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독했다. 상권과 하권은 전자책으로, 중권은 오디오 북으로 들었다. 오디오 북은 처음엔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특히 레트 버틀러의 느끼한 목소리나 교태 부리는 스칼렛의 대사) 이야기의 생생함을 전달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듣기 보다는 눈으로 더 빨리 읽어나갈 수 있다. 집안일을 할 때 오디오북이 효율성을 높인다 싶다가도 그만큼 집중을 하지는 않으니 어쩐지 반칙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처음부터 불편하게 표현되는 인종 차별 표현/문장 등은 중권에서 극에 달하며 남군의 패배, 북군의 지배와 새 체제의 설립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정치적 선동이 되고 노골적인 흑인 멸시와 혐오 대사가 계속된다. 북부가 남부를 지배해서 선거권도 빼앗고 '자격없는' 흑인이 남부의 부와 재산, 전통과 정신을 파괴했다는 주장이 반복되며 KKK를 자구책으로 설명하는데 (지난주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진 일이 더 섬찟하게 느껴졌다)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몇번이나 책의 문장을 확인해보니 더 심한 욕설과 비속어 문장은 건너뛰고 녹음했더라. 확실히 눈으로 읽는 것 보다 혐오 대사를 귀로 들을 때 그 충격과 불쾌감은 더 크다. 소설의 흑인들의 말은 어리숙하고 비문 투성이라 읽기에도 듣기에도 불편하다. (영화에서는 - 그러하다. 영화 까지 보고 말았다. - 흑인들이 그럭저럭 제대로 된 대사를 한다. 멍청한 행동을 해서 매를 맞기도 하고. '사람'이 아닌 비러비드가 어눌한 대사를 하지만 우아한 문장으로 번역된 모리슨의 소설은 또 다른 의미로 상황을 변질시키기도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반복되는 흑인의 '짐승 취급'은 역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이름이 아예 '돼지'(porc)인 노예도 있다. 그의 '충성심'을 치하하느라 금시계를 내리는 스칼렛은 북부에서 이주해온 양키들이 흑인 보모를 꺼려하자 자신들이 얼마나 흑인들을 잘 대접해왔는지 역설한다. (이 책이 왜 금서가 아닌거야???)
남군의 패배 후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한 스칼렛은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고 강단 있게 활동 범위를 넓히지만 원칙과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저 '돈'에 한이 맺힌 사람이 전쟁후 두팔 걷어부치고 온갖일을 다 해내는 억척 ...(1953년 한반도 아님) ... 이지만 팜므 파탈인지라 누구라도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 미국 조지아 주의 1860-70년대를 그리기 위해서 소재를 다 끌어오기 때문에 스칼렛의 성격이 오락가락한다. 그녀는 책이나 문화를 즐기지 않고 귀한집에서 컸지만 아버지의 상대적으로 덜 우아한 핏줄로 고집이 세고 거친 면이 있으며 닥치면 굳은 일도 해내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자기 애들은 내팽겨침)고 첫사랑 애슐리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뼈가 묻힐 '타라'가 특별하지만, 그 붉은 흙 덕에 야반도주를 하지 않았고, 그 땅문서 때문에 동생과 (더욱 더) 웬수가 되었더랬지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타라는 그저 설정으로 남는다. 소설에서 결국 타라 농장을 관리하게 될 사람들은 동생과 윌 부부가 될것 같다. 그리고 그 남자, 레트.
스칼렛이 열여섯 살, 애슐리에게 거절당하는 그 바베큐 파티에서 처음 만나는 거무튀튀한 레트는 이미 서른네 살의 남자다. (스칼렛의 엄마와 아빠 나이 차이가 삼십쯤 되는 데 비하면 약과인가?) 그가 스칼렛을 사랑한다고 '단언' 하는 일은 소설에선 거의 후반부에 이루어지는데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빙글빙글 웃는 이 늙은 남자는 대놓고 '얘, 아가야, 너 내거 하자' 라며 덤비고 있다. 발랄랄라한 영화 속 스칼렛은 (비비안 리의 화려한 표정 연기) 온몸으로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 영화는 그녀의 톡톡 튀는 대사와 걸음 덕에 전달 내용이 넘치도록 많아 정신없는 희비극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속았지! 어릴 적 본 미쿡 영화의 이쁜 주인공 이야기가 이리 위험한 것이다!
소설의 스칼렛은 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인물이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는 게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 편한대로 구는 사람이 스칼렛이다. 그녀가 주체적으로 행동을 한다기보다 그 시대의 소재들이 그녀를 이용해서 얽고 있다. 영화에선 레트와의 사이에 딸 하나 보니만을 두지만 소설에선 첫 남편 찰스와 아들 웨이드를, 둘째 남편 프랭크와 딸 엘라를 둔다. 결혼=임신 이라는 공식이라 유산=사고 이며 아이의 죽음=최고 비극이다. 그만큼 비혼여성은 (키티 고모와 인디아)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스칼렛은 처음 두 남편에게 사랑은 커녕 정도 없어서 그 두 아이들은 냉대를 당한다. 애들이 없어졌나? 싶게 이야기에서 존재감 없게 전개시키다 갑자기 애들이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식이다. 엘라는 자폐 증상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데 스칼렛은 그래서 엘라를 더욱 미워한다. 프랭크가 이용 당하다 ㄱ죽음을 당하는 만큼 엘라의 처지도 딱하다. 보니가 낙마해서 죽자 '하느님은 차라리 엘라를 데려가시지'라는 독백마저 스칼렛이 내뱉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니를 향해서 지극한 모성애를 가진 것도 아니다. 반면 레트가 보니에게 쏟는 애정은 징그러운 집착이다. 그는 대놓고 '이제야 나 만의 사람' 이라며 소유욕을 드러내고 스칼렛에게서 못 얻은 확실성을 어린 딸에게 찾고있다. 부인 대신 딸이라니. 부인에게 화가 난 레트는 스칼렛에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그런 밤을 열정의 밤으로 묘사하고 임신 사실을 알게된 레트는 갑자기 사랑을 외친다. 중학교 때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 구릿빛 피부의 츤데레 남주 원형이 레트 버틀러일지도 모르겠다. (절레절레)
그리고 우아한 멜라니 .... 는 더 무섭고 더 지독한 사람인데 오늘 이 책을 다 읽고 영화 까지 보느라 내 심신이 지쳐서 다른 인물들을 언급하기가 싫다. (누가 위스키 좀?) 문득 문득 말할 거리가 생각 나긴 한다. 커튼으로 드레스 만드는 스칼렛이 '사운드 오브 뮤직' 같다던가, 시절이 바뀌는 바람에 옛 대농장 아가씨가 농장 책임자랑 결혼하는 게 서희와 길상이 같다던가 ... 하지만 작년 늦가을에 시작해서 올해 초까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나서 ... 많이 지친다. 옛날 책, 유명한 책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안 읽을 땐 이유가 있는 거라고 깨달았다. 그런데 나 프루스트 읽고 있잖아? 하아 .... 한숨 나온다. 실은 이 책도 꽤 빻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