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너'의 고민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고민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대부분 시간이 지나도 '고민'은 자라지 않는다.  그때 한 이야기나, 그때 사로잡힌 고민에서 맴돌아 벗어나지 못한다. '너'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너'로 향하고 있지 않으니 늘 잘나간 '한때'에 머물러있다. '나'를 푸념하고 싶기만 하다.  고민도 일상도 삶마저 저당잡혀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줄 수도 나눌 수 없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또 너에게 귀기울이고 몇년전에 했던 얘기를 또 기억해내야 하고, 십년도 더 우려먹던 이야기를 챙겨줘야 한다. 너에게 마음을 기울인다. 쫑긋 너로 빨려들어가고 싶다. '한때'에 사로잡힌 쇠스랑을 끊어주고 싶다. '나'의 우울도 '너'의 우울도 이해하지만 '과거'를 사는 '너'가 더 자라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 때로 분노가 치민다. 앎도 지혜도 삶도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해  머리만, 몸만커져 남보다 낫다는 '너'를 끊고 싶다.

 

'너'는 오늘도 너'만'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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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저자, 강연자, 연구자 그리고 대중 사이

 

책을 내지만 사람들은 책을 보지 않는다.  저자는 강연을 하되,  대중은 책의 깊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많되 소통하거나 연구실적을 나눌 길이 없다. 학회는 있되 학회에서 듣는 사람은 전문? 연구자들만 있다. 학회지는 많지만 학회지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있더라도 관련분야 밖의 독자들은 없다. 나눌꺼리는 많지만 사이 사이 층은 얇고 모두 떨어져 있어 연결되지 않는다. 말하게 하는 법, 알고 있는 것 밖의 것을 연결하는 법, 책 속의 것을 질문하는 법, 아는 이를 끌어내는 법, 얇고 얇은 벽 사이를 관통하는 일들. 그런 시도나 실험, 기획. 진짜 삶문제를 잘 추스려내는 일. 맥락에 있는 분들이 서로를 확인하는 일. 모여 같이 기대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을 불어넣는 일. 한두번의 시공간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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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 다'  연구(所) 스케치

 

 

"환원주의의 맹점들을 드러내며, 서로 경계를 트고 이을수록 나아지는 점을 실사구시로 증명해낸다. 일상에 있어서도 그 벽을 허무는 작업이 얼마나 유용한가? 시간에 강한가를 분석해낸다. '없다'비평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시간이 함유되는 연관된 틀로 생생하고 종합적인 분석을 해낸다. 창의적이고 창발적인 시도, 접근, 시험을 존중하며, 그 결과들과 과정이 사람의 틀과 격을 통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연구해낸다.  주류보다는 비주류, 정상보다는 정상외의 삶과 권리도 평균적인 삶, 상식의 삶과 동일하다고 여기며 끊임없이 경계를 살펴, 주류 주도의 문제점을 제기해낸다. 지금여기의 고통, 그 아픔의 최소화를 지향하여 온몸으로 존재이전을 통해, 아픔의 고갱이를 얻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평과 연구의 잣대로 쓰이도록 한다. 늘 다른 관점, 다른 시점의 비평과 분석을 요구한다. 비평이 고정화되어 있지 않으며, 아픔의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열어둔다. 비평과 연구는 다시 만들어지고 수정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볕뉘.  꽃대공은 올라오고 꽃이 필 때가 마음의 겹눈에 들어오는데, 꽃의 그림자는 벌써 보이기 시작한다. 꽃밭에서 챙길 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뫔을 오랜동안 주어서, 너무 오래 마음을 써서 마음도 몸도 닳아버린 듯하다. 머무르지 않는 곳, 또 다른 시선들을 잇는 일들이 점선에서 점점 짙어진다. '있다'라고 여겼던 것이 애증만큼 짙은 듯싶다. '있다'의 뒷면 '없다'가 훨씬 빠른 지름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긴 시공간동안 '있다'에 목이 매였다. '뚝',  꽃을 꺾다!. 마음을 꺾다! 시듦을 예방하러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끔 존재의 단절은 더 많은 것을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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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두루' 보고 느끼려는 것이  어떤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는가

 

 

 

1. 전체사, 전체성, 전체를 보려하는 것


- 경제로만 판단하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의 관계 속에 판단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경제의 전일적인 과학으로 판단하게되면 자본주의는 여러 관계 속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일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 루이스 멈퍼드가 경계한 것은 기술과 과학으로만 보게 되면 신석기 시대와 중세 등 일련의 과정이 기술발달에 국한되게 되어, 실로 수많은 과정과 작은 혁명들을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종자개량이나 가축, 대중목욕탕, 공원 등 일상과 연관된 무수한 과정의 혁신이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과 연결된 문양과 예술, 관계도 뭍히게 되는 것이다.


- 전지구적인 것은 전지역적인 것이 되어 지역에 전지구적인 것의 정치적 과제가 흘러넘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정치인은 해결해야할 과제를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지만 점점 더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경고한다.

