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에게서 시작해보자. 그에게 생성은 시간과 동의어이다. 시간은 작용한다. 작용하는 시간은 족적을 남긴다. 시간의 족적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시간의 작용은 곧 창조이다. 352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은 본질이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측과 반복이 가능하다. 반대로 자신보다 상위의 힘에 종속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사건은 각자가 최초로 세상에 던져지는 한에서 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측가능하기는커녕 자신의 독자성과 더불어 생겨나고 또 그렇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세계에 단 한 번 주어진다. 일회성과 현존재성이 바로 그것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352

 

이질적 사건들은 전개되면서 단지 흩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나름의 틀로 어렵사리 인식할 수 있는 경향들을 보여 분다. 경향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필연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발성이 어떤 방향성을 띠고 집적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들의 축적이 곧 기억과 역사를 이룬다. 역사는 생성의 운동이다. 353

 

창조로서의 시간의 또 다른 특징을 이루는 것은 생산적 순환성이다. 사건들은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복수의 사건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무언가는 되풀이되고 다시 돌아온다. 기억과 역사는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정한 경향들로 응집되면서 스스로를 자신 안에 반영하는 자기지시적체계를 이룬다.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다양체 또는 잠재성의 현실화 도식은 바로 이러한 복잡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잠재성의로서의 초의식은 상호침투하는 무수한 경향들을 내포하며 생명적 약동의 폭발을 통해 현실화된다고 가정된다. 353

 

베르그손에게서 유전이란 현상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약동의 전달이다. 하지만 약동은 유한 한 힘이고 생명의 사건들은 무엇보다 지나간 흔적 위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환경 속에서 자신의 다른 얼굴을 만난다. 생명 현상들은 내적 역사이든, 외부 환경이든 간에 주어진 조건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 자체외 일체를 이룬다. 354

 

깡길렘은 유기체가 가장 하위의 형태에서부터 이미 긍정적 가치에 대한 선호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이루어지는 역동적 양극성을 보여 준다고 한다. 역동적 양극성의 작용으로 생명체는 부정적 변화에 대처하고, 긍정적 변화를 전유하는 자신만의 규범을 설정한다. 규범을 설정하는 유기체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규범성의 능력이 생명체가 수행하는 고도의 자기지시적 활동이자 생산적 순환성임을 알 수 있다....깡길렘 역시 베르그손과 같이 생명체게게 환경은 물리화학적인 필연적 현상의 총체가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생명체에게 환경의 변화가 불확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깡길렘이 새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이지 탄성의 법칙이 아니다...환경의 불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생성이며 역사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생명의 세계가 법칙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수준의 현상이라는 것, 즉 생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356

 

시몽동은 깡길렘과 달리 물질계에서 출발하여 그 생성의 특징을 찾아낸다. 이 점에서 베르그손과 대립점에 위치한다. 결정의 형성과정은 물질이 단지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것조차도 개체화과정을 겪음으로써 개체로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그는 물질적 연속성에 단절이 도입되는 정확한 계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정화 과정은 마치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주어진 에너지 조건을 이용하여 구조화되는 비가역적 과정이다. 시모동은 개체화과정이 모든 종류의 실체주의에 대립하는 생성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결정화과정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난다. 357

 

결정형성과정은 생산적 순환성을 나타낸다. 시몽동이 정보이론으로부터 차용한 내적공명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개체화가 진행될 때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다른 모든 지점들에 반향된다. 결정의 형성은 싹으로부터 극성을 띠고 응집되면서 이 특징을 주변의 다른 분자들에 계속 전달하는 과정이다. 구조의 탄생은 에너지 조건이 내적 공명에 의해 계 전체에 반향됨으로써 가능한데 이는 일종의 자기지시적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몽동이 생성을 존재와 대립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적극적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 생성이 존재가 자신과 관련하여 스스로 상전이라는 능력, 그러면서 스스로 용해되는 능력에 상응한다....베르그손이 생명과 의식의 현상에서 생성의 문법을 발견하고 물질게에 대해서는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면 시몽동은 그것을 물질계와 생명계에 공통적으로 확립하고 그 관계를 공고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358-359

 

