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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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그의 책을 처음 읽었을때, 그로부터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탄탄한 근거를 제시하는 박노자의 글에 기가 질렸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박노자의 언변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도덕경'을 쓴, 노자가 살아돌아온 것관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다. 그 흐름 속에서 박노자의 책을 어느덧 7권째 읽었다. 그러면서 박노자의 고정된 틀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선했던 그의 글이 이제는 신선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노자의 전략이 나의 눈에 파악되면서 이제 박노자의 주장에 나만의 반박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자, 박노자의 글과 한벌 놀아보자!


1. 국가는 절대악인가?

  박노자의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한 공산주의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도래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공산혁명을 일으킨 나라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현실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그런데, 박노자는 '국가'라는 존재를 '악'으로 대하고 있다. 


  "모든 폭력성을 대변하는 국가라는 지배계급의 기구는 당분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볼 수 있어도 절대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254쪽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박노자의 견해를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박노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2천년 동안 국가를 읽고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에게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충성심을 바랄 수 없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을 제외한 국가라는 존재는 그져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배제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에게 국가라는 존재는 애증의 존재였다. 조선시대 피지배인에게 국가는 나를 착취하는 기구이기도 했지만,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이 일어났던 것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한 것도, 모두가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나라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와 우리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에게 국가란 폭력과 착취의 기구였으며, 스쳐지나갈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국가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없어지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애증의 존재였다. 바꾸고 싶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박노자에게 한마디 더하고 싶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도전하며 촛불을 들어 어둠을 몰아내는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어찌 대한민국을 폭력적 존재! 억압적 존재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억압적 존재라면 국가를 문명화시키는 것도 나라의 주인인 깨시민들의 의무일 것이다. 


2. 호국불교는 청산의 대상인가?

  폭력에 몸서리를 치는 박노자는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라는 존재 자체 또한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인 승려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하여 목탁을 버리고 칼을 들고 일어서는 행위를 박노자는 반불교적 행위로 규정한다.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도덕적인 상대성 논리다. 언뜻 보면 불교를 왜곡하는 논리로만 보인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264쪽


  한국의 호국불교는 박노자의 지적대로 한국불교가 청산해야만하는 대상일까? 폭력은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산적의 칼은 힘없는 자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이지만, 어머니의 칼은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도구이다.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지배자들이 피지배층을 수탈하기 위한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군대는 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에 외적의 침입에 대응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면 군대는 우리 생존의 파수꾼으로 존재하게 된다. 도구의 성격은 도구의 쓰임새에 따라 달라진다. 도구의 악한면만에 주목하여 도구를 버린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금찍할 것이다. 

  박노자에게 질문해보자! 박노자 당신이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승려였다면, 왜군이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코를 베어가고 노예로 끌고가는 현실을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들고 불쌍한 중생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것인가? 

  아무리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고고한 삶을 살고 싶어도 현실의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때가 많다. 내가 평화를 사랑하며 사랑과 자비의 말만을 하고 싶어도, 우리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이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고고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론은 말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물론, 호국불교의 성격이 일제 강점기 친일불교로 변질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성전'으로 미화하며 반민족적 행위를하는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호국불교'라는 칼의 칼자루를 일제가 쥐고 한민족을 위협하는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해결해야갈 문제이다. 


3. 모든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불교의 계율을 모든 불자들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아니, 지킬 수 있을까? 살생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도 귀하게 여긴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한다. 동물과 식물을 희생시키지 않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영양제만 먹고 사는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살생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노자는 모든 불자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나와 남에게 진정한 이익은 무엇인가'에 대한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계율을 실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아니겠는가. 아마도 계율과 함께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각을 내면화한다면, 우리 사회의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계율을 어기는 현실들이 결코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38쪽


  박노자는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원리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이 달성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의열투쟁에 참여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상대가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우리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어찌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계율은 해탈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두스님이 개울을 건너는데 한 여성이 불어난 물을 건너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이든 스님이 그 처자를 업어 개울을 건네주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님이 이를 탓하자, 나이든 스님이 "나는 그 처자를 게울에 건네주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떠나 보내지 아니하였구나!"라고 말했다한다. 여성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이 계율은 승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개울을 건너지 못해서 어쩔줄 모르는 처자를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선을 행하는 일이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단계 이론을 통해서도 박노자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콜버그는 도덕성 발달단계를 6단계로 나누었다. 그중 4단계는 법과 질서 중시, 5단계는 사회계약 중시, 6단계는 보편적 윤리를 중시하는 단계이다. 박노자는 4단계 법과 질서를 중시여기는 수준에 고착되어있다. 불교의 계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한글자 한토시도 고칠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법과 질서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며, 이러한 법과 질서가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5단계로 이행될 수 있다. 한시가 급한 응급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신호를 지켜야하기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데도 붉은신호 앞에 멈춰선다면, 생명을 살리는 더욱 커다란 가치를 잃어버린다. 박노자여! 이제는 사고의 폭을 넓힐때가 되지 않았는가?


4. 괴력난신을 어찌하오리까?

