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을 발견한 베르크손은 이제 모든 것을 진정한 존재인 <지속의 상하>에서 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시론>>은 자유의 문제를, <<물질과 기억>>은 심신관계를, <<창조적 진화>>는 우주와 생명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행동의 문제를 지속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시도들이다. 그 결과 전통적 형이상학은 완전히 뒤집힌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그것은 서양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311

 

그의 운동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로 지속인데,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운동하여 자기동일성을 잃고 변해 버렸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을 말한다. 사실 모든 운동은 항상 필연적으로 타자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운동을 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은 그러한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운동이다./ 설탕이 물에 들어가 녹아들어가기까지 시간, <> 자체가 시간이다./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 생명 또는 순수지속이라 부른 것이다. 비결정성 자체의 자기동일성은 한사코 유지하는 비결정성이다. 필연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여 자신의 비결정성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는 비결정성이다. 비결정적인 것은 비약한다/베르크손은 그것을 <생의 비약>이라부른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라는 것이다./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313-315

 

시론의 배경

 

내가 출발한 것은 과학적 시간 개념이었지 절대로 심리학이 아니었다. 심리학에 도달한 것이지, 거기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지속을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의 밖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순수 지속을 살고 거기에 다시 잠기는 것이 나에게만큼 모든 사람에게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몇 해가 걸렸다. 322

 

<<물질과 기억>>에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실어증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5년간 실어증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제논의 역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역설을 깰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지성의 가장 근본적인 착각을 깨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사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방도도 그의 손에 쥐어졌음을 의미한다. 324-325

 

모든 과학적 발견과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걸음걸음마다 우연이 개입한다. 아니, 그런 발견을 한 사람들의 탄생 자체가 우연이 아닌가. 오묘한 것은 그러한 우연이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326

 

시론의 내용

 

1<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이 장 전체는 깊은 감정들, 미적 감정, 도덕감, 근육의 힘쓰기, 주의, 격렬한 감정들, 정조적 감각들, 표상적 감각들, 정신물리학의 순으로 의식의 심리상태들을 하나씩 분석해 가면서, 의식의 각 상태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질과 양을 혼동하는지를 구명한다. 329

 

1. 우선 깊은 감정의 부분에서는 욕망, 희망, 기쁨, 슬픔 등을 분석한다.

2. 미적 감정에서는 우아함의 느낌과 아름다움의 느낌을 분석한다. - 하나의 감동은 수많은 사실들이 녹아 있는 유일무이한 어떤 상태이며, 예술가는 그렇게도 풍부하고 개인적이며 새로운 세계 속으로 우리를 단번에 끌어들인다. 그것의 풍부함에 의해 우리는 예술의 깊이를 말하며, 그러한 각성상태들은 또한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다.

3. 도덕감으로서 연민의 감정을 분석한다.

4. 근육의 힘쓰기로 단번에 옮겨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깊은 감정과 표면적 노력의 강도에서 공통적인 정의를 찾기 위해서이다.

5. 주의는 단지 정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운동을 동반한다. 긴장이 더해감에 따라 압작, 피로, 고통 등으로 면적을 넓혀가거나 성질을 바꾸는 근육 수축의 느낌이 된다.

6. 격렬한 감정들(격렬한 욕망, 분노, 사랑, 증오 등)은 영혼의 긴장성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 관념에 따라 전체가 조정되는 근육 수축의 체계라는 점에서 주의의 노력과 본성상 차이가 없다. 이는 비반성적 관념인 것만이 다르다.

7. 감각은 쾌락과 고통의 감각인 정조적 감각과 표상적 감각으로 나눌 수 있다.-감각은 자유의 시작이다. 그것은 미래 행동의 선택지를 밑그림으로 그려 보여줌으로써 자유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쾌락과 고통의 감각은 미래로 향하는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견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바로 그 고통에 동조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다....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라는 명령이라면,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다.

8. 정조적 감각이 거기에 수반되는 신체적 반응 운동에 따라 강도가 평가된다면, 표상적 감각도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정조적 요소를 지니며 따라서 거기에 동원되는 신체적 반응에 의해 그 강도가 평가된다.

