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대화편 - 개정판
플라톤 지음, 최명관 옮김 / 창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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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사실은 그가 하지 않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법철학'이라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한다."라고 쓴 것이 마치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와전되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을 비롯한 수 많은 선생님들이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며 '악법도 법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관성이되었다.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며 독약을 먹었다."는 내용이 준법사례로 적절하지 않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들었을까?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집어들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의 일련의 사실을 알 수 있는 내용들로 이 책을 구성했다.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편'은 크게 5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첫번째 에우튀프론은 '경건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과 경건에 대해서 대화를 한 내용을 서술했다. 그러나, 첫번째 장에 에우튀프론을 배치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그리스 청년들을 일깨워주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기 위해서 배치한 글이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게 "자네 일로 알고 생각해 주게, 그런 전제 아래 자네가 약속한 대로 나를 잘 가르쳐 줄 수 있는지 말이야.(25)"라고 말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긴다. 그러나 대화의 주도권은 사실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치밀한 계산 아래 에우튀프론에게 질문을 하고 스스로 대답하도록 한다. 에우튀프론이 스스로 진실을 말하게 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게 했으며 이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도록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설득의 심리학을 알고 있었다. 타인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면 진실을 가르쳐 주기 보다는 스스로 진실을 말하도록 해야한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나로서는 문답법으로 학생을 깨우치는 것이 얼마나 큰 내공이있어야하며, 얼마나 큰 인내가 있어야하는지 잘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내공이 느껴진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일본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번역했기에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 자신에게 알맞게 오역을 했다. 천황중심의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서구의 양심 있는 사상을 왜곡해서 들여왔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변론''변명'이라 오역했다. 국가가 시키는 일을 거부하고, 국가와 당당히 맞서며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행동과 말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은 '변론'이라고 번역해야 타당하다.

소크라테스가 살고자 했다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탈옥하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만약 그가 살고자 했다면 유죄판결을 받고 나서 자신이 받을 죄값으로 "프로타네이온에서 향응을 받는 것 이상 어울리는 것이 없습니다."(79)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운자나, 올림피아의 우승자를 위한 잔치가 벌어지는 프로타이네온에서 향응을 베풀어 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많은 그리스인이 반대표를 던졌다. 소크라테스는 보통 사람들이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과는 달리 죽음과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아테네의 재판 결과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법에 순응하는자가 아니라, 법을 뛰어 넘은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음과 맞서려한 초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 그는 죽음과 맞서려했을까? 그 이유를 나는 세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장자'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시집을 가기 싫어했던 처자가 시집을 가고 나서는 너무도 좋아서 친정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장자는 이에 빗대어 우리의 죽음도 이러하지 않겠는가?’라며 질문을 던진다. 장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서양의 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죽음은 사람에게 가장 큰 선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죽음이 가장 큰 해악임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무서워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지가 아니겠습니까?"(65)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파이돈'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죽음으로서 여러 위인들과 만나서 철학적 대화를 나눌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가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죽음이 오히려 행복한 일일 수도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추론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기쁘게 죽음에 다가갔다.

둘째, 완벽한 철학적 사유를 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지 않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영혼은 육체를 떠나될 수 있는 대로 육체와 상관하지 않을 때,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을 전혀 갖지 않고 참으로 존재하고자 추구할 때 가장 잘 사유하게 되는 거야."-파이돈, 129

 

영혼이 육체를 떠나 육체와 상관하지 않을 때 가장 잘 사유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으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때에야 비로소 가장 잘 사유할 수 있다는 극단적 사고에 이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육체를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쾌락과 고통은 못과도 같아서, 영혼을 육체에다 넣어 결부시켜 마침내 육체와 닮게 하여 육체가 옳다고 하는 것을 같이 하기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지. 그리고는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게 되어 세상을 하직할 때에 절대로 깨끗해지는 법이 없고 하데스에 깨끗이 갈 수 없으며 언제나 육체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지."- 파이돈, 162

 

영혼이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게 되면 절대로 깨끗해지는 법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는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영혼은 깨끗한 것이고, 육체와 어울려 똑같은 습성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눈과 귀와 같은 신체 감각을 통해서 얻는 정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눈이나 귀나 아니 온 신체는 영혼과 관계하여 영혼이 진리와 지혜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고 보고, 가능한 한 이런 것과 관계를 끊고 이런 것에서 벗어난 사람이야말로 참 존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파이돈, 130

