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아침, 속을 달려 주는 음식에 대한 엣세이다. 그 시원함과 얼큰함, 속을 달래주고 뚫어주는 음식과 같이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마다 지방마다 (전국 ~ 해장국 자랑!) 나라마다 다채로운 해장 음식도 소개한다. 


해장(腸)인줄 알았는데 바른 말은 해정(酲) 숙취를 해소한다는 뜻이란다. 내장을 풀어주는 게 아니었음. 


저자의 만화 <술꾼 도시 처녀들>에서 익히 알았지만 저자의 과음과 숙취의 에피소드는 많고 그 레벨도 대단해 보인다. 위험할 정도로. 책 말미에는 건강을 위해서 절제할 것을 다짐하지만 책 전체 내용은 마시자! 먹자! (죽자!)의 응원 구호를 외치는 것 같다. 나도 좋아하는 음식들 이야기가 나오지만 멈칫 거리게 된다. 해장 음식 이야기는 술을 깔고 있기 때문에 책 전체엔 술 냄새가 은근하게 풍긴다. 책의 추천사를 쓴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이 떠오른다. 안주와 해장음식을 오가는 전국 팔도의 맛집 밥상, 아니 술상. 


10월 초 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더위가 가시면서 맥주가 맛이 없어졌다. 한 캔을 다 비우지 못했고 소주도 별로 취기를 부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와인을 만나지도 못했다. 자, 이만하면 많이 마셨지. 남편은 술을 못해서 (술 심부름은 잘함) 혼자 집에서 마시는 건 재미가 없었다. 모임도 없는데, 혼자 키친 드링커가 되기는 싫었다. 이렇게 갑자기, 문득, 시월에 술과 안녕을 고하고 (아직 한 달이 안되었는데 그냥 당기질 않는 느낌이 2년 전 고기를 끊고 채식을 시작할 때와 비슷하다) 별일 없는 날을 지내고 있다.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보시라!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커피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사랑이 얼마나 열광적인지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인들의 해장법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에스프레소 두 잔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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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8 0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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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8 0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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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다가 연상작용으로 읽었다. 애슐리. 하지만 김성중 작가의 단편에서는 여성형 이름으로 쓰인다. 작가 이름도 어쩐지 의미를 더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이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라고, 아니 남자는 아니라고 여기고 어머니께 상의한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그럴 수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주며 만약의 경우 '수술' 할 경비까지 마련해두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인공이 십대일 때 돌아가신다. 성 정체성을, 혹은 자각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과 동시에 지구에도 변동이 일어나 시간이 멈춰버린다. 그리고 인간들은 시간과 인생, 삶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제 인간은 무한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AI나 기계가 인간보다 단명한 세상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서에 대해 계속 '퀘스쳐닝'한다. 그 퀘스쳐닝에 대한 언어에 대한 퀘스쳐닝도 함께. 그리고 지구는 다시 ...  


김성중 작가의 전작, 역시 판타지와 sf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번 소설은 의외로 무겁고 자꾸 되짚어서 읽게된다. 성정체성을 정해서 파트너를 만난다, 로 줄여버리면 편편해지는 줄거리이지만 실은 주인공 에디 혹은 에슐리 (방점은 '혹은'에 찍혀있지 않을까)에게는 생존의 모든 문제이다. 그 고민의 깊이가 잘 와닿지가 않아서 아쉽다. 언뜻 천선란 작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sf 소설에서 넓혀가는 것들 중에는 우리가 사는 곳, 시간, 종족, 물질성, 그리고 성 정체성도 포함된다는 생각이 든다. 단편 안에서 소화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좀 더 길게 풀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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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테드 창으로 시작해서 김초엽, 문목하를 거쳤으니 요즘 젊은 작가들의 sf 소설이 더 궁금했고 읽을 자신이 생겨서 드디어 천선란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다. 제목 부터 '물질'이 들어가서 언뜻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 이 생각났다. 제목이 과학 같은 소설들.


