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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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우화집이다. 그러나 단순한 우화집이 아니다. 처음 '장자'를 읽으며 재미 있는 부분을 지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다. 과연 장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려할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에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강신주)을 함께 읽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강신주가 설명한 이야기는 '장자'라는 책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도 적었다. 어떻게 필부가 '장자'의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장자'를 완독하고 나서 장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강신주가 장자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텔레비젼을 잘 보는 성격이 아니라, 유튜브의 단편적 강의를 들으며 '강신주의 장자 수업1'을 읽기 시작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서 벗어나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강순주는 우리에게 던져줄까?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 독맥적 삶.

  영원한 자유인 강신주! 그는 여전히 자유를 말하며, 인문학자라면 자본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마마보이나 마마걸보다 무서운 국가 보이나 국가걸 혹은 자본보이나 자본걸이라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겁니다." -196쪽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일갈하는 강신주 조차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여러권의 책을 쓰는 것도, 그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면서 강의를 하고 벙커1에서 방청객들에게 자신의 책을 사서 보길 바라며 한 말들을 떠올린다면 그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10여년 전으로 기억한다. 대중강연에서 강신주는 '바람이 없으면 글라이드를 탈 수 없듯이, 자본주의라는 바람을 이용해서 우리는 살아가야한다.'는 말을 했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며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채근하는 그는 자본주의라는 감옥에서 '관념적 탈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문명화를 가축화라 지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사용하여 자본보이와 자본걸을 비판한다. 그런데, 과연 강신주의 말은 현실성이 있을까? 사실 자본과 국가라는 질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만약 벗어나고 싶다면 자연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다큐속 자연인들도 100%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은 매우 적다.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것들은 읍내로 나와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양봉이나 약초채집 등의 경제활동을 한다. 

  장자관련 서적을 읽으며 나의 가슴에서 남는 세속을 떠나는 방법에 관한 글이 있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은일하는 것은 최하급의 은일이고, 최고의 은일은 속세 속에서 은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글이다. 진정한 도는 산중에서 닦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인간의 고통을 고뇌하며 몸으로 닦는 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국가나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고 연대하며 우리의 국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이다. 부순다고 파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맘에 들지 않지만 고쳐나가고 변혁해 나가며 우리 사회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바람을 이용해서 창공을 날아가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야할까? 나는 '강신주의 장자수업'을 읽으며 '독맥적'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는 것은 척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가치입니다." -199쪽


  독맥(督脈)!!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숫타니파타'에도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독맥적 삶이 아닐까? 자본주의에 노예가 된자들이 유행에 따라가지 못한다며 나에게 핀잔을 주어도, 승진에 목을 매며 그 경쟁에 같이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경쾌하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독맥적 삶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스토커와 같은 삶보다는 그가 원하는데로 그에게 행해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나는 나의 길을 가야겠다.


2. 역사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강신주라는 철학자를 좋아하지만, 그가 말하는 논리의 근거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강신주는 철학뿐만 아니라 뇌과학과 인류학 분야의 많은 책들을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힌다. 그런데, 역사학 관련 서적은 많이 읽지 않는다는 인상을 그의 책에서 강하게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노예가 건설했다는 표현이다. 


  "파라오 한사람을 위해 돌을 나르는 수십만명의 노예들을 떠올려 보세요." -222~223쪽


  이집트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피라미드는 노예가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농민이 건설했으며 그 댓가로 맥주와 밀가루를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피라미드 건설은 농번기를 피해서 농한기에 일종의 뉴딜정책처럼 시행되었다는 연구결과를 강신주는 알지 못하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피라미드를 노예를 동원해서 건설했다는 잘못된 기록을 강신주는 아직도 믿고 있다. 강신주가 쓴 여러 책에서 피라미드를 노예들이 건설했다는 잘못된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강신주가 '농민도 어자피 노예이다.'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예와 농민은 엄격히 구분된다. 또한 농민을 노예로 여긴다 할지라도 대중을 위한 책에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농민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야했다. 물론 맘에 들지 않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강신주는 농경문화를 경멸하며 유목문화를 찬양한다. 억압과 지배의 문화가 농경문화라면 유목문화는 자유가 있는 문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웃이 마음에 안들면 천막을 걷은 다음 가축을 몰로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이웃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련없이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77쪽