 

신체가 진리와 지혜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라틴어 아식스(ASICS)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대 뇌과학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로만 보더라도 정신과 육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 신체의 특정 부분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부분을 담당하는 뇌영역이 퇴화한다. 반면 새로운 운동을 배우면 뇌에서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된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임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원론적 사고관에 빠져 영혼은 고귀한 것이고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육체라는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보다 자유로운 철학을 하기 위해서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셋째, 불의에 맞서는 투사로서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철학자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유약한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에 비하면 철학자는 약한자 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힘이 없다고, 그의 정신 세계마져 유약하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운 경험이 있는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으며, 위대한 철학자였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자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에게 아킬레우스를 예로들며 영웅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며 배심원들과 자신을 고발한 자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심지어는 "저는 몇번 죽음을 당한다해도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67)라며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협박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보인다.

 

"저는 투옥이나 사형을 두려워하여 옳지 않은 일을 제안하고 있는 여러분 편이 되느니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법률과 정의의 편을 들어야 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소크라테스의 변론, 71

"여러분, 어려운 것은 죽음을 면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비열함을 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비열함을 죽음보다 발이 빠르니까요."-소크라테스의 변론, 83

 

훌륭한 전사는 전쟁터에서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듯이, 옳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고발하고, 유죄를 선고한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목숨을 구걸할 의사가 없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부러질 지언정 굽히지 않는 당당함으로 그들과 대결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오히려 죽음이 나를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의 철학을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려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 오다카 도모오는 '법철학'이라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한다."라고 적었을까? 1930년대 일본은 전체주의 광풍이 휩쓸고 있을 때였다. 국가가 결정하며 질문을 하지 않고 따라야했다. 집단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죽음 조차도 나의 신념을 꺽을 수 없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다면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소크라테스의 본뜻을 무시하고 "악법도 법이다."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으며, '소크라테스의 변론''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오역했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명령에 저항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변명'으로 들려야만했다.

그리고 이 논리를 받아들인 독재자들은 교과서에 이 논리를 그대로 옮기며 자신들이 만든 악법을 충실히 따르라고 국민들에게 세뇌했다. 특히 도덕 교과서에서 윤리 교과서에서 반복해서 가르쳤다. 교과서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내용이 삭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독재자들의 논리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불쌍한 노예들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저승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며 통탄할 것이다.

크리톤이 감옥에서 편히 잠자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다. '파이돈'편에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는 편히 저세상으로 간다. 그런데, 갑자기 '향연'이 이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상관 없는 에로스에 대해서 아가콘의 집에서 연설을 하고 토론을 했다. 매우 낯설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상관없는 '향연'을 맨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우튀프론'이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도중에 에우튀프론을 만나 경건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떠한 방식으로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깨우쳤는지를 보여주었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는 것이 부당함이 서술되었다며, '크리톤'을 통해서 탈옥을 거부하며 당당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그의 마지막 모습을 독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향연'이 펼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플라톤이 '향연'을 맨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철학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돋보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특히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얼마나 찬양했던가! 아마도 이는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내용이 보태어졌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었으나 그는 영원히 인류의 가슴속에 살아남았다. 플라톤의 가슴 속에서 살아남아 아리스토텔레스로 그 생명력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죽더라도 어떻게 죽음을 맞아하는가에 따라서 그는 우리 가슴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도 있고, 잠시 타올랐다 꺼지는 촛불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자들과 유죄를 선고한 배심원들에게 당당히 맞섬으로써,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해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크라테스를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행동이며, 우리 스스로를 독재자의 노예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다. 스스로 노예의 길을 선택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는 없다. 나는 말하고 싶다.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그 누구도 당신을 노예로 삼을 수 없도록, 지혜의 횃불을 들고 깨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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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강나루님 *^^*

강나루 2022-07-09 12:21   좋아요 1 | URL
mini74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7-08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님^^
기분 좋은 기쁜 시간 되세요.^^

