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난 뒤로 내 정신건강이 그리 나쁜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의 주인공도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한참 동안 혼자 떠들어대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치지 않았다. 그냥 고약한 인간일 뿐이다. 미친 것과 다르다. - P215

사실 아홉 살 때 읽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꽤 재미있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놀라웠고, 동물들과 주고받는 대화도 마음을 끌어당겼다. 문장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그 책에 담긴 말소리가, 예를 들어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라는 말의 울림이 좋았다. "나는 사랑한다" 니체는 이말을 자주 한다. 우리집에서느 절대로 사용되지 않는 그 말이 마치 달콤한 꿀처럼 내 뇌 속을 흐른다. - P237

나는 저녁에 <레 미제라블>을 다시 읽으면서 아주 큰 힘을 얻는다. 뇌 속에 거의 물리적인 쾌락이 느껴진다. 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 열리는 것 같다. 그 책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고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준다.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 내용이 내 진짜 삶과 아주 가깝다고 믿는다. - P261

이 방법은 나처럼 타인에 의한 정서적 ‘지배‘라는 끔찍한 함정에 빠졌던 사람들을 도울 때 큰 역할을 했다.그런식의 지배에는 우선 포식자가 있다. 포식자는 오로지 자신의 정신세계, 믿음, 욕구, 욕망만이 중요하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만나면 우선 지배를 위한 함정을 만든다. 무엇보다 상대에게 자신과의 관계가 절대적 사랑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런 뒤 상대를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다루면서 서서히 소유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포식자가 말하는 존재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 함정을 벗어나는 것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그때부터는 희생자의 파괴가 순식간에 진행된다. 포식자는 육체적인 면과 지적인 면에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적인 면에서, 그야말로 모든 측면에서 철저하게 희생자를 파괴한다. - P320

유사종교야말로 정서적 지배의 완벽한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언제나 영적 지도자 한 명이 제자들을 이끄는 사교邪敎 집단의 모델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부부관계에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삼켜버리는 ‘2인 사교‘도 있고,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가족 사교‘도 있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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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와 소수자가 새로 만들어 제시하는 말은 기존의 언어 속에 담긴 차별과 편견에 맞서기 위한 대항 언어에 해당한다.

어떤 말을 버리고 어떤 말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가깝게 연결된다.

서울 사람이 쓰던 말을 ‘경아리말’, 그런 말투를 ‘경아리 말씨’라고 한다. ‘경京아리’는 국어사전에 "예전에, 서울 사람을 약고 간사하다고 하여 비속하게 이르던 말"이라고 나온다.

비가 거의 안 오는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는 돈의 액수를 나타내는 단위로 풀라와 테베라는 말을 쓴다. 풀라는 비, 테베는 빗방울을 뜻하는 말인데, 비가 얼마나 귀한 지역이면 그랬을까 싶다.

소천(召天)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개신교에서 죽음을 이르는 말. [...] 불교 신자가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소천‘이라는 말을 쓴다면 아무래도 어색하다.

교육부에서 ‘학부형‘ 대신 ‘학부모‘라는 말을 쓰도록 한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학부형‘이라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이 많다. 학생 보호자로 아버지와 형을 올려 놓은 학부형이라는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학부형을 버리고 학부모를 쓰는 것은 단순히 낱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낡은 인식과 결별하는 행위이다.

2017년에 어휘를 둘러싼 또 하나의 중요한 대립이 있었다. 성소수자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의제로 등장하면서 양성평등이라는 말 대신 성평등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엥 호응하여 성평등이라는 말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인간의 성 정체성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판단이 사회적 승인을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이에 반해 양성평등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이들은 성평등이라는 말을 용인하는 것은 동성애와 동성혼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 그래서 이 사안을 다루는 어느 신문에서는 기사 제목을 ‘양보 없는 용어 전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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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다. 언제나 해결책이 있다. 기필코 그것을 찾아내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 P137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 - P157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이 너를 위한 일인지 말해줄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세상을 지배하하고 암흑을 무찌를 수 있다."
그런 전투를 치르기에 최적인 자리는 물론 교황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교황이 될 수 없다. 교황이 되려면 주교 하나가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고환을 만져보고 라틴어로 "있다! 분명히 있다!"라고소리치는 검사를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 P180

하루 또 하루, 밤마다 피가 날 때까지 나 자신을 학대한다. 이상하게도 그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원할 때 스스로 멈출수 있는 고통이기 때문일까? 언제 고통이 시작될지 내가 결정하고, 언제 끝날지 정하는 것도 나다. 모든 게 나한테 달려 있다는 생각을하면 아무리 아파도 위안이 느껴진다. 이 끝없는 공포 속에서 사는 게 너무 지겹다. 왜 시작되었는지,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저 감내해야 하는 공포와 고통이끔찍하다. 악물었던 이를 조금씩 풀기 시작하면 증오와 경멸이 서서히 사라진다.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던 욕설들도 가라앉고, 나는 서서히 잠이 든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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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에 채워진 그의 결혼 선물. 목에 꼭 끼는 루비 목걸이로 너비가 5센티미터라서 내 목은 마치 굉장히 값나가는 잘린 목 같았다.