8편의 이야기들이 그리는 세상은 미래의 지구, 우주, 다른 행성이다. 다 망쳐버린 지구에서도 사람들은 고달프지만 여전히 애닲게 사람의 온기를 찾는다. 너와 나의 경계, 옳고 그름, 같고 다름, 여자 남자의 기준은 하찮다. 표제작인 <어떤 물질의 사랑>은 배꼽도 없고 성별도 정해지지 않은 주인공이 성장해 나가는, 여러 사랑, 경계 없는 사랑을 겪으며 자라나는 이야기다. 후반부엔 초반의 생동감은 줄고 작가의 염려 어린 설명이 많았지만 그만큼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바뀌는' 성별이라니. 그걸 심드렁하게 말하는 엄마라니. 표지에서 보여주는 '넌 알에서 태어났어' 이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그래도 좋아. 


sf에 빠지지 않는 AI 이야기로 자동차 사고 시뮬레이션용 Dummy 이야기 <마지막 드라이브>가 따뜻하고 인상 깊었다. 더미도 사랑을 합니다. 임신 중단 이야기 <너를 위해서>는 자녀 출산을 준비하는 태도를 조신한 남성에게 묻고 있는데,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인생을 내 놓는 게 지금 누군가 생각하면 찬물 한 잔을 마시게 된다. 


모든 이야기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보호하는 여성, 딸을 찾는 엄마, 여동생을 구하려는 언니, 치매 엄마를 보살피는 딸 등 여성들끼리의 사랑이 주가 된다. 의도적으로 남성을 배제했거나 우매한 적으로 만드는 설정도 있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애착어린 개입이 드러날 때가 많은데, 그래서 결말이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더라도 어쩐지 희망을 바라게 된다. 비극이고 절망인데 그 절망을 작가가 반쯤 막아준 덕분이다. 네, 사랑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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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1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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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표지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외출하고 헛되이 지치느니 '고전' 속 여자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수다를 떠는게 낫다, 는 표지의 글에 어울리려면 누가 저런 브래지어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겠나. 속옷은 벗고 대신 헐렁한 티셔츠 바람이 낫지. 


그런데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저자/독자 유즈키 아사코는 저런 검은 속옷 차림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외모와 나이, 결혼과 연애 이야기가 짧은 서평의 많은 부분을 잡아 먹어서 시시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 이야기, '수다'라 여기고 편안하게 읽었다. 고전 소설이라고 무게 잡고 인상 쓰면서 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책 내용은 프랑스,영국,미국, 일본의 "고전 소설"을 읽은 후 감상문인데 일본 소설의 경우 책 목록이 덜 고전적으로 보였다. 


어느 소설을 만나더라도 여자 등장인물의 장점, 강인함 혹은 의연함을 발견해 칭찬하는 저자의 긍정 마인드가 놀랍다. 친구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독하고 핼러윈 파티 겸 코스튬 플레이와 테마 디너를 준비했다니, 고전을 갖고 놀 수도 있다는 게 (그 젊은 나이와 더불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잡지 엣세이로 젊은 여성 독자를 의식하는지 너무 달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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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수다 떠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책들이 편안해서 끌리더라구요. 선선한 가을밤 심심할 때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0-10-11 20:38   좋아요 1 | URL
네. 가볍게 친구랑 책 이야기 하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읽고 싶어지는 책 목록도 당연히 챙겼고요. 선선한 가을밤....감기 조심하세요~

북극곰 2020-10-1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첫 단락 완전 동감인데욧! 비웃비웃 ㅋㅋㅋㅋ 라고 생각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읽고 파티하는 여자는 다른 건가.... (괜히 시무룩)

유부만두 2020-10-12 16:17   좋아요 0 | URL
저자의 전작들과 글 분위기가 표지의 으잉? 스러움과 닿아있지만, 저자가 완독한 고전들 이야기에는 ‘네...‘하는 자세가 되더라고요. ^^;;; 고전 읽고 ‘놀기도‘하는 젊은 마음이 부러웠고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직 못 읽었지만, 완독 한다면 전 아마 영화를 다시 볼 거 같아요.
 

교통사고로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난 오기. 사십대 지리학 교수인 그는 동승했던 아내가 사망한 걸 알아도 턱부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통증도 느낄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가족'은 장모 뿐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시작했는데도 긴장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았다. 오기도, 그 부인도, 장모는 더더군다나. 그런데 이런 불쾌감을 안고도 계속 읽을 수 있던 건 소설이 '안전하게' 한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끝이 보였다. 제목의 그 홀. 구멍. 구덩이. 어차피 빠지게 되어있다. 이미 빠져 있었고, 피할 수는 없다. 


오기의 부인이 겪었던 허영과 좌절이 낯설지 않다.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깔려 있다고 상상했다. 가짜 같고 엉성해 보이지만 그만큼 더 괴상한 장모와 함께. 생각해 보면 여기 저기, 끔찍한 아가리를 벌린 구멍들이 일상 도처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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