 

-

 

 

2. 전체를 보면 다시 보이게 되는 부분


- 시장경제는 교환가치의 실현으로 문턱을 넘게 된다. 자급자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삶의 방편인 것이다. 시장경제의 큰 흐름에 독점과 권력의 특이한 형태가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다. 전일적이고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뒤늦게 자리를 차지하는 밤의 손님, 특이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삶에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급자족, 호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그대로 의미를 갖고 관계를 유지하고 삶을 이어나간다는 점이다. 

 

- 자본주의가 딛고 서있는 자리에 숱한 빈 공간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고 처리하고, 비만과 병치료, 재해로 인한 추가 교환의 그물에 거래의 그물에 잡혀야만  자본이 말하는 성장의 안테나에 잡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화되고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다양한 방법과 그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 만들 세계는 상상력과 고정된 생각밖의 시도만큼이나 많을 수 있는 것이다.

 

- 칼폴라니의 embeded의 개념


- 기술은 본래 삶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 속에서 세대라는 시간을 갖고 삶 속에서 개발된, 삶과 붙어있는 기술이 본래 더 많았던 것이다. 예술도 그런 삶과 사람의 켜를 바탕으로 자라고 밑바탕의 근육을 키워나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삶으로 되먹임된 것이다.


- 노동은 없다. 사람이 기술과 자동화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화화되었고 기술의 고삐를 사람이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도 그러하다. 기술과 과학을 사람의 프리즘으로 통과하려는 기술과 노력은 어디에도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과 과학은 발전하고 신장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조련하는 기술과 과학은 존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정상과 주류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주류와 비주류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려고 하지 않으며, 여전히 정상성에 사로잡혀 무한반복을 외친다.

 

 

3. 왜 없다고 안된다고 해야 하는가


- 희망, 노력 모두가 좋은 말이다.

 

- 전태일이 있다보다 전태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노동과 노동사이를 올바로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자리, 노동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자리는 없다.

 

- 노동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팽개쳐지는 삶, 쫓겨나는 삶, 비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그래도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온몸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 신자유주의라고 뭉뚱그리는 순간 얼마나 많은 고통도 하나로 버무려져 해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이 되는가를 느껴야 한다.

 

-

 

4. (3)의 가정에 따라 사유하게 되면 어떤 시야가 생기는가

 

- 쓸데없는 희망처럼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운 것이 없다. 현실은 물밀듯이 쓸려오는데 그래도 아니라고 다짐에 목숨을 내놓는 것.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다시 생각하지 못하는 것.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 막을 수 있는 방편이 아니라, 삶의 다른 길도 갈 수도 있다는, 그래서 결국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열명에 한명은 살아간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가지지 않은 것보다 낫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삶의 저주의 나락만이 아니라 그래서 좌절과 약물과 고통만이 아니라 패배자가 아니라는 인식만 얻는 것이 아닌 것보다 낫다. 밀려오는 분노와 악다구니를 모두 남에게 퍼부어버린 결과와 원인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만이 이 고통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헛된 희망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지금 여기'를 다시 살피는 일, 지난 사유의 헛점을 되짚는 일. ...

 

 

볕뉘. 시간이 되면 살을 덧붙여야겠지만, 겨울 바람이 쓰라리다. 아이러니의 시대다. 소통할수록 소통할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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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서울행, 잠깐 외박휴가를 나온 차니와 만나 차한잔, 책한권을 건네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연극을 한편 보다. 체홉을 그냥하기는 좀 그렇고란 부제가 붙은 배꽃동산을 본다. 홍상수의 영화느낌이 물씬나는데, 이 작품도 속물근성을 그대로 대면하고 응시하게 한다. 곳곳에 장치를 마련해두는 재주가 대단하다. '예술이란 통찰력과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의지, 즉 제시력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라는 대사에 끌려 얘기를 더 나눈다. 그리고 배우와 연출자를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홍상수란 그물에 걸리지 않으면서 나는 법을 배우기란 참 쉽지 않다. 속물의 흡인력은 지고의 윤회같은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도 파닥, 약한 그물을 찢고 난다. 예술이 제시력으로 꽃피듯이 일상도 관통하는 의지로 뚫고 나가야하는 것들이리라.

 

 

 

원작은 벚꽃동산 ▼

 

 

 

 

펼친 부분 접기 ▲


 

일상들이란 무엇일까. 일상의 힘은 무엇일까. 좌초되지 않으면서 삶과 꿈을 부단히 잡으려는 노력들도 작품들 곳곳에 숨어있다. 그 흔적들에서 읽어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면하여 있는 의지들과 장치. 보려던 루이스 멤퍼드를 건넨다 - 기술과 예술, 그리고 삶 열정은 본디 하나라는 것이라고 전한다. 어쩌면  통찰은 늘 등잔밑에서 잘보이지 않게 가까이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볕뉘. 애석하게도 마지막 공연이었다. 계기가 되면 다른 곳에서 다시 보고 싶다. 희곡집도 살펴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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