9. 정신물리학......1장에서는 결국 의식의 상태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에 양을 집어넣거나 결과에 원인을 집어넣어 해석한 결과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2<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지속의 관념>

 

1. 수적 다수성과 공간: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지만, 그 단위들은 모두 동질적이며, 동시에 동일한 공간 위에서 장소만을 달리하여 병치되어야 한다. 수를 시간 속에서 셀 때도 하나하나 세어 갈 때마다 항상 지금까지 센 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켜야 한다. 결국 수의 관념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 수의 단일성은 이미 다수성을 내포하는 단일성이다. 또 각 단위들의 단일성도 이미 그 단위들이 무한히 나뉠 수 있다는 관념을 내표하고 있다.(분수가 될 수 있다.)

2. 공간과 동질적인 것: 텅 빈 동질적 장소를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또는 지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공간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공간을 동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공간 속의 사물들은 불가입적이며 상호 회재적이지만, 의식의 사실들은 상호 침투적이며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 따라서 동질적 장소로 생각된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라, 순수 의식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투한 사생아적 개념이다.

3. 동질적 시간과 구체적 지속: 순수한 지속은 우리 자아의 각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율의 음들처럼 서로 속에 녹아들어가 상호 침투하여 내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를 이룰 때를 말한다. 그때인 자아의 상태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순수 이질성이며, 부분은 전체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4. 지속의 측정 가능성: 순수 지속의 <질적 다수성> 또는 <구별되지 않는 다수성>은 수적 다수성이나 동질적 장소 또는 측정 가능한 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 이질성이며, 따라서 측정할 수 없다.

5. 운동의 측정 가능성: 내 속에서는 의식적 사실들의 유기적 조직화와 상호 침투 과정이 계속되며, 그것이 진정한 지속이다. 결국 자아 속에는 상호 외재성이 없는 계기만 있으며, 자아 밖에는 계기 없는 상호 외재성만이 있다....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것인 한 정신의 종합이자 심리적이며 불가분적인 과정이다. ..의식이 그 이외의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정신이 계속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종합, 즉 선율의 통일성과 흡사한 종합니다. 바로 그러한 질적 종합이 운동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6. 엘레아 학파의 착각: 엘레아 학파의 역설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킬레스가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뉠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공간을 단번에 지나가는 그의 운동은 나뉠 수 없다. 그러한 운동 그 자체를 공간과 혼동하여 공간처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논의 역설이 생긴다.

7. 관념과 동시성: 과학은 시간에서 지속을, 운동에서 운동성을 빼고서야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8. 속도와 동시성: 아무리 좁은 간격을 취하더라도 수학이 자리잡는 곳은 항상 양 끝점이므로, 그 사이의 간격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9. 내적 다수성: 의식의 다수성은 <질적 다수성>이며, 수와 공간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도무지 셀 수가 없다.

10 실재 지속: 상징적 표상이 아니라면 동질적 장소라는 형태를 띨 수 없는 자아는 동일성과 특수성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가짐으로써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띠게 되고, 특히 그 양자가 결합하는 공간 운동의 도움을 받아 동질적 시간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11 자아의 두 측면: 의식적 삶의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비인격적 자아의 이면에, 한없이 움직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이며 살아 있는 자아가 있다./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339-345

 

3<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자유>


1. 물리적 결정론: 생명현상은 비가역적이다. 물질들은 영원한 현재에만 머무르지만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나 의식적 존재에게는 덧붙임(과거가 자꾸 불어나니까)이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347

2. 심리적 결정론: 그 이전의 의식상태가 이후의 의식상태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장미의 향기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억 자체를 마시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불변하는 장미의 향기가 있고 거기에 기억이 연상된다는 것은 그것을 공간화한 것이며, 앞장에서 말한 병치의 다수성과 상호 침투의 다수성을 혼동한 것이다. 348

3. 자유로운 행위: 사실 자유로운 행위는 드물다. 우리의 일상적 행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느낌들 자체에서 얻는다기보다는 그러한 느낌들이 붙어 있는 의식 표피의 불변의 상으로부터 얻는다. 우리의 감정, 감각, 관념들이 기억 속에 응고되어 우리 행동의 기저를 형성하며 많은 경우 우리는 자동기계처럼 행동한다./갑자기 의식의 심층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날 때도 있다...그것은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인격 전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350

