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생태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이론이 아니다. 계몽주의의 이상, 그리고 (1)지난 두 세기의 혁명적 전통이 사회적 생태론의 뿌리다. 사회적 생태론의 사회분석과 목표는 마르크스, 그리고 표트르 크로포트킨 같은 급진 사상가의 이론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그들 이론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아이디어에 근거한다. 또 사회적 생태론은 (2) 1936-37년 스페인 혁명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위대한 혁명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론이다. 한편 사회적 생태론은 제 사상의 신자유주의적 개량 내지 구역질나는 온건중도주의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좌파 전통을 욕되게 하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산업주의" 입장이 그런 행보를 보여왔다. 그리고 "탈유물적" 영성주의는  두말할 것도 없다. 탈유물론적 영성주의는 에코-페미니즘, 라이프스타일 아나키즘, 심층 생태론, 그리고 소위 "사회적 심층 생태론" 내지 "심층 사회 생태론"에 의해 조성되었다."  

 
"지나치게 단순한 이념인 "에코-아나키즘"과는 달리, 사회적 생태론은 친환경적으로 구성된 사회란 (3) 과거로 돌아가는 형태여서는 안 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 생태론은  전자처럼 원시적 삶, 내핍 생활, 극기 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4) 물질적 향유와 여유를 강조한다.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5)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문명 창조와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려면 지적, 문화적 자기 계발의 여유가 필요한데, 삶의 이런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술과 과학을 거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행복과 여유 창조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생태론은 배고픔과 물질적 궁핍의 생태학이 아니라 (6) 풍요의 생태학이다. 요약하면, 사회적 생태론은 일정한 계획과 관리의 중요성, 또 민회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각종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코 개인의 이탈행동이나 기행같은 멋대로의 행동을 예찬하지 않는다."

 

 

좀, 따분하죠. 이론적인 글이라 더욱 그렇죠!!! 이래서 지성을 믿으면 안된다나봐요. 그래도 잘 따라오셨잖아요. 중산층, 소부르주아와 함께 가야한다구요. 혹시 당신이 근본 생태주의자라구요. 그럼 더욱 잘 되었군요. 진 녹색이라?? 그렇다면 논쟁까지 마다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근본종교주의....그래도 알고 생각 엿들어보는 것도 괜찮겠죠.  북친씨는 이렇게 물었죠. 지구에 인간이 필요없다면 환경만 지키고 필요하다면 인간을 없애는 것이 논리상으로 맞지 않느냐구요. 이런 모순에 빠져드는데 정말 당신의 순수한 열정에 의문을 품어달라고 했죠. 아마 그 책이 Social Remanking 이었죠. 이후 북친씨는 이론과 사상을 좀더 발전시켰다고 하네요. 한번 들어나보죠.

 

첫째 크로포트킨, 둘째 스페인혁명의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스트의 역사적 경험을 풍부하게 수용하는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세번째가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데요. 어떠신지요. '배 위에서 뛰어내려라!"라고 하나요. 잘못 이해했나요. 과거로 돌아가야한다. 모든 관계를 끊자라고 하지 않죠. 엔진을 꺼야한다고 하지 않아요. 네째, 다섯째, 여섯째 과학기술을 적극활용 하여야 된다. 물질적 여유와 풍요의 생태학이라고 하네요. 어때요. 당신이 갖고 있는 논리나 생각틀에서 벗어나나요. 양립할 수 없다구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면 다 꼬리표를 붙이시나요. 아니면 누구에게 물어보셔야 하나요? 그대로 서로가 부합하는지 곰곰이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안될까요?