  박노자의 눈에는 대입기도를 드리는 부모의 모습도 아힘사(비폭력)의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내 자녀가 합격하면 누군가의 자녀는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도 문제시한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데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국가와 폭력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라면, 대학에 합격하는 행위자체가 불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된다. 불자들은 모두 속세를 떠나서 살라는 말인가? 글쎄, 박노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있다. 부처의 말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상과 불화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만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노자의 말대로 모든 불상과 불화를 사찰에서 없애버려야할까?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들이 우상이라고하면서 불상을 회손한일과 무엇이다를까? 불상과 불화를 예배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가 아닐까? 훌륭한 불교 예술 작품으로, 후세에 전해주어야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예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생들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지, 불상과 불화, 그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의 마음에 쌓인 헛된 바람이 불상과 불화를 보고 미혹되는 것이지, 불상과 불화가 중생을 미혹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통력 있는 스님이 인정받는 현실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 신통력 있는 스님을 찾는다면, 불교가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불교는 고차원적인 철학적 종교이다. 

  불상과 불화에 대해서는 관대한 생각을 가진 내가, 신통력을 가진 스님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박노자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다수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의 보유 그리고 다수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은 결국 다수에 대한 권위주의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쉽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106쪽


  부처님의 제자가 신통력을 앞세워 부처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박노자의 경고는 깊이 있게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중에서 여성이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기에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서 성불한다는 '변성성불론' 비판, 초기 불교의 정신이 깃든 '산중공의'의 현대적 부활을 외친 부분에 깊은 공감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큰 문제점은 참여불교가 너무도 미약하다는 점이다. 참여불교로 나아가지 못한 대표적 예가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정부의 수배를 피해서 조계사로 들어갔지만, 한상균 위원장을 품어주기는 커녕, 조사계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김수한 추기경이 명동성당으로 온, 민주 시민들을 품어주었던 사실과는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사건이었다. 현실과 유리되어 기득권 세력과 손을 놓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민중속에 뿌리 내릴 수 없다.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아 불교의 외형을 번성시키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래서 박노자는 "이제는 짐이될 뿐인 전통들을 폐기해야 살아 숨쉬는 불교로 거듭날 수 있다."(287쪽)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노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나 또한 박노자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해본 것이다. 박노자의 새로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도 박노자와 깊은 대화를 할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그날을 고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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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강나루 2021-01-01 0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도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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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 1948년 6월 14일생으로 올해 나이 72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연을 하는 철학자이다. 일생을 고전과 힘든 씨름을 하던 그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책 '논어 한글 역주'를 시작으로 '대학 한글역주'를 읽고, '중용 한글역주'를 읽었다. 고전은 단번에 읽어 버리기 힘든 책이다. 일명 '사서'로 불리우는 책들은 하루 한줄씩, 일주일에 한줄씩 적어가며 음미해야 그뜻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책에 메달려서도 안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음미하며 곱씹어봐야 겨우 그 의미와 맛을 느낄 수 있다. 유튜브에서 '도올-중용, 인간의 맛(1~36강)'을 보면서, 책을 함께 읽었다. 도올의 '중용한글역주'를 읽으며 놀라운 것은, 고전에 대한 학설도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토오 진사이의 중용 3분설, 타케우찌 요시오의 중용2분설을 비롯한 기존의 정설은 '중용'이 자사의 초간 이후에, 후대학자들이 제1장과 21장 이후를 추가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덤에서 발견된 곽점본 죽간이 출현하면서 기존학설들이 무너졌다. 도올 김용옥은 '중용한글역주'를 저술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학설들을 종합해서 자신만의 관점을 정립하고 중용을 해설하였다. 끊임 없이 절차탁마하는 노학자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낀다. 도올 김용옥! 그가 '팔만대장경 판본보다 중용한줄이 낫다'라고 극찬한 중용의 맛을 맛보자.


1. 민폐 종교인에게 경종 울리기.

우리는 좀비들과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일부 목사의 독단적인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좀비들이 모여서 코로나19를 옮기는 숙주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에서 집회를 금지시키자,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다며 발악을 한다. 놀이 공원은 허용하면서 종교집회는 금지한다며 생떼를 쓴다. 중용 2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왈 우이호자용천이호자전생호금지세반고지도여차자재급기신자야(子曰 愚而好自用賤而好自專生乎今之世反古之道如此者災及其身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려 하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 지금 세상의 법도로 살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도로만 돌아라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며, 현정권을 비판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황당한다. 한예로 문재인 대통령이 금20톤을 뇌물로 받았다.라는 내용은 너무도 황당하다. 우리 한국은행에 있는 금보다도 더 많은 금을 물리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며, 행동을 제멋대로 하고, 민주 정권 시기를 살면서 깡패가 활개치는 자유당 정권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려한다. 결국 그들에 의해서 코로나 19 재앙이 그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도 미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나는 그들에게 유학의 "예법"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공자가 말하는 "예법"이나 제식은 현재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류의 교리가 말하는 제식이 아니다. "예법"은 "예배"가 아니다. 모든 "예배"란 결국 "귀신에 대한 복종과 찬미와 희생"을 의미한다. 유교의 "예"에도 "배"는 있으나, 그 "배"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 "절"이 아니라,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신을 차단시키는 인문의 결단이다. "예법"은 신에 대한 "신앙"을 유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주대의 예법 사회가 진행되어도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문제가 되는 사회병폐는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 -123~124쪽


