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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 피와 순수의 시대를 살아간 항일독립운동가 19인 이야기
안재성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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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탄생한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월등한 인간이 행복까지 누리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5쪽

  저자 안재성이 머리말 "비극의 아름다움"에서 내뱉은 첫문장이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영웅을 좋아하는 이유를 저자 안재성은 냉철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 노무현 대통령에서 시작하여 넬슨 제독에 이르기 까지 영웅의 비극적 죽음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가슴속에 오랫 동안 기억하게한다. 그 이유가 저자의 말대로 자기보다 월등한 인간이 행복까지 누리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이웃이 나보다 잘살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저자의 분석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던진 화두에 답해보자. 


  저자가 제1장에 배치한 인물은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하다가 광복된 후에는 북한의 부수상까지된 인물이다. 그러나 6.25 전쟁을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일으킨다. 그 댓가였을까?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겸 평양시다 위원장이었던 고봉기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제, 미제가 못 다 죽인 조선공산주의자들을 김일성이 이어받아 하나씩 다 죽여버렸다." -37쪽


  섬뜩한 문장이다. 그래, 김일성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가장 큰 친일파는 김일성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했던 그가, 광복 후에는 대단한 친일파가 되었다니? 무슨 뜻일까? 김일성이 6.25를 일으켜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릴 수 있게 했다. 패망한 일본은 김일성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일제가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을 김일성이 죽여주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김일성과 스탈린이 그들을 죽였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대의명분도, 신념도, 도덕도 져버리는 것이 독재자들이다. 독재자들은 비극의 시대를 살다가 영웅을 죽음을 선물하여 아름답게 만들었다. 

  저자 안재성은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다. 다음 문장에서 그가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에 연민을 갖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박헌영이 이 시대에도 가치를 갖는다면, 전 생애를 바쳐 민족의 자유와 민중의 평등을 위해 싸웠다는 점일 것이다."-15쪽


 모든 독립운동가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 어떠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갈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헌영에게는 그런 연민이 들지 않는다. 6.25를 일으켰다는 것 이외에 외눈박이 국제 정세 인식이 거슬린다. 

  경성제대 국문과 교수 김태준이 소련이 폴란드를 합병하고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했으며, 1930년대 중후반 대숙청을 한 것에 대해서 질문했다. 박헌영은 언제나 소련의 입장에서 대답했다. 이것이 그의 한계였다. 소련이한 모든 일이 옳다고 복 자녀와 부인의 이름도 소련식으로 지었다. 박헌영은 소련의 폴란드 합병을 "제국주의적 합병은 아니고 공산주의적인 것이며 일 보 일 보 세계 혁명을 진행하는 일환"으로 평가했다. 그렇다면, 소련이 북한을 합병해도 박헌영은 이를 "세계 혁명을 진행하는 일환"이라 말할 수 있을까? 스탈린은 김단야를 포함한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를 간첩혐으로 처형했다. 그가 믿은 소련, 그가 만든 북한은 결국 그를 배신했다. 그리고 그는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박헌영이 6.25 이전에 죽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특히 북한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죽은 영웅은 김일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가족도 무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찍 죽지도 못했으며,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댓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박헌영과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중에 수많은 항일 투사가 죽었다. 이 책에 소개된 이관술과 이주하만이 아니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들은 남쪽에서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고,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투사들의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당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박헌영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저자 안재성이 그토록 연민을 느끼는 박헌영이건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가 김일성에게 전쟁을 종용했다. 그 결과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다. 그의 항일 투쟁이 과연 그의 6.25 전쟁 발발의 책임과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에 면죄부가 될 수있을까?

  박헌영의 죽음은 그와 인연을 맺고 있는 남로당계 인사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승엽과 이강국은 미군정 짹에 포섭된 간첩이다. 박헌영이 미군정의 간첩이 아닌 것에는 동의하지만, 미군정 문서에 의해 밝혀진 사실을 저자 안재성은 반박하지 않고 이승엽이 인천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을 근거로 이승엽 간첩설을 반박한다. 


  "현실 공산국의 역사에서 이른바 '간첩' 또는 '밀정'의 생산 작업은 거의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106쪽


  남한의 독재정권도 반대파를 "빨갱이"라고 몰아 붙여 죽였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보다 더욱 철저하게 김일성 반대파를 숙청했다. 유독 북한에서 남한보다 철저한 숙청이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전체주의 속성이 공산주의에 더 강하기 때문일까?