4. 실재 지속과 우연성: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망설이는 자아일 뿐이고, 자유로운 행위는 거기서부터 과일처럼 떨어지는 것이다....우리의 의식 상태를 X,Y라는 도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시간을 공간으로, 계기를 동시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도식을 제거하면, 결국 결정론은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자유론은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의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351,352

5. 실재 지속과 예견: <모든 전건을 알면 후건이 도출된다> 이런 논의의 밑바닥에는 반성적 의식의 착각이 깔려 있다. 첫째는 강도를 고유한 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특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구체적 실재, 즉 의식의 동적 진행을 완성된 사실의 물질적 상징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착각은 시간과 공간의 혼동이라는 마지막 착각에 기인한다. 353

6. 실재 지속과 인과성: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리고 근대 물리학은 모두 원인과 결과 사이에 논리적 필연성을 확립하고, 지속의 작용을 파기하여 계기의 관계를 내속의 관계로, 외면적 인과관계를 근본적 동일관계로 환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필연적 결정의 관계로 만들려고 할수록 지속의 작용은 배제된다. 355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가 수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은 분해되지만 지속은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하려면 그것을 고정시켜야 하지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진행은 사물로 지속은 연장으로 그리고 자발성은 타성으로, 자유는 필연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357

 

결론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인 장소로 간주한 것이다. 지속과 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자유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롭고 실재하는 자아를, 지속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식능력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또 시간이 동질적이라면 동일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인과성은 필연적 결정이 될 것이므로 자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칸트는 거기서부터 지속과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유를 시간 밖에, 즉 우리에게 입장이 금지된 물자체의 세계로 넘겨 버렸다. 358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독특한 삶의 입장에 선다면, 즉 동적인 통일성과 질적 다수성의 구체적이고도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359


볕뉘


읽지 못한 해설이 삶의 이력 배경과 요약이 잘 되어 있어 옮겨놓는다.


요약 ▼

 

제시해주신 텍스트는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의 철학, 특히 그의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지속(durée)'**과 **'자유'**의 개념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을 5가지 주요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 '지속(Duration)'

  • 지속이란? 시간이 단순히 시계 바늘처럼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선율(멜로디)처럼 앞뒤 상태가 서로 침투하며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질적인 흐름을 의미합니다.

  • 자기동일성의 유지: 운동하면서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나'라는 본질을 잃지 않는 운동이 바로 지속입니다.

  • 생의 비약(Élan Vital): 물질의 필연성(정해진 법칙)을 극복하고 비결정적이고 자유로운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힘입니다.

2. 공간과 시간의 혼동 (지성의 착각)

  • 공간화된 시간: 우리가 흔히 쓰는 '과학적 시간'은 시간을 공간 위에 나열된 점들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시간이 아닌 '사생아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 수(Number)의 함정: 숫자를 세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공간적 배치를 동반합니다. 하지만 의식의 상태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숫자로 측정하거나 양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3. 제논의 역설과 운동의 본질

  • 역설의 원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은 '운동 그 자체'와 '운동이 지나간 궤적(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 해결: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지만, 운동은 심리적이고 불가분적인 하나의 도약입니다.

4. 자아의 두 가지 측면

  • 표면적 자아: 사회 생활과 언어 소통을 위해 고정되고 정형화된 자아입니다.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자동기계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 심층적 자아: 내면 깊숙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질적으로 다르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본래적 자아입니다.

5. 자유와 결정론

  • 자유로운 행위: 자유는 심층적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입니다. 이는 분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석하는 순간 '살아있는 지속'이 '고정된 공간'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 칸트 비판: 칸트는 시간을 공간처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유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 결론: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지속 속에 머문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지속은 분석되지 않으며, 자유는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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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창가에 햇살을 받고 있는 식물들에게 물을 준다. 
































-1.


설연휴에도 일들이 생겨 일터를 간간히 나오고 있다. 어제는 설 당일이라 쉬자하고 그제 종료지점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왔다. 하지만 오늘 아아를 픽업하고 오니 현장 입구에 지게차가 있다. 무슨 일이 없어야 하는데. 확인해보니 설 전일 퇴근하고 난 뒤에 사달이 나서 설 당일 내내 보완수리를 했다한다. 