  원시유가에서는 '교회가 교회를 탄압'하는 잘못이 벌어지지 않았다.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하고, 신에게 거리를 확보한다면,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는 서양 중세의 병폐는 없었을 것이다. 중세시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밀폐된 공간에 모여서 구원을 빌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 흑사병은 더 쉽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일부 교회의 대면예배와 소모임이 코로나 19를 전파 시키고 있는 현실은 중세 흑사병의 유행과 너무도 유사하다. 그들은 "예배"가 아닌, 유교의 "예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2. 못난 정치인에게 경종 울리기

  적폐세력들이 개혁세력을 비판하는 아이런이한 정치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독재세력들이 하던 방식으로 검찰권력과 국정원, 경찰 등의 권력기관을 이용해서 폭압 통치를 했다면, 찍소리 못하고 숨죽였을 세력들이, 민주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다. 민주적 헌법에 의해서 국가조직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폐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적 시스템이 망가진다.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은 민주적 시스템을 이용해서 민주세력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중용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왈 문무지정 재방 기인존즉기정거 기인망즉기정식(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문왕과 무왕의 훌륭한 정치는 목판이나 간책에 널브러지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는 흥할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는 쇠락하고 말 것입니다." -중용 20장


  훌륭한 정치에 대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실현할 사람이 있으면 정치는 흥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정치는 쇠락하게 된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사회와 국가가 움직여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스템이 갖춰졌다한들, 이를 현명하게 움직일 사람이 없다면, 민주적 시스템은 쉽게 붕괴한다. 적폐세력의 못난 행동에 두눈 부릅뜨면서 감시하는 깨시민이 되어야한다. '깨어있는 참된 시민'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정치인을 뽑는 현명한 투표가 행해져야한다.

  깨어있는 백성, 깨어있는 시민들이라면,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사탕발림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많이 배웠다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라할지라도, 인생의 지혜를 갖춘자라면 몸으로 참된 정치인과 어리석은 정치인을 구분할 수 있다. '중용한글역주'에 소개된 '회남자'의 일부분을 살펴보자. 


 동언이신 신재언전야(同言而民信 信在言前也동령이민화 성재령외야 (同令而民化 誠在令外也)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 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바로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리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지도자의 성의가 그 정령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234~235쪽


  아무리 사탕발림말을 국민에게 한다할 지라도 현명한 국민은 적폐 정치인들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를 지지하는 것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들의 말 이전에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민주세력이 보여주었던 '성의'가 너무도 감동적이기 때문에 민주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적폐세력이 뭐라해도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난 10년 동안 보여준 적폐세력의 막장행동 때문이다. 말보다는 '정성(誠)'과 '애정(情)'이 먼저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적폐세력은 명심해야할 것이다. 

  중용에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세력을 배려하는 말도 있다. 중용 20장을 보자. 


 성신 유도 불명 호선 불성호신(誠身 有道 不明 乎善 不誠乎身矣)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선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중용 20장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해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할 수있다. 갈피를 못잡고 있는 수구세력은 사회가 원하는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다. 일정한 목표없이 민주세력을 물어뜯고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몸을 성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선 수구세력은 사회의 '선'을 명료하게 인식해야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할 수록 그들은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의 '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적폐세력일 수 없다. 수구세력이 적폐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대열에 참여하길 바래본다. 


3. 배우고 가르치는 자에게 경종 울리기

  유학은 교육을 강조한다. 중용에도 학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하는 글이 있다. 


 박학지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널리 배우십시오. 자세히 물으십시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분명하게 사리를 분변하십시오. 돈독히 행하십시오. - 중용 20장


  학문을 배우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사리를 분명하게 판단하고, 돈독히 행하는 자세야 말고 참다운 배움의 자세이다. 학급의 급훈으로도 손색없는 명문이다. 

  그렇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좋은 글귀는 없을까? 중용 22장에 교사들이 가슴에 담으면 좋은 글귀가 있다.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능진기성 진인지성(能盡其性則 能盡人之性 )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중용 22장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에야한다. 교사는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해야,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있다. 못다핀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자신의 재능을 발현시키지 못한 교사는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없다. 교사가 온전히 자신의 재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부단히 절차탁마해야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열심히 재능을 가록 닦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옥을 갈고 쪼듯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부족한 점은 채울 때만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중용14장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가슴속에 새겨듣는다면 좋은 글귀도 있다. 


  정기이구어인즉무원(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상불원천(上不怨天) 하불우인(下不尤人)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중용 14장, 39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이나, 자신의 잘못을 남탓으로 돌린다.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방어기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불행이나 잘못을 외부에 돌리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것이다. 그래서 중용에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또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타인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을 절대 존재에게 돌리거나,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아랫사람에게 돌리지 않는 유교 철학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 학교 현장의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진다면, 학교는 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4. 세계 정치인들에게 경종 울리기

  트럼프라는 세계에서 가장 별난 정치인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이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며 미리 견제를 하고, 중국은 발톱을 숨기고 힘을 키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대국굴기(大國崛起)'를 하려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정치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있는 글귀가 중용에 있다. 