  철저한 숙청의 칼바람을 피해간 사람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홍덕유이다. 그는 일찍죽는 행운을 얻었기에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도 쓰지 않았다. 그는 행복하게 두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가 진정 행운이었던 것은 저 끔찍한 한국전쟁과 조선공산당 주류에 대한 숙청을 보지 않은 채 죽었다는 것, 남한에서도 아직 좌익의 기세가 드세던 1947년에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244


  일찍죽는 것이 행운이라니... 이것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다. 더러운 꼴 보기 전에 저 세상에 먼저가는 행운을 누리지 못한자들은 살아남은 댓가를 가혹하게 치뤄야했다. 반면 일찍 죽은 행운을 누린자는 그 가족들도 행복했다. 박진홍의 두자녀가 '혁명 유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태준과 어머니 박진홍이 일직 죽어서이다. 부모의 죽음은 어린 자녀에게는 불행일 텐데, 이 시대에는 행운이었다. 만약 김태준과 박진홍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그들의 자녀는 노동교화소에서 일찍 세상을 등졌을 것이다.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이 자기보다 월등한 인간이 행복까지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 책에 소개된 19명의 항일투사들의 죽음은 안타까움만을 더할 뿐 그들에 대한 질투심이나 안도감은 느끼게하지 못했다. '독립운동 열전 2'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공산주의자들의 피난처 소련으로 갔지만 많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스탈린의 숙청의 칼날 앞에 목숨을 잃었다. 그때 "이러려고 일제에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라는 질문이 연이어서 들었다. '잃어버린 한국현대사'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려고 목숨걸고 항일투쟁을 했는가?" 일제가 죽이지 못한 그들을 김일성이 대신 죽였다. 그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자기보다 월등한 인간이 행복까지 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영웅이 실현하고자 했던 웅대한 이상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한놈의 왜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실천 못했으며, 임난 이후의 조선을 이순신이 개혁하지도 못했다. 노무현이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을 구축하기 전에 죽었다. 그들이 그 이상을 실현했다면 우리의 삶도 변했을 것이다. 그들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영웅을 그리워하며 그들을 우리 가슴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이유이다.


ps. 옥의티

"공산주의와 동거하느니 영구분단을 하거나 아니면 북진 통일을 하겠다는 이승만과 김구 세력들을 상대" -317쪽

=> 김구는 분단을 막기 위해서 남북협상을 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백범을 모욕하는 표현을 수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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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꾸준히 반제투쟁을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공산주의자 및 그 영도 하에 있는 진보적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입니다.
1925년 12월에 일어난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공산당의 대부분 간부가피검되었으나 이에도 굴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진영을 정돈대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 1926년 4월 25일 이조 최후의왕이척이 서거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왜놈들한테 눌려서 신음하는 조선민족에게 반일적 감정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6월 10일을 기하여 반일 대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각 단체와 연락하야 운동을 계획한 것이 그만 미숙에 발각된 것입니다. - P241

군정 당국은 실정에 눈을 가려, 일터를 찾아 방황하는 노동자를 파업한마하고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추수에 여념 없는 농민을 태업한•다고 하며, 자기 식량도 미처 거두지 못하는 가난한 농민에게 곡물 판매를 거부한다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선동하여 경제를 혼란케 하는책임이 인민위원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첨과 모략을 능사로 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 세력에 둘러싸여 포위되어 있는 군정 당국은 그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억압하는 반동 세력의 대두를 조장하고 있다. - P247

8월 중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우리 군정학교 학생들이 숙사 뜨락에 앉아서 즐겁게 노래 부르며 휴식의 한때를 보낼 때였다.
신화사에서 사업하는 조선 동무들이 느닷없이 우리들 속에 뛰어들면서일제 놈들이 이제 곧 항복서에 조인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인심을 흥분시키는 특대 희소식은 삽시에 군정학교 전체 교원과 학생들 - P307