  강신주의 설명 대로라면 농경사회에서는 이동할 수 없기에 이웃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유목사회에서는 이동할 수 있기에 분쟁이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일까? 유목민은 언제나 자유로이 떠나며 분쟁을 겪지 않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강신주에게 '유목민족 제국사'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유목민 조차도 혼자살 수 없다. 그들은 광활한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족을 형성한다. 쪼드나 강과 같은 가뭄과 홍수가 초원을 덮치며 가축들이 먹을 풀은 줄어든다. 가축의 배를 가르면 자갈들이 가득한 경우도 있다. 뜯어먹을 풀이 없다보니 배고푼 가축이 자갈을 먹은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와 가축에 비해서 한정된 초지를 두고 부족간의 피의 사투가 벌어지기도한다. 그러한 사투는 너무도 참혹하다. 강신주가 칭기즈칸이 칸으로 추대되기 전까지의 고난의 기록을 읽어보았다면, 유목민에 대한 낭만적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쌍한 강신주는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는 오류를 범한다.


  "유목국가들은 인간을 가축화하는 야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국가가 대부분 무문자 사회였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276쪽


  강신주는 유목국가들이 인간을 가축화하지 않는 근거로 '무문자 사회'라는 점을 제시한다. 이것도 엄청난 오류이다. 유목국가들도 문자를 만들었다. 돌궐제국도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고 돌궐문자로 쓰여진 톤유쿡 비석이 발견된 사실이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란에는 거란문자가 있었고, 여진에는 여진문자가 있었으며, 서하에는 서하문자가 있었다. 유라시아 대제국을 세운 몽골에는 파스파 문자가 있었다. 부족간의 치열한 죽고 죽이는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부족을 통일한 유목민을 국가를 세우고 자방을 정복해 나아간다. 그리고 문자를 만든다. 유목국가가 무문자 사회였다는 강신주의 낭만적 역사관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그의 공상이다.

  강신주에게 말하고 싶다. 역사를 여행자의 시선에서 보지 말라!! 커피에 우유를 부어 마시는 비엔나 커피를 여행자는 낭만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커피와 우유를 마쉴 여유가 없는 마부는 한손에 고삐를 쥐고 다른 한손에 커피와 우유를 들 수 없기에 커피와 우유를 섞어 마셨다. 비엔나 커피는 여행자에게는 낭만적인 모습이지만 마부에게는 고단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이 묻어있는 현실이다. 강신주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유목민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유목민이되어 유목민의 삶을 바라보길 기대한다. 

  강신주의 많은 글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는 나이지만, 때로는 그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특히, '수주대토' 고사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절대 동의 할 수 없다.


  "송나라 사람이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단순히 전통이나 통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사건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그가 옳다고 판단한 자신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한비자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 송나라 농부를 잘못 읽어냈습니다. 송나라 농부는 고지식해서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중략) 일회적 사건을 일회적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끌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과감히 적용합니다. 평범한 바보나 멍청이는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창조적인 과학자나 비판적인 지식인만이 그렇게 할 수 있죠. 송나라 출신들은 주어진 관념이나 상식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 162쪽


  과연 그럴까? 상식과 관념은 현실을 살아가는 일차적 지식이다. 이에 기초해서 사유했다면 일회성 사건을 일반적 법칙으로 오인해서 나무그늘에서 늘어져 쉬면서 어리석은 토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부의 행위는 경쾌하지도 과감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숩고 무모해보일뿐이다. 강신주가 사건을 달리보려는 시도는 좋아보인다. 그러나 상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맞대로 평가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못내 불편하다. 역사를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보아야하듯이, 기존의 상식들도 과연 그러한지, 타당성이 있는지 냉철할게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



  책을 덮었다. 책을 읽고 나의 머릿속에 남는 한귀절이 있다.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310쪽)라는 혜시의 말이다. 물론 장자는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애절한 상황, 그리고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경이로운 상황에서 벗어니지 말고, 이러한 상황에 따르라"(314쪽)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혜시의 말을 따르고 싶다. 이 순간 만큼은 타의 탄생과 함께 나의 세계가 열렸으니, 나의 세계와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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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코 2024-05-2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 문해력이 꼴찌인 이유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구나

2024-05-20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
한용운 지음, 이성원.이민섭 옮김 / 필맥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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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이라니!! 만해 한용운을 김관호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한용운은 '정선강의 채근담'을 내어주며 이 책을 읽고 다시 오라고 말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그가 김관호에게 불교서적도 아니며 시집도 아닌 '정선강의 채근담'을 왜 내주었을까? 아마도 식민지 조선이라는 어둠의 터널을 걸어가며 흔들리지 않고 조국 독립의 길을 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채근담을 통해서 얻길 바라지 않았을까? 수많은 채근담 번역서가 있다. 그 중에서 '한용운의 채근담 강의'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국 독립이라는 뜻을 꺽지 않고 당당히 나아간 한용운의 마음을 채근담을 통해서 만나고 싶다. 