강나루 2022-07-09 12:20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7-10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많은 사상이 제자 플라톤에 의해 정리되었기에,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곧 플라톤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실 이들의 사상을 구별하기 쉽지 않은 듯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세하나마 작은 차이도 있을 듯 합니다. 강나루님의 글을 읽으며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는 것과 행위를 하나로 보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추상적인 수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구현가능하다면, 소크라테스는 이를 지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죽음을 향한 그의 여정이 그러했듯이요. 반면, 플라톤 <국가>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동굴 밖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죄수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러한 방향성에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작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강나루 2022-07-10 10:2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이해가 깊네요^^ 많이 배움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0 10:3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정확하지 않은 개인의 생각입니다. 강나루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러블리땡 2022-07-09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2-07-10 10:24   좋아요 0 | URL
러블리땡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7-10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강나루 2022-07-10 10:25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2-07-10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7-11 05:39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bookholic 2022-07-10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주말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늘 좋은 글과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더운 여름, 마음만은 늘 뽀송뽀송 시원하시길...

강나루 2022-07-11 05:40   좋아요 0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scott 2022-07-11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 달의 당선 축하 드립니다
자주 리뷰 올려 주세요 ^ㅅ^

강나루 2022-07-11 05:42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행복하게 보내세요.
 
숫타니파타를 읽는 즐거움 - 보경 스님의 친절한 해설
보경 스님 지음 / 민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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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타니파타를 처음 알게된 것은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의를 통해서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읽어주는 숫타니파타의 글귀는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탕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 처럼

 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쪽


  숫타니파타를 읽기 전서부터 나의 가슴을 울렸고, 지금도 숫타니파타의 이 구절처럼 나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ebs 강의를 듣고 언젠가는 숫타니파타를 읽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 대한 울렁증이 있어 쉽게 시작을 하지 못했다. 불교라는 거대한 철학의 바다를 건너기에는 나의 역량이 너무도 작았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19로 가족이 힘들어하고 있다.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숫타니파타가 필요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숫타니파타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대중을 위한 강설이라기 보다는 구도자의 길을 가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는가를 친절하게 강설하는 내용이다. 그러하기에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문장은 찾기 힘들었다. 아니, 일반 대중들에게도 좋은 글귀이지만, 이미 불교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탐욕과 집착을 벌리고 선한 삶을 살아가라는 내용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때 마라(파피만)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로 인하여 기뻐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로 인하여 기뻐한다. 

   사람이 집착하는 바탕은 기쁨이다. 

   집착하는 바탕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기쁜 일도 없으리라.


  스승이 대답하셨다. 

   자녀를 가진 사람은 자녀로 말미암아 걱정하고,

  소를 가진 사람은 소로 말미암아 걱정한다. 

  참으로 사람이 집착하는 바탕은 근심 걱정이다. 

  집착하는 바탕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일이 없다. "-25쪽


  보경 스님은 부처님의 말이 옳다고 강설하셨다. 출가자 혹은 구도자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속세를 살아가야하는 중생들에게는 마라의 말도 옳고 부처님의 말씀도 옳다. 자녀를 기르며 자녀가 건강히 자라기를 바라며 걱정한다. 또한 자녀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기뻐한다. 자녀에 대한 집착은 고통인 동시에 행복을 가져다준다. 자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면 고통이 심해지고, 자녀에 대한 무관심은 자녀를 불행하게 한다. 자녀에 대한 건강한 거리를 두고 건전한 사랑을 준다면 자녀도 행복하고 부모도 행복하다. 집착을 버릴 수없는 속세인들에게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지혜를 갖는다면 집착도 행복으로 만들 수 있다. 

  숫타니파타의 글은 출가자를 위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기에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는 거리감이 있는 내용도 있고, 불교에 대한 상식적인 말들로 채워져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숫타니파타에 보경스님이 붙여놓은 해설은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중세 아랍시인 루미에게 수피 한사람이 경전을 읽는 것이 유익한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 대답이 걸작이다. 


