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의 혁명 - 비루한 삶도 고귀한 삶도 부활한다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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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죽었다.'라 말하며 초인이 되라고 강하게 말하는 철학자 니체! 강해보이는 그는 아픈 사람이었다. 젊어서 교수가 되었기에 연금을 받으며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으나, 두통에 시달려야만했고, 매질받는 말을 몸으로 끌어앉으며 쓰러져서는 10년 동안 정신병원에 정신적 사망상태에서 살아야만했다. 그에 대한 애처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니체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에 다시 손이간 것도 이때문이다. 니체의 글을 읽으며 아픈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니체의 말은 강하다. 그에 말에는 힘이있고 시대의 금기에 주저하지 않고 맞서는 당참이 있다. 중세를 지배했던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용기가 있다. 


  "그런 신이라면 사라져라! 신이 없는 것이 차리리낫다.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일이며, 차라리 바보가 되고, 차라리 나 자신의 신이 될 일이다."-97쪽


  동양의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신이 아니다. 먼저 깨달은 자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라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서양의 종교는 유일신을 상정한다. 그는 절대자이다. 그리고 절대 복종을 강요한다. 이러한 신에 대해서 니체는 '그런 신이라면 사라져라! 신이 없는 것이 차라리낫다.'라고 당차게 외친다. 사실 신이라는 존재도 인간의 창조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니체는 한다. 


  "인간은 삶이 무서워서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허버트 스펜서)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포이어바흐)

  "신이 종교를 내려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교를 만든 것"(니체)-138쪽


  인간은 그 누구도 신을 본적이 없다. 보지도 못한 신이라는 존재를 인간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 원초적인 질문 속에서 종교의 등장, 신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 허버트 스펜서, 포이어바흐, 니체라는 걸출한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존재이다. 니체는 이러한 신의 존재를 직시했다. 그리고 신의 노예이기보다는 삶의 주인이고자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위버맨시(초인, 극복자)가 되라하였다. 니체는 신의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한 진정한 극복자였다. 

  19세기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마음속에서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죽은 신을 부여잡고 그 존재에 의탁하며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노예적 사람들은 삶의 허무를 견뎌내지 못하기에 무의미를 없애려고 거짓 의미를 부여한다. 가령 자신이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 생각한다."-193쪽


  목사의 아들 니체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실날하게 비판한다. 어디 기독교 뿐이랴! 불교 신도 중에서도 오늘의 고통을 '전생의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얼마나 노예적 생각에 점겨 있는가! 삶의 허무를 견뎌내지 못하고, 신이라는 존재에 의탁해서 현실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낙타의 삶이다. 자신이 짊어진 짐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주인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뜨거운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니체는 '노예적 사람'에게 외친다. 극복자(위버맨시, 초인)가 되라고... 종말인(최후의 인간)이 되기보다는 짊어진 짐을 벗어 던지고, 사자가 되고, 아이가 되라고 외친다. 그것이 바로 극복인! 초인이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살인을 합리화시키기도하는 인간 말종이나 종말인들은 니체의 울부짖음에 귀기울여야한다. 

  손석춘은 니체에 대한 오해도 풀어주었다. 보통 니체가 젊은 시절 사창가에 갔다가 매독에 걸려 일생을 고통속에서 살아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매독균이 뇌에 들어가 천재적인 업적을 이루기도한다. 그리고 매독성 치매로 진행되어 10여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고통속에서 살다 죽어야했다고 말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니체는 뇌종양을 알았다고 한다. 니체에 관한 자료를 더 찾아보았더니, 뇌수막종양가설, 유전성 다발성 뇌경색성 치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매독 환자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징후가 니체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으며, 매독 발병 후 보통 2~3년 내 사망하지만 니체는 투병기간이 무려 11년이라는 사실이 그 근거이다. 이 사실을 알고 니체에게 미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얼마나 고통 속에서 괴로워했을까? 더욱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진실로 받아들여졌음을 니체가 안다면 저승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손석춘은 니체를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이 책 곳곳에 세심한 배려를 숨겨 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순우리말을 찾아 사용한 것이다. 한예로 밑절미와 같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단어를 사용하였다. '밑절미'라는 단어를 찾아보며 '밑거름'과 비슷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질 수도 있는 우리말을 사용하여 새생명력을 불어 넣는 일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손석춘은 니체의 철학용어를 쉬운 말로 적절하게 다시 번역하였다. '최후의 인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니체는 '최후의 인간'을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긍정적 의미의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책을 읽을 때 너무도 괴리감이 첬다. 손석춘은 이를 '종말인'으로 번역했다. 이밖에 '초인'을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니체의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러한 번역어를 접하면서 니체의 철학이 보다 가깝게 나에게 다가왔다. 