1. 무엇이 그를 채근담으로 이끌었을까?

  고전은 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민이 있을 때 접한 한줄기 글귀가 나를 덮고 있는 고민덩어리에서 해탈케한다. 식민의 고통을 겪었던 만해 한용운에게 어떤 채근담의 글귀가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친일파들이 난동을 벌이고 있다. 매국노들이 나를 일제에 팔아 넘겼다. 을사오적과 일진회 세력이 활개를 치는 그 시대에 만해는 고민했을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승려로서 구도자의 삶을 살 것인가?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으로 살 것인가? 그 때 한용운은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걷어차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승려이면서 시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소명을 다한다. 아마도 그는 채근담의 다음 구절에서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隨時之內善救時 若和風之消酷暑, 混俗之中能脫俗 似淡月之映輕雲.

(시대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시대를 잘 구제하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무더위를 몰아내는 것과 같다. 세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세속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희미한 달빛이 가벼운 구름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다.) 84쪽


  칠흑같이 어두운 식민의 터널을 걷고 걸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시대를 잘 구제'하여 독립의 꿈을 이룬다면 이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와서 무더위를 몰아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 조선을 살면서도 조국 독립을 이루는 것은 '희미한 달빛이 가벼운 구름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지 않은가? 

  누구는 절망했고, 누구는 변절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현실과 굴복하지 않았다. 풀뿌리를 씹어 먹으면서도 자신의 올곧은 신념을 꺽지 않았다. 친일을 선택한 민족반역자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때 한용운은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짓는다. 그리고 집이름을 심우장이라했다. 아이가 소를 찾아 깨달음을 얻듯이 그도 자신이 추구하는 참된 진리를 찾아 긴 여생을 보내며 자신의 집을 심우장이라 지었다. 


貧家淨掃地, 貧女淨梳頭, 景色雖不艶麗, 氣度自是風雅. 士君子一當窮愁寥落, 奈何輒自廢弛哉.

(가난한 집의 마당을 깨끗이 쓸고 가난한 여인의 머리를 곱게 빗으면 외관과 외모가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품이 우아할 것이다. 사군자가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어찌 스스로 피폐해지고 해이해질 것인가) 290쪽

肝腸煦若春風 雖囊乏一文 還憐煢獨 氣骨淸如秋水 縱家徒四壁 終傲王公.

(마음이 봄바람처럼 따뜻하면 주머니 속에 먼지만 가득해도 오히려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동정하며, 기개가 가을 강물처럼 맑으면 사는 집이 사방 벽으로 간신히 바람만 막는 정도라도 왕후장상을 우습게 여긴다.) 118쪽


  비록 가난했지만 한용운의 마음은 풍요로웠다. 창녀의 화려함을 절개 있는 처녀가 부러워할리 없듯이, 친일파의 부귀를 한용운이 부러워할리 없다. '사군자가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어찌 스스로 피폐해지고 해이해질 것인가'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며, 오히려 변절한 친일파들을 '동정'하였을 것이다. 부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신념임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순탄할리 없다. 수없이 감옥에 갖히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했다. 순탄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어떤이는 그만 타협하고 편안한 삶을 살라고 그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때 한용운은 채금담의 이 귀절을 되새겼을 것이다. 


一念錯 便覺百行皆非 防之當如渡海浮囊 勿容一針之罅漏.

(한 생각이 잘못되면 백 가지 행동이 잘못된다. 이것을 예방할 때는 바다를 건널 때 쓰는 부낭에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게 하듯이 해야한다.) 18쪽

欲做精金美玉的人品 定從烈火中鍛來 思立欣天揭地的事功 須向簿氷上履過.

