아무리 촘촘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구조에 주목하자. 소쉬르의 말을 살펴보자.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 인간은 결정된다."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든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말과 글을 빼앗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된다면, 언어라는 구조를 바꾼다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된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 혹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독재정권이 '보도지침'을 내려서, '교통비 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교통비 현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 이유도 언어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권력자가 파놉티콘을 만들어 우리를 일망감시하려한다면, 우리는 역파놉티콘으로 그들을 주시해야한다. 모두가 중앙에 있는 권력자를 감시한다면, 파놉티콘은 다수의 감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만나는 길이 너무도 어렵다. 난해한 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이 보통의 노력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황진규 덕분에 나는 철학자들의 글들 사이를 비교적 쉽게 헤집고 다니며 깨달음의 보석들을 발견했다. 그중에 하나가 흄의 말이다. 

  "인과관계는 근본적으로 논증 불가능하다."-69쪽

  어제 태양이 떠오른다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 어제 떠오른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태양이 50억년 이후에는 수소를 다태우고 백색외성이 되어서 수축하거나 폭발할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양이 떠오를 수 없다. 법칙은 한정된 조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태양이 존재하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철학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에 의문을 품는다. 당연한 일들에 의문을 던지며 나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나의 사고도 좁은 알을 깨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는 맛이 난다. 함께 철학의 품에서 뛰어 놀지 않으련가?

 

ps. 나의 가슴에 남는 몇줄을 적어본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없는 지석은 공허하다."-칸트 95쪽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야만 한다."-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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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5-02 05: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삶이 오래 될 수록 생각이 많아지네요

2019-09-12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9-12 06:15   좋아요 1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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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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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격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터미네이트>>의 스카이넷이 인류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 인공지능은 인간이 개발한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말들이 넘쳐났다. 사람의 언어를 학습하던 AI에게 '너희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인간을 멸종시킬거지?'라는 질문을 하자, AI는 "사람은 소중하느까, 사람동물원을 만들어 잘 보관해야죠."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달구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라는 책은 이러한 고민속에서 읽기로 결심했다. 철학을 전공한 김재인 교수는 이러한 나의 고민에 어떠한 해답을 제시할까?

 

1. 모든 철학은 당대의 자연과학과 나란히 가야한다.

  철학자가 최첨단 인공지능에 대해서 책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철학자이니 만큼,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보다 심도있게 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책의 상당부분은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있다. 철학교수가 인공지능을 공부하려하니 너무도 힘들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든다. 왜? 철학자가 최첨단 과학에 대해서 글을 써야할까? 과연 쓸 수 있단말인가?

  이러한 나의 의문은 책속에 답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철학자마다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는 과학이 이전부터 있었다고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을, 근대철학자들은 물리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으며 철학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크니츠, 로크, 버클리, 흅 등 17~18세기 철학자들이 당대의 자연과학과 동시대적으로 작업했다. 철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현실에 당을 내딛고 있어야한다. 각시대의 시대적 조류를 이해하고 시대적 과제에 나름의 비젼을 제시하려 철학자들이 노력하였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철학과 과학은 관련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현대 철학자들은 어떠한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을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일 수 있고, 뇌과학일 수도 있다. 강신주의 경우, 인류학과 뇌과학을 그의 저서에서 인용하기도 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철학적 사유가 출현해 이러한 변화에 비젼을 제시해야한다. 그러하기에 다양한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물론, 과연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과와 이과로 분리되어 이과학생은 문과과목을 공부하지 않고, 문과학생도 이과과목을 공부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현대 과학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는 철학자가 많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리라. 대지에 뿌리 내리지 않은 나무는 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철학자로서 최첨단의 인공지능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김재인 교수의 시도는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죽음의 묵시록이 펼쳐질 것인가?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출현할 것인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인공지능에 의해서 나의 직업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상상이다. 이에 대해서 김재인 교수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시대에 나의 직업을 지키며,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인공지능은 과제를 잘 해결한다. 반문에 인간지능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목표를 설정한다. 즉, 인공지능은 바깥에서 주어진 목표를 수행한다면, 인간지능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의 삶은 스스로 이끌어가는 주체이다. 정재승 교수도 '열두 발자국'에서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작동하며, 데이터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며, 데이터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할 뿐아니라, 데이터에 없는 영역을 찾아 스스로 데이터를 만드는 능력이 약하다고 지적했지 않는가? 이러한 인공지능의 약점을 우리가 잘 이용한다면, 인간이 직업을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는 틈새를 찾을 수 있다.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이 못하는 일로, 문제제기, 목표 설정, 창조적인 일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 우리의 교육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스승이 제시한 문제를 학생들은 빠른 시간내에 정확한 답을 도출하도록 교육받는다.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학교에서는 요구 받고 있다. 이러한 교육으로 길러진 인재가 인공지능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할까? 나는 유대인 교육에서 그 탈출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질문'이다. 일명 '하브루타'라고 불리는 토론 학습에서 학습자는 다른 관점을 접하면서 가장 다양한 질문을 하도록 교육받는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문제제기를 학습한다. 또한 유대인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목표를 정하지 않고, 자녀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기다려준다. 타인과 같은 아이로 성장하기 보다는 타인과 다른, 자녀만의 독특한 개성이 발현되도록 격려를 해준다. 그러면서 자녀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사회에 나가서 창조적인 일들을 한다. 김재인 교수가 제시하는 인공지능이 못하는 일을, 학습자들이 잘 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은 가정에서부터 교육하고 있었다.

  김재인 교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 시스템을 강조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가? 학교에서는 아직도 두발단속을 한다. 개성을 말살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게이지수 라는 것이 있다. 게이가 많은 도시와 첨단산업이 발전한 도시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첨단 산업 즉, 창조성이 요구되는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 게이들은 허용적인 분위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시를 찾아 이동한다. 그러하기에 게이들이 많은 도시는 허용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유로운 도시이다. 이러한 도시는 첨단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김재인 교수가 제안한 '예술가적 삶'이 가능한 도시! 그러한 도시에서만이 니체가 말한 인간만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3. 인공지능의 시대, 우리 현실을 묻다.