들뢰즈의 경우 어떤 발견의 논리보다는 종합의 논리로 자신의 철학을 일구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베르그손과 깡길렘, 시몽동이 각각 생물학과 의학, 물리학에 직접 조회하고 그 자료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기초 개념들을 구성했다면 들뢰즌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에 조회하여 주요 개념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전유하는 것같다. <<차이와 반복>>에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화두로 삼는 것처럼 개념의 발명으로 이어져 생성철학의 역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359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차이만이 즉자적이다. 생성으로서의 반복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독특한 차이와 관계하고 있다. 이념의 세계에서 차이가 잠재태로 존재한다면 생성-반복의 세계에서 그것은 강도차로 나타난다. 강도차는 언제나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일종의 틈새와 간격들로 구성되는 역동적인 질서이다. 강도차로 나타나는 반복은 개체화 속에서 애벌레 주체의 강요된 운동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한다. 생성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영원성의 타락이 아니라 베르그손에게서처럼 잠재성의 현실화, 니체에게서처럼 유일무이한 힘이 자신의 역량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다. 360-361


볕뉘


목차의 2장에만 체크표가 있는 책이  <베르그손의 고고학>이란 책때문에 다시 불려나온다. 베르그손의 책들을 모으다가 어 이 책 왜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지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깡길렘을 읽고, 의사, 의과학에 대한 관심. 물리학, 화학과 다른 결을 갖는,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제야 나타날 수밖에 없구나 한다. 


이 책에서는 비샤부터 의학의 역사와 독특한 프랑스 과학-철학사의 개요도 확인할 수 있다. 팩트체크라고 해서 우리는 사실이란 것이 명백히 있다는 착각을 은연중에 한다. 사실의 자연사에 따르면 이 또한 개인-집단-현실의 요동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병의 역사로 보면 이러한 관점을 확연이 얻을 수 있다. 물리학 뉴턴-아인슈타인에 사로 잡혀 명확하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님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자유스러운 것이나 고정된 관점 사실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최근 핫한 블랙홀은 어떠한가. 호킹복사를 통해 사라지는 블랙홀이 관찰되기도 하지 않는가.


이처럼 진리하는 것도 지천에서 시작해 강물을 이루고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개인-집단-현실의 역동적 인식으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프렉은 이 개념으로 중력장이란 표현을 쓴다. 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의 퍼즐이 아니라 사유양식과 사유집단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퍼즐의 맞추거나 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퀼트같이 삶을 나누거나 삶을 만들거나 삶을 넘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기후위기라고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기후정의를 외치기 위한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는 녹색을 칠하며 전쟁마저 서슴지 않는다. 빙하가 녹고 산호초가 죽어가도 여기는 딴 세상같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미래세대와 어떤 교감이 실마리처럼 이어질 수 있을까? 진리는 있는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가?


위 책에는 주류철학이 아니라 비주류의 철학을 끌고가는 저자의 외침도 섞여있다.  사실이 아니라 관심이나 감식의 방법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아마 당위보다는 유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아니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보다 나와 내새끼의 삶의 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쫓겨가는 삶이 아니라 달라지는 삶과 운명이라는 잣대가 조금씩 서로 물들어간다면 지구라는 얇은 대기권의 막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전쟁금지 주간이나 전쟁금지 세계지도자, 제2의 평화협약, 아프리카전역기본소득확대시행 예기치못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조금 분기점은 마련할 수 있을까.  작고 조그마한 생각씨들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듯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확율을 높여가는 작은 일씨들의 범벅이 모여 흘러가면서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정해진 날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삶이 깨우침들이 강물로 흘러가다가 또 다른 우연과 겹쳐 또 다른 흐름길로 갈 것이다. 집단의 기억은 이렇게 지금-여기와 다르게 만나 과거를 바꾸며 미래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것은 명확하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긴 하지만, 지금과 다른 방식이 유효한 것 같다.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거대한 폭포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거대한 전환을 예측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불쑥 올 것은 확실하다. 68혁명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 극도로 지난한 전쟁들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 새로운 흐름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낙관의 확율은 커지고 전쟁의 상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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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쉽사리 입에 맴돌지 못한다. 비문이기도 하고, 한참을 다시보고 나서야 뒷말을 있는 말이 앞 문단을 가르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르그송 당신 말을 잘 못알아 듣겠으니 한마디로 정리해달라는 사교계의 부인들의 조크에 이렇게 반응했다 한다. <의식적....어쩌구 저쩌구의 시론>은 초기에 잘 읽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질과 기억>이 인기를 끈 후에서야 읽히지 시작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그송은 <의식적 어쩌구...>를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싶은 듯하다. 시간과 자유의지.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베르그송에게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관념. 결정론과 목적록. 분석의 기초를 무엇으로 가져갈 것인가? 이분법의 울타리에 갇혀 진자처럼 왔다갔다만 하는 사유의 철학의 유물론과 관념론이란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끝까지 제 것으로 꼬리표를 달려고 하는 아집.  필연은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우연에 풀려날 수 있다는 미지의 것을 사유하지 못한다. 