(순금이나 좋은 옥과 같은 인품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뜨거운 불 속에 단련되어야한다. 천지를 들었다 놓을 만한 업적을 이루기를 생각한다면 살얼음 위를 걷듯 해야 한다.) 16쪽


 조금의 타협도 용납할 수 없다. 식민의 바다를 건너는데 '부낭'에 '바늘구멍만한 틈'이 생긴다면 이는 곧 친일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순금을 '뜨거운 불 속에 단련'하듯이 자신의 이 고통도 자신을 단련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해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남긴다. 


  역사상 위대한 충국의 열사와 절개 있는 사람은 칼날을 밟고 뜨거운 피를 뿌리는 외롭고 고통스럽고 험난한 환경에서 나오고, 세상에 드문 영웅과 호걸은 구사일생의 어려움 속에서 생깁니다." 17쪽


  한용운은 앞으로 자신의 삶을 예견하듯이 해설을 달아 놓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칼날을 밟고 떠거운 피를 뿌리는 외롭고 고통스럽고 험난한 환경'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若果一念淸明, 淡然無欲, 天地也不能轉動我, 鬼神也不能役使我, 況一切區區事物乎! 

(생각이 청명하여 담당하고 욕심이 없으면 천지도 나를 흔들지 못하고 귀신도 나를 부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모든 사소한 사물이야 오죽하겠는가.) 160쪽


  그렇다. 조국 독립에 대한 '생각이 청명하여 담당하고 욕심이' 없기에 '천지도 나를 흔들지 못하고 귀신도 나를 부리지 못'한다. 그 누가 나의 곧은 지조를 꺽겠는가? 한용운의 피맷힌 포효가 느껴진다. 


2. 우리는 채근담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채근담이 만해 한용운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데 일조했다면, 우리의 마음도 단단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채근담에는 우리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주옥같은 글귀가 많다. 그 중에서 몇가지를 꼽아보자.


紅顏失志 空貽皓首之悲傷.

(젊어서 뜻을 잃으면 늙어서 슬픔만 남는다.) 44쪽


  청소년기에 수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자신의 능력에 회의를 품기도한다. 힘들어하는 이땅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이다. '젊어서 뜻을 잃으면 늙어서 슬픔만 남는다.'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라. 정면대결이 힘들다면 우회로를 생각해 보라. 

  패기가 있고 도전정신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적 경험이 적어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이러한 청년에게 들려주고 싶은 글귀가 있다. 


欺人者非福, 而受人欺者遇一番橫逆便長一番器宇, 可以轉禍而爲福.

(남을 속이는 것은 복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속임을 당한 사람은 한 번 속을 때마다 한 번 더 자신의 도량을 키워 화를 바꾸어 복으로 만든다.) 136쪽


  현명한 자는 실수로 부터 배우고, 멍청한 자는 실수를 반복한다. 타인에게 속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그래야 다시는 같은 이유로 속임을 당하지 않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잡상인에게 영어 교재를 강제 구매 당한적이 있다.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서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어리석은 일로부터 배워야한다. 그러한 배움이 쌓이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굳건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사회에 나아가서 여러사람을 만나다보면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士君子之涉世, 於人不可輕爲喜怒 喜怒輕 則心腹肝膽 皆爲人所窺, 於物不可重爲愛憎 愛憎重 則意氣精神 悉爲物所制.

(사군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에게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지 말아야 한다.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으면 남이 속마음을 샅샅이 엿보게 된다. 외부 사물에 지나친 애증을 품지 말아야 한다. 애증이 지나치면 의기와 정신이 모두 외부 사물의 지배를 받게 된다.) 64쪽


  나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나의 감정을 얼굴에 쉽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을 얼굴에 분명히 드러내어 대인관계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채근담에서는 나의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품지 말아야'하며, '외부 사물에 지나친 애증을 품지 말아야'한다. 이것은 인생을 현명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 가짐이다. 

  때로는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하늘이 운이 따르지 않을 때가 있다. 