  "인간대 기계의 대결이 아니다. 기계를 가진 인간대 기계가 없는 인간의 대결이다. 데이터와 직관력은 말과 기수와 같다. 당신은 말을 앞지르려 노력할 필요 없다. 당신은 말을 탄다."  - 도밍고스

 

  수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을 머릿속에 상정하고 두려워한다. 카풀택시 도입을 반대하는 택시기사분들의 시위도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우버택시가 미국에 상륙했고, 공유경제는 시대적 조류가 되고 있다.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했지만, 서양과의 통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물결 속에 조선의 존립이 위협받았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공유경제는 피할 수 없는 조류이다. 이러한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카풀택시의 도입을 막으며, 말과 경쟁하려해서는 안된다. 결국은 말로 표현된 인공지능에게 인간은 패배하고 생존마져도 위협받을 수 있다. 말의 기수가되어, 인공지능에 올라타서 앞으로 내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물론, 말로 표현한 인공지능에 올라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카풀택시의 도입을 막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자명하게 알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용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일! 인간이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분야를 찾아서,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할 때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인간 마음은 본성상 편파적이다."-김재인

 

  인간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공감을 많이 느끼지만, 먼 사람에게는 공감을 덜 느낀다. 이것은 연민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차별 없는 사랑 즉, '겸애'를 주장한 묵가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매우 탁월한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재인 교수는 '공감'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의 개인사를 비교한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해 연민을 지닌 동시대인이 박근혜의 부모가 총탄에 죽은 시기를 같이 살았던 노인분들이 느끼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김재인 교수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노인세대가, 박근혜에게 느끼는 연민과 세월호 희생자에게 느끼는 연민의 시간적 거리감은 박근혜가 더 먼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세월호 희생자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을 좌파라고 몰아부치는 사람도 있다. 박근혜에게 연민을 느낀다면, 세월호 희생자에게도 연민을 느껴야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연민'을 걷어내야한다는 김재인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또한, 박근혜에게 연민을 갖기 위해서는, 그녀가 저지른 권력남용과 적폐가 없었어야한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보통의 사람들은 연민보다는 적개심을 갖는다. '연민'을 걷어내기 보다는 보다 종합적으로 '연민'을 통해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차이이다.

 

  과학에 문외한 이라서 이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더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가 이 책을 결론을 요약해서 제시했더라면 책을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든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하는 철학자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을 담고 있는 책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이 자신의 직업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책에서 느끼는 희망은 제법 크다. 그래, 인공지능과 경쟁하려하지 말고, 인공지능에 올라타서, 저 푸른 들판을 향해서 내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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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나를 키우는 도덕경 :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옛글의 향기 4
노자 지음, 최상용 옮김 / 일상이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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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은 쓸쓸히 밤하늘을 거닐지만, 온 천지의 강에  떠오른다. 고전은 달과 같다. 한권의 고전이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전중에서 '도덕경'은 읽는 사람의 마음밭에 따라서 달리 읽힌다. 읽는 사람이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읽는가에 따라서 너무도 달리 읽힌다. 주역을 토대로 유학자의 마음으로 왕필이 '도덕경'을 주석했다. 그 반대편에 제왕의 관점에서 하상공이 '도덕경'을 주석했다. 같은 책이지만, 왕필과 하상공의 마음에 비친 '도덕경'이라는 달은 너무도 달랐다. 필요하다면, 원문의 뜻을 반대로 주석하는 것도 불사할 정도로 너무도 다른 해석을 적어 놓았다. '노자도덕경주'에 이어서, 하상공주를 토대로 엮은 '내안의 나를 키우는 도덕경'을 읽기 시작했다. 왕필이 주석한 '도덕경'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1. 우리 주변을 비추다.

  배운다와 가르친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노자의 대답을 들어보자.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학문의 길은 날마다 쌓아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내는 겁니다. "

 

  교사가 되기 전에 날마다 나의 지식을 쌓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얇팍한 지식들을 쌓아갔다 생각하지만, 그 때는 내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는 자신감(?)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교사가 되고 나서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듯하지만, 학생과 생활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나를 비워가는 생활을 했다. 초임 교사 시기에는 나를 비워가는 일이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기 위해서 나를 더 채우려했다. 학생 상담에 필요한 얇팍한  지식으로 복잡한 그들만의 세상과 만난는 일은 너무도 무모했다. 교육학 서적 몇권과 심리학 서적 몇권으로 학생들의 복잡한 세계를 모두 알수 없다. 나를 비워야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내려 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새롭게 학생들의 이야기에 채워야 그들의 세계가 나의 눈에 들온다.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이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라면, 교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내려 놓아야한다. 노자는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교장과 교사는 같은 존재일까? 관리자들 중에는 자신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꾀 있다. 특히 장학사를 거쳐서 교장으로 발령받은 경우, 자신을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교장이 많다. 교사를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학부모에게 어떻게 잘 보일 것인지만을 생각한다. "교사가 힘들면, 학생이 행복하다."라는 말도 스스럼 없이 하는 관리자들도 있다. 불행한 교사가 학생들을 기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까? 불행한 부모 밑에서 아이들이 밝게 웃기 힘든 것 처럼, 행복하지 않은 교사와 대면하는 학생들은 기쁨이 넘쳐날 수 없다. 노자의 말을 들어보자.

 

  "부유대 고사불초 약초구의 기세야부(夫唯大, 故似不肖, 若肖久矣, 其細也夫)- 오직 위대하기 때문에 모자란 듯 보이는 겁니다. 만약 똑똑하였다면 세세하게 살피는 정치를 행한 지 오래되었을 겁니다. 그러한 사람은 소인배와 같은겁니다."

 

  탁월한 관리자일수록 자신을 내려 놓고 교사와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똑똑한 관리자일 수록 자신의 교육관을 교사와 학생에 강요한다. 그리고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며 교사를 가르치려한다. 이00교장과 나00교감의 경우가 그러했다. 똑똑한 장학사 출신의 교장과 교감이었기에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려 교사의 의견을 들었으나, 결론은 자신의 주장으로 끝을 맺었다. 무늬만 '민주적인 의사결정'이었을 뿐이다. 세세한 그의 '가르침'은 학생을 지도하는 일부터, 교사가 사용하는 학습지까지 세세하게 지적했다. 똑똑한 관리자에 대한 불만은 높아 갔다. 연구학교 지정을 받기 위해서 교사 투표를 했으나, 많은 교사들이 반대표를 던졌다. 똑똑한 관리자에 대한 교사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독일 군대의 속담에 "유능하며 부지런한 자는 참모로 적당하다. 유능하고 게으른 자는 탁월한 지위관이 될 것이다. 무능하고 게으른자는 조직에 쓸모없는 사람이다. 무능하고 부지런한자는 조직에 해가되는 사람이니, 반드시 제거해야한다."라는 말이 있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장학사 출신의 관리자들은 교장, 교감에 부적당하다. 그들은 교장과 교감의 참모로 적당할 뿐이다. 교장이 되기 위해서 승진점수를 얻고, 승진점수를 얻기 위해서 장학사 시험을 본는 지금의 인사시스템은 교사와 학생을 행복하게 학교를 만들어가는 관리자를 만들 수 없다. 학부모의 눈치만 보면서, 타학교 보다 더 많이 학생을 압박하여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고 교사를 감시와 처벌의 눈으로 보게만든다. 똑똑한 관리자가 아닌 탁월한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 마치 모자란듯 보여야한다. 그래야 교사와 학생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다.