  후왕이박래 소이 회제후야(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가는 것은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은 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후를 회유하는 것이외다. - 중용 20장, 509쪽

  

  남녀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풀어야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는 것이 후해야 오는 것이 후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이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으려하지 않고, 서로 작하게 주고 후하게 받으려 한다면 두세력 사이의 불화는 끝이 없을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추구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더 갖으려는 욕심보다, 보다 많이 배풀려는 풍성함이 이루어낼 수 있다. 

  유교의 황금률이라할 수 있는 문장을 살펴보면, 중국과 미국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자기에게 베풀어보아 원하지 아니 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지어다. - 중용 13장, 353쪽


 이 문장은 '논어'에도 실려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남에게 강요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타인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물질문명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타문화를 야만적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반면, 유가에서는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아니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말라한다. 내가 싫은 것은 타인도 싫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이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강요하지 않았다고해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문화를 절대선으로 여기며 강요한다면 이는 새로운 문화 제국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용'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저 대자연에 피어나는 만물들을 보라! 저 만물들은 서로 같이 자라나면서도 서로를 해침이 없다. 저 대자연을 수놓은 무수한 길들을 보라! 저 길들은 서로 같이 가면서도 서로 어긋남이 없다. - 중용 30장, 608쪽


  불교의 화엄세상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광활한 들판에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장엄하게 제각각 피어있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화엄의 세계이다. 놀랍게도 '중용'에도 그 화엄의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대자연에 피어난 수많은 꽃과 풀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수많은 세상의 길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은 세상! 바로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이다. 

  우리 세상이 이러한 화엄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서로 못난 것도 없으며, 잘난 것도 없다. 제각각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수놓으면 된다. 미국을 따를 필요도 없으며, 중국을 따를 필요도 없고, 나와 같아지라 강요하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화엄 세상이다. 어떠한가! 시진핑과 트럼프는 화엄세상을 이땅에 만들 용의가 없는가?


5. '중용'에 경종 울리기

  '중용'은 좋은 고전이다. 그러나, 고전의 모든 부분이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 부분도 엄연히 존재하기 대문이다. 고전을 맹종하고 고전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른 도그마에 갖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중용'이 좋은 고전이기는 하나, 우리 삶에 적합하지 못한 구절들을 살펴보고 현대적 의미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해보자.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군자지도사 ''미능일언 (중략)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군자의 도는 넷이있구나, 나 구는 그 중 한가지도 능하지 못하도다! (중략)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중용 13장, 364쪽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긴다면, 제대로 국가가 잘 통치될까? 임금이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복종일이다. 선조처럼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왕권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임금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또한 신하는 특권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며 백성들의 삶에 반하는 정책을 입안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신하들과 조선의 양반 지주들의 반발 때문이다. 요즘, 사법부의 사법농단에 대한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사법부가 특권 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도 검찰이 특권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면, 기존의 특권세력이 이익은 증대되겠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수정해야할까? '백성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所求乎民 以事君)으로 수정해야한다. 나라의 기반인 백성의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야 나라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될 것이다.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거참원색 천화이귀덕) 所以勸賢也 (이권현야) 모함하는 이들을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외다.-중용 20장, 508쪽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이의를 달아본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재문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 즉, 돈을 귀하게 여긴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절대빈곤의 상태에 빠지면, 덕을 갖춘 선비로서의 품위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덕'과 '재물'을 대비시켜 마치 '덕'과 '재물'이 상극인 것처럼 표현한 것은 오늘날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덕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재물에 노예가 되지 않고, 재물에 주인이 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로 수정해야한다. 돈에 노예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삭막해질 것이다. 그러나 돈에 주인이 된다면, 돈을 의로운 곳에 쓰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겨 가난에 허덕이기 보다는 돈에 주인이 되어 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인자인야 친친위대) 인이라는 것은 발음 그대로 인입니다. 사람의 근본바탕의 감정이지요. 인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용 20장, 478쪽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친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와, 관시를 중시여기는 중국 사회의 모습이 '親親爲大 (친친위대)'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의 풍토가, 각종 불합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결과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중용의 여러 문장 중에서 우리가 이부분을 가장 유의해서 읽어야한다.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것과, 친하다는 이유로 각종 불합리한 특혜를 준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이다. 친함이 지나쳐, 불합리한 특혜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주의해서 해석하자.

  '중용'의 일부 문장이 현재 우리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있지만, 놀랍게도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많다. 그중 한문장을 살펴보자. 


 군자지도 조단호부부(君子之道 造端乎夫婦) 기지야 천지(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인,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중용 12장, 346쪽


  보통 유학이 여성을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논어'에도 소인과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는 공자의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중용'에는 '부부'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조화로운 관계가 군자의 도가 시작되는 시초라는 말은, 독신을 사제의 조건으로 여기는 타종교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음과 양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교와 달리, 일부 종교에서는 본성과는 배치되는 독신을 강요한다. 참다운 깨달음은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니 유교의 합리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도가에서 은거하는 방법중에서 산속에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는 것보다, 군중 속에서 은거하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부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는 것을 중시여긴 점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유학이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용'은 4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라는 장엄한 문구로 시작하는 '중용'은 불교와 같은 고차원적 철학서적보다는 읽기가 약간 수월했다. 이 책을 읽을 때 박학다식한 도올 김용옥의 풍부한 설명이 '중용' 이해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때로는 도올이 인용한 많은 책들이 중용의 글귀보다도 더 가슴에 와닿았다. 특히 '순자-불구'편의 한구절이 인상 깊다.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높음을 예찬하고, 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후덕함을 존숭한다. 사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의 예견된 움직임에 따라 삶을 설계한다. (天不言而人推高焉(불언이인추고언地不言而人推厚焉(지불언이인추후언), 四時不言而百姓期焉(사시불언이백성기언).)"