 天薄我以福, 吾厚吾德, 以迓之  天勞我以形, 吾逸吾心, 以補之  天阨我以遇,吾亨吾道, 以通之  天且我奈何哉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주면 나는 나의 덕을 두텁게 하여 박한 복을 맞아들이고, 하늘이 내 몸을 힘들게하면 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힘든 육체를 돕고, 하늘이 나에게 액운을 내리면 나는 나의 도를 형통하게 해서 앞길을 열리니 하늘인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296쪽


  운명론적 삶을 거부하라! 채근담은 말한다. 사회의 일부 지도층 사이에서 역술인에 의존하는 자가 있다. 부적을 차고 다니고, 무속인이 쓴 글자를 손에 적고 다닌다. 자신의 삶이 떳떳하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가짐이 단단하지 않을 수록 역술에 의존하게 된다. 하늘이 나아게 나에게 복을 박하게 주면 나는 덕을 두텁게하고, 하늘이 몸을 힘들게하면 나는 마음을 편하게 할 것이며, 하늘이 액운을 주면 나는 도를 형통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인들 나를 어찌하겠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말인가! 운명에 나의 모든 것을 내 맡기기 보다는 나의 운명을 내가 만들어가자.

  내가 사회적 리더가 되었을 때는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져야할까? 채근담은 이렇게 말한다. 


我果爲洪爐大冶 何患頑金鈍鐵之不可陶鎔 我果爲巨海長江 何患橫流汚瀆之不能容納
(내가 큰 화로와 거대한 대장간이 되면 단단한 쇠를 녹이지 못할까를 어찌 걱정하며, 내가 큰 바다와 긴 강이 되면 내가 제멋대로 흐르거나 더러워진 강물을 용납하지 못할까를 어찌 걱정하리오.)


  리더가 될 사람은 그릇을 키워야한다. 그릇이 크지 않은자가 큰척한다면 마음에 큰 상처를 얻을 것이다. 나의 마음을 거대한 대장간으로 만들고, 커다란 바다와 긴 강으로 만든다면 때로는 치기 어린 아랫사람도 품어 안을 수 있다. 우리 자존감의 그릇을 키우자.

  나에게는 세상을 사는 젊은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실 정치에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절대 현실정치에 무관심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를 채근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居軒冕之中,  不可無山林的氣味. 處林泉之下,  須要懷廊廟的經綸

(관직에 있어도 산림 속에 사는 듯한 기질과 취미를 버리지 말아야 하고, 산속 샘가에 살더라도 반드시 조정에 있는 듯이 경륜을 품어야 한다.) 224쪽


  자연인으로 산다 할지라도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정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기를 바라는 자는 바로 독재자들이다. 로마의 황제들이 빵과 써커스 정책을 펼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 않도록했다. 너의 눈과 귀, 그리고 배를 채워줄테니 황제의 독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민화 정책은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으로 이어졌다. 성과 영화, 스포츠을 보면서 즐기면서 전두환 독재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기를 그들은 바랬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산림 속에 사는 기질을 버리지 말아야하듯이, 산속에 살더라도 반드시 나랏일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이것은 홍자성이 살았던 명나라 시기만의 교훈은 아닐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단순한 독립운독가가 아니다. 만해는 '고려대장경'을 낱낱히 열람하여 1000권을 선정하고 그 중 중요한 구절을 정선하여 번역했다.(1914)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정선 강의 채근담'을 집필했다. 그는 보통의 승려 이상의 능력과 실천력을 가진 분이시다. 중학교 시절, '님의 침묵'을 읽고 30여년이 지나서 그가 강의한 채근담을 읽었다. 채근담을 읽으며 자신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었을 만해의 뜨거운 열정이 나의 가슴속에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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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이)는 자신이 한 국가의 장관을 그의 가족과 함께 맨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극심한 불만감에 귀족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귀족이나 귀족의 혈통을 완전히 말살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가 자신의 장관들에게 같은 혈통의 왕자들보다도 높은, 국가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부여하려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생시몽 회고록

술탄들 중의 술탄이자 국왕들 중의 국왕이고, 지구상의 군주들에게 왕관을 나눠 주는 사람이며, 이 세상의 신의 그림자이고, 백해와 흑해의 술탄이자 최고 통치자이며, 루멜리아, 아나톨리아, 카라마니아의 최고 통치자인 내가 (중략) 프랑스 왕인 그대 프랑수아에게 전한다.
그대는 나의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중략) 그대는 그대를 구해 달라며 원군을 요청했다. (중략) 용기를 내고 낙담하지 말라. 우리의 영예로운 전임자들과 걸출한 조상들(신께서 그들의 무덤에 빛을 밝혀 주기를!)은 적을 물리치고그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들의 발자국을 따랐고 아주 강력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성채와 지역도 늘 정복해 왔다. 우리의 말에는 밤낮없이 안장이 얹혀 있고 허리에는 우리의 칼이 걸쳐있다.
-술레이만 - P128