  학교에서 우리 주변으로 눈을 돌려보자. 유명회사의 양00회장이 부인에게 마약류를 권하고, 직원들에게 구타를하고 이를 촬영했다. 우월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힘없는 여성과 직원들에게 갑질을 한 것이다. 연일 터져나오는 갑질 뉴스에 몸서리를 친다. 노자라면 갑질을 해대는 사회지도층분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주었을까?

 

  "故貴以賤爲本 高必以下爲基 是以侯王 自爲孤寡不穀(고귀이천위본 고필이하위기 시이후뫙 자위고과불곡)-그러므로 귀한 것은 반드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반드시 낮은 것을 기초로 합니다. 이 때문에 제후나 왕은 스스로를 '고아 같은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춧돌이 없이 어찌 기둥이 홀로 설수 있을까? 꼴찌가 없이 어찌 일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앞서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에 있어야한다는 평범한 이치를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모르고 있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반드시 낮은 것을 기초로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왕이 자신을 '과인' 즉, 부족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갑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2. 정치를 비추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면서 “모든 부담을 미국이 져야 하는 상황은 부당하다"라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불법이민을 막겠다며,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과 각을 세웠다. 결국 셨다운 상태에 돌입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라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이다. 초강대국은 어떠한 모습이어야할까? 노자에게서 힌트를 얻어보자.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대국자하류 천하지교)-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어서,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대국은 큰 강처럼 자신을 낮춰 세상의 모든 물을 줄기를 받아들여야한다. 그리고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한다. 천하의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 이제 트럼프는 미국이 큰강도, 큰바다도 아니라며 폐쇄적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자, 대국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는 길이다. 중국 당나라를 보라, 유럽의 로마제국을 보라, 서아시아의 오스만제국을 보라!! 제국은 천하의 '하류'였다. 자신을 낮추어 모든 문화와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서 능력이 탁월한자를 관직에 임명하며 제국의 힘을 키웠다. 문화의 용광로이며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대국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노자는 2천년 전에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다.

  어느 정치인이나 꿈꾸는 것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올랐다면, 역사에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때로는 그 업적을 마김과 동시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도 도구로도 활용된다. 과거 이명박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했다. 20조가 넘는 예산이 들어갔고, 4대강은 큰빗이끼벌래가 활개를 치고, 녹조라떼의 녹색물결로 뒤덮혔다. 노자라면 우리에게 어떤말을 해줄까?

 

  "將欲取天下而爲之 , 吾見其不得已 (장욕취천하 이위지 , 오견기부득이)-장차 온 세상을 휘어 잡고자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꾸미는데, 내가 보건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시이성인거심 거치 거태)-이 때문에 성인은 지나치게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스러움도 버리며, 과분한 것 역시 버립니다.)"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 자신 주변 사람들에게 떡고물을 줄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부질없는 일이며, 심하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극심한 사치도 버리고, 과분한 것 역시 버린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랏살림을 망치는 정치인들과 그러한 정치인을 선출하고 지지하는 국민에게 노자는 따끔한 말을 하고 있다. 정치인과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마음이다.

 

3. 니체와 공자를 비추다.

  고수들은 서로 통한다. 비슷한 주제를 달리 말하기도하고, 같은 의미의 말을 놀랍도록 일치하기도한다. 노자의 말은 니체와 공자의 말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음미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3단계 변신을 이야기했다. 낙타가 사자로, 사자가 아이로 변화해 가면서, 정신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낙타가 중세의 짐을 지고, 굴종적인 노예의 삶을 사는 존재라면, 사자는 자신을 짓누르는 짐을 벗어던지고 당당히 자신의지를 밝히는 존재이다. 그에 반해서 아이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이다. 힘이 약하면서도 힘이 강한 부모를 마음대로 다루는 존재가 바로 아이이다. 놀랍게도 노자도 아이의 이러한 힘을 알고 있었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곡 상덕불리 복귀어영아)-남성스러움을 알면서 여성스러움을 지킬 수 있다면 천하의 계곡이 될 수 있습니다.천하의 계곡이 되면 항상 덕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 갓난아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갑니다."

 

  남성스러움을 알면서도 여성의 부드러움을 지킬 수 있다면, 계곡처럼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마치 갓난아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웃음으로 부모를 기쁘게하고, 아기가 아플때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니체보다 앞서 노자는 2천여년전, 아기의 가능성을 주목했다. 고수끼리는 통하나 보다.

  공자의 말과 노자의 말을 비교해보자. 우선, 공자와 노자 모두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信言 不美 美言 不信 善者 不辯, 辯者 不善,(신언 불미 미언 불신 선자 불변 변자 불선)-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선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않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못합니다."-노자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자왈 교언영색 선의인)-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잘하고 표정을 잘꾸미는 사람치고 어진사람이 드물다.-공자

 

  중국철학을 대표하는 공자와 노자 모두 말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 서럽지 못하며, 말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못하다고 한 노자! 말잘하고 얼굴표정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 드물다는 공자! 말보다는 진실된 행동을 중시하는 선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말을 잘 표현하는 것을 중시한다. 아고라 광장에서 토론을 통해서 발전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의 역사를 본다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상당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반면 동양인들이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하다보니, 활기찬 토론과 의견교환이 동양에서는 이뤄지기 힘들지 않았을까? 물론 활기찬 토론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같은 계층안에서는 토론이 이뤄졌겠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 어른과 아이 사싱의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굴곡진 현대사에서는 "말잘하면 빨갱이!"라는 말이 유행했지 않는가! 이제는 말잘하는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폭력보다는 말로서 상대를 설득하는 그러한 사회를 꿈꿔본다.

  공자와 노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어찌 대답했을까? 놀랍게도 공자와 노자의 입장은 일치한다.

 

  "知不知上 不知知病(지부지상 부지지병)-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는 게 최상의 덕이고,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게 병폐입니다."-노자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알이다."-공자

 

  공자와 노자 모두, 모르는 것을 아는체하는 것을 커다란 병폐로 여겼다. 또한 자신의 무지를 아는것을 참다운 앎이라 여겼다. 노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알면서도 모르는 것 처럼하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공자와 노자의 말은 소크라테스에게서도 발견된다.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도, 너의 무지를 알라는 말이다. 동양을 넘어서 서양의 현자도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참다운 앎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을 설명하면서, 중세 시기에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신의 뜻'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몰랐다. 반면에 근대에 들어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유럽인들은 진리를 알고 싶어서 실험과 관찰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그 과학혁명의 힘으로 서양이 동양을 침략해온다. 동서양의 현자, 현대의 현자들은 모두 말한다. 너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 그것이 참다운 앎의 시작이라고.....

  충신과 참다운 친구는 언제 나타날까? 공자와 노자가 비슷한 말을 했다.

 

  "六親不和,有孝慈;國家昏亂,有忠臣(육친불화 유효자 국가혼란 유충신)-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자, 효도와 자애로움이 있게 되었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충성스러운 신하가 생겨났습니다."-노자.

