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 P28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 P69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 P75

처음에는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밎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나는 짐작으로 맞출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 P8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5-18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짧은(?) 책인 줄 몰랐어요!

유부만두 2023-05-18 12:16   좋아요 1 | URL
근데 문장을 다듬고 골라서 쓴 느낌이라 가볍지 않아요. 아직 맘이 먹먹해요.
 

"부유한 자들의 혈통이 그러하듯, 고전은 고립된 책들이 아니라 지도이자 별자리와 같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은 다른 고전들보다 앞선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자를 먼저 읽고 전자를 읽더라도 누구나 그 계보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작품의 기원, 관계, 종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조이스와 유제니디스와 계보를 이룬다. 플라톤의 동굴 신화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매트릭스」로 돌아온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적인 프로메테우스로 상상되었다. 오이디푸스는 불행한 리어왕으로 환생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는『미녀와 야수』로, 헤라클레이토스는 보르헤스로, 사포는 레오파르디(Leopardi)로, 길가메시는 슈퍼맨으로, 루키아노스는 세르반테스와「스타워즈」로, 세네카는 몽테뉴로,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로, 루크레티우스는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와 마르크스로, 헤로도토스는 폴 오스터의 「유리의 도시」로 환생했다. 핀다로스(Pindaros)는 "인간은 그림자의 꿈"이라고 노래했다. 셰익스피어는 그 노래를 "우리는 한낱 꿈을 빚어내는 재료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우리의 짧은 삶은 꿈에 둘러싸여 있다."라고 표현한다. 칼데론(Calderón)은 "인생은 꿈"이라고 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과 꿈은 동일한 책의 페이지"라고 표현한다. 말과 메타포의 끈은 시대를 휘감으며 시간을 가로질러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 두어 장은 작가가 너무 몸을 사리며 말을 돌려서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이야기, 그동안 (일본 문단에 대해) 서러웠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부터는 꽤 읽을 만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었던 책과 작가 이야기가 좋았다. 특히 그의 꾸준함, 일정한 규칙적인 생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챈들러를 읽고 연상 작용에 끌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뭔가에 홀린듯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 왜 그랬어. 하루에 몇 쪽씩 밖에 못 읽겠다. 이런 인물들이 이런 대화를 한단 말이지. 작가의 설명대로 1인칭 소설의 한계였을까, 대화로 전해지는 장면들은 더 적나라하고 억지로 꾸겨 넣은듯 기괴하게 와닿는다. 


하지만 뭐 이런 소설에 취한 시절의 나도 있었지. 그 나이가 된 큰아이는 다행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른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 P151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 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 P180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나는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 P226

외국 작가로는 제인 오스틴, 카슨 매컬러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작품을 전부 다 읽었습니다. 앨리스 먼로도 좋아하고,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은 몇 권 번역도 했습니다. - P278

작가 존 어빙을 만나 대화했을 때, 그는 독자와의 관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봐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독자에게 mainline을 hit하는 거에요. 말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미국 속어로 mainlne은 정맥주사를 맞는다, 즉 상대를 addict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 P283

제임스 조이스는‘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인 텍스트 뭉치들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난다. 독자가 이를 읽어가면서 새로운 글을 보려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가고 왼손으로는 읽은 부분의 두루마리를 말아야 한다. 휴지기와 리듬을 요하는 느린 춤과 같다. 독서를 마치면 두루마리는 정반대로 말려 있게 되기 때문에 다음 독자를 위해 두루마리를 되감아 둬야 한다.”


옛날 옛적, 삐삐가 최첨단 통신기술일 적. 영화는 CD도 아니고 비디오 테잎 형태로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다 본 다음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처럼 다시 원래 대로 감아두어야 했다. 스트리밍 영상과는 다르게 그 시절 영화와 내용은 테잎이라는 물질과 더 가깝게 느껴졌고 때론 동일시하기 쉬웠다. 귀신 영상은 테잎에 붙어서 옮아다닐 수도 있을만큼. 공포 영화 <링>이나 테잎을 다 날려먹은 잭 블랙의 영화처럼. 영화 제목이 <Be Kind Rewind> 되감기하는 친절을 베풀어주세요, 쯤이려나? 유명 대여점의 표어도 Rewind is divine 되감기 좀 해서 반납하라고 외친다. 