 대자연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대자연을 숭상하고 그에 맞춰 살아간다. 사람도 그와 같은 도량을 갖춘다면 주변 사람이 추앙하지 않겠는가! 스승이나 부모가 대자연과 같이 살아간다면, 학생들과 자녀가 참다운 사랑을 받으며, 참다운 사랑을 베풀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중용'을 덮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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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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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도올 김용옥은 그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도마복음'을 만나면서 그 무게를 벗어 던졌다.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는 한국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참다운 예수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도마복음'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치열한 사상탐구의 모습에서 나의 고통을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가난한 집안의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야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나는 그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좋은 아이였다. 때로는 구타를 당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2학년 담임 선생은 이러한 나를 부던히 싫어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 검사에서 우수한 지능지수가 나오자, 그는 나를 2시간 동안 두둘겨 패면서 컨닝을 했다고 자백하라며 다그쳤다. 두시간 동안 맞으면서도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당시 내 주변에 있었던 학생들은 나보다 IQ가 낮게 나온 학생들 뿐이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한 나를 무참히도 짖밟았던 이들이 '크리스찬들'이었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라는 성경의 말은 그들 세계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위선적인 기독교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그때, 도올 김용옥을 만났다. 그는 당당히 한국 기독교의 위선적인 모습에 강한 일갈을 가하며 나의 가슴에 감동의 물줄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도마복음'을 만났다. 적을 때려 눞히려면, 적의 논리를 알아야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왜곡하는 예수를 바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린시절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치유받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도마복음2'를 읽어 내려갔다.

  하루에 한문장, 때로는 한주에 한문장, 때로는 한달에 한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연습장에 영어 원문을 적으며,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읽었다. 때로는 새로운 환희에 무릎을 쳤고, 때로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제 참다운 예수를 만나보자.

 

 

1. 믿으면 진실을 볼 것이다! 라는 크리스찬들의 거짓말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초등학교 시절, 산골짜기 까지 선교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집에 허락받지도 않고 들어와 포교를 했다. 나의 이성적 질문에 그들은 "믿으면 진실을 볼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이 있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말만을 할뿐이다. 이 질문은 '크리스찬인 당신들이 실은 나를 왕따시키고, 나를 구타하고 있소. 만약 신이 있다면, 불쌍한 나를 왜? 구원하지 않소?'라는 질문이었다.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이비신자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현실의 문제에 뿌리두지 못하고, 공허한 말들만을 늘어 놓는 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나, '도마복음'은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하라'(interpretation) 도마는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자신이 직접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예수의 쌍둥이 '도마'다운 말이다. 그렇다. 한국 기독교는 깨달아야한다. 끊임 없이 재해석 되고, 끊임 없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해야하거늘 그들은 거대한 예수의 그늘을 무기삼아 질문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게 강요한다. 참다운 예수와 만나는 첫 관문은 끊임 없이 해석하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도마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 해석하라!! 그러면 진리를 만나게 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2.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다! 크리스찬들의 두번째 거짓말!!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에온 포교자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포교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한다. '천국'을 풀어보면, '하늘 나라'이다. 하늘에는 구름과 공기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천국에 가는 조건은 교회에 다니는 것뿐이라는 괴변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시기, 수학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포교를 했다. 한 친구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조상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지옥에 갔겠네요."

당돌한 친구의 질문에 수학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는님이 보기에는 한줌도 안되는 존재들이에요."

수학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과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무리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논리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되니, 스스로를 크리스찬이라는 말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그들의 말은 스스로의 종교를 부정하는 일이다. 지하철에서 종종 듣게 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도마복음 속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가 본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예수님은 말하신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천국에 갈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다면, 물고기가 천국에 먼저 이를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고, 우리 밖에 천국이 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우리가 하찬케 여기는 주변의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자! 예수님은 진정으로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 꾸짖고 있다. 귀가 있는 자여, 들어라!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말씀을.....

 

3. 종말론을 짖거리는 자여, 거짓된 말을 그만둘 지어다. 크리스찬들의 세번째 거짓말

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este death."(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마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안히라리라.")

  거리에서 포교하는 자들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해대는 말들을 들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도 죽음을 무기삼아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광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때로는 성조기나, 이스라엘깃발을 들고 나타난다.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도 집회를 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떠들어 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과연 진정한 예수님은 그들을 어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도마복음 속에서 만난 참된 예수의 모습은 한국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종말론을 말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라고 반문한다. 시작도 보지 못한 것들이 끝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강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이 질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피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종말론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늘, 나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자. 오늘을 꽃피운다면, 아니, 최소한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면, 내일 종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은 남을리 없다.

 

4. 예수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는말,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어느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선교단을 파견하여 교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사건이 있었다. 여행을 자제하라는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던 그들은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후로,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반성을 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에 선교를 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을까?