  니체의 사상중에서 '영원회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이 생각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떠올리게한다. 발전론적 역사관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순환론적인 '영원회귀'를 주장하는 니체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도에서 '영원회귀'를 말했다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니체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불교의 윤회사상이나, 비과학적인 우주론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주장을 한것은 여전히 이해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손석춘은 니체 철학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우주'와 '평행우주'가 니체의 영원회귀와 '친화적 가설'이라 주장한다. 


  "니체 사후 지금까지 발전해온 우주과학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영원회귀의 철학적 사유는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147쪽

   

  우주에 대해서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 알지 못하고 있는 지식이 많기에 니체의 '영원회귀'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먼 미래에 과연 니체의 '영원회귀'는 입증될 수 있을까? 아니면 철학적 가설로만 남아 있을까?


  니체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하며 상승하고자했던 사람이다. 평생을 두통에 시달렸고, 루 살로메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갈구했던 소심하고 약했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당당히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신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초인이 되어야한다며 낙타의 짐을 벗어던지고, 사자의 날카로운 이빨을 누그려뜨려 아기의 부드러움을 가지라 말한다.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니체 읽기의 혁명'을 읽으며 더 깊어졌다. 특히, 기존 번역어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보다 니체의 철학에 알맞은 단어로 대체해준 손석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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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인생수업 : 석가모니가 세상에 남긴 삶의 지혜 인생수업
석가모니 지음, 김지민 엮음 / 하이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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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 인생수업'이라는 제목에 마음이 끌리어 서가에서 책을 펼쳤다. 석가모니의 주옥같은 말들을 읽어가며 마음을 다스려보자. 

  

1. 싯다르타여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싯다르타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수행자들에게 한 말이 일반 대중에게 적합하게 적용되기 힘들고,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에 그때의 말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도 안된다. 싯다르타의 말들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몇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나의 결점을 알려주고 꾸짖어 주는 이를 만나거든 보물지도와 같이 대하라."(30쪽)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타인의 결점을 누가 꾸짖을 수 있는가? 단지 그가 성인이라면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기회를 줄 뿐이다. 타인을 꾸짖는행동 자체가 꼰데나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혹은 소시오패스가 마음 약한자를 가스라이팅하기 위한 행동일뿐이다. 

  타인 꾸짖음을 보물단지로 여기기 보다는 광활한 대지에 깊게 뿌리박은 나무처럼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그의 꾸짖음을 들어야한다. 그의 꾸짖음이 나를 길들이기 위한 가스라이팅인지, 자신의 한소연인지, 진심어린 충고인지를 판별해야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보물지도를 가장한 독배를 마쉴뿐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의 결과물이다. 마음이 모든 것이다."(48쪽) 언듯 들으면 너무도 아름다운 말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물적 토대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 종교적 관념론에 빠지느냐,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빠지느냐는 본인의 자유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마음과 물적 토대의 역동 속에서 나는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마음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기도하지만, 나를 둘러싼 조건들이 나를 만들어 가기도한다. 마음과 물적토대의 역동 속에서 나는 대지에 굳게 뿌리 박은 거대한 나무처럼 나의 삶을 살아가려한다. 그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2. 석가모니여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석가모니의 주옥같은 말들이 감탄을 한다. 그중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몇가지를 함께 살펴보자. 

  첫째, "견고한 바위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현명한 자는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45쪽) 그렇다, 타인의 한마디에 놀라지 않는 바위과 같은 사람이 되자. 그 누구가 나의 눈과 나의 귀를 현혹시킨다하더라도, 굳건하게 대지를 지키는 바위처럼 살아보자꾸나!

