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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 왕 34인의 이야기
석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역사학에도 심리학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사 강의를 듣던중, 문철영 교수가 던졌던 화두였다. 역사학은 딱딱하고, 대중의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고민이 깊어가던 시기였다.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라 생각했던 역사가, 재미없고 딱딱한 학자들만의 이야기 남아 있는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심리학과 역사학을 접목시킨다면, 역사속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들이 그러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고, 역사학의 재미는 배가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감돌았다. 드디어 심리학의 눈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본 책을 만났다. '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왕34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문종을 재발견하다.
고려시대,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시기, 백제는 근초고왕시기, 신라는 진흥왕 시기, 발해는 선왕시기, 조선은 세종대왕 혹은 영정조시기를 전성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고려의 전성기는 언제였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사 교과서를 펼쳐보자. 태조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광종과 성종 치세에 국가 기틀을 잡다가,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물리치지만, 몽골의 오랜 침략 속에서 결국 굴복한다. 그 굴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민왕이 노력했지만, 결국 고려의 혼란은 수습되지 않고 조선왕조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고려는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혼란기에 접어들었다는 인상을 주는 서술이다.
사실 고려왕조의 전성기는 문종시기였다. 조선 세종이 셋째이듯이, 문종도 셋째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시기 학문은 발전했고, 여진족은 고려에 복속되었다. 고려의 기미주로 편성된 여진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백성들의 삶도 편안해졌다. 학문이 발전하고, 정치가 밝아졌으며, 국제 정세도 고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종시기 역사에 대해서 교과서에서는 서술이 안되고 있다. 조선에 비해서 너무도 홀대받는 고려의 모습을 바라보며, 혹시! 식민사학의 그늘이 고려에 드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유독 고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망상일까?
문종치세를 재발견하고,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가지 생각한 것은 이 책에서 문종의 심리를 분석하며 문종치세의 업적을 제시한 부분을 읽으면서부터이다. 다른 고려사 관련 책들에서 발견하지 못한 보석을 '심리학으로 풀어낸 고려왕 34인의 이야기'에서 발견했다.
2. 마음속에 어린 아이가 울고 있는 궁예
드라마 '태조왕건'이 한창 방영되던 시기!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태조 왕건'인지, '궁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건보다 궁예라는 캐릭터가 주는 강렬함은 많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젼앞으로 모이게 했다. 마치, 중국의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의 싸움을 보면서, 승리한 한고조 유방보다, 패배한 초패왕 항우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언더도그 효과(underdog effect)' 즉, 어려운 환경에서 악전 고투를 하거나, 게임에서 지고 있는 자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작동했을 것이다. 궁예는 왕족이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한쪽 눈까지 잃었다. 반면, 왕건은 송악의 호족 출신이다. 아버지에게 살해라는 위기에 빠져 악전고투하는 궁예를 자신에게 투영하며 사회적 밑바닥에 있는 인물이 승리하길 바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건의 승리로 결말이 지어질 것을 알고 있다. 결말을 알면서도 궁예를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한 것은 궁예에 대한 미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궁예가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궁예는 왕건을 넘어서기에는 너무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러레노어 테어는 '유아시절의 외상은 잊히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런 경험을 지닌 사람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냉혹한 면이 있으므로 잘 관찰하면 외상의 유무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궁예의 가슴속에서 커다란 상처가 있다. 그 내면에는 '버림받은 아이' 궁예가 울고 있었다. 결국,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궁예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 관심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도 죽인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처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나, 회복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한쪽 눈을 잃고, 힘든 삶을 살아야했던 것은 궁예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자신의 '내면 아이'를 달래고, 스스로를 치유할 의무는 궁예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궁예는 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도 수많은 궁예가 있다. '울고있는 내면아이'를 달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아이를 달랠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달래고 치유하는 의무를 사회가 나눠 수행할 수는 없을까? 생애전환기 검사를 하듯, 정신과 진료를 받고, 내면 아이를 치유하는 시스템을 우리도 갖길 바란다.
3. 절대지존! 그러나 나약한 인간!