  "그대 자신이 그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더 나을 것이오."-106쪽


  자신이 경전의 말씀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경전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의 말씀을 담을 그릇이라면 그 경전은 너무도 큰 기쁨을 줄 것이다. 어디 경전뿐이랴, 세상의 어느 책이든 매한가지가 아닐까? 가벼이 초기 불교의 맛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숫타니파타를 추천한다. 이왕이면 보경 스님처럼 좋은 해설을 덧붙여주는 분의 책을 읽기를 권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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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1-11-10 18: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의 불교 강의는 약 20년 전의 그 불교강의를 말씀하시는건가요?^^
저도 그 강의를 재미있게 보고 법정스님께서 옮기신 <숫타니파타>과 <법구경> 읽었던 기억이...
소개해주신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강나루 2021-11-10 18:41   좋아요 3 | URL
네 맞아요.
그때 생각보다 시청율이 안나와서 강의를 오래하지는 못한 걸로 알고 있어요.

붕붕툐툐 2021-11-10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 싶어용!!

강나루 2021-11-11 06:05   좋아요 1 | URL
명상하듯 읽으실 수 있어요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3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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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치 니체처럼 기독교는 도올 김용옥이 뛰어 넘어야할 커단란 산줄기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자에게 강한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기독교 연구에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니체가 '안티크리스트'라는 책을 쓰면서 참된 크리스트인이 되기를 촉구했듯이, 도올 김용옥은 수많은 크리스트교 저작을 통해서 참된 크리스찬은 어떠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는 이런 점에서 도올 김용옥의 탁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2권에 이어서 3권을 1년 이상 읽었다. 하루에 한장 혹은 일주일에 한장, 그것도 안된다면 1달에 한장을 읽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제 그 대장정을 마친다. 

  도마 복음은 예수의 언행이 이루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모아 놓았기에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문헌이다. '논어' 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어떠한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도올을 통해서 내가 얻은 진리를 소개하겠다. 


1. 우리 모두 길잃은 양이 되자. 

107장

 Jesus said,  (중략) "One of them, the largest, went astray. He left the ninety-nine and sought the one until he found it. After he had gone to this trouble, he said to the sheep, 'I love you more than the ninety-nine."(예수께서 가라사대, (중략) 백마리 중에 가장 큰, 그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났다. 목자는 아흔아홉마리를 버려두고 그 한마리를 찾을 때가지 헤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를 끝내었을 때, 목자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아흔 아홉마리보다도 너를 더 사랑하노라!'


  크리스찬들은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길잃은 양으로 비유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이야기가, 도마복음에는 놀랍게도 길 잃은 양에 대한 칭찬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중의 무리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양들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져서 방황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하는 큰 양을 예수는 더 사랑했다. 무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하는 모습은 청소년 시기, 자신의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학생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미운 7살, 방황하는 청소년 시기에 뇌가 발달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말안듣고 속썩이는 말썽장이 자식의 모습이겠지만, 사실은 도마 복음에서 사랑받는 커다란 양의 모습이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는 말하고 있다. 99마리의 양들처럼 순응하고 도전하지 않는 삶보다는 도전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  모험을 즐겨라! 


2. 천국은 이땅위에 있다.  

113장

  His followers said to him, "When will the kingdom come?" "It will not come by watching for it.  (중략) Rather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upon the earth, and people do not see it."(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중략)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51장 (전략) "What you look for has come, but you do not know it."(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뿐이니라.)

52장 (전략) "You have disregarded the living one who is in your presence and have spoken of the dead"(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 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구나!)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면서 죽어서 천국가려면 교회나오라고 말한다.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라는 그들의 말이 나에게는 강한 반감을 주었다. 내새를 위해서 현새를 희생하라는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개똥받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처럼, 저승보다는 이승에서 행복한을 추구하는 것이 값지지 않을까? 

  그런데, 도마 복음속의 예수님은 철저히 현세에 천국이 있다고 강조한다. 천국이 언제 올 것이냐는 추종자들의 말에,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거룩한 말인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서 헤메지만, 파랑새는 남매 곁에 있었다. 단지 파랑새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도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물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이 땅위에 깔려 있지만, 단지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할 뿐이다. 