두루마리 다시 감는다는 이야기에 오늘도 내 생각은 저 멀리 멀리 펼쳐지고 있다. 


마침 블럭버스터 대여점 이야기가 넷플릭스에서 나온다고 한다. 초심을 돌아보는 심정일까. 비디오 테잎 대여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그런데 레트로 감성 자극할 뻔한 예고편은 매력이 부족한듯.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3-04-2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추억의 블럭버스터!! 이젠 넷플릭스가 대세,,, 저는 비디오테이프 하니까 예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스트리밍 이런 서비스가 당연히 없었던 고려쩍 이야기라, 한국 비디오 빌려보던 생각나요. 물론 되감아 돌려준 적은 없는 것 같아요.ㅠㅠ 그러고 보니까 세상 많이 좋아졌구요,, 비디오도 빌려 보기 힘들었던 힘들었던 과거를 잘 헤쳐온 것 같아 갑자기 뭉클하네요..^^;; 저도 덕분에 라떼에 빠져봅니다.

유부만두 2023-04-24 11:39   좋아요 0 | URL
저도요. 90년대라 금요일이면 한국 마트에 가서 2주쯤 지난 한국 드라마 등을 빌려봤어요. 정말 고리고쩍 같네요. 그때 깻잎 10장을 2불50 주고 사먹은 기억과 함께! 그땐 비디오 테잎을 빌려와서 보면 리와인드 되있는 게 별러 없었던듯 해요. ㅎㅎ 라떼....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시대를 살았군요.
라로님, 새로운 생활 응원 합니다. 따로 라로님 서재에 댓글을 달려고 합니다. ^^

레삭매냐 2023-04-24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럭버스터 비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네요.

비됴 가게에 가면 자동차 모양
으로 생긴 리와인드 기계가 있
었지요 ㅋㅋ

유부만두 2023-04-24 11:41   좋아요 0 | URL
정말 기술이 사람 사는 방식을 이렇게 크게 바꿀지는 몰랐어요. CD만 해도 플로피 디스크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데 요즘은 차원이 다르죠. 그래도 종이책이나 극장 영화는 남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베를린 천사의 시> 도서관 장면


https://youtu.be/rnbIZ2o3gWM
사람들 사이의 검정옷은 공안 정보부원들 아님. 천사들임;;;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과 에트가어 비스니브스키(Edgar Wisniewski)가 설계한 베를린 주립도서관을 떠올려보자. 그곳에서 빔 벤데르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장면을 찍었다. 카메라가 넓은 독서실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간 뒤 공연장의 특별석처럼 튀어나온 곳에서 드넓은 내부를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평행하게 정렬된 책장사이로 사람들이 책을 들고 서 있다. 또는 의자에 앉아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책에 집중하고 있다(턱을 받치고 있는 사람, 주먹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사람, 손가락 사이를 프로펠러처럼 돌고 있는 볼펜 등). - P70

한 무리의 천사들이 1980년대 옷차림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서관에 들어간다. 브루노 간츠는 넓고 짙은 외투에 목을 덮는 스웨터를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천사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한다. 또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을 엿보기도 한다. 어느 학생의 볼펜을만지기도 하고 그 작은 물체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미스터리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들은 언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왜 책이 그들을 몰입하게 하는지 알고자 한다.
천사들은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속삭이는 말들을 포착한다. 독서는 내적 소통을, 고독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천사들에게는 놀랍고도 초자연적인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독서를 통해읽은 문장들이 아카펠라나 기도처럼 울려 퍼진다.
- P71

영화의 이 장면처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중얼거리는 말로 가득했을 것이다. 고대에는 눈으로 문자를 인식하면 그 문자를 읽으며텍스트의 리듬을 탔다. 발로는 메트로놈처럼 바닥을 두드렸다. 읽기는듣기였다.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P7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혜윰 2023-04-24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는 정말 너무 좋아요♡♡♡♡♡

유부만두 2023-04-25 06:01   좋아요 0 | URL
전 클립들만 보고 영화 전체는 아직이에요. 이번 기회에 통독(?)을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