만약 폐하께서 외국 무역을 금지하는 그 오래된 법을 폐지해도 안전하다는 데 만족하지 못한다면, 실험을 해 보기 위해 그 오래된 법을 5년에서10년 정도 유예할 수도 있습니다. 바라던 만큼 이롭지 않은 것으로 판명나면, 그 법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은 종종 해외 국가와의 조약을몇 년 정도로 제한한 다음, 희망에 따라 그 조약의 갱신 여부를 정합니다.
-페리가 가져온 필모어 대통령의 서한 - P211

1. 이 서약으로 "우리는 광범위하게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헌법과 법률의틀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세운다.
2. 심의회가 널리 설립되고 모든 문제가 열린 토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3. 모든 계층은 국가의 문제를 힘차게 관리해 나가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
4. 불만이 존재하지 않도록 문관과 무관은 물론 일반인들도 각자의 소명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5. 과거의 악습은 중단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공정한 자연법에 근거해야한다.
6. 황제 통치의 기초를 강화하기 위해 세계 전역에서 지식을 추구해야한다.
-메시지 유신 대관식에 서명한 5개조 서문 - P213

우리는 열강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나 어떤 진영에도 연루되지 않을 계획이다. 36그래야만 우리가 인도의 대의명분뿐 아니라 세계 평화의 대의명분에도 기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정책으로 한 집단의 열렬한지지자들은 우리가 다른 집단을 지지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모든국가는 외교 정책을 수립할 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다행히도 인도의이익은 평화로운 외교 정책과 일치하며, 모든 혁신적인 국가들과의 협력과도 일치한다. 필연적으로 인도는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국가들과가까워질 것이다.
-네루, 뉴 리퍼블릭, 1947 - P231

인도 대표단이 미국을 자극할까 두려워 소련 진영을 피했다면 터무니없고 현명치 못한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가 계속해서 비우호적인태도를 보이면 불가피하게 다른 곳에서 친구를 찾을 거라고 그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네루 - P232

우리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친공산주의나 반공산주의가 되는 것 외에는 확실한 입장을 취할 수 없습니까? 세계에 종교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것을 안겨 준 사상계의 대표자들이 이런저런 종류의 집단에 꼬리표를 붙이고 자신들의 소망을 실행에 옮기면서 가끔은 아이디어를 주는 이런저런 집단 주위를 어슬렁거려야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는 자존심이 있는 민족이나 국가에게는 가장 모멸적이고 굴욕적인 것입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훌륭한 국가들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 뒤 결국 이런식으로 굴욕을 당하고 비하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네루, 1955, 반둥회의 - P232

독일 국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이렇다. 만약 그들이 전쟁이끝난 뒤에도 세계 평화를 어지럽히는 데 관심이 있는 야심과 음모를 꾸미는지배자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다른 민족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밑에서계속 살아야 한다면, 차후에 세계 평화를 보장해야 할 국가들의 동반자로 그들을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윌슨 - P293