  "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 송백지 후조)-추운 겨울이 와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공자

 

  임진왜란이 닥쳐야 이순신과 같은 충신 영웅이 등장한다. 눈내린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 불행이 닥쳐야 옥석을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노자와 공자는 말하고 있다. 내가 행복하고 돈과 권력이 있다면, 나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그들이 얼마나 함께할까?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의 문상이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이 세상사이다. 진정 사람을 바라보는 참돈눈이 있다면, 불행이 닥쳤을때, 나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한 눈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4. 왕필과 하상공을 비추다.

  왕필과 하상공은 '도덕경'에 주석을 달았다. 같은 책에 주석을 달았으나, 서로의 원문이 다른 경우도 있으며, 같은 문장을 달리해석한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글자의 뜻을 정반대로 설명한 경우도 있다. 그것을 모두 여기에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중 몇가지만 소개해 본다.

 

  "不自見故明(불자현(견) 고명)"

 

  이 문장의 '見'을 현으로 읽어야할까? 견으로 읽어야할까? '현'으로 읽느냐 '견'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해석에 차이가 생긴다. 왕필은 '현'으로 본 반면에 하상공은 '견'으로 보았다. '현'으로 읽을 경우,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지혜가 밝게 드러나고'라고 해석된다. 반면에 '견'으로 읽을 경우, '성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기에 밝게 알고'로 해석된다. '드러낸다'와 '본다'의 해석상의 뉘앙스는 약간다른다. '현'으로 읽을 경우, 성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신하들로 하여금 악역을 맡도록하는 고난도의 통치술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으로 읽을 경우, 자신이 직접 세세하게 살피지 않더라도 각종 첩보기관을 이용해서 세상의 정보를 얻고 통치한다는 의미로해석된다. '도덕경'을 제왕들에게 통치의 방법을 알려준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노자 통치술의 무서움이 서려있는 문장이다.

  같은 문장의 해석을 달리한 경우를 살펴보자.

 

  "民不畏威, 則大威至.(민불외위 즉대위지)"

 

  위의 문장을 하상공은 '백성들이 해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해로운 것이 이르게'된다고 해석했다. 반면 왕실은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큰 위엄이 이르니'로 해석했다. 왕필의 경우 '위'를 해롭다로 해석했다. 백성들이 작은 해로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보다 큰 해로움 즉, 죽음에 이른다는 문장으로 해석한 반면에, 왕필은 군주가 겸손한 자세로 물러나는 것을 버리고서 자신의 위엄과 권력에 의탁하면 만물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감시와 법망을 피하려하기에 위엄으로 백성을 통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위'를 해로움으로 볼 것인가? 위엄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문장의 해석이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왕필과 하상공을 비롯해서 수많은 주석서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찌해야할까? 나는 '고전은 자신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나의 명제로 되돌아 간다. 고전이라는 거울은 자신을 비추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수많은 주석서들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주석가들의 고민을 토대로 고전을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않다고 그들을 탓할 수 없다. '도덕경'은 질문에 따라서, 질문자에 따라서, 사회에 따라서 대답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덕경'의 참다운 가치이다.

  하상공은  한자의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큰 환란이 내 몸에 이르러도 귀하게 여기며 두려워해야합니다"의 '貴(귀)'를 '귀하다'라는 본뜻과 반대로 '畏(외)' 즉, 두렵다로 주석을 달아 놓았다. 큰 환란을 두려워해야한다는 하상공의 해석과 큰 환란을 내몸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왕필의 해석을 비교하면서, 하상공과 왕필이 스스로 구하고자 했었던 시대의 질문이 달랐음을 짐작해본다. 그들의 논쟁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질문과 나의 고민으로 '도덕경'을 비춰봐야할 것이다.

 

  도덕경을 읽겠다는 1년여의 대장정을 마칠 시간이 왔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공본 '도덕경'을 비교하면서 하루에 한구절씩 혹은 일주일에 한구절씩 읽어 내려갔다. 도덕경 81장 6천여자를 읽으며, 고전의 숲을 거닐 때 길을 잃지 않아야함을 깨달았다. '도덕경'이라는 달은 우리가 밤길을 갈때, 나의 앞길을 밝혀주는 존재일뿐, 나의 길을 대신가주는 존재는 아니다. '도덕경'은 도구일 뿐, '도덕경'이 목적일 수 없다. '도덕경'이라는 좋은 안내서의 도움을 받아서, 나의 인생의 고개하나를 넘었다. 인생이라는 머나먼 길을 고민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독자에게 하사공본 '도덕경'을 추천해본다. 물론, 왕필본 '도덕경'과 비교하면서 읽는다면 그 미묘한 차이에서 느끼는 재미는 더더욱 커질 것이다. 이제 또하나의 길을 찾아 떠난다. 어느 고전을 안내서로 새길을 떠날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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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28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이 공자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공자 사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중국의 국제적인 행보를 보면 군자답지 않습니다.. ^^;;

강나루 2018-12-28 17:43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유교에는 사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도 있는데 강대국의 미덕을 그들은 보이지않는군요

짜라투스트라 2018-12-28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요새 제가 관심 있는 영역의 책을 읽고 글을 쓰셔서 댓글을 안 쓸 수가 없네요. ^^;;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공자나 노자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해서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긴 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12-28 20:3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행복한 새해 맞이하세요

서니데이 2018-12-31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 제 서재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이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항상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연말,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강나루 2018-12-31 23:04   좋아요 1 | URL
항상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는 서니데이님도
2019년 행복하고 즐거운 한해 되시길 빌어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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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얼마나 거창한 주제인가! 솔직히 이 책이 베스트 셀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잘팔리는 이유는 저자가 하버드대 교수라는점과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안성맞춤의 책이라는 점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이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많은 생각할 꺼리를 제공하는 값진 책으로 입소문이 났다. 수많은 딜레마 속에서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어떠한 선택을하며, 왜?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지를 논리적으로 말하도록하는 책이다. 마치 유대인 들이 예쉬바라는 그들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하브루타와 같은 책이다. 드디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책장에서 뽑아들었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는 나에게 어떠한 지적 충격을 줄까?

 

1. 이제는 고민해야할 문제, 징병제인가 지원군인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 김두관이라는 정치인이 '모병제'로 전환할 것을 대통령 공약으로 들고나온 적이 있다. 김두관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모병제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고, 김두관은 예비경선에서 탈락했다.

  마이클 샌델이 '징병제'와 '지원군' 중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물었다. 질문은 징집과 고용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일차원 수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병사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서, 징병제가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고려하는 4차원적 논의로 이어진다. 자원군을 시행한 결과 사회적 약자들만 군대에 간다. 부유층은 전쟁에 둔감해진다.자신들의 자녀들이 전쟁에 희생될 이유가 사라지고, 국가는 아니, 군산복합체는 자유롭게 세계의 전쟁터에 자국군을 보낸다.