  대학에 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니 취직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취직하니 결혼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결혼하니 아이가 다 자라면 행복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우리를 보고 나이드신 할머니분들은 "저 때가 행복할 때인데, 그때는 몰랐어"라는 말을 하셨다. 맞다. 행복은 지금 우리 옆에 있다. 단지 우리가 행복을 몰라볼 뿐이다. 내세이서, 다음생에서, 지금 이순간이 지나고 나서 행복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버리자. 행복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3. 일부 눈먼 목사를 위한 조언 

34장 

Jesus said, "If a blind man leads a blind man, both of them will fall into a pit"(예수께서 가라사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서울의 어느 목사와 신도가 신자들을 현혹시켜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결국 코로나 19가 유행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언론 보다가 연이어서 등장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자'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신도들을 코로나19 감염의 위험속에 빠뜨린 눈먼 목사와 눈먼 신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자신의 눈으로 성경을 읽지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눈먼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구덩이에 빠지는 눈먼자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눈물흘리지 않을까?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31장

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a doctor does not heal theose who know the doctor."(예수께서 가라사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이 말은 너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녀석들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렸을 적 그대 그대로의 내가 지금도 계속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의 이 사람이 미래에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의 이사람이 과거에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엄청난 시간 속에서 잠시 만난 일부분이 그사람 이생의 전부인냥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와 탁월한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러니컬한 일들이 벌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지금 만난는 이 사람도 그사람의 인생속에서는 한낱 찬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그사람의 변화가능성, 성장가능성을 인정하자.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해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도 이해되지 않아서 이해하지 않은 채로 넘긴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01장의 내용이다. 


  "Whoever does not hat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and whoever does not lov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For my mother gave me falsehood, but  my true mother gave me life."(내가 증오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지아니 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나의 엄마는 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된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101장의 내용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긍정할 수 없는 표현이다. 도올 김용옥은 "세속적 엄마가 문자 그대로 거짓을 준다는 뜻은 아닐것"이라고 설명했지만, 101장의 예수님 말씀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른 문화권에서 단편적인 말씀만이 기록되어 있는 도마복음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라는 백사장에서 나의 인생을 함께할 조약돌 한두개를 주었다면, 나름 의미있지 않은가! 그래, 도마 복음과의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 이제 새로운 책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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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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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공기의 사랑"!! 이보다 적정 사랑을 잘 표한한 말이 있을까? 사랑이 고픈 이에게 한 공기의 사랑은 가장 최적의 사랑이다. 한공기의 사랑마저 받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방황한다. 한 공기를 넘어 두공기, 세공기,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준다면 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된다. 저자 강신주는 철학 강의를 하면서 철학의 원래 뜻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이중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수차례의 강연과 그의 저서를 통해서 강조해왔다. 이제 그 결정판이 나왔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불교철학을 기반으로 김선우 시인의 시 8편을 캐스팅해서 강신주만의 설명을 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학교 현장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사랑'이 부족해서, '사랑'이 너무 넘쳐서 발생하는 학교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교사 다락방 "독서와 수업 사이"에서 이 책을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그럼, 한공기의 사랑을 맛보러 가보자.

 

1. 사랑의 매는 존재할까?

일체개고(一切皆苦)! 사람은 태어났기에 고통을 겪는다. 삶이 곧 고통이라는 이 말은 불교를 염세주의적, 비관주의적 종교로 착각하기 만들기 좋은 단어이다. 저자 강신주는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처럼, 고통 뒤에 행복을 배운다고 말한다.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고파진다. 배고픔의 고통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한 공기의 밥을 먹는다. 한 공기의 밥은 잠시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할뿐, 영원히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수많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을 완화하면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한 공기의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듯이 말이다.

현실은 행복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천국이라 호도하지 말자!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희망과 사랑을 품자! 싯다르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고통의 현실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우리는 공감이라한다. 저자 강신주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이이라면 '사랑의 매'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폭력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개발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주변에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그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에 나 자신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동료 교사의 고통을, 학생들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면 폭력을 합리화하는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행복과 자비와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 학교 현장에서 진정한 교육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에서 출발해야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2. 지는 꽃은 가치가 없을까?