예상한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않고, 그 틀 안에서 깨우침들은 번진다. 방법만 몇 가지를 바꾸었어도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을 확률은 높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방법들이 길인지는 깨우치지 못한다. 스스로 그 길도 가보지 않고, 자신이 뒤늦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몇 가지 우려가 있어 이 경로들도 미리 매듭을 지어놓아 확산될 기미는 없어보인다. 하지만 사람 일들이란 모를 일이기때문에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다.


꼬박 한 달. 이렇게 대보수가 길어진 적은 없다. 사실 너무 피곤하다. 주말도 쉰 것 같지도 않고, 핑계삼아 한 두잔 하는 것들로도 지치기도 한 것 같다. 


-2.


지난 주말 이틀 쉬는 동안 지인들과 가족들과 만남을 갖는다. 3주 전의 만남에 이어 무척이나 시간이 흐른듯하다. 푹빠져 재독하는 맛에 들려 깊은 독서의 시간이었기도 하고, 작업에도 진척이 있어 열심히 손을 놀려 이것저것 작업도 한다. 또 다른 재료도 구매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무척 고프기도 한 나날들이었다. 


그리스철학의 완결이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였다니!!! 청년 마르크스 박사논문을 읽으면서 그 동안 갖던 의문들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23세살의 맑스와 24살에 <<루크레티우스의 초록>>을 출간한 베르그손이라는 사실도 덤으로 얻게 된다.


ktx기차로 올리브유 선물을 챙겨가는 동안, 짐은 점점 무거워진다. 백팩에 셋, 환경가방에 둘. 만만치 않다. 구석에 하나.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카페에 안착해서야 한 시름 놓는다. 그리고 책을 펼쳐든다. 유일하게 가져온 책짐은 <<물질과 기억>>이다. 투썸에서 완독해낸다. 물질과 관념이 아니라 물질과 기억의 모두에서 그는 말한다. 이원론을 너머서서 둘로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그것 이상을 알 수 있게되기를 희망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 또한 에피쿠로스의 남아있는 편지 가운데 세 편 가운데 하나에서 이 점만을 기억해달라.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나머지 것들이 다 헛갈리게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닮아있다. 


1.


아래 책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게 읽던 책이다. 아마 달팽이책방에서 시모임을 할 때이니 십년이나 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들은 뜨뜻 미지근했다. 뭐라고 소설보다 재밌다는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반응들로 간간히 출간될 때마다 전후좌우의 맥락을 살피기 보다는 그때그때 읽었다. 그래서 이 책들이 서로 뿌리를 못내렸던 것 같다. 이제서야, 책을 다시 집어들고 우겹살짬봉과 미니 탕수육을 시키고 이과두주를 한잔하며 읽지 않았던 해설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비밀을 알은 자들의 숨결같은 것들. 몇 꼭지를 읽지 않더라도 들뢰즈로 번진 것도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한다.


볕뉘


지인들과 얘기. 막내와 얘기들로 독후감의 내용이 다시금 정리되기도 하는데, 아 그래 나쁘진 않구나. 서로 나누어가면 더 더 진한 애정과 스토리들이 생기겠구나 한다. 일터도 추진 당사자분께서 잘못을 시인한다는 말도 들린다. 그렇게 매듭짓고 다시 또 가는 수밖에 없다. 매듭의 시선이 출발의 시선이 쿨하면 된다. 그래야 다 같이 갈 수 있다싶다. 더 멀리. 긴 기간이었지만 얻은 것들이 많다. 이게 성과다. 어느 한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들은 여전히 수많은 길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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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상태는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정보만으로 미래를 완전히 예측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가 과거의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23

 