속에 퍼졌다. 하여 라가평 언덕은 조선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열광적인 만세소리와 환호소리로 들끓었다.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은 이 기꺼운 소식을 부근 백성들에게 알리려고저마다 횃불을 추켜들고 시위 행렬을 지었다. 숙사 언덕을 내려선 시위행렬은 라가평 마을을 오르내리면서 "항일전쟁 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모 주석 만세!"를 높이높이 외쳤다.
한없이 격동된 마을의 백성들도 횃불을 추켜들고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시위 행렬 속에 뛰어들었다. 환희와 격정으로 충만한 여름밤 횃불시위는 샐녘까지 계속되었다. - P308

밀사를 따라 당나귀를 타고 연안을 향해 들어갔다. 서금서 연안까지2만 5천 리 밤과 낮을 이어서 몇 날 몇 밤을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가라고는 도무지 볼 수 없고 오직 감나무와 호두나무가보일 뿐이다. 별만이 총총한 이역 하늘 아래, 교교한 밤을 나귀에 몸을의지하고 가노라면 바위 위에 크게 나타나는 글자들이 보인다.
"토벌을 가는 길은 도망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다. 어디로든지 빠져나와우리에게로 오라! 너희를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이는 팔로군에서 우리들의 학병들을 부르는 신호이다. 흐르는 달빛 아래은은히 클로즈업해 나타나는 우리의 국문 - 공연히 눈물이 죽죽 흐른다. - P326

조선의용대장 시절의 김원봉.

주석 김 선생이 의용대를 대표하여 자못 명확한 어조로 연설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 조선 인민은 중국의 매차의 혁명에 참가하였는바, 특히 동북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실례로된다. 그러므로 이번에 중국 당국은 그들이 조선이라는 뚜렷한 기치를들고 항전사업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 선생은 자못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되며 그 의의가 중대하다고 인정하였다.
"우리들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의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입니다. 아니, 전 중국의 4억 5천만 동포들이 모두우리의 역량입니다."
힘 있는 말마디마다가 매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P374

1939년 3월 나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소환령을 받고 본부가 자리 잡은계림으로 갔다. 그때 김구 선생은 서안에서 광복군을 세웠다. 그리하여중경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서안으로 갔지만 장수연, 김위, 김화순 등 여성들을 포함한 우리 일행 40명은 계림으로 갔다.
계림에 이르러보니 조선의용대는 약 300명의 당당한 진용을 이루었고 3 - P375

개 지대와 부녀대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임철애를 부녀대대장으로, 나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 P376

조선의용대가 싸움마다 패주하는 국민당 군대와 계속 배합작전을 하며오늘의 후방이 내일 아침이면 전선이 되는 국민당 구역에서 항일선전을 - P385

계속한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날마다 붕괴되는 국민당의 전선과는 반대로 공산당과 팔로군은항일전선에 진출하여 적후 근거지를 세우고 일제 침략자들의 뒤통수를때렸다. 하여 일제 침략자들은 국민당 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진공을정치상의 회유정책으로 바꾸고 진공의 예봉을 공산당과 팔로군으로 동렸다.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항일을 하는 이상, 진정으로 항일하는 공산당과 팔로군을 도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86

중국군사위원회의 강력한 종용으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 계획이 드디어 실천에 옮겨져서 이해 5월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광복군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김홍일이 맡고있었는데,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파견된 셈이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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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김호기.박태균 지음 /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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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만큼 쟁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좌우익의 극한 대립속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수행한 대한민국은 그 내부에 갈등과 대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현대사'의 40꼭지가 한국현대사의 모든 쟁점을 살핀 것은 아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김호기와 역사를 전공한 박태균의 조합으로 한국사회의 정치사적 쟁점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쟁점을 두루 살폈다. 

  다양한 쟁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폭넓게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책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다양한 주제를 살펴볼 수는 있었지만, 깊이있는 성찰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깊이있는 성찰을 하려면 해당 주제의 책들을 읽던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이 태백산맥 정도의 권수와 분량으로 늘어나야할 것이다. 해당 분야를 전공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두꺼운 책 읽기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머리를 식힐겸 꺼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국 현대사의 쟁점을 쉽게 정리하면서 새롭게 읽을 책과 관심가는 분야를 찾기에 좋은 책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독해볼 것을 추천한다. 300쪽 분량의 얇은 책이지만 절대 내용은 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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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 우리가 몰랐던 해방·미군정·정부 수립·한국전쟁의 기록
김택곤 지음 / 맥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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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 국립 문서고에 가야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한세대가 지나야 역사로 연구할 수 있다며 당대의 역사를 연구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결국,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바로알기 위해서 남의 나라 문서고를 뒤져야만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한조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남의 나라 문서고를 뒤진다. 이책은 저널리스트 김택곤이 역사학자들이 해야할 작업을 대신했다. 우리에게 우리현대사의 조각난 진실을 찾아 책으로 묶어 냈다. 김택곤은 새로운 진실의 조각을 우리에게 던지며 생각의 파도를 일으켰다. 