공포정치 이후, 혁명 집정부 초기에 단두대를 피한 귀족들이 목에 붉은 리본을 매는 아이러니한 유행이 있었다. 칼날이 베고 지나갔을 바로 그 위치에 매는 상처의 기억 같은 붉은 리본. 그리고 그의 할머니는 이 아이디어에 끌려 리본을 루비로 만들게 했다. 아주 화려한 저항의 제스처! 




금박 거울에 비친 나를 쳐다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경주마를 감정하는 전문가의 감식안, 심지어 시장에서 잘라놓은 고깃덩어리를 자세히 바라보는 가정주부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난 그전까지 그의 그런 시선을 한 번도 보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완전히 육체적인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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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3-22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 책 찾으러 갑니다. 으스스한데 묘하게 끌리는 이 책 찾으러요!!

유부만두 2021-03-22 14:44   좋아요 1 | URL
으스스하고요, 묘하고요, 야해요!

Falstaff 2021-03-22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젤라 Y. 카터.
저는 이 양반을, ‘앤젤라 엽기 카터‘라고 부릅니다. 으... 취향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면 사 읽게 되는 희한한 작가. 전 <써커스의 밤>이 더 좋았습니다만. ^^
<현명한 아이들>이란 책이 카터가 쓴 것 가운데 매우 재밌다던데 번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군요.

유부만두 2021-03-22 14:45   좋아요 2 | URL
아, 그런가요?!!! 어쩐지 엽기스럽긴 했어요. 피해자인데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는 느낌도 들었고요. <써커스의 밤>...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자꾸 새 책 추천하고 그러시는 거 ....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책들 언제 다 읽지요? ;;;;;

수이 2021-03-22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하다고 하시니........ 얼른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퍼뜩!

유부만두 2021-03-22 18:38   좋아요 0 | URL
단어와 문장이 도발적이에요. 독자를 막 째려보고 덤비는 듯합니다.

꼬마요정 2021-03-22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다가 중단한 뒤 아직도 다 못 읽었어요ㅠㅠㅠㅠ 힘들더라구요ㅠㅠㅠㅠ 유부만두님 리뷰 기다릴게용 ㅎㅎㅎ

유부만두 2021-03-22 22:37   좋아요 1 | URL
저도 표제작만 읽은 상태에요. 매우 강렬하더라고요?! 눈에 힘 주고 한 편씩 읽어보려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전래동화‘들도 다 쎈 이야기들이네요. 죽고 굶고 베고 썰고 ;;;;

psyche 2021-03-29 0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또 찜할 책이 있네!

유부만두 2021-03-29 16:31   좋아요 0 | URL
도전적인 책이에요.
 


무수한 sf 영화들이 특수효과와 cg에 집착하게 만드는 후유증도 낳았다. 특히 장면의 중요성을 시간으로 치환하는 슬로모션 기법은 내가 글을 쓸 때에도 즐겨 활용하는 연출 방식이다. 중요한 장면일수록 문장을 두껍게 쌓아 읽는 이에게 슬로모션과 비슷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 P56

웰즈는 <공중전쟁>과 <다가올 세계의 모습>을 통해 1,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경고해 왔다. 또 <해방된 세계>에서는 끝없이 책분열하는 폭탄으로 세계가 멸망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이 계기가 되어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웰즈는 이를 한탄하며 <공중전쟁>의 재출간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뭐랬어, 이 썩을 멍청이들아." - P82

스페이스 오페라는 왜 이렇게 제국을 좋아하는가? 결국 이 이야기들은 무대만 우주로 옮겨 놓은 판타지이거나,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백인들의) 향수병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여전히 궁정 로맨스를 사랑하고, 우주에서 이런 이야기를 풀어 놓기 위해서는 배경이 왕국이거나 제국일 필요가 생긴다. - P132

최근에는 여성형 휴머노이드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데, 이를 이용해 <얼마나 닮았는가>와 같은 훌륭한 페미니즘 서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폭력적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녀>의 ‘사만다‘처럼 몸이 없는 편이 안심이 된다. - P142

미국의 코믹스 회사들은 영웅 민담과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일종의 아이돌 산업을 만들어 냈다. 이 서브 장르의 이름은 바로 ‘수퍼히어로‘다. - P186

가장 유명한 클리셰인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이제는 좀 그만 보고 싶은 유형이다. 이 패턴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류는 멸망하고 딱 두 사람만 남게 된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과학자(혹은 부모)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주고, 두 사람은 무너진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이 패턴은 낡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라 진즉에 탈락되었어야 할 규칙인데도, 장르 규칙에 무지한 창작자가 새로 유입될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가끔은 멋들어진 변주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부은 뻔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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