따라서 그리스와 터키를 포함한 서유럽 지역에서의 활기차고 독립적인정치 활동의 보존을 요구하는 대서양 해양 세력의 이해관계와 늘 불안한 유라시아 대륙 세력의 이해관계 간에 근본적 충돌이 유럽에서 발생할 것인데, 유라시아대륙 세력은 늘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추구해야하기 때문이다. 대륙 세력의입장에서 보았을 때, 대서양 외에는 안전하게 팽창을 멈출 수 있는 장소를발견하지 못한다..
-1945,케넌, 소련이 적으로 돌아설것 예상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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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에서 배우는 禪의 지혜 - 벽암록 종용록 무문관이 전하는 선사들의 가르침, 개정판
윤홍식 지음 / 봉황동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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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상사' 강의를 들으며 화두를 처음 접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화두를 접하며 '불교는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편견을 더욱 견고화 시켰다. 그러던중,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화두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강신주가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집필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강신주는 화두에 관한 책을 더 이상 펴내지 않았다. 화두에 관한 갈증이 높아갈 때 윤홍신의 책을 집어들었다. 과연 윤홍신은 나의 갈증을 풀어주었을까?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를 읽으며 가장 인상에 남는 간어는 '반조선'이다. 조선에 반역한다는 뜻일까? 아니다. 화두를 통해서 수행하는 방법에는 화두선과 반조선이 있다. 화두선이 선문답을 제3차의 입장에서 묻고 의심하며 화두를 풀어 깨달음을 얻는다면, 반조선은 스님의 대답을 듣고 곧장 자신을 돌이켜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윤홍신은 간화선이라고도하는 화두선 또한 반조선의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화두선만을 알던 나로서는 반조선은 더 어렵다는 선입견이 몰려왔다. 그러나, 윤홍신의 반조선은 화두를 어렵게 풀지 않는다. 강신주가 서양 철학의 개념을 이용해서 화두를 풀었기에 읽으면서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윤홍신의 반조선은 너무도 쉽게 설명하여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윤홍신이 풀이한 화두 중에서 '세존, 침묵의 설법'이 가장 인상적이다. 세존께서 법좌에 올랐다. 세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나무방망이를 쳐서 설법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 화두를 읽으며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생각났다. 음악에 조회가 있는 사람들은 존 케이지가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음을 '4분 33초'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비움이 있어야 새로움을 채울 수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홀에서 음악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가 소음이라는 이름을 붙이 소리들이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세존도 자신의 설법으로 가득 채워야할 장소를 비우셨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침묵을 듣도록하였다. 침묵의 설법으로 우리의 내면을 직시하고, 세존의 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릇은 비워 있어야 쓰임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눈을, 우리의 귀를, 우리의 생각을 비울 때 진리로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오조, 어느 것이 진짜 몸인가'에 대한 풀이도 인상적이다. 윤홍신은 이 화두를 풀이하기 위해서 '유설이혼기'라는 글을 소개한다. 장감이라는 청년이 천녀라는 여인과 도망가서 아이를 낳는다. 천녀가 마음의 병을 앓자, 장감은 장인집에가서 그간의 일을 설명한다. 그런데, 장감의 아내 천녀는 장인 집을 떠난적이 없단다!! 천녀는 모든 힘을 잃고 5년 동안 방에서 앓고 있었다. 장감이 아내를 데로오자 두 천녀는 하나로 합쳐졌다. 혼은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죽으면 땅으로 사라진다. 천녀의 혼백은 장감을 따라 갔지만, 육신은 집에 남겨져 있었다. 마치 뇌사에 빠진 것처럼.... 

  그렇다면 혼백과 육신 중에서 누가 천녀일까? 이러한 이분법적 질문이 잘못이다. 혼백과 육신도 천녀이다. 나의 손과 발이 나이듯이 말이다. 온전한 천녀는 육신과 혼백이 분리되지 않은 천녀이다. 

  그런데, 윤홍신은 의외의 설명을 한다.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 수 있는 자라야, 죽은 뒤에도 자유자재로 의생신을 나투며 온 천지의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이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이 진정 혼백의 주재권을 장악하고 지수화풍을 자유자재로 모이고 흩어지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398~399쪽


  지수화풍을 자유자제로 모이고 흩어지게 한다니? 살아 생전에 '혼과 백'을 자유로이 다스려서 육신을 여관방 출입하듯이 드나들다니? 정말 쌩뚱 맞다는 생각이든다. 도교의 도사들이 도술을 부릴 수 있다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는 혹세무민을 저지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21세기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도사 혹은 사이비 종교인들이나 할 것 같은 표현을 불교 서적에서 읽으니 못내 불편하다. 



  화두에 대한 갈증에서 읽기 시작한 책을 내려 놓았다. 강신주의 '메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쉽게 풀어쓴 윤홍식의 반조선이 묵직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강신주의 책을 읽기 전에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강신주의 화두 풀이를 듣기 전에 화두에 관한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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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어디다 대놓고 묻기 애매한
장웅연 지음, 니나킴 그림 / 담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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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은 디테일에 강하다고 한다. 불교관련 책을 좀 읽었지만, 불교에 관해서 잘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못하는 자신을 보며, 불교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체감할 뿐이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는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모아 놓았다. 정말 사소하지만 불교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다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모아 놓았다. 불교에 관한 책을 좀 읽었기에 목에 힘주던 내가 사소한 질문에 대답못하며 무너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한장 한장 재미있게 읽었다.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 중에서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것은 4가지 이다. 