학생들 중에는 유독 청소를 싫어하는 녀석이 있다.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 청소해요?"라고 묻는 학생에게 나는 말한다. "너는 어차피 배고플 텐데 왜? 밥을 먹니?"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표현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소멸하기에 모든 일은 부질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염세주의이다. 변하기에, 영원하기에 우리는 지금 이순간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저자 강신주는 '조화''생화'를 예로 든다. 생화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조화는 이상화된 천국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천국을 좋아한다. 천국이라는 논리에 매몰되어 오늘을 천국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당신은 조화와 생화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화보다는 생화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참다운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우리 속담이다. 지극한 행복만이 있어 지지 않는 꽃만이 존재하는 천국보다는 힘겹게 꽃망울이 터지더니 활짝 핀 꽃이 행복하게 하늘거리는 현실이 좋다. 그리고는 이내 꽃이 떨어진다. 떨어질 꽃이기에 지금 활짝핀 지금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애절해 보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해야한다.

아파마데나! '올바른 자각' 혹은 '올바른 지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래,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바라고 소중하게 간직하자! 작년에도 나는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냈다. 올해도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내년에도 학생들과 함께 일 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학생과 올해의 학생은 다르다. 올해의 학생과 내년의 학생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난 학생은 내생에 유일한 올해 나의 제자들이다. 이들과 만나는 올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자!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 파티", 이 순간을 잡으라는 뜻의 "카르페디엠"이라는 단어가 우리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우리 세상의 유한함과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은 우리에게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오늘 만나는 모든 이는 소중하다.

 

3. 교칙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할까?

'제법무아(諸法無我)'!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이 개념을 강신주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일화로 설명한다. 추운 겨울 혜림사에 단하스님이 묵게 되었다. 너무도 추워 단하스님은 목불을 도끼로 쪼개어 땔감으로 만들었다. 단하스님이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본 혜림사 스님은 화를 냈다. 그러자 단하스님은 "이 부처에 사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고 태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혜림사 스님은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라고 내뱉었다. 그렇다. 목불은 나무일뿐 부처가 아니다. 목불에는 '자성'이 없다.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단지 수많은 인연들이 얽혀서 이루어진 관계일 뿐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고, 아들에게는 아들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그렇다면, 학생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학생을 위해서 만든 것이 학교의 교칙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을 위해서 만든 교칙이 본래 의도를 벗어나 학생이 교칙을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여학생의 교복 치마에 치맛주름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교칙은 학생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칙을 위반하는 일이라고 단속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복변형을 금지시키는 교칙을 위반했으니, 학생부장이 아침부터 열심히 여학생을 지도해야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면, 교칙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으며, 교복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교칙도 교복도 학생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학생이 교칙과 교복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교복 변형이 문제라면, 불편한 교복을 후드티와 같은 학생이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으로 변경하면 되지 않을까? 실재로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입는 후드티를 교복으로 정해서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은 사례가 있다.

여기서 나는 전율을 느낀다. '제법무아'라는 단어는 우리 교육현장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었다.

 

4.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바보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세상의 근심 걱정도 알지 못하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먹을 것이 자신의 입에 들어오면 마냥 행복한 바보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나의 질문에 저자 강신주는 원효 스님을 소환한다. 원효는 고요한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부르고 요동치는 마음을 '생멸문'이라 부른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혹은 내부의 욕망에 의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면, 모든 갈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원효는 생멸문을 두개로 나눈다. 미숙한 생멸문과 성숙한 생멸문이 그것이다. 미숙한 생멸문은 나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이에 반해서 성숙한 생멸문은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내부의 욕망과 집착으로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생멸문을 거쳐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며 나뭇잎에도 파문이 이는 잔잔한 물처럼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진여문에 제대로 도달한 싯다르타는 다시 생멸문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스스로 파계승의 길을 선택하고 속세로 나아간 것이다.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고고한 것처럼 보이는 교사가 너무도 험한 일을 많이 당한다고 절망할 때가 많다. 전두엽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고, 변연계가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충동적인 고등학생을 상대하다보니, 논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운 자녀를 교사가 혼냈다고 막말을 해대는 막무가내식의 학부모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속세의 때를 벗어 던지고 산사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속세의 때가 싫어 산사를 찾는다면 싯다르타는 아마도 나를 혼낼 것이다. 강신주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부처는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아파하고 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이다."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중생을 외면할 수 없다. 속세의 때가 없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깨달았다면 다시 속세로 나와야한다. 참다운 깨달음의 방법은 때가 가득한 속세에서 깨닫고 부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말한다. "자비가 아니라면 불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와 같은 서양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에 만족하지만, 불교는 인연, 연기 등의 이론적 틀로 "자비"를 실천하라 말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5. 나쁜 인연에 대처하는 법은?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다. 다음해에는 그들과 만나기 싫기에 그 학생들과 함께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강신주는 나쁜 인연을 만나면 다시 수평선 너머로 배를 몰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나쁜 인연에 길들여진 존재는 나쁜 인연에 안주하게 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쉽게 길들여진다. 나도 나를 괴롭히는 인연을 쉽게 단절해버렸다.