북친씨!  오랜만에 뵈니 잊고 있던 거 있죠. 당신이 민회와 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과 매개와 역할로서 과학기술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태론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겠죠. 더 많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다음에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께요. 당신이 생각하는 과학기술하며, 풍요와 여유에 대해서도 말이죠. 조금 흥미로워지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가죠. 오늘 급히 달렸네요.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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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들은 오래전부터 모든 정부를 곧 국가로 간주하여 비판했다. 모든 종류의 사회 조직을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지만,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국가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계급이 피착취계급을 규제하고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임이 분명하지만, 정부 내지 정치polity는 협의가 필요한 삶의 문제를 평화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의 총체이다. 공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모든 제도화된 협의기구는 국가의 존재여부와 무관하게 정부의 형태일 수밖에 없다. 한편 모든 국가는 응당 정부의 한 형식이긴 하지만 계급 억압과 통제를 위한 폭력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게는 공히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피압박 민중들은 수세기에 걸쳐 군주, 귀족, 관료계급의 횡포에 저항하여 헌법의 제정을 요구했고 입헌 정부의 수립, 심지어 법률과 규범의 제정을 요구했다. 그뿐인가. 이를 문서로 공식 천명하는 운동을 해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리버테리언들이 정부 자체를 반대하고 심지어 법률까지 반대하는 것은 자기 꼬리를 삼키는 뱀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국정운영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상호 반대되는 긴장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들은 계속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는 국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특권 계급의 이해관계 아래 시민을 지배하고 시민을 손쉽게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기구이다. 반면 정치란, 그 말 뜻 자체가, 자유 시민이 공동체의 일 처리와 자유 수호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1790년대 프랑스 혁명가들이 일컫던 시민주의의 구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라는 단어 자체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 이 말은 늘 민주주의와 함께 사용되는 가운데 시민에 의한 도시의 직접 지배를 의미하였다. 그러다가 수 세기에 걸쳐 이런 시민참여의 정치가 퇴락하고, 특히 계급이 형성되면서, 필연적으로 국가가 등장하고 그 국가에 의한 정치 영역의 침식과 합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국정운영과 정치, 국가와 정부 그게 그거 아닌가요?  국정운영 잘 하면되고, 정치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구요. 하지만 북친씨가 토를 달죠. "정치란 자유시민이 공동체의 일 처리와 자유 수호에 적극 개입한 것"을 말한다 잖아요. "시민참여의 정치가 퇴락하고, 계급이 형성되면서 정부의 기능도 국가의 시녀역할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듯하네요. 그런데 북친씨의 지적처럼, 그  결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해본 적도 없어 대응도 천변일률인 것이 진보의 관행인 듯 싶은데요. 아닌가요? 민주진보세력이 있기나 한지? 집권에만 관심이 있어 잔잔한 변화의 키는 갖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이리저리 유행처럼 쓸리고 쓸려가는 것이 정치인 것처럼 말에요.  "정부 내지 정치polity는 협의가 필요한 삶의 문제를 평화롭고 공정한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의 총체이다." 공무를 처리하는 시스템으로서 정부나 정치에 대한 구분을 할 필요가 있고 집요한 관철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여기지네요. 그런면에서 세세히 그 구조와 시스템, 관행에 대한 여러 제어기능에 대한 살핌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싶네요. 당연히 해야되는 것이나 해줄 것으로 아는 것. 권력과 실행의 문제는 다른 것, 국정운영과 정치는 별개로 구분해서 이슈를 살리고 만들어가야 함에도 오로지 한가지 문제로 뭉뚱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소비자로서 상품의 미묘한 차이는 구별하지만,  정치와 국가폭력을 구분해지 못해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자기발등을 찍는 것이 일상이잖아요. 살려야 할 것은 2트랙이든 3트랙이든 정치란 고기맛이 부위별로 차별화되면서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되는 것 아닐까요? 소비자로서 미묘함은 정부와 정치의 미세함으로 넘어서서 그 굵직굵직한 질곡, 거꾸로 자본으로 수혈하는 정책과 정치들을 말라버리게 해야되는 것은 아닐까요? 진보는 구분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가는 길을 뚜벅뚜벅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진보의 로드맵은 정치나 정부의 설계도에서 공용이나 공유하는 부분이 정말 많은 것은 아닐까요?  30년뒤, 20년뒤, 10년뒤의 지점부터 거꾸로 거슬러올라오는 시나리오를 서로 쓰다보면....같이 쓰다보면....큰정권의 길도 좋지만 작은 숨결같은 작은 정치의 길들을 서로 샘나게 그리는 일들... .... 이렇게 하면 북친씨!!  조금 마음이 놓이나요?? 알아들어 먹은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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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인간관계만을 점점 더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한때 그것에 반대했던 바로 의식마저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자기 궤도 내로 흡수해 버렸다. 일찍이 샤를 푸리에는 한 사회가 문명으로서 갖는 위상은 그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오늘날의 모습을 보며 한 가지 더 첨가한다면, 한 사회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퇴락하였는가는 그 사회가 신비주의와 절충주의에 얼마나 빠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준들을 적용해 볼 때, 20세기 끝무렵의 자본주의 사회만큼 한때 급진적이었던 저항세력을 철저하게 변질시킨 사회는 없다."

