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인 텍스트 뭉치들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난다. 독자가 이를 읽어가면서 새로운 글을 보려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가고 왼손으로는 읽은 부분의 두루마리를 말아야 한다. 휴지기와 리듬을 요하는 느린 춤과 같다. 독서를 마치면 두루마리는 정반대로 말려 있게 되기 때문에 다음 독자를 위해 두루마리를 되감아 둬야 한다.”


옛날 옛적, 삐삐가 최첨단 통신기술일 적. 영화는 CD도 아니고 비디오 테잎 형태로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다 본 다음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처럼 다시 원래 대로 감아두어야 했다. 스트리밍 영상과는 다르게 그 시절 영화와 내용은 테잎이라는 물질과 더 가깝게 느껴졌고 때론 동일시하기 쉬웠다. 귀신 영상은 테잎에 붙어서 옮아다닐 수도 있을만큼. 공포 영화 <링>이나 테잎을 다 날려먹은 잭 블랙의 영화처럼. 영화 제목이 <Be Kind Rewind> 되감기하는 친절을 베풀어주세요, 쯤이려나? 유명 대여점의 표어도 Rewind is divine 되감기 좀 해서 반납하라고 외친다. 

두루마리 다시 감는다는 이야기에 오늘도 내 생각은 저 멀리 멀리 펼쳐지고 있다. 


마침 블럭버스터 대여점 이야기가 넷플릭스에서 나온다고 한다. 초심을 돌아보는 심정일까. 비디오 테잎 대여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그런데 레트로 감성 자극할 뻔한 예고편은 매력이 부족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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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4-2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추억의 블럭버스터!! 이젠 넷플릭스가 대세,,, 저는 비디오테이프 하니까 예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스트리밍 이런 서비스가 당연히 없었던 고려쩍 이야기라, 한국 비디오 빌려보던 생각나요. 물론 되감아 돌려준 적은 없는 것 같아요.ㅠㅠ 그러고 보니까 세상 많이 좋아졌구요,, 비디오도 빌려 보기 힘들었던 힘들었던 과거를 잘 헤쳐온 것 같아 갑자기 뭉클하네요..^^;; 저도 덕분에 라떼에 빠져봅니다.

유부만두 2023-04-24 11:39   좋아요 0 | URL
저도요. 90년대라 금요일이면 한국 마트에 가서 2주쯤 지난 한국 드라마 등을 빌려봤어요. 정말 고리고쩍 같네요. 그때 깻잎 10장을 2불50 주고 사먹은 기억과 함께! 그땐 비디오 테잎을 빌려와서 보면 리와인드 되있는 게 별러 없었던듯 해요. ㅎㅎ 라떼....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시대를 살았군요.
라로님, 새로운 생활 응원 합니다. 따로 라로님 서재에 댓글을 달려고 합니다. ^^

레삭매냐 2023-04-24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럭버스터 비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네요.

비됴 가게에 가면 자동차 모양
으로 생긴 리와인드 기계가 있
었지요 ㅋㅋ

유부만두 2023-04-24 11:41   좋아요 0 | URL
정말 기술이 사람 사는 방식을 이렇게 크게 바꿀지는 몰랐어요. CD만 해도 플로피 디스크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데 요즘은 차원이 다르죠. 그래도 종이책이나 극장 영화는 남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베를린 천사의 시> 도서관 장면


https://youtu.be/rnbIZ2o3gWM
사람들 사이의 검정옷은 공안 정보부원들 아님. 천사들임;;;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과 에트가어 비스니브스키(Edgar Wisniewski)가 설계한 베를린 주립도서관을 떠올려보자. 그곳에서 빔 벤데르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장면을 찍었다. 카메라가 넓은 독서실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간 뒤 공연장의 특별석처럼 튀어나온 곳에서 드넓은 내부를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평행하게 정렬된 책장사이로 사람들이 책을 들고 서 있다. 또는 의자에 앉아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책에 집중하고 있다(턱을 받치고 있는 사람, 주먹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사람, 손가락 사이를 프로펠러처럼 돌고 있는 볼펜 등). - P70

한 무리의 천사들이 1980년대 옷차림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서관에 들어간다. 브루노 간츠는 넓고 짙은 외투에 목을 덮는 스웨터를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천사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한다. 또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을 엿보기도 한다. 어느 학생의 볼펜을만지기도 하고 그 작은 물체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미스터리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들은 언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왜 책이 그들을 몰입하게 하는지 알고자 한다.
천사들은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속삭이는 말들을 포착한다. 독서는 내적 소통을, 고독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천사들에게는 놀랍고도 초자연적인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독서를 통해읽은 문장들이 아카펠라나 기도처럼 울려 퍼진다.
- P71

영화의 이 장면처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중얼거리는 말로 가득했을 것이다. 고대에는 눈으로 문자를 인식하면 그 문자를 읽으며텍스트의 리듬을 탔다. 발로는 메트로놈처럼 바닥을 두드렸다. 읽기는듣기였다.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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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3-04-24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는 정말 너무 좋아요♡♡♡♡♡

유부만두 2023-04-25 06:01   좋아요 0 | URL
전 클립들만 보고 영화 전체는 아직이에요. 이번 기회에 통독(?)을 해야겠습니다. ^^
 


대출을 금지한 책을 전부 다 갖춰 놓고 싶었다. 책이 커다란 탑처럼 쌓여 사물함을 꽉 채웠으면 했다. 그책들을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 - P118

책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앉았다.
크기 순서대로 쌓았다가, 그다음에는 알파벳 순서로 쌓고, 또 내가 읽은 책이랑 안 읽은 책으로 나누어 쌓았다. 책의 무게가, 촉감이, 특히나 책을 열 때마다 찌직 소리를 내며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기는 투명한 코팅이 된 책이 좋았다. 어떤건 오래된 책이었다. 심지어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어떤 건 완전 새 책이었다.
그리고 모두 다 금지된 책이었다. 여기 쌓인 책들은 보물이었다. - P187

"예의 바른 여자들이 역사를 만드는 일은 별로 없단다. 옳은 것을 위해서 나쁘게 행동하는 걸 이번에 처음으로 맛봤다고 생각하렴."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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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의 4월1일 토요일은 지옥 같았지.

"내일이 초하루군요. 사월 일일입니다. 만우절이죠. 부인이 등기우편을 받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리슨 부인?"
노파의 눈이 나를 향해 빛을 발했다. 노파는 웃기 시작했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만우절이라." 노파는 다시 킥킥댔다.
"아마도 못 받을 테지."
나는 노파의 웃음을 뒤로하고 떠났다. 웃음소리가 암탉이 딸꾹질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편물 안 왔다는데요."
"그렇지, 안 왔어. 토요일이 초하루였지. 만우절이었어. 히히!"
노파는 말을 멈추고 앞치마로 눈을 닦으려다가 그게 고무 앞치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기분이 언짢아졌는지 입이 자두같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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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심리 변화와 그 묘사 만큼이나 작가 뱅자맹 콩스탕의 인생이 흥미롭다. 어휘 선택을 보면 역자의 심정도 비슷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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