 

그런데, 교사라는 직업은 반전의 연속이다.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학생과 학부모가 다음해에, 혹은 2~3년이 지나서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너무도 말썽을 부렸던 녀석들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학교를 찾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유난히도 속을 섞였던 녀석들이 많은 해일수록, 그해 졸업생 중에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녀석들이 많다. 나쁜 인연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좋은 인연으로 성숙하는 경우가 교육 현장에서는 꾀나 있다.

싯다르타는 극단의 영원성이나 불변성에 빠지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편의 극단적 순간성에도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금 이 인연이 나쁜 인연이라고 혹은 좋은 인연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지금 힘든 인연이라면 일단은 그 인연과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자. 그러나 나에게 힘든 인연이 성숙하여 좋은 인연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것이 우리의 인생사이다. 싯다르타는 그 극단을 경계했다. 성숙한다는 것은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6.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학생을 상담하다보면, 진로를 두고 부모와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가 이뤄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모는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시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고 싶은 학생과 자녀를 자신이 못한 일을 대신해주는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 사이의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때로는 실업계 학교로 가기 위해서 교칙을 어겨 징계를 받는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돌봄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한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인으로 살기 힘들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부모와 대립하며, 때로는 퇴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기를 선택한 존재들이다.

15년 전 D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해서 눈물 흘리는 학부모의 모습이 안타까워 문제 학생에게 물었다. ? ? 문제를 일으키냐고…….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자신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퇴학당하겠다고 말했다. 놀란 나는 학생의 어머니와 면담하며, 실업계로의 전학을 권했다. 그것이 어머님과 학생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말했다. 어머님은 울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업계로 전학을 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후, 학생은 퇴학을 당했다. 그 후로 3년여가 흘렀다. 그해 졸업식이 끝나고 홀가분히 집으로 오는데, 전화를 받았다. 그때 그녀석의 어머니였다. 선생님과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는 것이다. 녀석은 D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실업계에 진학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실업계 전형으로 대학에도 했다고 한다. 나의 조언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마운 마음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많은 길을 돌아가야 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 녀석이 대견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들이 사실은 타인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네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 임제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주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7. 아끼는 사람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끼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강신주는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반복하자."라는 강신주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반려동물에게서 우리는 많은 기대나 보은을 원하지 않는다. 맛있게 사료를 먹고, 나를 위해서 웃음만 지어주길 기대한다. 때로는 집안에 똥을 누워도 탓하지 않는다. 특별한 보은을 바라지 않기에 반려동물 때문에 고통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학원을 보내고, 좋은 성적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를 한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요구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이러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바타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강신주는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하도록 했나보다.

사랑한다면, 아낀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랑의 방법을 배워야한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존재이다. 더욱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사랑은 절대적이다. 농작물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강신주의 표현대로 "아끼는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이 '한공기의 연'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끼는 사람의 행복은 우리로 인해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이 힘든 가 보다. 학생이 자라기 위해서는 학생과 연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건강한 만남을 이뤄야한다. 교사는 그 인연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제자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나약한 존재가 교사이다.

 

교사 생활을 하기전, '사랑'이라는 뻔한 단어에 환멸을 느꼈다. 너무도 교과서적인 단어이며, 교사를 혹사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무수히 많은 학부모를 만나면서 모든 문제는 '사랑'에서 발생하여 '사랑'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와 교사의 사랑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며, 부모와 교사의 건강한 사랑이 사태를 해결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학생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병아리들이다. 그러하기에 강신주 자자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은 우리들에게 참다운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준다. 심오한 불교 철학을 기반으로 참다운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학교 현장의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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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5-01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정성 가득 담긴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교직에서 치열하게 아이들을 사랑하시느라 애쓰시는 모습이 느껴지네요~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강나루 2021-05-01 21:17   좋아요 3 | URL
책읽은 감상을 두서없이 적은 것인데, 칭찬을 해주시니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scott 2021-06-04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교육 현장에 강나루님 같으신 분!이
계신 것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이 ^ㅅ^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저는 평범한 교사일 뿐입니다.
scott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6-04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4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불금 되세요~~~