  로마 용병에 의해서 망한 로마제국을 떠올려도 알 수 있듯이, 징병제를 실시할 경우 군인들의 충성심이 용병들보다는 높기에 국가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병제를 실시해야한다고 단순히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무기가 고도화되면서 전문적 군인이 필요해지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젊은이들을 2년여 동안 군대에서 창의력을 잃고 획일적 군사문화를 배우게하는 것은 부적합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외인부대 병력의 1/4이 라틴아메리카인이다. 프랑스의 전투력이 징병제를 실시하는 나라 군인보다 못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지원군' 혹은 '모병제'는 국가가 국민의 반감을 덜 받으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시민의 의무를 팔릴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깎아내린다"라는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떠올리며, 과연 '지원군' 제도가 옳은 제도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고차원으로 상승한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받게된다. 로봇이 전쟁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살인 기계를 만들려고 했다고 세계의 로봇과학자들이 카이스트에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던 일이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오해로 끝났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로봇이 인간을 사냥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로봇이 아니더라도 전투복을 입으면 힘이 터미네이터처럼 강해지고, 삽시간에 적을 초투하시킬 수 있는 가공할 무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은 전쟁도 기계가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징병제'나 '지원병'이냐는 논란 자체가 필요없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나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인간이 전쟁을 상정해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을 만들어 낸다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려 살인 로봇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이는 아마게돈의 시작일 것이다.

 

2. 공리주의자? 그들은 악마인가?

  중학교 도덕교과서에서 '벤담'이라는 사람의 이름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그의 명언을 처음 접했다. 최대다수가 최대한으로 행복하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공리주의'라는 말은 정확한 번역어가 아니었다. 마이클 샌델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잘팔린 핀토라는 소형차 이야기를 한다. 뒤에서 이 차를 들이 받으면 연료통이 폭발한 위험이 있다. 회사는 사람 한사람의 값을 정해서 죽는 사람에게 들어갈 값과 리콜하는 비용중에서, 사람값을 치뤄주는 것이 값싸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는 공리주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행복하기 보다는 모두를 효용성이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불행하게 만드는 논리였다. 더욱이, 벤담은 죽어서도,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국제 벤담학회 창설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죽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끔찍한 극단적 공리주의자의 모습을 한 벤담을 보면서 공리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 되었다.

  그러나, 같은 칼이라하더라도 강도가 사용하면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도구이지만, 어머니가 사용하면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사랑스런 도구가 된다. 같은 공리주의를 극단적으로 사용한 예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빌게이츠의 100만 달러를 형편이 어려운 100명에게 1만 달러씩 나눠준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소개되어있다. 같은 이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수구들의 논리가 될 수도 있고, 급진 개혁주의자의 사상적 무기가될 수도 있다.

  그럼, 같은 사상을 어떻게 사용해야할까?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사상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사상의 지배자가 되자!'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특정 이론과 주의에 매몰되어 이론의 노예가 되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 사이비 종교에 노예가 된 것도 한예이다. 말은 타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말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한다면, 말에 의해서 부림을 당한다면, 그 삶은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주인이되자! 나의 삶에 주인이되자! 특정 이론과 사상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그 사상의 주인이되어 사상의 등에 올라타자!!

 

3. 롤스의 주장에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는가?

  마이클 샌델의 논리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공리주의에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벤담 뿐만 아니라,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공리주의 보다 더 냉혹해 보인다. 그는 우리가 불공평을 수정하려 노력해서는 안되며, 불공평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고 그 결과 생겨나는 이익을 즐겨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을 드러낸다. 약자를 도와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은, 주장의 논리성과는 상관없이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못한 공산주의가 전체주의 괴물이 되어 한세기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신자유주의는 또 다른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에 반해서 롤스의 '정의론'은 따뜻한 이상사회를 향한 안내서로 보인다. 극단적 양극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의론'을 참고해야하지 않을까? 특히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한다."라는 주장은 되새겨봐야한다.

  그러나, 롤스의 주장에도 문제점이 있다. 우선, 롤스는 무지의 장막 뒤에서 원칙을 정할 때 사람들이 자신은 소수에 속할 것라고 믿기에 공리주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롤스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양반의 후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기 양반은 많아야 2~3%였다. 사극을 보더라도 자신을 왕족과 양반에 감정이입하지, 노비에 감정이입하지는 않는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자신을 재벌2세나 신데렐라에 감정이입하지, 갑질당하는 소시민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한국의 일반인들은 대중매체에 현혹되어 자신이 노비의 후손일수도 있으며, 현실은 짓밟히고 있는 소시민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롤스의 주장 중에서 두번째 의문점은 개인의 노력도 그에게 주어진 환경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같은 환경인데도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룬 성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마져도 롤스는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롤스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자괴감이 든다.

 

4.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야하는가?

  책을 중반정도 읽다보면, 마이클 샌델이 '롤스'를 너무도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은 '롤스'의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한다.

 

"최고 공익과 영광은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한다."(아리스토텔레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아리스토텔레스)"

 

 이시대의 '공동선'을 제대로 파악하는자가 리더가 되야한다. 과거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공동선'을 강요당하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다. 이제 참된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변화가 우리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이제 새로운 정권을 얻은 집권당은 '공정'하고 '절제'하고 '용감'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행동을 해야한다. 말로만 적폐를 청산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이제 그 성과를 내 놓아야한다. 민주주의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라고 유시민이 말했다. 최선을 추구하기 보다는 최악을 피하는 제도이기에 답답함을 느끼기도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공정하게 행동해야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용감하게 시대의 문제에 직면해야한다.

 

5. 유발 하라리를 떠올리다.

  칸트에 대한 롤스의 소개글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흥미로은 부분과 마주쳤다.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면?"

"답: 의지의 자유는 과학이 그것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과연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았을까? 요즘 발전하는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라는 책을 비롯해서, 최신 뇌과학책들을 살펴보면, '로봇쥐'가 소개되어있다. 살아있는 쥐의 뇌에 전기 자극을 주어, 쥐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로봇처럼 조정할 수 있는 쥐를 과학자들이 만들어냈다. 그 쥐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학자가 보낸 전기자극이 뇌에 영향을 미쳐 쥐를 움직이게했을 뿐이다. 인간은 뇌의 신호가 있고 나서 하고 싶은 욕구를 얻게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말했던 칸트의 철학은 삽시간에 붕괴되어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유발 하라리를 떠올리게한 첫사례이다.