 

하이! 북친씨! 오랫만이죠.  꽤나 떨어져 있었네요. 그렇다고 마음까지 떠나 있던 것은 아니니 이해해주세욧!! ㅎㅎ 이렇게 딱딱하게 시작하면 안되죠. 사실 부드럽고 예민한 분을 이렇게 덥썩 선입견을 갖게 만들면 안되는데... ... 그래도 가진 것이 시간이니, 시간맷집을 감안하여 가보죠. 씩씩하게 말에요. "자본주의가 의식마저도 자기 궤도로 흡수해버렸다." "그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사회의 위상을 알 수 있다."라고 하셨네요. 덜컥!  떨리네요. 겁도 나구요. 가부장에다가 집밖으로 돌고... ... 할 말이 없기도 합니다. 그림자노동에다가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모습하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신의 삶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는 것은 아닐까요. 잘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만, "신비주의와 절충주의에 얼마나 빠졌는가?"란 문화적인 측면도 말씀하시는군요. 그래요. 이 사회가 꿈마저 비슷하게 꾸게 만들었다는 사실, 무의식마저 그만그만 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그래서 다른 삶, 다른 일상, 다른 꿈, 다른 생각조차 용인도 못하고 헐덕거린다는 사실 말에요. 신은 오간데 없고, 대형마트처럼 커져만 가면서 죄를 사해주는 의식으로 일주일간 일용한 양식을 구하시고 말에요. 너무 심한가요. 문화적 퇴락을 이야기한다면 짚어야하겠죠. 가족에게 아이들은 동일한 인격체가 아니잖아요. 대리물이자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해주는 발현체는 아닌가요? 암묵적 구속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훈계가 스며들어있죠. 더 열린 듯 하지만 고립을 자초하게 만든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라고 정리해도 될까요?   길어졌네요. ㅎㅎ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가죠.

 

"세상 사람, 즉 대중도 과거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변하고 있으며 향후 수십 년간은 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하고 있는 변화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롭고 광범위한 모순들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지난 두 세기 동안 거의 모든 혁명운동을 실패로 이끈 치명적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혁명운동이 과거로부터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광범위한 중산층을 설득하여 새로운 민중적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불만에 찬 소부르조아의 도움 없이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시도는 일말의 가능성도 갖기 어렵다."

 

이건 또 뭡니까? 중산층을 설득하여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야 한다니? 소부르조아의 도움없이는 어떤 사회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다니 말에요.  아~~  잠시 생각 좀  하다 돌아올께요. 여기 그냥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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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보다 창조를 추구하는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근원적인 행복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복은 적대적인 환경이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서가 권하는 삶의 방식이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찍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찾은 이들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외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장애와 압제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끌어모아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정치 및 경제를 개혁하여 세상을 재창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개혁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저절로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낼 기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세상은 창조적 정신이 살아있는 세상, 삶이 곧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한 모험인 세상이다. 그 세상의 토대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지키려는 욕구나 타인이 소유한 것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창조적 충동이어야 한다. 그 세상에서 애정은 대가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연애는 지배 본능을 벗어던질 것이며, 잔인성과 시기는 행복한 삶을 일구고 그 삶을 정신적 환희로 채우기 위하여 자유롭게 진보하는 모든 본능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한 세상은 실현될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사람들이 마음먹고 만들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러셀씨, 이제 말씀 마무리짓죠. 혹시 당신을 행복 만능주의자, 나에게 모든 행복이 있다라고 오해하실 분들도 있는 것 같아 덧붙입니다. 또 얼마나 당신이 유연하고 열려있는지에 대해서도 보여줄 것이 있어야 될 것 같아 남깁니다. 해석은 러셀씨를 허겁지겁 따라 온 길을 더듬으면 오해가 이해로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따라오신 분들께 감사!!  러셀,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만나요. 안녕!!