  선교하고, 기도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순수한 금식, 순수한 기도, 순수한 희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도마복음 속 예수는 말한다. 그런데, 지난 몇달 동안 언론에 비친 기독교는 어떠했는가?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 종교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질본의 호소를 뒤로하고 주일예배를 강행했다. 결국, 교회 집단 간염이라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모교회가 종교집회를 통해서 코로나19를 집단 간염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 '너희는 정죄되리라'

 

5.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홀로 서라!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and they will stand alone."(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마복음을 읽다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중에 한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보다는 충돌을 선사하러 왔다. 가정에서 아비와 아들이 충돌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충돌을 통해서 이들은 홀로설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발달단계상의 과정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각기 홀로서게 될리라.'라는 말을 통해서, 타인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가 신자들을 교회에 혹은 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는 엄청난 말씀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들은 통하는 것이 있나보다. 그래, 정복한 왕국을 버리고 가는 왕처럼, 그대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도올 김용옥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서술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다음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특수한 문헌이며 인간의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어야한다."-381쪽

 

성경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는 도올의 모습은 대학시절 내가 품었던 의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교 3학년 시절, 한국 사상사시간이었다. 교수님은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중간 중간 성경을 말하며 은연중에 포교를 했다. 한국 사상사를 보다 밀도 있게 듣고 싶었던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질문했다.

"종교가 시대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시대가 종교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나의 질문을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자, 나는 달리 질문했다.

"시대가 변하면 교리도 변해야합니까, 아니면, 시대가 변해도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이 답하셨다.

"종교에는 부활과 같은 영적인 것이 있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죠"

나는 반박했다.

"부활은 포교를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순간 말을 얼버무리더니, 나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나의 학점은 날라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학점을 A+를 주었다. 교수님은 성경도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로 사료비판을 해야한다는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도올 김용옥도 '도마복음'을 풀이하면서 성서는 재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울부짖고 있다. 그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지난날 부던히도 내가 외쳤던 말들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도올은 '도마복음 2'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382쪽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급우들로부터, 거리의 포교자들로부터 나의 자유를 압살당해왔다. 그들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를 대접했다. 나는 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신자로 만들려 폭력을 가하기 까지 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논어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己所不欲勿施于人)'이라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남을 대접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모습을 띈다. 진정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려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논어의 황금율을 가슴에 새겨야한다. 그럴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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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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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선종불교의 화두로 유명한 말이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은 살불살조를 외친 임제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책이다. 사실 반야심경을 단순한 주문을 모아둔 밀교적 성격의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하지 않았다. 도올 김용옥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을 들고 나오자, 반야심경을 읽고 싶어졌다. 도올이라는 깊이 있는 철학자가 단순한 주문을 책을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랬다. 도올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스무살에 반야심경에 미친 도올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반야심경의 매력에 빠져보자.

 

1. 여인의 정체는?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도올 김용옥은 자신이 반야심경을 만나서 승려생활을 청산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먼저한다. 도올과 반야심경의 만남을 통해서 도올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도올은 2장에서 한국 불교의 유명 스님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사를 살펴본다. 그중에서 경허스님의 이야기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계율을 지켜야하는 스님이 계율을 어기며 술을 마신다. 그리고 묘령의 여인을 열흘동안 자신의 방안에 들이다. 계율을 스스로 파괴하는 그의 모습은 고승과 파계승의 차이가 종이장 한장 차이라는 생각마져들게한다. 그러나, 사찰의 제자들이 그 여인을 내 쫓을 것을 요구하기에 어쩔수 없이 그 여인은 절을 떠난다. 그 여인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경허스님에게 잘못을 구한다. 경허스님은 잘못을 비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절을 떠난다. 경허스님과 열흘을 같이 있었던 여인은 도대체 어떠한 여인일까?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행복해하지 않고 오히려 경허스님에게 잘못을 빌었을까?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찰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릎서는 경허스님의 모습에 경외심이 들었다. 경허스님과 같이 열흘을 한방에서 지낸 여인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을 읽어 보길 바란다.

 

2. 불교를 부정한 경전

 

  "불교는 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한 지혜의 사상을 지혜의 완성으로 옹립했습니다. "-223쪽

 