아낌없이 주는 자연의 장관은 수천 년 동안의 생물학적 평화와 지혜의 산물이기보다 모든 것에 영향을 받은 대격변, 불균형 그리고 불완전한 시대의 산물이다. 83 자연사에서는 과거의 성공 요인이 오늘날의 실패 용인으로 뒤바뀔 수 있다. 85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 대멸종, 우연한 서건 그리고 어쩌면 빠르게 일어날 생태적 대격변의 형태로 우연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진화의 법칙으로 변한다. 그 결과, 이전에는 큰 혜택이었으며 자연선택으로 잘 조절됐던 것들이 약점이나 위험한 불완전함으로 변한다. 86 자연에서 불완전함은 종종 다양한 이해관계(예를 들어, 수컷과 암컷 사이의 관계)와 상반되는 선택압 사이에서 타협을 찾아야 하는 필요에서 생겨난다. 87 그 밖의 다른 환경적 요구가 동시에 중첩된다면, 다양한 기능을 지닌 적응적 특성 사이에서 불완전한 타협안이 만들어질 것이다. 88

 

다윈의 진화론은 해부학적 유사성(유전된 형태적 구조)존재 조건(외부 선택압)‘ 사이의 변증법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관성과 제약 사이,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한 환경 상황 사이에서 탄생했다. 93 불완전함은 수많은 생명체 사이의 연결고리이자 진화의 역사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고고학적 흔적으로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100 적응은 변화에 대응하는 움직이는 상태이지 완성된 최적화된 상태가 아니다. 110 자연에서 구조와 기능 사이의 관계는 중첩된다. 단일 기능은 몸속 여러 기관에 걸쳐 수행된다. 그러니까 중요한 순간에 여러 기관 중 하나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111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재사용할 수 있다는 건 최적화되지 않은(그러니까 완벽하지 않은) 구조가 자연에서 빈번하게 발견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15 우주에는 진화가 꿈꿔왔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가능성은 실제보다 훨씬 강력하다. 자연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모든 이론보다 훨씬 강력하다. 122

 

진화는 오래된 것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거나 오래된 것 위에 새로운 것을 구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 필요하지 않게 된 모든 DNA를 지워버리진 않는다. 128 치키노사우루스: 새들은 공룡에서 진화한 생명체이므로 자연스럽게 유전체 안에 공룡 특성뿐만 아니라 그 후에 비활성화된 휴면 유전자를 갖고 있다. 2009년 닭에서 격세유전 유전자를 찾아내 치아가 난 조류를 처음으로 탄생시켰다. 이는 그리 어렵지 않다. 닭의 유전체에는 여전히 공룡 치아 유전자가 보조돼 있어서,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만 추가하면 부리 안에서 다시 치아가 자라난다. 칠레에서는 닭 다리로 공룡의 다리를 재현했고, 예일대에서는 닭의 두개골을 변형시켜 공룡과 더 비슷하게 만들었다. 129 문제는 정크 DNA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당황스럽게도 그 비율은 우주의 팽창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이 추정하는 암흑물질 그리고 암흑에너지 비율과 비슷하다. 139 단백질을 구성하는 유전자는 전체 유전적 유산 중 일부 10%가 채 안되는 수준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정크 DNA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간의 유전체는 쓸모없는 정보와 잡음으로 가득하다. 단백질을 암호화해 그 결과 알려진 혹은 예측 가능한 기능을 하는 DNA의 작은 조각은 의미 없는 망망대해의 유전적 바다에서 가설 뗏목을 타고 떠다니는 것과 같다. 인간 유전체의 2% 미만만이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이며, 그마저도 상당 부분(9-18%)이 반응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공개되었다. 140-141


볕뉘


1. 


읽은 지가 꽤 지났지만, 곁에 두고 있어 밑줄을 옮겨둔다. 책 안의 내용들은 일관되어 있다는 인상이나 최신 과학흐름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잘 짚어내었다. 이런 결론들만 기억에 남고 세부내용은 다시 들추고 나서야 각인되는 것들도 있다. 양파의 유전체가 사람의 다섯 배라든가 치키노사우러스는 여러 분들에게 얘기거리로 던져서 생생히 남아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첫 장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묘사하는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이기도 해서 가장 강렬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연관해서 페이퍼를 남길까 하다 너무 길어져 이렇게 쪽편으로 남기고 있다. 


3.