  1. 하지 사령관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역사학자들은 하지를 군사적인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없는 존재라 평가한다. 타지역에 보내진 장군들은 해당지역에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능력까지 가졌다. 그러나, 하지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는 친일파와 지주가 많이 있는 한민당인사들이 요직을 장악하도록 했다.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승만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들이 정권을 잡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하지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밀었던 이승만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1948년 1월 허스트그룹 신문회장인 윌리엄 R. 허스트에게 하지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물론, 하지는 그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편지를 보낼 용기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허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아집이 세고 돈을 사랑하며 친일파와 밀착해 있다고 실날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완전 독립 국가로서의 한국에 대한 고려는 없었습니다."(302쪽)라는 말과 함께 이승만은 '신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다고까지 표현한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밀었던 그가,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을까? 이승만이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는 이승만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제서야 하지는 이승만의 실체를 깨달았다. 하지 그가 친일파를 등용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던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돌고 물신 양면으로 노력한 것도 그가 아닌가? 순진한 군인 하지는 노련한 이승만의 실체를 진정 몰랐단 말인가? 

  이렇게 무능한 하지를 저자 김택곤은 "한국인을 이해하고 도우려했던 우리의 친구였지 않았을까?"(455쪽)라고 평가한다. 미군범죄를 단속하려했고, 한국인을 무시하거나 인종차별하지 말것을 미군에게 당부했던 그의 모습만 본다면 그의 마음이 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기사에 10명의 미국 흑인 병사가한국 여성을 석유 저장고에 가둬 놓고 밤마다 성폭행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소녀가 탈출해서 이 사건을 오빠에게 알렸기에 이사건에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미군은 한국인 여성들을 창녀로서 자발적으로 군부대에 왔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410쪽) 전형적인 축소 수사의 냄새가 난다. 이렇게 미군에 의한 범죄가 사회문제였던 당시에 한국인을 존중하고, 미군범죄를 단속하려했던 하지의 노력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치명적 단점은 정치적으로 무능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군사 격언에 가장 나쁜 지휘관을 무능하면서 부지런한 자라고 했다. 그러한자는 반드시 제거해야한다는 당부도 프로이센 군사 격언은 잊지 않는다. 열심히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승만을 물신양면으로 등용했던 그는 부지런하면서도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반도의 운명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2. 지청천 장군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항일무장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군용지도와 작전교범을 가지고 일본군을 탈출해서 신흥무관학교에 간 그는 독립군을 양성한다. 1930년대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이끌었으며, 1940년에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삶이 우리 항일 무장 투쟁사의 역사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조국 광복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던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동일한 인물이 그를 상반되게 평가하고 있다. 

  OSS 이글팀의 실무책임자 싸전트 대위는 지청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광복후 지청천에 대해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왜일까? 싸전트 대위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지청천 장군이 변한 것일까?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지청천은 광복후 극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극우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며 분단을 지지 혹은 방관했다. 저자 김택곤의 글을 읽으며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내가 존경했던 인물의 안타까운 이면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는 듯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고포스 일병이 하지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고포스 일병은 한국의 운명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했다. 


"한국인 스스로 그들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미국-소련 양국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면 남북간 내전이 틀림없이 발발할 것입니다."(414쪽)


  일개 일병조차도 한반도의 내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분단은 곧 내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범 김구가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한 것 아닌가? 분단을 막고, 동족 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백범이 인생의 마지막 모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백범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지청천 장군을 어찌 분단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던가!

