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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서지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18년 6월
평점 :
선생님들과 독서모임을 하다가 민족주의에 대한 논쟁을 한 적이있다. 어느 선생님은 민족주의는 극복의 대상이라 주장했다. 나의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는 유효하며,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마무리되었었다. 토론을 마무리하며 한선생님이 열린 민족주의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고 했다.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미니홈피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유효한가'라는 글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글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당시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이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하면 지식인으로 뽐낼 수 있었다. 반면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면, 구시대의 인물로 평가되었다. 민족주의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며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그러면서, 의문이 들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메이지, 쇼와는 타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며 자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반면, 우리의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제3세계 민족주의자들은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했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렸던 민족주의를 같은 민족주의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읽었다.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부터 잘못되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상상된 공동체라 주장한다. 상상에 촛점을 맞추느냐, 민족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상상되고 구성된 것이냐는 해석상의 차이가 번역상의 차이로 이어졌다. 그리고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은 허구이며 조작된 것이고, 때로는 그 허구와 조작된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타민족을 죽이게한다고 공격한다. 이러한 주장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혐오하고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았을까?
재미있는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인류학자가 아니라, 정치학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것은 그는 영국인이었지만,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고 아일랜드인으로 죽었다. 30대 중반에 친구 족보 연구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아일랜드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증명해가며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부정하기 보다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반식민주의 민족주의에 깊은 애정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가 죽었을때, 인도네시아인들이 깊이 슬퍼한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상상된 것을 허구이며, 타파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벌이는 오류이다.
"사실 대면 접촉으로 이루어진 원초적인 촌락보다 큰 공동체는 전부 상상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가짜냐 진짜냐가 아니라, 어떠한 스타일로 상상되었는가를 기준으로 구별해야한다." -26쪽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를 허구나 날조로 보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모두 상상된 것이다. 심지어 대면 접촉을 통해서 이루어진 원초적 촌락 공동체도 상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했듯이, 사피엔스가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탄탄한 호모 에렉투스를 박멸하고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의 힘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이를 믿고 심지어는 목숨을 바치기도했다. 수많은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힘은 상상된 이야기의 힘이었다. 이러한 힘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대해서 반식민지 민중들을 하나로 뭉치게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투쟁의 대열에 동참해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 어머니의 요리용칼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살인자의 칼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다. 같은 칼일지라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칼의 용도와 의미는 달라진다. 민족주의는 도구이다. 그 도구를 누가, 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달라진다. 탈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어두운면을 보고 탈민족주의를 주장하지만, 제3세계 약소민족은 거룩하고 장엄한 독립투쟁을 떠올리며 민족주의는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를 허구로 비난하기 보다는 어떠한 민족주의의를 상상할 것인지를 우리는 고민해야할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적 민족주의를 동시성에서 찾는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며, 인쇄물은 국가내의 사람들에게 동시성을 갖도록 하였다. 중세에는 종교적 소속감, 혹은 지역적 소속감이 민족을 압도했다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는 계속된 질문이 맴돈다. 상상된 공동체가 고대에는 불가능했을까? 서양의 중세에는 종교적 소속감이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소속감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도 그러했는가? 그리고 꼭 동시성이 있어야 민족주의라는 의식이 싹틀 수 있는가?
고구려는 700년을, 백제도 700년을, 신라는 천년, 고려와 조선은 500년을 발전했다. 우리 역사속에서 등장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가 창건되고 500년을 넘겼다. 이렇게 장기가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탄탄한 시스템뿐만 아니라, 국가 구성원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상된 공동체가 필요하다.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삼국의 건국영화의 신화가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신화와 역사를 옛날 이야기로 전해들으면서 비동시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하지않았을까? 서구의 학자들이 문헌기록에 강한 신뢰를 두고 역사를 연구하지만, 인도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구전기록과 구전문학이 민중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한 고려없이 서양의 역사에 근거해서 민족주의를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도 서구 중심적 사고가 아닐까?
베네딕트 앤더슨은 인텔리들은 인쇄물을 우회하여 단지 문맹인 대중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읽는 비문맹 대중에게조차 상상된 공동체를 퍼뜨릴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유튜버들은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로 독서에 관심이 없는 철없는 10대 20대 남성들을 왜곡된 상상된 공동체로 만들고 있다. 가짜뉴스와 극우적 밈과 노래로 젊은 남성들을 우민화 시키고 있다. 갈수록 견고화하는 어리석은 극우의 상상된 공동체를 허물어뜨릴 방법은 무엇일까? 베네딕트 앤더슨이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를 외친 민족주의를 사랑하며, 상상된 공동체를 연구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서는 반민족주의 친일 친독재로 점철되는 극우 상상된 공동체를 타파를 외쳐야만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를 희망차게 만드는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땅의 모든 시민들이 고민해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