  둘째,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74쪽) 인간은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과거에 이러했다면 나는 나았을 것이다. 혹은 어린시절에 머물고 싶어하는 갈만을 갖기도한다. 과거에 집착하며 퇴행적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과감히 나무가 꽃을 버리고, 강물이 강을 버리듯이 과거를 버려, 열매를 맺고 바다에 이르자.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참다운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타인의 삶과 비교하지 말라. 해와 달은 서로 비교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시간대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다."(127쪽) 우리는 선진국과 비교하며 발전을 이루었다. 비교하지 말라는 사람들은 타인 혹은 타국과 비교하지 않고 어찌 발전이 있을 수 있느냐며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타인의 뒤를 쫓는 개발도상국이아니다. 이제는 우리가 타국의 모범이 되어야한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삶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신의 진짜삶을 모색해야한다. 해와 달이 자신의 시간대에서 빛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시간대에서 빛나자.,


  석가모니의 좋은 글들을 가려뽑아서, 저자 김지민의 사색을 덧붙였다. 그가 덧붙인 사색보다는 석가모니의 글을 직접 음미하는 것이 더 좋은 책이다. 언젠가는 석가모니의 진리가 담긴 불경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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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주역 - 팔자, 운세, 인생을 바꾸는 3,000년의 지혜 오십에 읽는 동양 고전
강기진 지음 / 유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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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역은 점을 치는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이 유교의 경정이되었다. 주역점을 치는 책이 괴력난신을 말하지 말라고한 공자가 가죽끈이 세번 떨어질 정도로 애독하던 책이라니 아이러니했다. 단순히 점치는 책이라면 공자가 이렇게 좋아할리가 없다. 그래서 언젠가는 주역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역이 어려운 책이라는 공포(?)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십에 읽는 주역'을 먼저 읽기로 했다. 

  저자 강기진은 어려운 주역을 쉽게 설명하려 노력했다. 한자 하나 하나를 갑골문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 뜻을 깊이 있게 설명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튜버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쉽게 주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중에서 박막례 할머니의 말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거이여. 왜 남한테 장단을 맞추려고 하나. 북치고 장구 치고 니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164쪽)


  불교에서 강조하는 주인으로 살라는 말을 박막례 할머니는 70 평생의 긴 내공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언제나 주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며 남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에게는 너무도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명예와 승진을 부추겨도 이에 휩쓸리지 않는 거목이 되고 싶었다. 박막례 할머니의 말씀은 거목이 되고 싶어하는 나의 마음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 주었다. 

  강기진은 '붕'과 '우'의 차이를 갑골문을 들어 설명한다. 우는 서로 손을 잡은 상태를 뜻한다. 소꿉친구들이 이에 속하는 반면, '붕'은 같다는 뜻으로 동류라는 뜻이다. 같은 도를 추구하며 가은 길을 걸어가는 도반을 붕이라 한다. 

  그런데, 나는 우를 사귀려했다. 그것이 진정 사심없는 사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하는 우리는 붕을 사귀어야하지 않을까? 같은 뜻을 같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붕을 사귀어야한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려 고민하는 붕을 사귈 때이다. 

  책을 덮었다. 두꺼운 주역을 얇은 책으로 이해하려했다. 물론, 이 책한권 읽었다고 주역의 심오한 뜻을 다 이해했다고 믿지 않는다. 공자가 인생의 여로에 주역을 읽으며 그 심오한 뜻을 이해하려하였듯이, 나도 언젠가는 주역을 읽으며 인생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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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2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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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가 자신의 전공으로 돌아왔다.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다시 대중앞에 섰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1,2'는 그가 탐구한 장자에 대한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10여년전, 나는 강신주가 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을 읽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을 읽으며 10여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와 달라진 강신주의 생각을 떠올렸다. 강신주! 그는 어떤 성숙한 모습으로 장자를 다시 초대했을까?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라는 부제가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20여년전,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쓸 때는 세상과 맞서며 자신의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강신주가, 이제는 쇠약해져서 세상으로부터 밀쳐진 이들을 위한 찬가를 부르고 있다. 피튀기는 경쟁 사회에서 탈출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강신주가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유목민의 삶이다. 정착민 vs 유목민의 삶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장자를 유목민적 사유를 가진 책으로 소개한다. 정착민을 대표하는 사상가 공자, 유목민의 대표 사상가 장자의 대립구도 속에서 강신주는 장자의 글을 빌어서 공자를 비판한다. 지배자의 논리를 대변하는 공자를 비판하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삶을 찬양한다. 아마도, 경쟁에서 승리하라 강요하는 현대사회에서 밀쳐진 현대인들에게 강신주는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떠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에서 강신주가 말했던 강조점이 달랐다. '수영이야기' 즉, 46번째 주제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서'라는 글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서는 차이를 뛰어 넘어 소통과 자유의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소재였다. 