아니, 불교경전이 불교를 정면으로 부정하다. 반불교적 행위를 지혜의 완성으로 옹립하다니 말이되는가? 그런데, 이는 사실이다. 반야심경의 일부를 살펴보자.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219쪽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말씀조차도 "개구라"라고 말하는 대승불교의 방력있는 과감한 모습에 순간 나의 머리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졌다. 260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전이 나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줄줄은 미쳐 몰랐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려라 라는 말이 있다. 부처의 말씀이라는 배를 이용해서 피안의 세계에 다다랐다면 부처의 말을 버려야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조차도 버려야한다. 세상의 모든 허상들을 나의 마음에서 버려야한다. 그 허상들은 내가 깨닫기 위한 방편들일 뿐이다. 나의 인생이라는 항해를 위해서 만든 작은 나침반은 항해가 끝나면 버려야한다. 나침반은 인생을 항해하는 도구일뿐, 인생 그자체의 목적일 수 없다. '반야심경'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나침반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에 노닐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도올은 말한다. "과연 기독교가 '신약성서'를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과연 예수의 역사성을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아니,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종교들 중에서 자신의 성전과 자신의 교리를 스스로 부정한 종교는 없다. 아인슈타인이 “불교에는 우리들이 장차 우주적 신앙에서 기대하게 될 특성들이 함축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영혼을 함께 아우른다. 만일 현대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미래에 과학에 부응하는 종교를 나보고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불교를 선택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타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만의 파격성이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고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얼개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 도올 김용옥은 마음의 짐을 내려 놓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책 곳곳에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이 도올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대학자도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소 고발에 괴로워하고 있다. "법비"라는 말이 있다. 법을 이용해서 사람의 재물을 약탈해가는 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는 수 많은 '법비'들이 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을 법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구속하려한다. 자신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법비'들이 법을 이용해서 사람을 괴롭힌다. 도올이 '법비'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반야심경'이 선사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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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1-29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책이네요. 예전에 고 최인호 작가가 경허대선사님의 생애를 소재로 한 소설 <길 없는 길>에도 나온 일화인데, 저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야심경은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접해보면 유익한 경전 같습니다. 저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강나루 2020-01-29 07: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고 최인호 작가가 경허스님을 소재로한 소설을 썼군요
암튼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민트 2020-03-2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덕분에 날마다 성장하는 재미를 배웁니다.
그런데 혹시 강나루님 역사 선생님이신가요?

강나루 2020-03-27 11:27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대학.학기한글역주 -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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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을 대학시절 TV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후, 그는 동양철학에 대한 심도있는 강의를 우리를 일깨워주었다. 한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우리사회에 날카로운 독설을 설파하는 그를 나즐공(http://www.hooz.com/)과 '대학 학기 한글역주'를 통해서 다시 만났다. 이 책에서도 도올의 날카로움은 빛났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도올의 강연은 재미있고 쉽게 하지만, 그의 책은 쉽지 않다. 알기 힘든 외래어와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한예로 '시스테마틱'이라는 용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 다음 검색을 했으나, 용어의 뜻을 찾을 수 없었다. 간신히 단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systematic'라는 단어였다. '시스테메틱'이라 표기하고, 철자를 괄호안에 적어 주었다면, 이러한 곤란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친절함이 '대학 학기 한글역주'에서는 더욱 심해졌다. 이 책에는 '머릿글'이 없다. 이 책을 왜? 썼는지 알려주는 '머릿글'이 없음은 황당 그 자체였다. '존사'와 '학기'를 왜? 같이 묶었는지 머릿글에서 서술해주었다면, 이책을 읽는 수고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장장 6개월 동안 이책을 읽었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하면서 떠오른 나의 단상들을 적어보겠다.

 

1.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창공을 날다.

  도올 김용옥의 위대성은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자신의 학설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주희도 송나라의 일개 학인일뿐이며 왕수인도 명나라때의 일개 학자일 뿐이다."

  "21세기의 학문을 과거 어느 학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학문을 훨씬 뛰어 넘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하는 것이다."-212쪽

 

  조선의 유학자들은 동양고전 해석을 주자의 방식대로 하려했다. 특히 우리가 대학자로 알고 있는 우암 송시열은 새로운 방법으로 중용을 해석했다하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다.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는 패악질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를 뛰어넘는 연구성과가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노론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우리의 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강대국의 아류가 될 뿐이다. 도올은 조선성리학자들의 아둔함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자의 '대학'을 깨고 원본 '대학'의 참의미를 서술했다. 드디어 자유로이 학문의 자유를 얻게되었다. 도올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진사이는 주희를 비판하면서 '대학을 공맹의 혈맥에서 벗어난 후대작품으로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진사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앗던 우암 송시열은 주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도올은 자괴감을 느낀다.

 

  "우암의 학문은 주희의 해석을 대함에 있어 근원적으로 경학적 방법론이라는 학문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 애초로부터 주자학을 북벌대의와 관련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필요하게 "사문난적"의 논의만을 일으켜 정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암식 노론의 학문논리는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선사회를 이끌어갔다고 칭송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올이 지적했듯이, 성리학의 유연선이 사라지고, 정적을 죽이는 도구로 학문을 전락시킨 조선 유학자들의 태도는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도올은 이러한 불행을 이제 끊으려했다. 그리하여 '대학'이라는 책을 편찬하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함께 집어넣었다. '존사'에는 천자보다 더 막강한 도덕권력으로서 스승의 존재를 말함으로서, 단순히 '주자 집주'속의 대학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고본대학'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주자가 '사서집주'를 통해서 사대부의 윤리를 위한 도구로 수신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대학'을 천자의 책에서 사대부의 책으로 변화시켰다. 반면 도올은 주자 이전의 '대학'의 진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집어 넣어 '주자의 대학'이전의 진짜 '대학'의 모습을 밝히려했다. 이것이 도올의 위대성이다.

 

 

2. '학기'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1)  학연 지부족 교연후 지곤(學然後 知不足 敎然後 知困) : 배우고 난 후에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후에야 곤궁함을 안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과 수석과 학년 수석을 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을 암기해서 쓰는 실력이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 나의 주장을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역사교사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알았다. 한국사 전분야를 강의하면서 내가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역사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도 나의 부족함이 컸기 대문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완벽한 이해를 전제해야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배운뒤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치면서 자신의 지식의 곤궁함을 알게 된다.