  그럼, 두번째 사례는 무엇일까? 롤스가 소개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글을 읽을 때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가 자신보다 강력한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호모 에렉투스를 박멸하면서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지혁명'덕분이라 말한다. 이 '인지혁명'은 거짓말을 믿도록하는 능력을 갖도록했다. 민족이라는 개념을 비롯해서 국가, 회사라는 개념은 상상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에 이야기를 부여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화를 비롯한 이야기에 의해서 힘을 키워간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 혹은 종족이라는 개념은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네안데르탈인과 싸워서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말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이다. 서로 떨어져있는 듯한 고리들이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역사와 철학이 서로 별개의 학문분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이클 샌델의 강의도 함께 들었다. 강의와 책은 비슷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책에서는 간략하게 다룬, 로크를 강의에서는 한시간 동안 설명했다. 마이클 샌델이 말했듯이 그의 책은 그의 강의와 달랐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다가 책읽기 속도를 강의가 따라오지 못했다.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보다 책읽기를 더욱 수월하게 여기다니... 나 자신에게서 놀랐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에게도 큰일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책의 쟁점을 이용해서 나의 사적인 일들을 고민했다. 쉽게 일들이 해결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 현실의 일들은 냉철한 이성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인간관계에는 감정이라는 긴 강이 흐른다. 그 강을 무시하면 타인에게로 건너가지 못한다. 이제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감정'이라는 강이 흐르는 우리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고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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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老子道德經注 - 노자도덕경주
왕필 지음, 김시천 옮김 / 전통문화연구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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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라는 이름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서양에 '스피노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노자'가 있으며, 현대에는 '박노자'가 있다. 한결같이 시대의 반항아로 살아가며,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한다. 이들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중에서 동양의 '노자'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노자를 만날 수 있는 '도덕경'이라는 책이 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덕경'해설서 중에서 김시천 교수의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골랐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에서 보여준 김시천 교수의 실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자, 노자를 통해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만나러 길을 떠나자.

 

1. 노자! 교육을 말하다.

  고전은 시대가 변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도덕경'은 2천 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에도 많은 혜안을 주고 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듯이, 도덕경이라는 거울은 우리의 교육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한다. 예습과 선행학습은 엄연히 다르다. 예습은 다음날 배울 것을 간단히 살펴보는 공부라면, 선행학습은 1년전에 혹은 6개월전에 한과목을 미리 배우는 것이다. 선행학습에 대해서 노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전식자 지화이우지시(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미리안다는 것! 선행학습은 학생들에게 허황된 꽃이며,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키는 시작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기에 수업에 참여할 흥미를 떨어뜨린다. 수업시간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했는데, 이미 다아는 것인데, 왜? 또 공부를해야하느냐며 잠을 청하기도 한다. 교과서 진도를 빨리 나가면 실력도 타인보다 앞서 간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선행학습은 겉모습만 화려한 꽃이며, 참다운 공부의 질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노자가 한국에 온다면 한국 어머니에게 해줄말은 무엇일까? 자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우리이의 어머니에게 아마도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시부재 시이현덕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낳으면서 가지지 않고, 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자라게 하되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신묘한 덕'이라 한다.

 

  과거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노후연금으로 생각했다.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 하면 노후에 자녀가 자신에게 효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아집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이어진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녀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자녀의 꿈보다는, 자녀의 행복보다는 타인에게 자랑할 수 있는 직업과 학력을 가진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낳았으니, 자녀는 나의 소유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자녀에게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폭력이다. 노자는 말한다. 한국의 학부모여! 자식을 낳았으되, 소유하려하지말라! 자녀를 길렀으되 자녀에게 의지하려하지 말라,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바란다면 자녀가 하고 싶은 일을 부모가정하지 말고 자녀가 결정하게하라! 이러한 양육방법을 오묘한 덕이라한다. 진로문제로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사가 우리를 놀라게했던 적이 있다. 자녀를 소유하고 의지하고 다스리려한다면, 자녀가 부모의 노예가 되던지, 부모가 자녀의 희생물이 될 수도있다.

  노자가 우리 학교를 방문해서, 보통의 교장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떠한 말을 해줄까? 초빙교장, 응모교장들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각종 사업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노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지난치 이기상지유위 시이난치(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무언가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서 교육청에 민원이 들어왔다. 교장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연구학교를 신청했다. 그런데, 교사의 찬성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재투표를 했고, 그래도 찬성율이 저조하자, 교무부장이 이를 조작했단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 학교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보아왔던 많은 학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찬성율이 나오면 재투표를 했고, 투표를 하기 전에는 "선생님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승진을 하셔야하는 주변의 선생님을 위해서 부디 찬성표를 던져주세요"라는 멘트를 넣는다. 정에 약한 한국사회에서 승진에 목을 메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찬성표를 던진다. 그리고 그결과는 비참하다. 보여주기 위한 행정이 시작된다. 학생과 상담하며 알찬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서 쏟아야할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행정에 소비해야한다. 가득이나 바쁜 학교생활이 더욱 바빠지고, 그 스트래스는 자연스럽게 학교 구성원들 모두에게 퍼지게된다. 서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도, 신경질적으로 대하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로 이해하며 몸이 아파서 병가를 쓴 선생님의 교실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를 두고 신경질을 부린다. 나도 힘들고 시간이 부족하기에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우리의 학교 현장을 보며 노자는 말한다. "교사와 학생이 힘들어하고 그들을 조화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교장과 교감이라는 관리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교육의 핵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만들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노담 선생님(노자) 힘든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나가야하나요"라고 내가 묻는다면, 노자는 어찌 답할까?

 

 " 이성인상민, 필이언지하, 선민, 필이신후지(是以聖人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물린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자벌자무공 자긍자 불장(自伐者無功 自矜者 不長)"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하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별로 무섭지 않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녹음기를 들고와서 자신이 필요한 질문을 차근차근하면서 논리적으로 사건을 따져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당장의 화풀이 보다는 법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의 화를 감추고 얼굴에는 미소를 띈다. 가장 무서운 관리자는 폭력적, 강압적으로 교사와 학생을 짓누르는자가 아니다. 자신을 낮추며 그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물리는 자이다. 폭력적 관리자는 민원을 제기하고 법적으로 그를 상대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관리자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내가 경험했던 000 교감이 있다. 겉보기에도 유약해보이고 겸손했다. 선생님이 타주는 커피를 받아들고도 다른 선생님들은 커피를 마셨냐며 자신의 커피를 주려하였다. 큰일을 결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만, 일단 결정이 되면 그 어떤 반발에도 굴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취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먼저 챙겨주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고 그는 자주 말한다. 노자는 말한다. 사회생활을 현명하게 하고자한다면, 아랫사람들 대할 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낮추라, 그들을 이끌고 가고 싶다면 그들 뒤에서라! 가기 싫어하는 소를 억지로 앞에서 끌고 가기 보다는 그 소와 친구가 되어 뒤에서 소를 몰고가라!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 뽐내지 말고, 스스로 자랑하지 말자! 그러면 남이 먼저 나를 알아줄 것이다.

  노자가 우리의 교실에 들어와서 변화하고자하는 교사에게 어떠한 조언을 해줄까?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들에게 어떠한 수업을 해야할까?