 

 

"생디칼리슴과 집산주의와 아나키즘의 목표는 모두 현재의 경제적 위계 및 사적 소유 전반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산주의는 모든 이의 소유를 지향하고 아나키즘은 무소유를 지향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소유를 지향한다. 따라서 생디칼리슴은 사회주의가 설파한 경제이론 및 계급투쟁론을 순전히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입장이다. 생디칼리슴은 집산주의가 의존하는 대의제 정치 활동을 완강히 거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아나키즘과 다른 점은 사실상 행동의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순전히 상업적인 활동으로, 생기도 기쁨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소수를 배불리는 활동 대신 전국 길드와 함께 일하자. 노동을 돈으로 사고파는 대신 책임감을 갖고 일하자. 오늘날 끔찍할 만큼 비대해진 국가와 주식회사의 관료주의 대신 자치 정부와 권력 분산을 추구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동의 기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양만 아니라 질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중세 시대를 연상케 하는 케케묵은 표어도 있고 '노동의 기쁨'같은 표어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표어를 믿고 따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집산주의의 철학, 즉 노동은 결코 즐거워질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노동자의 유일한 희망은 소소한 오락거리를 한가득 안고서 더 길게, 더 풍요롭게 누리는 여가 시간뿐이라고 단언하는 그따위 철학에 영원토록 굴복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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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 과정에 따르는 고통은 외과수술에 뛰따르는 통증처럼 안타까워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폭력 충동에 이끌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삶이 아니라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조치는 범죄자의 시야 및 욕망의 범위를 넓혀 주는 것이다....부자가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대개의 경우 빈민이 저지르는 한찮은 범죄보다 사회에 더욱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간다.... "

 

 

러셀씨, 음 지당하신 말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삶이 아니라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수 있다.' "예방과정에 따르는 고통은 외과수술에 뒤따르는 통증처럼 안타까워 해야 한다." 이러기에는 부자다운 부자가 없죠. 경주 최부자집의 6연이란 철학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원칙이라도 있어야 할텐데 말이죠. 부자나 부자가 되고싶은 이들은 모두 한가지 원칙, 돈이면 다다라는 것만 있네요. 한 세대를 통해 무지막지한 부가 축적되었어도 빈민의 나락은 대물림된다죠. 이 세상은 러셀씨가 말한대로 부자에겐 더 부자가 되도록,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하도록 만드는 일만 하는 것 같군요.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서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수 있다"라는 말은 지금 살아지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겠죠.

 

러셀씨는 말했죠.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많은 것을 움직이게 한다. 이기심을 더 자극하고 그 충동들을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써라! 마음껏 이기적이어도 좋다. 삶, 살아가는 기쁨과 교집합이 있다. 이것이 일상과 삶을 더 윤택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부자들도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삶을 통해 그토록 벌고 싶어하는 돈을 많이 오랫동안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아질까요. 

 

달동네의 반경이 여기저기 점점 커지고 오랫동안 그늘을 드리운다죠. 치고 볶고 싸우고 따듯한 손길이 그리운 곳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 세상이네요. 범죄는 더 날카롭고 예리해지고 있다죠. 예전처럼 볶고 지지는 따사로운 온기가 사라지고, 고통은 완충되지 않아 햇살은 늘 양지만 쬐이고 있다죠. 고통이 있다는 사실. 예방적 고통이 필요하다는 사실. 너무 고통을 외면하고 대면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 통증이 제대로 전해지고 나눠질 때만이 그래도 나은 해법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고통마저 발굴해내야 하는 시대는 아닌가요?

 

러셀씨의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은 검찰과 경찰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어요. 부를 쌓으려고 저지르는 악행은 못본 척하거나 더 옹호하면서, 하찮은 범죄에는 너무도 인색한 지금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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