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30남성. 중도층처럼 움직이지만 그렇지 않는 이 그룹은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이대남인가? 그렇게 폄훼될 수 있을 것인가? <경험의 멸종>에서 말하는 것처럼 떠블클릭의 광증에 시달리는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매개는 없고 즉답을 요구하고 즉답만 살아남는 시절에 우리는 반추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조차 살아남을 길이 없다. 하물며 연구라니?
세대론, 남성여성, 재산, 지역으로 나누는 구분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2030남성이란 정체는 그런 구획이나 선긋기나 갈라치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변할까? 변할 수 있을까? 백여일 뒤, 설문이나 데이터는 어디를 가르키고 있을까? 그리고 그 사실이 변할 수 있고, 변하게 하는 지표나 물꼬를 만들 수는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뒤섞인다 싶다.

2.
미국인 저자의 말로는 강원도 상동광산이 살아나고 있다한다.(급 검색을 해보니 작년부터 난리가 났군. 내년부터 채굴가능이라고 한다.) 땅밑의 전쟁은 불안한 국제정세로 국가마다 굴곡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예견하고 대안의견까지 갖고 있기도 하다. 지구가 갖는 희귀자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지구 안의 흐름에 갇혀 여기저기 그 수혜와 희생을 함께 맛볼 수 밖에 없음을 평온한 논조로 기술한다. 그리고 그 지하에서는 영국 산업혁명초기의 굴뚝청소부 이상의 과다노동과 열악노동이 빈번하다. 버젓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국가는 학대당하고 있다. 제1세계의 안락한 삶들을 위해 수면아래 거침없는 발놀림은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3.
우리는 기억력과 문해력, 글쓰기의 곤란을 몸소 겪고 있다. 남녀노소 성별 세대를 불문하고 뇌를 밖에 두면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지 않고 요약해달라 하는 독서의 종말, 문서 작성을 맡기는 생각의 종말, 지시어만 넣어 그림을 얻는 창작의 종말까지 우리의 경험들은 단순화시켜 밋밋해질 것이다. 그 와중에 재미까지 휩쓸려내려가지는 않을까?
벌어지는 일들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면 그럴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상실들을 발라내지 않는다면 서있는 나의 중력까지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안간힘, 경험과 재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채득하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은 좀비처럼, SF 영화의 아메바처럼 뚱뚱한 몸만 남아 걷지도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4.
정현종시인의 시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척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하물며 애써 고른 선물로 전달될 온전한 마음과 정성이 그 만남에서 버무려진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그 순간부터 싹이 나고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상품을 고르는데 익숙하다. 가성비와 유용성. 하지만 팔할은 사람들 사이에 이런 유용성과 가성비만 따지다보면 대부분 팔할이상 그 관계를 놓친다.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도배된 세상을 쫓다보면 틀림없이 당신 곁에 사람들은 남지 않을 것이다.
어디 가든 빈 손으로 가지마라. 빈 손이 아니라 여행떠나기 전 설렘처럼 다른 것들을 담는 선물을 준비한다면, 받는 이는 마음과 당신의 됨됨이, 사교의 끈을 읽을 것이다. 이 또한 혹시 벌어질 일을 예비한다는 측면에서 뇌물로 진화한 지 모르겠지만, 작고 꾹꾹 눌러쓴 편지글처럼, 애써 만든 물건이나, 희귀한 가성비 좋은 지역 특산물들은 신선한 바다나 파도향까지 덤으로 전하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살지만, 자본주의를 너머 사는 법은 해보는 만큼 바뀔 수 있다. 부끄러워 말고, 만날 때 음료수 한병이라도 건네자. 장이라도 튼튼하게 말이다. 십중팔구 좋아질 것이다. 맨 손보다는.. ...
5.
스피노자는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다. 신의 목적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 사소한 출발을 놓친다. 그래서 지구를 탈출하고 지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철퍼덕 주저앉는 상태다. 자연스럽다. 그냥 연결된 하나란 사실을 여전히 머리 처든 국가 국익이란 괴물을 만들어 애써 부정하고 있다. 북극해를, 그린랜드를 또 어떻게 이용해쳐먹으려고, 편취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만 잘살면 대체 뭘할 건데. 나만 잘살면 대체 무슨 재민겨의 버전의 노하우도 갖지 못하는 것이 국가라는 망령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의 해결책은 지구밖에 있지 않다. 머리처든 국가의 아둔, 그것이 인간만 낫다는 목적론의 유사 판박이다. 그러니 우리는 근본의 철학을 다시 모든 사유와 평행하게 같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자연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상상하고 배울 수 있다. 부르주아가 귀족의 유유자적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국가의 우둔함을 문제삼아야 한다. 그 그룹은 버젓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 오늘도 여념없이, 한 국가의 한 국민을 위한다는 착각을 주입하면서 말이다.
6.
헛, 이 사람 한병철인가? 왜 이리 책을 자주 내는 거야. 살펴보니 기고문, 연설문 등등 최근 이 삼년간의 활동 흔적이다. 연결되어 있다. 모르는가? 다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모르고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데이비드 봄의 사유까지 나아가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은데, 이만하면 감지덕지 아닌가? 이탈리아의 사회운동가로, 어디도 국가는 못된 짓과 기득권의 아성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야생성은 온데 간데 없고, 냉소로 가득채운 분위기는 지구 곳곳을 횡행한다. 우리는 홀로 존재했다. 혼자 악다구니로 산다. 하지만 말이 그러하듯, 우리는 소통해야 한다. 언어라는 것이 소통하려고 만든 것이다. 혼자는 없으니 걸음마처럼 선물하듯 남을 의식하는 일상들이 채워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어제 달팽이책방 매대에 놓인 책들이다. 선물같은 책들. 궁금의 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책들이 서로 손짓하며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우리의 삶들이 손짓하기에 맘짓하기에 이런 책들이 나오고 만나고 있다고 여긴다. 사회도 점차 강도와 온도와 밀도를 높이고 있다고 여기고 싶다. 분명 달라질 것이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여기고 싶다.
7.
지금 여기, 지금 나, 지금 우리를 제대로 보는 방법들이 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켜켜로 쌓인 지구지층, 지구정치, 지구국가들처럼 그 사이사이를 뚫고 솟아날 마그마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근시안은 더 이상 떠블클릭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밖의, 창문 밖의 너를 호명하고, 불러내고, 같이 만나는 것이 시작이다.
8.
스피노자는 귀환했다. 그만큼 모든 철학자와 정치학자, 사회학자가 만날 것이다. 곧, 아니 만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로 같이 더 나은 삶을 꾸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원론에서 사로잡힌 근대인들이 망상과 지금의 나를 빠져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