토끼와 거북이. 제논의 역설처럼  우리는 공간을 잘게 쪼개서 무한으로 근사하는 사유에 집착하면, 시간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베르그송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과 자유의지.  자연스럽게 공간 속의 한 물체로, 공간이나 장소 가운데 관조하여 바라보는 고체로서 사유를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물은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사물 내부의 변화. 시간을 통해 소외, 반성 의외의 면들이 포착되는 것을 포함하여야 전일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름이 아니라 정지한 찰나의 순간으로 사유한다. 그것이 문제다. 더구나 고질적이다.


그래서 지속을 말하며, 기억을 말하며, 경험을 논하며, 느낌을 얘기해야 한다. 심신은 이렇게 제3의 생각을 끌어들였을 때만 분리되지 않는다. 경험, 느낌, 깨달음은 과거를 가져오며, 현재를 다른 미래로 이어준다. 과거-현재-미래가 결코 분절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스피노자가 얘기하고 베르그송이 다짐하듯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이란 삼요소로 삶은 느끼고 자신의 관심사와 관점으로 이루어나간다. 그때 그때 감정들은 신체와 어우러지며 감정의 파노라마를 이루어 앞으로나를 이루어간다. 그 세가지 요소때문에 각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홀로 살 수 없기에 나와 집단, 현실이라는 인식의 삼요소 역시 저 바다라는 인식의 지평을 향해 달리 지천으로 강으로 모여가며 사회적으로 농축된다.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살아있내는 모든 것들은 서로로 향한다.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했듯이 스텡게르스는 문명화되기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의 성을 만들어갔던 과학의 물결 역시 연관성의 게임이라는 자각이 있었더라면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라는 것은 직선으로 이어진 평탄대로가 아닌 것이다. 지나온 모든 돌보지 않았던 모든 부분적 연결의 생태를 인지하고 느끼거나 깨달을 때야 비로소 모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학문의 재학문이 있어야 하고 사상의 재사상의 역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더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지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아직도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따로 보는 공간론자이기에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양자터널링처럼 당신의 작은 앎이 과거-현재-미래를 스치듯 잇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마 시간의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작은 깨달음들이 모여 번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우연의 여신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도 우리의 미래세대들도 다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우리만 잘 살아내야한다는 강박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한 방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길게보는 길로. 지금도...


#달팽이책방

#이런이론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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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비양도를 오른편으로 보여주면서 협재해변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저 부근을 달릴 수 있다니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날씨도 좋을 듯싶어 더욱 기대가 된다. 포항 바다를 그리고 있어, 바닷빛은 더욱 관심이 간다. 한려수도를 지나고 있다는, 꼭 찝어서 여수 어느 바다위를 지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33F 석은 마지막 탑승, 내릴 곳도 빨라 안성마춤인 자리이기도 하다. 기장의 말씀에 따라 내려다보는 바다의 쪽빛과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은 뭉글하면서도 오묘하다.


미리 렌트카의 위치가 3층 D구역이라는 안내와 셔틀버스 운행위치도 알 수 있어 조급함은 덜어진다 싶다. <해변의 부엌> 종달점은 책의 저자인 친구가 소개해준 곳이기도 하다. 부어커로 있다는 딸의 안부도 궁금하던 차여서 마라톤을 빌미로 들려보기로 한 곳이다.  입장이 늦으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극장식 음식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바심을 내고 부지런히 달려보지만 네비가 가르치는 시간은 정확하다. 더하고 빼고가 없다. 아니 제주도의 특색이기도 하다. 빨리도 늦게도 달릴 수 없는 구조기도 하다. 다음에는 서둘지 말기로 한다. 도착하기 오분전 해변의 부엌 안내자의 연락이다. 김춘옥 할머니는 89세 정정하기 이를데 없으시고 노래나 인터뷰 정말 연예인체질이신듯 정정 그 자체이시다. 쉬는 시간 잠시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곳의 사진도 몇 컷 찍어둔다.