전통시대! 제왕은 절대지존이다.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무시할 수 없다. 한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해서일까? 고려의 왕들중에는 자신의 막강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이들 왕의 묘호앞에는 '왕'자가 붙는다.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의미이다. 고려의 왕은 고려에서는 절대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원나라 황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부인 제국대장공주에게 매까지 맞은 나약한 충렬왕!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를 두고 경쟁했던, 충렬왕과 충선왕!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고,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도 조카를 세자로 삼아 아들을 견제했던 충선왕!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체장애자로 모함받은 충숙왕! 부왕의 첩과 외숙모를 겁탈하며 향락에 빠져 살다가 타국에서 죽은 충혜왕! 어린나이에 죽은 충목왕과 충정왕! 이들의 삶은 애잔한 느낌까지 든다. 그들은 몽골과 몽골출신 부인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야했다. 그리고 고려 백성에게는 한없이 강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제국대장공주가 사냥을 즐기는 충렬왕에게 사냥을 하지 말고 백성을 돌보라했겠는가?
"자신이 기대는 대상에게 비굴해질수록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의 단점을 들춰내고 더 모멸하는 것이다. 이는 의존할수밖에 없는 자신의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열등 상태를 극단의 주관적 우월감으로 표출하면서 억압 에너지를 해소하려는 행동이다."(261쪽)
강자에게 비굴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자에게 강해진다.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강한자에게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고려왕들의 모습은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백성들이 고통을 받더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도! 힘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권력을 지키는 것도 버거웠을 테니까...... 타인의 힘에 의지한 정치는 충혜왕의 폐륜적인 모습으로 극에 달한다. 당당한 주인으로 살지 못하면, 그 고통은 대를 이어 유전된다.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도 주인으로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타인에 의존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왕은 비단, 원간섭기에만 있지 않았다. 수동의존형 왕 '인종'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이자겸에 의존해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했고, 이자겸을 제거하고 나서는 묘청에 기대어 정치를 하려했다. 결국에는 김부식을 비롯한 문벌귀족에게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고,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의종 시기에 무신정변이 발발하여 고려왕의 권력은 무너진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정치를 하지 못하는 왕은 그 권력을 쥘 자격이 없다. 절대자를 추종하는 맹목적 신도처럼 그들은 나약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권력은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게 된다. 인종의 나약한 자아는 경계선 성격을 지닌 인종으로 이어졌고, 자신이 관심의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마치 트럼프처럼!
권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없는 왕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는 백성들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왕조시대! 제왕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어떠한 제왕을 만났는가에 따라서 백성의 삶이 많이 달라진다. 무당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며 푸른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었기에 우리가 겪어야했던 고통을 생각한다면, 고려시대 백성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상처받은 자들!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없는가?
제왕에서 평민까지, 아니 노비까지! 사람은 나약한 존재이다. 사랑을 갈구하며 부모라는 존재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한다.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다시 자신의 삶을 옥죄게 된다. 하인츠 코헛은 "전능한 줄 알았던 부모가 능력의 한계가 있고 자신의 이상과 기대에도 못미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건강한 자아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 "최적의 좌절"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제왕의 아들에게는 "최적의 좌절"을 해줄 아버지가 부재한 경우가 많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만백성의 생명이 달렸기에 그들의 도덕성 발달은 좌절될 위험이 상존한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을 비롯한 대기업 자녀들의 갑질은 "최적의 좌절"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제왕들의 자녀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그나마, 제왕의 자녀들은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많은 스승과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기업에는 제왕의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려는 '스승과 신하들'이 있는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부모라는 존재에 의해서! 강한 힘을 가진 어른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불의의 사고에 의해서! 힘쎈 친구에 의해서 겪게된 고통을 치유할 방법은 없을까?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치유의 방법을 살펴보자.
"트라우마를 말살하기 보다 그것과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과 성숙의 원천으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익혔을 때 마침내 내면의 상처가 완치된다."