  철기 이범석 장군도 항일 무장 투쟁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시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며, 한국 광복군 제2지대를 이끌었던 영웅이다. 그러나 그도 광복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며 극우파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청천과 이범석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항일 영웅 김좌진 장군이 안타깝게 암살된 것을 지켜보며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광복 후,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군인이지만, 현명한 정치가이지는 못했다. 어디 티없는 옥구슬이 있으랴? 옥구슬의 티마져도 우리가 보듬고 끌어안아야만하지 않을까?


3. 연합국의 지위를 얻기 위한 임시정부의 처절한 투쟁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연합국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보다 치열하게 노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다. 그러나, 저자 김택곤이 소개한 임시정부의 처절한 투쟁을 읽으며 그분들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무모한 이글 프로잭트를 추진했다. 김택곤은 "김구 주석의 마음에는 또 다른 수십명의 윤봉길 의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101쪽)라고 표현했다. 무슨 뜻일까?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에 입장권도 없이 갔다. 윤봉길 의사의 기지로 기념식장에 입장했고, 의거에 성공하고는 저세상으로 갓다. 국내 진공작전 즉, 이글 프로잭트도 이와같았다. 국내에 국내 정진군에 호응할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구체적인 작전계획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젊은이들을 무리하게 국내로 보낸다는 것은 죽음의 제단에 그들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라도 값진 피를 흘려 연합국의 지위를 얻으려했다. 심지어 광복 직전에는 광복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기는 것을 제안하기도했다. 그렇게해서라도 연합국의 지위를 얻으려했다. 

  둘째, 1945년 8월 18일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 선발대는 미군 C-47 수송기로 미군과 함께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복 예비 접수' 명목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중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셋째, 김구 주석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냈다. 김구 주석은 도너반 장군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건의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죽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 전문요구 전문을 보냈다. 도너반 장군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한 임시정부 승인 요구를 읽으면 감동과 깊은 상념이 든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일본과의대결에서 달성하게 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한국혁명(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한국 국내외에서 대일 파괴 활동과 게릴라전 등 갖가지 대일항전을 벌여왔습니다. 때문에 세계의 다른 어느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조직은 혁명과 파괴 활동에 대한 경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도너반장군의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임정승인 요구) - P107

 

  만약, 루즈벨트 대통령이 3년만 더 살았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루즈벨트 대통령이 살았을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단 말인가!


  책은 두껍지만 관련 사진과 큰 활자를 고려한다면 두껍다고 겁낼 필요가 없는 책이다. 술술 잘읽히고 새로운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 큰 재미를 주는 책이다. 책을 덮고서 나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프롤로그에 일본계 미국인이 남긴 위안부 보고서였다. 


"위안부는 창녀 이거나 혹은 병사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군에 부속되어 부대를 졸졸 따르는 존재일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일본인 특유의 것입니다." 37쪽

"낯선 사람 앞에서는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실은 여자만의 제주를 부릴줄 압니다."37쪽


  알렉스 요리치라는 일본계 미국인의 심문 기록은 그도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낸다. 일본을 위한 변명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가 진하게 묻어난다. 미군의 기록이 제3자의 객관적 기록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남겨진 수많은 기록은 미국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남겨진 하나의 기록이다. 그 프리즘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다른면을 바라볼 수있다. 진실의 퍼즐을 맞추며 새로운 감동과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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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 우리가 몰랐던 해방·미군정·정부 수립·한국전쟁의 기록
김택곤 지음 / 맥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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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트 대위와 김구면담)
비밀 보고, 1945년 4월 3일
1945년 4월 3일 아침, 본인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주석과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은 본인이 전혀 요청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얼마 전 본인이 군사 관련 업무로 임시정부 본부를 방문했을 때제의를 했었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면담은 응접 - P46

김구 주석과 대담하는 동안 한국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 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 장군, 최근 조직되어 안휘성 부양에서 주둔 중인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소장 그리고 통역 정한범이 배석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평범한 중국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응접실에들어왔으며 몸이 불편해 잠시 쉬고 있었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구 주석은 외모나 몸가짐에서 건강하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품격 있어 보였고 절제와 점잖음을 갖춘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가 25년 동안 애국적 자객이 - P47