  첫째,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라는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내세관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잣대로 한국의 무속 신앙과 불교를 살펴본다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절대자와 내세관이라는 기준은 서구의 기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잣대이다. 절대자가 없이도, 내세관이 없이도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종교가 될 수 있다. 무속과 불교가 바로 그 예이다. 특히, 불교는 철저히 신을 부정한다. 


  "불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로 완성되는 종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란 인간의 나약과 미망을 먹고 자라는 헛것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13쪽)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슨이 이말을 듣는다면 너무도 기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로 불교를 지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불안을 먹고 사는 타종교와는 달리, 당당히 스스로 성철하며 주인이 되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감동적인 가르침이다. 

  개인적으로 사찰에 가면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물론 심오한 불교의 이론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나의 생각과 일치하기에 불교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했던 것이다. 

  반면, 성당이나 교회에 가면 불편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 가서 방백을 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몹시 불편했다. 사이비 종교인을 만난듯이 너무도 불편해서 자리를 떴다. 신의 종이되라는 말도 몹시 불편했다. 인생을 주인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신의 종으로 살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신도를 노예로 만드는 종교보다는 모두가 주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불교가 우리를 더 가치있게 만든다. 

  둘째,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이다. 선생님들과 절에 갔던 기억이 난다. 한분이 "이곳은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인가봐, 조선의 숭유억불책으로 절이 산속에 갔다잔아"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한분이 "글세요. 불교가 원래 속세를 떠나서 스님들이 수도하는 산속에 있지 않나요?"라고 맞받아쳤다. 역사를 전공했다고 자부하던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열심히 불교 서적을 읽었지만, 절은 왜 산속에 많은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책속의 불교 지식을 흡수할 궁리만 했지, 당연한 것에 의문을 던지며 그 이유를 탐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절이 산속에 많은 이유는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때문이란다. 속세를 벗어나 수도를 하는 불교의 원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절이 산속에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여기에 풍수지리설이 더해져 마치 인체에 뜸을 놓듯이,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 절과 탑을 세웠다. 여기까지 읽고 조선의 숭유억불책 때문에 절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웅연은 절이 산속에 많은 마지막 이유를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라 말한다. 그랬구나! 불교의 탈속주의와 풍수지리, 여기에 조선의 숭유억불책이 더해져서 절이 산속에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으로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을 꼽고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숭유억불책은 부차적 원이으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사찰들이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된 것들임을 떠올린다면 사대부들은 숭유억불을 했을지 몰라도 서민들의 삶속에 불교는 녹아들어 있었다. 

  셋째, "천도제인가, 천도재인가?"라는 주제는 제와 재의 심오한 차이를 깨닫게해주었다. 


  "불교에는 '재'만 있지 '제'는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는 조상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고 싶다는 일종의 투자에 가깝다. 이와 반대로 재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비우겠다는 다짐이 먼저다. 아울러 제사상은 여인들의 명절 증후군을 발판 삼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리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잿밥은 맨밥이어도 괜찮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눈물을 닦아 줄 수만 있다면."(233쪽)


  유교의 '제'가 조상의 음덕을 바라며 지내는 것이라면, 불교의 '재'는 죽은자와 산자 뿐만 아니라, 짐승을 포함한 만물을 위해서 지낸다. 불교의 하해와 같은 만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러한 심오한 차이를 알기나 했을까?

  넷째,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저자 장웅연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단지 '밀린다왕문경'의 메난드로스 왕과 학승 나가세나의 문답에 제시한 논리를 제시해주었다. 


  "촛불은 금방이라도 꺼뜨릴 수 있지만, 한 촛불이 다른 촛불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촛불이라는 '존재'는실체가 없으나, 촛불이란 '현상'은 영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74쪽)


  '밀린다왕문경'을 소개하면서도 저자 장웅연은 '딱히 결론이 없는 주제'라고 얼버무린다. 그러나, 나는 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별이 폭발하면서 많은 원소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원소들은 우리몸을 이루는 일부분이 되었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면, 사람의 육신을 이루던 원소들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음식물을 통해서 다시 사람에게 흡수된다. 우리의 원소는 과거 수많은 위인들의 몸을 이루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원소는 미래 새로운 세대의 몸을 이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윤회한다. 불교의 윤회는 과학적으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책의 49가지 질문에 완벽히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이 몇펴센트있을까? 교사인 나에게 불교의 심오한 이론을 묻는 학생은 거의 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해야하는 역사교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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