강나루 2021-06-05 04:4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ookholic 2021-06-05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시원하고 즐거운 주말.... 하지만 천천히 지나가시길...^^

강나루 2021-06-05 05:56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bookholic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6-05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1-06-05 11:13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이하라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래요^^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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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벙커1'을 통해서 강신주를 처음 만났다. 그가하는 상담을 들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많아 살아본 할아버지도 아닌데, 상담 심리학을 정공한 사람도 아닌데, 일개 철학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둟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후, 강신주의 동영상 강의와 서적들을 살펴보며 그가 말하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긍금했다. 지난번 강신주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위해서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 이어서 '철학 삶을 만나다.'를 펼쳐들었다. 강신주식 철학의 비밀을 이 책을 통해서 파헤치고 싶다. 


1. 강신주식 철학적 사고의 매력

  강신주가 쓴 철학책들은 쉽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을 들으며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데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무조건 암기하는 탁월한 암기과목이었다. 이에 반해서 강신주가 말하는 철학은 우리 삶을 철학하게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는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일어나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친절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왜? 이러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쏟아냈는가?, 교수가 학생과 대화하기는 커녕, 교수 혼자 독백을 했가? 라는 질문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설게 볼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3단 논법대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어난다. 어찌보면 평범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사유에 강신주는 도끼를 휘두른다. "당연하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는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우리 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옆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낯설게 보면서 소중함을 안다. 강신주가 다상담에서 "'내옆의 아내와 언제던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3단 논법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사유한다. 나의 행동과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3단 논법을 끌어들여합리화한다. 강신주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3단 논법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역사적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을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았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우연성의 철학'과 '필연성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유와 신과같은 존재의 계획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유의 대립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를 발전론적으로 보고, 역사의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무척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들을 우수한 논문으로 대우한다. 반면 우연에의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나열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라고 교육받았던 나로서는 세상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주장이 낯설기는하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담준론에 갖힌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 삶을 철학하게하는 소중한 지혜였다. 


2. 강신주의 철학을 넘어서.

  강신주는 '사랑과 가족',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낯설게 만든다.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유발시킨다. 

  우리의 사랑은 남녀가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완성된다는 헤겔식 철학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반면, 강신주는 바디우의 철학을 끌어들여 '둘'의 사랑을 '둘'로 정의 내린다.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면서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갖혀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에 항상 맞짱구만 칠수는 없다. 나의 전공이 역사이다보니, 강신주가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강신주는 '국가'도 낯설게 본다. 인디언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로 묘사하며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디언 들에게 서구 문명의 총아인 '총'을 주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든 교수가 말했듯이, 태평양의 부족들에게 총기를 주자 그들은 잔인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대표적인 왕국이 하와이 왕국이다. 물질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문명화로보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들의 물적 토대가 강력한 집권자가 나오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원시공산사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확장시켜 인질=국민, 국가=인질범이라는 도식으로 국가를 낯설게 본다. 강신주식 사고가 무척 신선해보인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위태롭다. 시리아 내전을 본다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의 주민들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탈출해서 유럽으로 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독재자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생명을 위협받는 무질서보다는 안정된 독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국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자본에 따른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강신주의 글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현듯 반론을 제기해본다.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국가는 개인을 일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할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보라! 국가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개인은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않는가? 강신주의 지적대로 국가가 개인을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그러한 국가의 속성을 개인이 이용해서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있지 않은가! 공기의 매서운 저항을 이용해서 우리가 행글라이드를 보다 재미있게 탈 수 있듯이, 국가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지배층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대라면 강신주의 주장은 정확히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며 국가를 제대로 움직인다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어지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답이 기억난다. 그때는 '철학적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말들을 외우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난다.'라는 책을 읽으며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철학이 우리 삶과 전혀 관계 없는 학문이기 보다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학문임을 강신주의 책 '철학 삶을 만난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입문서로 읽는다면 삶이 풍성해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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