자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담은 대부분 덕담을 나누는 수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 주석은 미국의 관심에 감사한다고 말하고(제가 이범석 장군과 관계를 이어온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어 전면적인 협력을 할 의향이 있으며특히 최근 안휘성 부양에서 막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포함해(광복군)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일반적인 동맹국 간 공유하는 가치와는 다르게 한국과의사이에서는 보다 각별한 가치를 공유해야만 한국-미국 공조를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대담하는 가운데 김구 주석은 두개의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습니다.
1. 김구 주석은 이범석 장군과 본인 사이에 발전되어온 관계에 대해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양인과의 관계에서 싹튼 모든것을 승인했다고 말했습니다.
2. 그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섬에 진격할 때 필리핀 대통령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동행했는데 이는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솟아나는 협력 정신으로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을 공격하는 미군을 돕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합군이한국에 진격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동행한다면 한국 민중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이와 같은 조치는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기꺼이 일본에 저항해 일어서게 하여 한국 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 P48

비밀 전문 수신, 1945년 3월 30일발산: 곤명 헬리웰 대령수신: 중경 버드 중령싸전트 대위와 이범석이 토요일(31일) 중경에 도착한다.
뒤에 언급된 인물은 이글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니, 모든 예우 - P51

를 다해 정중하게 맞아줄 것을요망한다. 이글프로젝트는 4월15일경 시작될 것이며 첩보 활동은 바로 그 뒤 절차대로 착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P52

본인은 안휘에서 온 37명의 광복군 병사들로부터 강력한 인상을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지적이었으며 눈이 초롱초롱하고 열정에넘쳐 있었습니다. 군인 집단으로서 이들은 본인이 본 어떤 집단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 보였고, 자질 역시 미국의 어떤 청년 장교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이고 몇몇은 소통 가능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중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인은 이들 전원을 이글프로젝트에 투입해줄 것을 이범석 장군에게 요청했습니다.
(싸전트 대위 보고서) - P52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의 보좌역인 정한범 박사가 오늘 아침 나를 방문해,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사령관, 조소앙 외교부 장관 3인이 웨드마이어 사령관을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를요청해왔습니다. 이들 모두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최고위 당국자들이며 워싱턴 주재 임시정부 대표가 보내온 전보를 받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전보에 따르면 웨드마이어 장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을 활용하는 문제를 워싱턴에 있는 한국 관계자들과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언제가 괜찮을지 알려주면 본관이적절한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oss중국전구 부책임자 윌리스버드 중령이 미군사령부 윌리엄 맥아피 소령을통해전달) - P56

현재 우리가 교육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요원 개개인에게는 많은정보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 미국 기간 요원들은 이들로부터 첩보를 얻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요원 가운데 50명은 지난해 한국또는 일본 점령지역 곳곳에서 제각기 다른 시간대에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65퍼센트는 일본군에서 탈출했습니다. 이들이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전략적 · 전술적 정보의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이들로부터 끌어내려면 현재의 제한된 미군의 인력으로는 매우 더딜 것입니다.
(싸전트 대위보고서) - P61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일본과의대결에서 달성하게 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한국혁명(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한국 국내외에서 대일 파괴 활동과 게릴라전 등 갖가지 대일항전을 벌여왔습니다. 때문에 세계의 다른 어느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조직은 혁명과 파괴 활동에 대한 경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너반장군의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임정승인 요구) - P107

수산: 러치 부인, 제국호텔, 도쿄
발산: 이승만, 워싱턴 DC. 1946년 12월 14일
이 전문을 러치 장군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직접 문병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장군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저희는 장군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입법의원을 지명한 것은 실책입니다. 한국 국민은 그들을 직접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 사령관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겠다고 고집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좌익 입법의원들은 입법을 방해하고국민을 분열시킬 것이며 그 결과는 비참할 것입니다. 하지 사령관에게 제발 좌우합작 노력 중단을 명령하라고 조언하십시오. - P224

하지 사령관은 미국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온건우파와 온건좌파의정당 간 합작을 구축하고 과도입법회의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 자치정부 수립의 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한국 국민의 다수는 현실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좌우합작은 지난해 10월 초 발표되었으며 지난 12월 과도입법의원 구성을 위한 선거가 치뤄졌습니다.
-1947.1.3. CIG 가 트루만에게 제출한 한곡의 실태 보고서 - P229