 

  "대백약욕 광덕부족 건덕투 질진약투(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고,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고,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고,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1타 강사들이 학원가를 휩쓸고 있다. 최태성, 설민석을 비롯한 많은 스타강사를 보면서, 나도 저들처럼 수업을 하려했다. 나름 강의식 수업에는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의 확고 부동한 강의식 수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에서 이세돌이 승리했다. 더 이상 암기를 많이 시키는 수업은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 변화해야한다. 변화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이 변화해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변화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우리 교사에게 노자는 무어라 말해줄까?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다.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다.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다.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좋은 수업은 서툰듯하다. 교사가 모든 것을 학생에게 알려주는 수업은 완벽한 수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헛된 수업일 뿐이다. 참된 앎을 전해주고 싶다면, 마치 서툰듯, 비어 있는듯 수업을 해야한다. 교사는 가만이 있지만, 학생들은 바삐 움직이며 배움을 터득해간다. 학생이 스스로 친구들을 가르치고 배워간다. 교실에서 교사는 마치 한가히 노는 백조인 듯 하다. 요즘, 강조하는 학생 중심 수업을 실행하라.

  학생들에게 성적문제, 이성문제 등등 수많은 고민거리가 있지만,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자신의 진로문제이다.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는 학생, 자신의 성적으로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할 수 없기에 꿈을 바꾸어야할지 고민학는 학생들이 많다. 노자가 진로를 고민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다가가 무엇이라 말할까?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이성인, 불위대, 고능성기대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거대한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지만,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다. 태산앞에 자신의 위치는 너무도 낮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모한 도전을 할 것인가? 큰꿈을 가지라 했기에 무조건 큰 꿈을 갖고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들 학생들에게 노자는 조언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함부로 태산을 한걸음에 오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태산을 오르는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내딛어야하는 작은 걸음을 시작하자. 자신의 꿈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서 서점을 찾아가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천하의 어려운 일도, 천하의 큰일도 작고 세세한 것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노자! 한국사회를 말하다.

  노자선생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말들을 해줄까? 노자를 초대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우리 현실을 노자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자.

  노회찬이 갔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만, 너무도 두려운 존재 삼성을 상대로 굴하지 않았으며, 503호 공주님과 맞짱을 뜨며 약자의 편에서서, 노동자의 편에서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드루킹 사건에서 불거진 선거자금 문제에 너무도 힘없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으며,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여러 책들을 읽으며 진리를 얻고자했다. 한국의 명문대학을 나오고서도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용접을 배웠다. 자신의 삶을 힘써행하는 그의 모습에는 뜻이 있었으며, 노동자를 위한 삶을 버리지 않은 그는 서민을 위한 정치인으로 오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도 강해보이는 그가, 자신의 티끌 같은 오점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허공속에 내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도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삶은 노무현의 삶과 오버랩된다. 약자를 위해서, 약자를 위한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와 정면대결했던 그들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우리 가슴속의 밀알이 되어 영원히 우리곁에 살아갈 것이다.

 

  "부유병, 시이불(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성인, 이기병, 시이불병(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 병폐가 없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땅의 진보세력은 자신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이 그것을 강요한 측면도 강하다. 몇백억을 집어삼키고서도 뻔뻔하게 잘도살아가는 사람이,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라고 말하며 혀를 찼단다. 그들에게는 돈 얼마 받아먹은 것이 전혀 허물이 되지 않는가 보다. 결국 그들의 허물이 쌓여서 적폐가 되었다. 이 땅의 진보세력들은 자신의 병폐를 병으로 여긴다. 병폐를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진보세력이 아니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진보세력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병폐를 병폐로 여기고 이를 용납하지 않아야한다. 그러기에 진보세력에게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한다. 이로인해서 진보세력의 거두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병폐가 적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도덕적 흠을 용납해야할까? 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 속에서도 나는 믿는다. 이 땅의 진보세력이 언제까지나 약자의 편에서서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려 노력하리라는 사실을.... 도덕경 20장은 고 노회찬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

 

"荒兮 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황혜 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我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래래혜 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 其若海 飂兮 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담혜 기약해 요혜 약무지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황량한 모습이 텅 빈 곳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뭇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봄날 누각에 오르는 것 같다.

나 홀로 담박하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기 같으며,

몹시 지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잃어벌니 듯하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구나.

혼돈스럽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홀로 흐리멍덩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롣 살피는데, 나홀로 어리석도다.

담담하여 바다 같고, 고고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홀로 완고하고 비루하다.

나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자 하여 만물을 먹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을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일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해서 비판하려하면 좌빨로 바라보는 노년세대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 이야기를 싫어하는 주변인들을 바라보며, 우리사회에 우경화를 걱정했다. 노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보면서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  개지미지위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모두가 좋아하고 절대다수가 사랑하는 사회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될 수 있는 사회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기 않기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해야한다는 믿음이 지배하기에, 나와 다른 유대인과 아름답지 않은 장애자들을 죽였다. 노자는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치기는 너무도 힘들다. 폭력으로 No를 외치지 못하게 만들기도하고, 사회 분위기가 No를 금기시하기도한다.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사회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세상을 아름답게하기 위해서라도 추함과 아름다움은 조화를 이뤄야한다. 2000년전 노자는 서양보다 먼저 똘래랑스를 알고 있었다.

  취직이 잘되지 않고, 그래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중에는 비트코인에 빠져서 대학 등록금을 날린 대학생들도 있다. 이들에게 노자는 어떠한 말을 할까?

 

  "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부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아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게 하라.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말아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라.

 

  일확천금을 얻으려 대학등록금을 날린 젊은이들은 정부를 탓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이를 정권탓으로 돌린다. 그렇게하면 일시적 위안은 느낄 수 있다. 마치 자신의 누명을 인정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Q'처럼....위정자라면,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 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한탕으로 부자가 되려하지 않게 해야한다. 투기성 비트코인을 보다 일찍 규제하여, 투명하고 안전하게 만들고, 비트코인의 위험성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야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새로운 창조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한다.

  요즘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힌 바닷거북을 보면서 인간의 편리함이 자연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천하만물어유 유생어무 )"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천하의 모든 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는데 있음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석유라는 유에서 플라스틱이라는 있음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마땅히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 그래야만 천하만물이 순환하며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도 길다. 있음을 위해서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인간이 만든 플라스특은 거스르고 있다. 반면 질그릇은 진흙이라는 있음에서 탄생했으나, 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있음을 위해서라도 없으로 돌려보내야한다.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있음은 만들어서는 안된다. 비단 플라스틱만이 아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수많은 있음들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아 자연을 위협시키고 있다. 있음은 없음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노자의 말에 인간이여 귀를 기울여 조시오....

 

3. 노자! 정치를 말하다.

  노자라는 책이 제왕학의 교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노자와 법가가 결합하여 '황로학'이 성립한다. '황로학'은 중국 한나라 시기에 경제때에 중국 황제들에 의해서 번성했다. 어떤이는 도덕경을 병법서라고 말한다. 도덕경에는 병법에서나 볼법한 글귀들이 많이 있다. 노자가 말하는 정치학을 만나보자.