2) 선학자 사일이공배 우종이용지 불학자 사근이공반 우종이원지(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 師勤而功半 又從而怨之) : 잘배울 줄 아는 우수한 학생은 선생님께 즐거움을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배가 된다. 그리고 그 공을 모두 선생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런데 잘 배울 줄 모른느 졸렬한 학생은 선생님께 괴로움만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탓하지 않고 선생님만 원망한다.

  '학기'에 나와 있는 이말은 요즘 현실과 일면 맞기도하고, 맞지 않기도하다. 예의 바른 학생들은 교사의 수업에 귀를 기울이고, 총명하여 가르치는 것이 수월하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한 학생은 가르쳤으나, 생각이 나지 않으면 배우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때로는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반면, 공부를 잘하지만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학원에서 배웠기에 학교 수업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예의 바른 학생도 있다.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학기'의 내용은 일면 타당하지만, 일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고전에 절대 진리를 담고 있지만은 않다.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내용도 있다.

3) 유자청이불문 학불렵등야(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 : 연소한 학생이 경철할 뿐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함부로 엽등(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학기'의 내용중에서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학생이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간다면 이는 교사로서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학문에서 조차 선후배간에 등급을 지켜야한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학문은 경직화되고, 패거리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논문에 존칭을 쓰지 않는 것은 학자들은 대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승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주장이면, 당연히 제자가 이를 지적하고 스승을 뛰어 넘어야한다. 청출어람 청어람하지 못한다면, 어찌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말하고 싶다. '엽등하라! 질문하라!'

4) 고군자지어학야 장언수언 식언유언(故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 : 그러므로 군자의 학습법이란 문제가 되는 것을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촉발하는 계기가 찾아오면 그것을 열심히 연구한다. 휴식을 취하고 한가롭게 노닐 때도 항상 학문에서 생겨나는 의심과 관심사를 마음에서 지우는 법이 없다.)

  상당시 공부에만 매진하라는 꼰데들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몰입의 즐거움을 생각한다면, 학문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학문에 몰입해야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학문에 미치지 않고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배움을 쌓고 닦고 또한 쉬면서 즐겨야만 학문을 이룰 수 있다. '학기'는 이를 말하고 있다.

5) 군자지교유야 도이불견 강이불억 개이부달(君子之敎喩也. 道而弗牽, 强而弗抑 開而不達) :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란, 학생이 가야할 대강의 큰 길을 보여주지만 억지로 잡아끌지는 아니 하며, 카리스마를 과시하면서도 학생을 억압하지 아니하며, 문제으 서두를 열어주되 금방 그 문제를 풀게 만드는 것이아니라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개닫기를 기다린다.

  강압적이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칠수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학기'는 설파하고 있다. 알을 깨고 스스로 진리의 세계로 뒤쳐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이미 2천년 전에 설파하고 있다. 현대식 교육 방법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이러한 교육방법을 이제 우리가 다시 발견할 때이다.

 

3. 대학을 통해서 오늘을 바라보다.

1) 호이지기오 오이지기미(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 좋아하는데 그 단점을 알고, 싫어하되 그 장점(아름다움)을 알라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만 알려하기 보다는 그 단점도 함께 알아야하며,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단점 뿐만 아니라 장점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래야 적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실수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면,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없다. 진정으로 삶을 살아갈 때 유념해야할 명언이다.

2) 대덕불관 대도불기 대신불약 대시부제(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 대덕은 관직에 얽매이지 아니하며 대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아니하며 대신은 사소한 약정에 구애받지 아니하며 대시는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얽매이지 아니한다.

  높은 관지과세상의 명리에 큰덕은 휘둘리지 아니한다. 큰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크다. 즉, 보편적 법칙은 한 기능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큰 믿음은 사소한 약속보다 큰약속을 지킨다. 어머니보다 큰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처럼.... 큰 시간도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얼매이지 않는다. 우주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을 초월하기에....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3) 인자 이재발신 불인자 이신발재(仁者 以財發身 不仁者 以身發財) : 인한자는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인자하지 못한자는 몸으로써 재물을 모은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말을 해주고 싶다. 재물은 사람을 위해서 모아야한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00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젊은이가 죽은 사건이 연이어서 발생했다. 그 발전소의 주인은 재물로써 사람을 위하지 않고, 사람으로써 재물을 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을 읽어 보아야한다. '대학'의 가치는 물질만능주의가 강해질 수록 빛날 것이다.

4) 국불이리위리 이의위리야(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 나라는 이익을 취하는 것만을 이익으로 삼지 아니하고, 의를 구현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는다.

  한때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유행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를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삼은 대통령과 특정 무속인에게 의존하며 아바타와 같은 삶을 산 대통령이 있었다. '대학'은 말한다. 국가는 이익을 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여야한다고.... 독재자와 친일파의 후예들은 권력을 잡자 국가를 사적 이익을 잡는 도구로 사용했다. 우리의 국가가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대학'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학'은 '논어' 보다 유명한 고전이 아니다. 분량도 적고 세상에 알려진 명언도 적다. 그러나, '대학'이 국가를 통치해야하는 제왕을 위해서 저술된 책이고, 주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할 사대부에게 윤리적 기준으로 '수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고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대학'을 왜? 읽어야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주인이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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