경찰이 정치에 개입해 선호하는 한 편을 지원하고 다른 편을 가해한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한국 경찰들이 목전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못 본 척하고, 실제 테러를 저지르지 않고 있다며 테러단체들을 묵인하고 있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불안과 미군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좌우합작위원회의 계획도실현될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한국 경제는 친일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친일파 처리에 관한 법이 법제화되어 시행되지 않는 한 조국을 위해헌신할 애국적인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리지만경찰 개혁이 이루어진 후에야 공정한 선거를 치를 수 있습니다.
-미군정 정치고문 로버트 키니의 정책 보고서 - P258

동아일보 1960. 2.17.
청천벽력의 비보에 전 국민은 경악
꿈속에 사라진 지도자, 야릇한 운명만을 원망또 한 사람의 자유수호자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민주당 대통령입후보자 유석 조병옥 박사의 급서를 알리는 외전은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대 비보였다.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꺼진 듯한 이 비보를 들은 국민들은 4년 전 해공 신익희 선생의 부보에 접했던 놀라움보다 더 큰경악과 실망을 맛본 듯했다. 수술을 받고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고 - P554

국에 돌아오면 민주투쟁에 감연히 나서 옥쇄도 불사하겠다던 조박사. (중략) 그를 이 나라 유일의 민주주의 수호자로 아끼고 우러렀던 학자 그리고 이름 없는 시정인(人)에 이르기까지, 기구한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그의 급서 비보에 여며 그지없이 슬퍼했다. - P555

2018년 1월 16일 <연합뉴스>
강북구청, 제주 4.3 민간인 학살책임 조병옥 흉상 건립 철회
서울 강북구청이 추진하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6위 흉상 건립사업에서 제주 4.3 민간인 학살 주요 책임자로 알려진 조병옥을제외하기로 했다. 제주 4.3 희생자유족회와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강북구청이 각계와 내부 의견 수렴을 거쳐 이같이 결정·통보해왔다고 16일 밝혔다.
제주 4.3 단체들은 조병옥 흉상 건립을 제외해달라고 그간 성명을 냈고 지난 10일에는 박겸수 강북구청장을 만나 해당 사업에서조병옥 흉상 건립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강북구청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명예를 선양하고 역사의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여운형, 신익희, 손병희, 이준 등의 흉상을 건립하기로 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병옥은 1947년 3·1절 기념 대회 도중 발생한 민간인 대상 발포사건으로 시작된 대규모 학살 당시 경찰 지휘 책임자 중 1명이다.
고성식 기자(제주 <연합뉴스>> - P556

여순사건이 발생한 사흘 뒤인 1948년 10월 22일 미군정 G-2정보보고는 그날 오전 10시부터 11시 15분까지 실시한 항공 정찰 내용을 기록했다.

5명에서 10명 규모로 그룹을 이룬 사람들이 여수 시내 곳곳을 오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여수항에는 약 200명의 군중이 모여 집회를 갖고 있고 건물 위에는 적기가 걸려 있습니다. 여수 시내 번화가에서 각각 10명과 12명으로 보이는 두 그룹의 반란군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으며 교룡리에서 흰옷을 입고 북한기를 들고 있는 50명의 사람들이 마을을 벗어나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순천 시내에서는 파란 제복을 입은 청년 150명이 - P576

번화가에 집결해 있으며 5명의 무장한 군인들 두 팀이 제각기 1열로 행진하고 있습니다.
순천역에 4개 소대로 짐작되는 약 200명의 전원 무장한 반란군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또 다른 200명의 병력들이 역과 철로 사이에 앉아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객차 8량을 단 기차가 보이는데 기관차 2량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천 시내 건물 곳곳에 북한기가 날리고 있고 어떤 집 마당에는 모두 흰옷 차림의 시체 5구가 목격되었습니다. 구례에서는 정부에 충성하는 국군 병력를 태운 차량 행렬이 막 남원 방향에서 구례에 도착했고, 구례 시내는조용합니다. - P578

10월 27일 오후 2시경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3개의 그룹으로 분리되어 각각 국방경비대의 경계 아래 억류되어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들은 반란군을 도운 혐의를 받는자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방경비대의 감시를 받으며 붙잡혀 있는 사람 중에는 반란군들에게 도움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보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관련조차 안 되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붙잡혀 있는 1,500에서 2,000명이 반란군 포로들이라는 것은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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