과학에 대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강한 우리들이 읽어봐야할 대목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놓치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또한 과학에 얼마나 이로울 수 있는가?는 역시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신의 관점을 흔들어보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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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나는 작은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들에 대해 비웃는다. 대체 저게 무슨 운동이 된단 말이냐. 산쓰장에 있는 철봉과 도구들을 보면서도 대체 저것이 무슨 운동이 된단 말이야. 나이들어가는 나는 산쓰장과 어린이 공원에도 있는 헬쓰기구들을 보면서 아마 사연이 있을 거야 한다. 그런데 너무나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은 계속 든다. 


나이 든 나는 사연이 있지, 스포츠과학이 괜히 있겠어. 검증 받은 것일거야. 약한 밴드 운동이라고 무시하면 되겠어 한다. 속근육을 만들거나 기초 저변을 넓히는 일이 필요하겠지 한다.


주변의 지인 가운데 약한 체력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다. 다행히 복받은 체력은 부지런히 젊은 시절 하루 종일 밖에서 놀면서 지낸 효과를 보낸지도 모른다. 


러닝을 하면서 존투(젖산 생성지점)라는 용어도 알게되고, 그 영상들이 무진장 많다는 것도 알게된다. 과연 그럴까. 하체 위주의 스포츠를 즐긴 나는 쇠약해지는 상체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운동은 턱걸이 정도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산 것이다. 나이가 덜 먹은 것일까? 대체 몸쓰는 일이 그렇게 나이와 상관관계를 갖는단 말일까? 그렇게 시작한 궁금증은 그렇게 나이와 상관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깨달음이 들어오고,

지금 역시 <저강도>라는 것이 달리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팔들고 간단한 동작들을 반복하는 습관들, 힘들의 변곡점이 생기는 일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밴드로 열번 스무 번, 맨손 서른 번, 매달리기 십초 십오초 등등 중력과 일반 습관에 저항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 지점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폼롤러가 몸이나 생활 반경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거나 지나가다가 철봉에 한번 매달려보는 일, 런지 자세를 취하면서 몇 십초 버티기를 하는 일. 커피를 주문하고 대기중에 발뒷꿈치를 열 번 스무 번 들어올리는 일. 이렇게 잔잔한 모든 행위는 뭔가 다른 것으로 번질 수 있다는 몸가짐. 그런 것들이 몽글몽글해진다는 것이다.


책읽기. 그림그리기. 서예. 선하나 긋는 일이 아무 일도 아니지만 큰 변환지점이기도 하듯이 몸쓰는 한 번의 행동이 다르게 만드는 출발점이라는 것. 그 지점이 불쑥 마음 속에 들어온다. 시공간이 뜨문뜨문 있다가 어느 순간 연결되는 것처럼, 전완근 운동기구를 들다가 빨래 건조대로 쓰이는 매달림 봉에 매달리고 출근하는 일이 보통 루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온 것이다. 이제 마음의 울타리가 놓아두거나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약한 밴드로 가슴을 펴고 열 번 스무 번. 등 뒤로 펴면서 역시 열 번 스무 번. 쭉쭉 쭉쭉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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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만의 무죄", 골령골서 이관술선생을 추모하는 고유제가 지난 해 말일(25.12.31)에 열렸다한다. 이 선생의 외손녀가 청구한 재심이 열려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


국가의 폭력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질기고 질긴 사법부의 특권은 내란재판 선고를 앞두고도 여전하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성역은 과연 어떻게 허물어져 내릴 것인가.


소설 <<랑월>>이 다시 돌아왔다. 


대전근대의 사진풍경과 산내골령골의 학살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현장이 실려있다. 대전산내평화공원 설립도 그 소식들이 알려지고 벌써  이십년도 넘은 일이다. 그 충격을 메우고 보듬는 일들은 이리 하염없고 더디기만 하다. 


전쟁의 칼날은 여전하다. 


아직도 인류는 반성을 모르는 짓들을 얇은 막의 지구 위에서 인간 동물 식물 생물들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만 잘 살아야 한다면서 국가는 남을 악마화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돌아보지 못한다. 


여전히 현실이기만 지금이 안타깝다. 차분한 독서로 또 다른 평화의 물줄기가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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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정말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네요ㅜ.ㅜ

여울 2026-02-13 14: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더 안타까운 건 늘 반복된다는 사실들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