안내자에게 부탁을 해서 만난 이현 부어커는 첫눈에 총기있는 눈빛과 사교성이 동시에 들어왔다. 4월까지 졸업후의 일들을 챙겨가는 모습도 좋고 짧게 나눈 이야기에도 솔깃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싶다.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하여 반대편 숙고까지는 한시간 반이 더 걸린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오랜 시간 근무하시다가 자리잡은 숙소는 아늑하고 좋다. 담날 아침 8시무렵 한림종합운동장 주변을 배회할 겸, 주차할 겸해서 나선다. 믹스커피와 소비대잔치 흑돼지구이를 종이컵에 주어서 가볍게 요기하고, 한림공고 운동장에서 3k정도 몸을 풀어주고 출발 대기다.


제주 해안가는 공항을 기점으로 용담코스는 미리 러닝한 적이 있고 그 서쪽인 한림을 핑계삼아 돌아보는 곳이기도 하다. 출발하자 마자 시내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는 코스 . 인파로 인해 더 열심히 달려볼 수는 없지만 기분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어 좋다. 쭉쭉 . 바람도 파도내음도 좋다. 무리지어 달리는 맛도 몇 달만인가. 부상은 드디어 회복되는가 싶다. 깔창아 힘을 다오. 


선두권의 엘리트 선수들은 벌써 돌아오고 있다. 반환점까지 내리막이었다는 사실은 반환점이 되어서야 알게된다. 그래도 굿굿이 늦추지 않고 시내로 접어들면서 마무리한다. 이렇게 올해 첫대회 첫시작. 활짝 핀 매화와 동백의 섬. 제주도의 반짝이 좋다. 제주의 봄.


 볕뉘. 

오고가는 길 책 한 모금은 베르그손 캉길렘의 결합의 의학사를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다르게 번질 수 있는 실마리를 얻고 오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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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참 어렵다.


한림 해안가를 달리는 코스를 신청준비하고 하루 한 대밖에 없는 비행기도 할인으로 골라 떠나기 전날, 상가가 생긴다. 가까운 곳이면 들러가련만, 그렇지 않은 거리이기도 시간도 애매해서 양해를 부탁드리고 가기로 마음먹다.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검색해보니 예약해 둔 <해녀의 부엌 종달점>과 에어앤비로 잡은 숙소 <아트하우스두드림>은 세시간 가까이 걸린단다. 세상에나 시간은 빠듯하고, 돌아오기도 만만치 않고 어쩔 수 없이 렌터카를 검색한다. 공항에서 가까운 곳. 그리고 회원가입에 보험까지 쉬운 길이 없다.


렌트카비용은  35000원정도+기름값 170원/km 25000= 6만원정도, 숙소 65000원

해녀의부엌 59000원 20만원, 비행기 왕복 15만원  총비용 35만원 - 40만원


늦밤이 되어서야 정리가 되고, 숨돌릴 틈없이 빠듯한 일정이 될 듯하다.


어쨌든 바닷바람과 풍경이 안식이 될 듯하다.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 낙오가 되어 다른 일정을 소화해낼지는 모를 일이다.


내리자마자 sk렌터카 대여를 해서 우도선착장부근 <해녀의 부엌>으로, 2시간20분 공연과 식사가 끝나면 명월성로 141 <아트하우스두드림>으로,  다음날 한림종합운동장에 10k 0940 출발.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공항으로 와서 렌터카 반납. 1220 공항복귀다.


포항 1410출발 1520도착 렌트카 1530도착 1535출발 1655 해녀의 부엌 도착  1910 부엌출발 2050 숙소도착 제주마라톤 1040출발 렌트카 1130도착 1220제주출발(20분연착) 1330포항도착


렌터카 비용은 생각보다 저렴하다 싶다. 이러면 다음 번에도 이용하는 수밖에. 다음에는 긴 여행으로 잡아야 할 듯 싶다. 빈 시간에 작업할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와 <<다른 과학은 없다>>는 다음 주 독서모임이 있어 챙겨둔다.


