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에 있으며 흔히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긴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처럼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241
사람은 똑같은 종류의 물체에 대하여 형성한 보편 관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완전하다고 하며, 이와 반대로 비록 전적으로 제작자의 견해에 따라 완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유형의 개념과 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242
우리는 사람들이 사물의 참다운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편견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자연물을 완전하다든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자연은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지 않는다/신이 어떤 목적인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목적인을 위해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용에서도 아무런 원리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오직 사유의 양태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이 동일한 종이나 유에 속하는 개체를 비교함으로써 습관적으로 형성하는 개념이다. 243
한계, 종말, 무능력 등과 같은 부정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 우리들은 그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만큼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선과 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 또한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할 경우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나 우리가 사물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244
선이란 우리가 형성하는 인간의 본성의 전형에 점차로 접근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들이 인지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이해한다. 그러나 악이란 그 전형에 유사하게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아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인간이 이 전형에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접근하는 경우 인간을 더 완전하다거나 더 불완전하다고 할 것이다./어떤 사람의 본성이 활동 능력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의 활동 능력이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245
표상은 참다운 것이 참다운 한에서 참다운 것의 현재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의 현재의 존재를 배제하는 더 강한 다른 표상이 나타남으로써 소멸된다. 249
인간은 항상 열정에 필연적으로 예속하며, 또한 자연의 공통된 질서를 따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 만큼 그것에 적응한다. 251
인간은 자기의 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정신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마치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의 유의 유지에 노력하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 262
어떤 것들이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능력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무능력이나 부정에서, 또는 열정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열정에 복종하는 한 그들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271
각 인간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며, 또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덕을 갖게 되며,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능력,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크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할 때 본성상 가장 많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들은 서로 간에 가장 유익할 것이다. 275
4부 정리 38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인간의 신체로 하여금 외부의 물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하는 데 알맞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는 것과 다른 물체를 자극한 데 더 알맞으면 알맞을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이와 반대로 신체를 이것에 덜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해롭다. 282
오만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만의 반대인 소심함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슬픔으로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오만한 자는 반드시 질투하며, 덕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칭찬받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미워라며, 그들에 대한 그의 미움은 사랑이나 친절에 의하여 쉽게 정복되지 않고, 또한 그의 무능한 정신에 비위를 맞추고 그를 어리석은 자에서 미치광이로 만드는 그러한 자들의 현존만을 기뻐한다. 소심함은 비록 오만과 반대되지만, 소심한 자는 오만한 자와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은 그가 자신의 무능력을 타인의 능력이나 덕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생기므로, 만일 그의 표상이 타인의 결점을 고찰하는 데 집중된다면 그의 슬픔은 가벼워지고 그는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나온다. 불행한 자의 위안은 나쁜 동료를 갖는 것이다. 298
4부 정리67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08 신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인식할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먹자마자 살기를 욕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309
제5부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정리 36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에서 고찰된 인간 정신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 자체이다. 즉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359
정리 38 정신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정서의 작용을 덜 받으며,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361
정리 42 지복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들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366
볕뉘
1.
여러 번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다시 읽으면서 추려낸 이들은 왜 방점을 서로 다른 곳에 찍게 되는 것일까? 왜 변함없이 주요한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재사유하게 되는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접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알튀세르 부터, 마르크스 노트 마저 최근에야 번역이 진행중인 연유도 있지만, 인식론의 단절(우연, 마주침, 확율 등) 인과와 목적을 사유의 전제로 두는 방법론의 문제가 우선이라 할 수 있겠다 싶다.
3.
인간중심주의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유가 없다. 목적도 작용도 없다. 있는 그대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론이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냉정하게 따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예속>이란 정의. 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서란 무엇인가? 정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무수한 논의를 보아왔지만 윤리-정치-사회라는 동시에 울림이 있는 사유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게하는 힘이 있다.
5.
무신론이거나 범신론이거나 신은 저기에 있거나 여기에 있거나, 신에 대한 개념과 관념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있던 게다. 현실과 맞지 않은 이야기. 신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스피노자가 사유한 전체성을 읽지 못하거나 총체성을 읽어내지 못하면, 지금의 사유에서 뱅뱅 맴돌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이나 그 와류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던 것이 문제였을 수 있다.
6.
그의 사유를 가져오면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구차하게 많은 사상가들이 이 점을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바로 지점에서 데카르트에게 거꾸로 걸려드는 것이다. 쉽다. 임신한 엄마. 공동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만의 행복. 그것만 사유할 수 없는 존재가 나다. 이런 배경설명에는 사회적인 나, 서사로서의 나 등등 모든 것들이 말 위의 말일뿐이다.
7.
신체와 정신, 몸과 영혼은 죽으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것이 정신의 지적 사랑이다. 이 3종 인식은 지금까지 온 것의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하다. 깨우침과 통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모든 것들을 또 다른 시선아래 살 게 만들기도 한다.
8.
쇼펜하우어가 부와 명예, 욕정, 아니 삶을 다루는, 인류에게 절제란 무엇인가?란 가르침을 준 첫 사상가로 소개한 <<지성개선론>> 또는 <<지성교정론>>에서 반복하는 것들은 되짚을 이유가 충분히 있다.
0.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이 오십이 아니라 육십에 컹컹 개처럼 짓기만 했다는 걸 깨닫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