 

  "섯부르게 나의 '성심'으로 나의 '아비투스'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하기보다는 나의 생각을 판단중지하고 망의 단계에 접어들어야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유영의 단계에 접어들어야한다. 거친 물결에 자신의 몸을 맞기듯이, 행글라이드에 몸을 싣고 세찬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기듯이 우리는 차이에 자신을 싣고 포월해야한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 자유로운 연대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한다."-'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서평에서...


  그러나, '강신주의 장자수업'에서 '수영 이야기'는 '소통과 자유의 연대'를 말하는 소재로 쓰이기 보다는 유목민적 삶의 태도와 정착민적 삶의 태도를 극명히 대비시키는 소재로 사용되었다. '장자'의 같은 우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강신주가 현대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달라졌다. 이제는 자유인으로 유목민처럼 떠나라고 말한다. 강신주는 우리가 자유인이 되길 권한다. 

  '에태타'는 대단한 추남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 그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매력적인 추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외모마져도 자신을 상품성을 돋보이는 도구로 사용한다. 수많은 성형외과 수술이 이어지고, 어떻게든 예쁘고 젊게 보이고 싶어한다. 세계 언론이 50대 여성이 20대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며 한국의 한여성이 받은 성형수술을 심도 있게 소개한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그 성형수술의 주인공인 K 여사를 자유인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신주에게는 그녀보다 에태타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며 많은 값으로 팔려나가길 바라는 우리에게 강신주는 자유로운 에태타가 되라 말하고 있다. 피튀기며 밀쳐지지 않으려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지 말고, 자유로운 그곳으로 떠나라 말한다. 


  "없음은 아직 마주하지 않은 다자들의 있음으로, 삶은 마주침이 지속되는 다자들의 있음으로, 그리고 죽음은 마주침이 와해된 다자들의 있음으로 긍정했던 것입니다." -76쪽


  강신주는 '장자'의 입을 빌어 죽음까지 포월하라 말한다. 자유롭게 떠나라! 심지어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이 삶을 긍정하며, 죽음도 긍정하는 평온한 자유를 만끽하라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있고 없음을 고뇌하기 보다는 내가 없음에도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예찬하자. 이 세상을 마음껏 여행한 유목민이 미련없이 떠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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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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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에서는 브렉시트가 단행되었고, 미국은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세계가 혼돈의 회오리 속에 빨려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현실이 변해야한다. 그러나 불길을 피해 살기 위해서 찾아든 곳은 물이있는 비좁은 화장실이었다. 탈출구를 찾아 헤메지만 좁은 터널을 달리듯이 탈출구는 멀기만할뿐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이라는 만능키를 가지기 위해서 옆을 볼 수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는 우리에게 그것이 착각임을 자각하게한다. 'The Tyranny of Merit', 능력의 폭정이라는 원제목처럼 능력이라는 만능키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능력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탈출구는 존재할까?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탈출구는 혹시 폐쇄된 화장실이아닐까?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행해지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진단한다.


  "수십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41쪽


 그렇다. 미국사회에서 좌측에서는 버니센더스 열풍이 불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분노의 물결이 미국을 휩쓸며 신자유주의의 성지인 미국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이 도도하게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우측에서는 트럼프가 노동자의 언어를 사용하며 기존 미디어의 문법을 벗어난 선거를 했다. 인종차별, 여성혐오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는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좌측의 변화 물결은 민주당 당내 경선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힐러리와 트럼프와의 대결에서 기성 미디어들은 힐러리의 당선을 외쳤지만, 현실은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변화를 수용한 공화당은 승리했고, 혁명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민주당은 패배했다. 