오고가며 짬날 때 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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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2-22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주 렌터카가 비수기인 겨울이라 가격이 싼가 봅니다.성수기인 여름에는 가격이 높아져 바가지요금이라고 뉴스에 나올 정도니까요.게다가 빌린 사람이 인지 하지 못한 기존에 있던 사소한 기스를 트집잡아 돈을 요구하는 양아치 업체도 많다고 하니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울님 혹 다음번에도 제주도 여해을 가신다면 시간(일주시간 대략 8~9시간)은 매우 길지만 제주 시내버스비 두번 비용으로 제주 일주가 가능한 버스 투어를 한번 해보셔도 색다른 느낌을 받으실 거에요.

여울 2026-02-23 08:59   좋아요 0 | URL
잘 다녀왔어요. 저도 버스여행을 즐기는 편이에요. 매년 동백꽃들이 그리워 자주 찾는 편이고, 해안가 러닝맛에 들려 더 자주 가보려고 해요. 버스투어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소개해주셔서 고마워요. 꼭 해볼께요. 카스피님
 

지속을 발견한 베르크손은 이제 모든 것을 진정한 존재인 <지속의 상하>에서 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시론>>은 자유의 문제를, <<물질과 기억>>은 심신관계를, <<창조적 진화>>는 우주와 생명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행동의 문제를 지속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시도들이다. 그 결과 전통적 형이상학은 완전히 뒤집힌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그것은 서양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311

 

그의 운동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로 지속인데,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운동하여 자기동일성을 잃고 변해 버렸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을 말한다. 사실 모든 운동은 항상 필연적으로 타자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운동을 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은 그러한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운동이다./ 설탕이 물에 들어가 녹아들어가기까지 시간, <> 자체가 시간이다./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 생명 또는 순수지속이라 부른 것이다. 비결정성 자체의 자기동일성은 한사코 유지하는 비결정성이다. 필연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여 자신의 비결정성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는 비결정성이다. 비결정적인 것은 비약한다/베르크손은 그것을 <생의 비약>이라부른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라는 것이다./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313-315

 

시론의 배경

 

내가 출발한 것은 과학적 시간 개념이었지 절대로 심리학이 아니었다. 심리학에 도달한 것이지, 거기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지속을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의 밖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순수 지속을 살고 거기에 다시 잠기는 것이 나에게만큼 모든 사람에게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몇 해가 걸렸다. 322

 

<<물질과 기억>>에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실어증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5년간 실어증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제논의 역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역설을 깰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지성의 가장 근본적인 착각을 깨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사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방도도 그의 손에 쥐어졌음을 의미한다. 324-325

 

모든 과학적 발견과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걸음걸음마다 우연이 개입한다. 아니, 그런 발견을 한 사람들의 탄생 자체가 우연이 아닌가. 오묘한 것은 그러한 우연이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326

 

시론의 내용

 

1<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이 장 전체는 깊은 감정들, 미적 감정, 도덕감, 근육의 힘쓰기, 주의, 격렬한 감정들, 정조적 감각들, 표상적 감각들, 정신물리학의 순으로 의식의 심리상태들을 하나씩 분석해 가면서, 의식의 각 상태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질과 양을 혼동하는지를 구명한다. 329

 

1. 우선 깊은 감정의 부분에서는 욕망, 희망, 기쁨, 슬픔 등을 분석한다.

2. 미적 감정에서는 우아함의 느낌과 아름다움의 느낌을 분석한다. - 하나의 감동은 수많은 사실들이 녹아 있는 유일무이한 어떤 상태이며, 예술가는 그렇게도 풍부하고 개인적이며 새로운 세계 속으로 우리를 단번에 끌어들인다. 그것의 풍부함에 의해 우리는 예술의 깊이를 말하며, 그러한 각성상태들은 또한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다.

3. 도덕감으로서 연민의 감정을 분석한다.

4. 근육의 힘쓰기로 단번에 옮겨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깊은 감정과 표면적 노력의 강도에서 공통적인 정의를 찾기 위해서이다.

5. 주의는 단지 정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운동을 동반한다. 긴장이 더해감에 따라 압작, 피로, 고통 등으로 면적을 넓혀가거나 성질을 바꾸는 근육 수축의 느낌이 된다.

6. 격렬한 감정들(격렬한 욕망, 분노, 사랑, 증오 등)은 영혼의 긴장성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 관념에 따라 전체가 조정되는 근육 수축의 체계라는 점에서 주의의 노력과 본성상 차이가 없다. 이는 비반성적 관념인 것만이 다르다.