'상처를 받은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상처를 치유할 의무는 나에게 있다'는 말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 트라우마를 치유할 의무는 나에게 있다. 트라우마를 없애려하기 보다는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의 발판으로 삼으라! 성숙된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했다. 그리고 그 왕따의 그늘은 나의 삶을 그늘지게했다. 나는 과연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며, 그 트라우마를 발전과 성숙의 원천으로 사용했는지 자문해본다. 내가 고등학교 교사로 살고 있는 것도 그 트라우마를 성숙의 원천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때론 초등학교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미병의 상태'!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 조상들은 강조했다. '위생가설'에 따라서 병균을 없애면 인간이 건강해질 것이라고 서양의학자들은 말했다. 그리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항생제 남발은 우리에게 유익한 유산균들도 죽였다. 무균실에서 자란 아이는 오히려 면역력이 낮아져 질병에 시달리기 쉬워진다. 병을 없애기 보다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 즉 미병의 지혜를 터득할 시간이 왔다.
정신분석학자 로버트 존슨은 그림자를 대하는 원칙을 "우선 직면해서 수용하고, 그다음으로 함께 가볍게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주체가 되어 그림자와 춤을 춰야지 그림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로버트 존슨도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려하기 보다는 아픔을 직면하고 주인이되어 아픔과 가볍게 춤을 추라했다. 어린시절, 나를 괴롭혔던 '친구'라는 괴물들을 직면하고 그들이준 상처와 가볍게 춤을 추어야겠다. 나의 내면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달래며 내면아이와도 함께 춤을 추어야겠다. 그리고 나의 내면아이를 끌어 안겠다. 눈물을 흘리며.....
"(윌리엄 제임스)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면 이유나 변명을 달지 말고 열정적으로 살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그래, 나의 내면아이를 끌어안고 이제 열정적으로 살아가자! 지금 당장! 행동이 변해야 삶이 변하고 인생이 변한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이유나 변명을 달지 말고 열정적으로 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적으로 살자!!
5. '옥의 티'를 찾아서
이 책의 저자 '석산'은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있다. 자신의 전공도, 자신의 출신 대학도 책에는 적혀있지 않다. 아마도 경제분야를 전공한 다방면에 박식한 사람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심리학과 고려사에 대한 상당한 실력이 있음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그러나 '석산'의 책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첫째, 동북9성의 위치능 어디일까? 어린시절, 동북구성의 위치를 천리장성밖의 함경도 지역으로 배웠다. 그러나 이 설은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며, 우리학자들은 길주설과 두만강 유역설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영토를 축소시키려는 일본인 학자의 설을 궂이 적었어야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길주설과 두만강 유역설을 소개해주었다면 이 책이 더욱 빛났을 것이다.
둘째, 광종은 숭유억불책을 썼는가? 이 책에는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이 노골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편 광종의 아내였다."라고 적고 있다. 광종은 최승로의 시무28조에도 나오듯이 말년에 불사를 많이 일으킨 왕이다. 광종이 숭유억불책을 썼다는 말은 수정해야한다.
셋째, 충선왕은 원나라가 좋아서 고려에 안왔을까? 이 책에서는 "충선왕은 어릴때 부터 원나라생활에 젖어 있던 터라 고려보다 원을 더 가깝게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충선왕이 연경에서 전지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원의 정치변동에 따라서 왕권의 향배가 달라지는 고려의 뼈아픈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분까지 지적해주었다면, 이 책이 더 빛났을 것이다.
작지만, 아쉬운 '옥의 티'를 잘 닦아 준다면, 이 책은 더없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록 절대적 카리스마로 혼돈을 잠재울 영웅을 기대린다." 바로 '알파형 리더'를 기대한다. 전통시대! 그러한 알파형 리더가 나타나길 바라며 '제왕'이라는 존재를 만백성들은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왕'들도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알파형 리더'가 나타나기를 바라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삶을 개척해나갈 때만이, 참다운 주인으로 살수있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들은 신화를 만들어 낸다. "집단 무의식에서는 신화의 진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 의미와 지향하는 바가 중요한 것이다." 신념은 집단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알파형 리더'를 바라는 잘못된 심리는 잘못된 집단 무의식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잘못된 집단 무의식은 '제2의 박정희'와 '제2의 히틀러'를 만들어 낸다. 우리사회는 과연 그러하지 않는지, 우리는 스스로 주인으로 살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이 책은 묻고 있다. 34명의 고려왕의 심리를 해부함으로써 그들을 저 높은 좌대에서 끌어 내어 우리 곁에 다가서게 했다. 그리고 묻는다. 민주주의 시대! 우리는 주인으로서 살고 있으며, 주인으로 살 준비개 되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