  많은 언론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어리석은 썬밸트의 레드넥(백인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보도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은 트럼프에 열광하는 것일까? 버클리 캘리포니아 국립대학 사회학과 교수 엘리 러셀 혹실드는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우수은 이야기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그들도 이방이었다. 인디언이라 불리는 미국의 토착민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갖혀서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고 자신의 땅에 내쫓겨서 폐인처럼 살도록 한자가 누구였던가? 지금, 수많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서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백인 노동자를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 내몰고 있다. 

  백인 노동자들은 어쩌다가 자기 땅의 이방인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의 폭정 때문이라 주장한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해서 엘리트 가정은 지옥같은 교육을 시킨다. 우리와 다른점이 있다면, 미국은 엘리트층이 입시지옥을 겪는다면, 우리는 거의 모든 가정이 입시지옥을 겪고 있다는 차이만이 존재한다. 

  기부금입학, 운동 특기생 전형, 동문 특혜 등등의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엘리트들은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 엘리트 사회의 부를 세습한다. 엘리트 카르텔은 너무도 견고했다. 2008년 대선 유세에서 버락 오바마는 경영자나 기술관료의 언어에서 벗어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써브프라임 금융위기 속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엘리트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월가에서는 정부로부터 받은 구제금으로 금융엘리트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공분을 사기도했다. 

  어떤이는 말한다. 엘리트들이기 때문에 현대와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그러나, 엘리트들에게 가장 현명한 결정은 사회적 약자에게 이로운 결정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적 부와 명예를 세습할 수 있는 결정이다. 그러한 예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하게 보이지 않는가! 

  능력에 따라 지위와 부를 분배해야한다는 소위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주장에 대해서 100% 공감할 수는 없다. 

  첫째, 모든 재능은 평등한 가치를 가지는가?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하는가?  마이클 샌델은 모든 재능은 같은 가치를 가지며, 노력에 비례해서 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재능 덕분에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와 똑같이 노력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버린 사람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 52쪽


  재능 중에서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이 있고, 필요치 않은 재능이 있다. 물론, 농구 재능처럼 고대 사회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은 재능이었으나, 현대에는 유용한 재능이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모든 재능에 사회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으로 사회에서 요구하지 않는 재능에게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재능과 같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은 무리한 이상일 뿐이다.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은 재능을 가진 사람은 그 재능을 자신의 여가 생활에 사용하면서 만족하면 될뿐이다. 

  노력을 했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서 대우를 해줘야할까? 우리 주변에서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라는 말을 많이한다. 열심히 책상 위에 앉아서 서류를 만지작 거리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보고서는 형편없는 사람과 단시간내에 탁월한 보고서를 완성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보이는 사람중에서 누가 좋은 대우를 받아야할까? 노력은 아름답지만 댓가는 노력에 비래하지 않는다. 

 둘째,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인가? 마이클 샌델은 명문대 학위가 사회적 경제적 지위 상승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 합격자를 제비뽑기로 뽑자고 제안한다. 대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1차로 선정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제비를 뽑자는 제안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학 학격자는 오만에서 벗어나 겸손해질 것이며, 불합격한자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운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능력주의적 오만"에 바람을 뺄 수 있을까? 한국의 현실에 적용시킨다면 장수생들을 배출하는 최악의 입시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학 간판이 사회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한국 사회에서 제비 뽑기에서 탈락한 학생은 자신이 운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다음해에 다시 도전할 것이 분명하다. 사법고시에 인생을 바치다가 끝내는 폐인이 되는 사례처럼, 명문대 입시 폐인이 늘어만 갈 것이다. 대학 입시 횟수 제한을 둔다면 이 또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사회적 분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립대를 통폐합하여 하나의 대학으로 만드는 방법이 가장 현실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 그는 철학자일뿐 행정가는 아니다. 그의 제안은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날 방안을 찾아보라는 화두를 던졌다는것에 의미를 두어야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저출산의 위기에 봉착했다. 국가 소멸의 위기로 치닫는 이유중에는 자신이 겪었던 입시지옥, 취업지옥을 자녀들에게 대물림 시키고 싶지 않아서라는 입장도 있다.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소멸의 위기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극우의 물결이 불어닥치는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그 위험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 물결을 헤처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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