7. 감각은 쾌락과 고통의 감각인 정조적 감각과 표상적 감각으로 나눌 수 있다.-감각은 자유의 시작이다. 그것은 미래 행동의 선택지를 밑그림으로 그려 보여줌으로써 자유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쾌락과 고통의 감각은 미래로 향하는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견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바로 그 고통에 동조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다....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라는 명령이라면,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다.

8. 정조적 감각이 거기에 수반되는 신체적 반응 운동에 따라 강도가 평가된다면, 표상적 감각도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정조적 요소를 지니며 따라서 거기에 동원되는 신체적 반응에 의해 그 강도가 평가된다.

9. 정신물리학......1장에서는 결국 의식의 상태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에 양을 집어넣거나 결과에 원인을 집어넣어 해석한 결과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2<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지속의 관념>

 

1. 수적 다수성과 공간: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지만, 그 단위들은 모두 동질적이며, 동시에 동일한 공간 위에서 장소만을 달리하여 병치되어야 한다. 수를 시간 속에서 셀 때도 하나하나 세어 갈 때마다 항상 지금까지 센 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켜야 한다. 결국 수의 관념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 수의 단일성은 이미 다수성을 내포하는 단일성이다. 또 각 단위들의 단일성도 이미 그 단위들이 무한히 나뉠 수 있다는 관념을 내표하고 있다.(분수가 될 수 있다.)

2. 공간과 동질적인 것: 텅 빈 동질적 장소를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또는 지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공간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공간을 동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공간 속의 사물들은 불가입적이며 상호 회재적이지만, 의식의 사실들은 상호 침투적이며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 따라서 동질적 장소로 생각된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라, 순수 의식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투한 사생아적 개념이다.

3. 동질적 시간과 구체적 지속: 순수한 지속은 우리 자아의 각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율의 음들처럼 서로 속에 녹아들어가 상호 침투하여 내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를 이룰 때를 말한다. 그때인 자아의 상태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순수 이질성이며, 부분은 전체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4. 지속의 측정 가능성: 순수 지속의 <질적 다수성> 또는 <구별되지 않는 다수성>은 수적 다수성이나 동질적 장소 또는 측정 가능한 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 이질성이며, 따라서 측정할 수 없다.

5. 운동의 측정 가능성: 내 속에서는 의식적 사실들의 유기적 조직화와 상호 침투 과정이 계속되며, 그것이 진정한 지속이다. 결국 자아 속에는 상호 외재성이 없는 계기만 있으며, 자아 밖에는 계기 없는 상호 외재성만이 있다....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것인 한 정신의 종합이자 심리적이며 불가분적인 과정이다. ..의식이 그 이외의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정신이 계속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종합, 즉 선율의 통일성과 흡사한 종합니다. 바로 그러한 질적 종합이 운동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6. 엘레아 학파의 착각: 엘레아 학파의 역설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킬레스가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뉠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공간을 단번에 지나가는 그의 운동은 나뉠 수 없다. 그러한 운동 그 자체를 공간과 혼동하여 공간처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논의 역설이 생긴다.

7. 관념과 동시성: 과학은 시간에서 지속을, 운동에서 운동성을 빼고서야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8. 속도와 동시성: 아무리 좁은 간격을 취하더라도 수학이 자리잡는 곳은 항상 양 끝점이므로, 그 사이의 간격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9. 내적 다수성: 의식의 다수성은 <질적 다수성>이며, 수와 공간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도무지 셀 수가 없다.

10 실재 지속: 상징적 표상이 아니라면 동질적 장소라는 형태를 띨 수 없는 자아는 동일성과 특수성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가짐으로써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띠게 되고, 특히 그 양자가 결합하는 공간 운동의 도움을 받아 동질적 시간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11 자아의 두 측면: 의식적 삶의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비인격적 자아의 이면에, 한없이 움직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이며 살아 있는 자아가 있다./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339-345

 

3<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자유>


1. 물리적 결정론: 생명현상은 비가역적이다. 물질들은 영원한 현재에만 머무르지만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나 의식적 존재에게는 덧붙임(과거가 자꾸 불어나니까)이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347

2. 심리적 결정론: 그 이전의 의식상태가 이후의 의식상태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장미의 향기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억 자체를 마시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불변하는 장미의 향기가 있고 거기에 기억이 연상된다는 것은 그것을 공간화한 것이며, 앞장에서 말한 병치의 다수성과 상호 침투의 다수성을 혼동한 것이다. 348