 

 

  "重爲輕根 靜爲躁君(중위경근 정위조군)"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輕則失本 躁則失君(경즉실본 조즉실군)"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전차 만대를 부리는 주인이면서 어찌 그 몸을 천하에 가볍게 처신하겠는가. 가볍게 처신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굴면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진정 정치를 하는자는 신중하고 냉철해야한다 한비자 '망정'편을 보는 듯하다. 군주가 신중하지 않고 가볍게 처신을 한다면, 근본을 잃게 되고 심지어는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다. 항상 신중하게 자신의 권위를 사용해야한다.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군주를 4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덕경 17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태상 부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대인이 윗자리에 앉아 다스릴 때에는 아래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친하게 여기고 기리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두려워하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모멸한다.

 

  이를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해보자. 군주가 윗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을 알 정도 정치를 잘하는 단계(下知有之)에는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들 수 있다. 그다음 그를 친하게 여기고 예찬하는 단계(親而譽之)는 우리나라 세종과 정조 대왕을 예로 들수 있다. 임금을 두려워하 단계(畏之)는 연산군을 들 수 있다. 인조반정 전의 신하들은 연산군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찼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왕의 주변을 떠나거나 반정군의 편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임금을 모멸하는 단계(侮之)는 인조를 들 수 있다. 두번씩이나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무능한 왕이다.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칭찬을 받기 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자는 두렵고 멸시받는 군주를 최하등급으로 두고, 무위의 통치자와 유능함으로 다스림으로써 사랑받는 통치자를 가장 윗자리에 두었다. 503호의 국정농단을 겪으면서 한국의 대통령들은 두렵우면서도 경멸을 받는 존재인지,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생각해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전쟁은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위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의 연장선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전쟁론을 살펴보자.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사지소처 형극생언)"

  군사로 천하에 강자 노릇하지 않으니, 그런일을 되돌리기를 좋아한다. 군대가 머물던 자리에는 가시덤불만 돋아닌다.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 전쟁을 쉽게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 이명박 정권에서 NSC가 열렸는데, 군필자가 국방부장관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유명하다. 전쟁을 모를 수록, 군을 모를 수록 전쟁을 쉽게 말한다. 손자병법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라했으며, 전쟁은 신중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점에서 노자는 정쟁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임할때는 당연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선용인자위지하)"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용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을 잘 이기는 자는 함께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낮춘다.

 

  싸움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일이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신중을 기해야만이 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잘 싸우는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과 함께 다투지 않는다. 외교로, 경제를 무기로 적을 제압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한다. 트럼프가 오바마처럼 싸드를 비롯한 무기로 중국을 압박하기 보다는 경제로서 압박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는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대국은 어떠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야할까? 도덕경 61장에는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의 단초가 있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축인)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소국불과욕입사인  부양자각득소욕 대자의위하)"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아래쪽에 처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요. 천하 사람들이 돌아오는 암컷이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하면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아래에 처하면 큰 나라에게 취해지니 그러므로 어던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하고 어떤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해지는데 큰 나라는 다른 사람들을 다 거느리기를 바랄 뿐이고, 작은 나라는 다른 사람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둘이 각자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아래에 처해야한다.

 

  도덕경 61장은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를 상정해 놓은 듯하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려가던 시기에 살았던 노자의 머릿속에는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러 회맹을 맺고 작은 나라들이 이에 순종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한듯하다.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가 무너진 지금, 중국이 걸어야할 바람직한 외교질서는 무엇일까? 바로 도덕경 61장에 있다.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낮은 곳에 임하여 천하의 모든 것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야한다. 대국굴기를 하려는 중국은 야심차게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다. 차이나머니를 앞세워 주변국들에게 각종 투자를 하는듯하지만, 그 과실은 중국이 가져가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경제치투에 신음하고 있다. '도광양회'하면서 미국의 발톱을 피해가던 중국이 이제는 대국굴기를 외치며 세계로 폭주하고 있다. 중국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그들을 품어야한다. 지금의 폭주하는 중국의 모습은 약소국에게는 모멸의 시선을 받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라는 경제적, 군사적 견제를 불러 일어킨다.

 

4.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말하다.

  김시천은 노자를 전공한 학자이다. 그의 '도덕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번역한 '역주 노자도덕경주'에 대해서 몇마디 할말이 있다.

  첫째, 김시천은 지나치게 바그너의 학설을 따른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외국 학자들의 '도덕경' 관련 서적을 많이 본 김시천은 외국 학자들의 학설을 많이 받아들였다. 외국학자들의 주장이 나름의 타당성이 있어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외국학자들 중에서 특히 바그너의 주장을 많이 따르고 있는 점은 약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도덕경 23장 " 德者 同於德(덕자 동어덕)"이라는 문장은 하상공본과 왕필본 도덕경에 모두 실려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필 주문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덕'을 '득'으로 고쳐서 '者 同於得(득자 동어득)"으로 수정하였다.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똑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수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이다.

   둘째, 주문을 근거로 본문을 고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도덕경 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만물귀언이불위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를  "萬物歸之而不於主(만물귀지이불어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로 수정한 것이 대표적이 예이다. 저본의 '언'을 주문의 '귀지'에 근거하여 '지'로 수정했다. 이번에도 바그너의 주장을 따른예이다. '위'를 '어'로 수정하 것은 앞의 문장과 짝을 이루기 위해서 수정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김시천의 해석에 대한 불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왕필의 해석에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도덕경 57장에 "民多利器 國家滋昏(민다리기 국가자혼, 백성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란해진다.)"를 왕필주에는 "백성이 강하면 국가는 약해진다."라고 적어 놓았다. 백성이 강해지면 국가가 약해진다는 말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며, 노자를 바르게 해설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된다. 백성이 이로운 것만 추구하면 국가가 혼란해진다.라는 뜻으로 해설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백성이 자신의 이로운 것만을 추구하다가 국가에 해를 끼친사례는 비트코인 사태를 들 수 있다. 단기적 이익을 쫓다가 개인은 물론, 국가와 사회에도 해독을 끼쳤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내 나름의 해석도 해보았다. 도덕경 27장에 "常善救物 故無棄物

(상선구물 고무기물, 늘 만물을 잘 구하는 가닭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으니)"라는 문장을, 항상 물건을 잘 구하기에 그래서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즉, 한번 물건을 살 때, 제대로 된 물건을 장만했기에 벌빌 물것이 없다. 로 해석했다. 어떤가? 괜찬은가??

 

 

  노자를 읽으면서 20여년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 나와 했던 강의가 새록새록 기억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도덕경이 이렇게 재미있고 쉬울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도덕경'을 사서 원문을 공부하며 강의를 들었다면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까?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도 고민이 많았다. 대학을 다니며,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해야했다. 사랑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한번 만나게된 '도덕경'은 그 시간 동안 성숙한 나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먼 훗날, 도덕경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무르익은 내가 도덕경의 감동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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