3. 자유로운 행위: 사실 자유로운 행위는 드물다. 우리의 일상적 행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느낌들 자체에서 얻는다기보다는 그러한 느낌들이 붙어 있는 의식 표피의 불변의 상으로부터 얻는다. 우리의 감정, 감각, 관념들이 기억 속에 응고되어 우리 행동의 기저를 형성하며 많은 경우 우리는 자동기계처럼 행동한다./갑자기 의식의 심층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날 때도 있다...그것은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인격 전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350

4. 실재 지속과 우연성: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망설이는 자아일 뿐이고, 자유로운 행위는 거기서부터 과일처럼 떨어지는 것이다....우리의 의식 상태를 X,Y라는 도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시간을 공간으로, 계기를 동시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도식을 제거하면, 결국 결정론은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자유론은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의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351,352

5. 실재 지속과 예견: <모든 전건을 알면 후건이 도출된다> 이런 논의의 밑바닥에는 반성적 의식의 착각이 깔려 있다. 첫째는 강도를 고유한 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특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구체적 실재, 즉 의식의 동적 진행을 완성된 사실의 물질적 상징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착각은 시간과 공간의 혼동이라는 마지막 착각에 기인한다. 353

6. 실재 지속과 인과성: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리고 근대 물리학은 모두 원인과 결과 사이에 논리적 필연성을 확립하고, 지속의 작용을 파기하여 계기의 관계를 내속의 관계로, 외면적 인과관계를 근본적 동일관계로 환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필연적 결정의 관계로 만들려고 할수록 지속의 작용은 배제된다. 355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가 수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은 분해되지만 지속은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하려면 그것을 고정시켜야 하지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진행은 사물로 지속은 연장으로 그리고 자발성은 타성으로, 자유는 필연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357

 

결론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인 장소로 간주한 것이다. 지속과 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자유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롭고 실재하는 자아를, 지속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식능력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또 시간이 동질적이라면 동일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인과성은 필연적 결정이 될 것이므로 자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칸트는 거기서부터 지속과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유를 시간 밖에, 즉 우리에게 입장이 금지된 물자체의 세계로 넘겨 버렸다. 358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독특한 삶의 입장에 선다면, 즉 동적인 통일성과 질적 다수성의 구체적이고도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359


볕뉘


읽지 못한 해설이 삶의 이력 배경과 요약이 잘 되어 있어 옮겨놓는다.


요약 ▼

 

제시해주신 텍스트는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의 철학, 특히 그의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지속(durée)'**과 **'자유'**의 개념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을 5가지 주요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 '지속(Duration)'

  • 지속이란? 시간이 단순히 시계 바늘처럼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선율(멜로디)처럼 앞뒤 상태가 서로 침투하며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질적인 흐름을 의미합니다.

  • 자기동일성의 유지: 운동하면서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나'라는 본질을 잃지 않는 운동이 바로 지속입니다.

  • 생의 비약(Élan Vital): 물질의 필연성(정해진 법칙)을 극복하고 비결정적이고 자유로운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힘입니다.

2. 공간과 시간의 혼동 (지성의 착각)

  • 공간화된 시간: 우리가 흔히 쓰는 '과학적 시간'은 시간을 공간 위에 나열된 점들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시간이 아닌 '사생아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 수(Number)의 함정: 숫자를 세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공간적 배치를 동반합니다. 하지만 의식의 상태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숫자로 측정하거나 양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3. 제논의 역설과 운동의 본질

  • 역설의 원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은 '운동 그 자체'와 '운동이 지나간 궤적(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 해결: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지만, 운동은 심리적이고 불가분적인 하나의 도약입니다.

4. 자아의 두 가지 측면

  • 표면적 자아: 사회 생활과 언어 소통을 위해 고정되고 정형화된 자아입니다.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자동기계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 심층적 자아: 내면 깊숙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질적으로 다르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본래적 자아입니다.

5. 자유와 결정론

  • 자유로운 행위: 자유는 심층적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입니다. 이는 분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석하는 순간 '살아있는 지속'이 '고정된 공간'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 칸트 비판: 칸트는 시간을 공간처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유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 결론: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지속 속에 머문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지속은 분석되지 않으며, 자유는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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