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에게서 시작해보자. 그에게 생성은 시간과 동의어이다. 시간은 작용한다. 작용하는 시간은 족적을 남긴다. 시간의 족적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시간의 작용은 곧 창조이다. 352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은 본질이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측과 반복이 가능하다. 반대로 자신보다 상위의 힘에 종속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사건은 각자가 최초로 세상에 던져지는 한에서 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측가능하기는커녕 자신의 독자성과 더불어 생겨나고 또 그렇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세계에 단 한 번 주어진다. 일회성과 현존재성이 바로 그것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352

 

이질적 사건들은 전개되면서 단지 흩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나름의 틀로 어렵사리 인식할 수 있는 경향들을 보여 분다. 경향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필연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발성이 어떤 방향성을 띠고 집적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들의 축적이 곧 기억과 역사를 이룬다. 역사는 생성의 운동이다. 353

 

창조로서의 시간의 또 다른 특징을 이루는 것은 생산적 순환성이다. 사건들은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복수의 사건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무언가는 되풀이되고 다시 돌아온다. 기억과 역사는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정한 경향들로 응집되면서 스스로를 자신 안에 반영하는 자기지시적체계를 이룬다.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다양체 또는 잠재성의 현실화 도식은 바로 이러한 복잡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잠재성의로서의 초의식은 상호침투하는 무수한 경향들을 내포하며 생명적 약동의 폭발을 통해 현실화된다고 가정된다. 353

 

베르그손에게서 유전이란 현상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약동의 전달이다. 하지만 약동은 유한 한 힘이고 생명의 사건들은 무엇보다 지나간 흔적 위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환경 속에서 자신의 다른 얼굴을 만난다. 생명 현상들은 내적 역사이든, 외부 환경이든 간에 주어진 조건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 자체외 일체를 이룬다. 354

 

깡길렘은 유기체가 가장 하위의 형태에서부터 이미 긍정적 가치에 대한 선호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이루어지는 역동적 양극성을 보여 준다고 한다. 역동적 양극성의 작용으로 생명체는 부정적 변화에 대처하고, 긍정적 변화를 전유하는 자신만의 규범을 설정한다. 규범을 설정하는 유기체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규범성의 능력이 생명체가 수행하는 고도의 자기지시적 활동이자 생산적 순환성임을 알 수 있다....깡길렘 역시 베르그손과 같이 생명체게게 환경은 물리화학적인 필연적 현상의 총체가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생명체에게 환경의 변화가 불확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깡길렘이 새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이지 탄성의 법칙이 아니다...환경의 불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생성이며 역사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생명의 세계가 법칙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수준의 현상이라는 것, 즉 생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356

 

시몽동은 깡길렘과 달리 물질계에서 출발하여 그 생성의 특징을 찾아낸다. 이 점에서 베르그손과 대립점에 위치한다. 결정의 형성과정은 물질이 단지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것조차도 개체화과정을 겪음으로써 개체로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그는 물질적 연속성에 단절이 도입되는 정확한 계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정화 과정은 마치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주어진 에너지 조건을 이용하여 구조화되는 비가역적 과정이다. 시모동은 개체화과정이 모든 종류의 실체주의에 대립하는 생성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결정화과정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난다. 357

 

결정형성과정은 생산적 순환성을 나타낸다. 시몽동이 정보이론으로부터 차용한 내적공명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개체화가 진행될 때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다른 모든 지점들에 반향된다. 결정의 형성은 싹으로부터 극성을 띠고 응집되면서 이 특징을 주변의 다른 분자들에 계속 전달하는 과정이다. 구조의 탄생은 에너지 조건이 내적 공명에 의해 계 전체에 반향됨으로써 가능한데 이는 일종의 자기지시적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몽동이 생성을 존재와 대립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적극적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 생성이 존재가 자신과 관련하여 스스로 상전이라는 능력, 그러면서 스스로 용해되는 능력에 상응한다....베르그손이 생명과 의식의 현상에서 생성의 문법을 발견하고 물질게에 대해서는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면 시몽동은 그것을 물질계와 생명계에 공통적으로 확립하고 그 관계를 공고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358-359

 

들뢰즈의 경우 어떤 발견의 논리보다는 종합의 논리로 자신의 철학을 일구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베르그손과 깡길렘, 시몽동이 각각 생물학과 의학, 물리학에 직접 조회하고 그 자료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기초 개념들을 구성했다면 들뢰즌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에 조회하여 주요 개념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전유하는 것같다. <<차이와 반복>>에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화두로 삼는 것처럼 개념의 발명으로 이어져 생성철학의 역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359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차이만이 즉자적이다. 생성으로서의 반복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독특한 차이와 관계하고 있다. 이념의 세계에서 차이가 잠재태로 존재한다면 생성-반복의 세계에서 그것은 강도차로 나타난다. 강도차는 언제나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일종의 틈새와 간격들로 구성되는 역동적인 질서이다. 강도차로 나타나는 반복은 개체화 속에서 애벌레 주체의 강요된 운동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한다. 생성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영원성의 타락이 아니라 베르그손에게서처럼 잠재성의 현실화, 니체에게서처럼 유일무이한 힘이 자신의 역량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다. 360-361


볕뉘


목차의 2장에만 체크표가 있는 책이  <베르그손의 고고학>이란 책때문에 다시 불려나온다. 베르그손의 책들을 모으다가 어 이 책 왜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지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깡길렘을 읽고, 의사, 의과학에 대한 관심. 물리학, 화학과 다른 결을 갖는,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제야 나타날 수밖에 없구나 한다. 


이 책에서는 비샤부터 의학의 역사와 독특한 프랑스 과학-철학사의 개요도 확인할 수 있다. 팩트체크라고 해서 우리는 사실이란 것이 명백히 있다는 착각을 은연중에 한다. 사실의 자연사에 따르면 이 또한 개인-집단-현실의 요동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병의 역사로 보면 이러한 관점을 확연이 얻을 수 있다. 물리학 뉴턴-아인슈타인에 사로 잡혀 명확하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님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자유스러운 것이나 고정된 관점 사실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최근 핫한 블랙홀은 어떠한가. 호킹복사를 통해 사라지는 블랙홀이 관찰되기도 하지 않는가.


이처럼 진리하는 것도 지천에서 시작해 강물을 이루고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개인-집단-현실의 역동적 인식으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프렉은 이 개념으로 중력장이란 표현을 쓴다. 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의 퍼즐이 아니라 사유양식과 사유집단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퍼즐의 맞추거나 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퀼트같이 삶을 나누거나 삶을 만들거나 삶을 넘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기후위기라고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기후정의를 외치기 위한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는 녹색을 칠하며 전쟁마저 서슴지 않는다. 빙하가 녹고 산호초가 죽어가도 여기는 딴 세상같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미래세대와 어떤 교감이 실마리처럼 이어질 수 있을까? 진리는 있는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가?


위 책에는 주류철학이 아니라 비주류의 철학을 끌고가는 저자의 외침도 섞여있다.  사실이 아니라 관심이나 감식의 방법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아마 당위보다는 유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아니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보다 나와 내새끼의 삶의 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쫓겨가는 삶이 아니라 달라지는 삶과 운명이라는 잣대가 조금씩 서로 물들어간다면 지구라는 얇은 대기권의 막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전쟁금지 주간이나 전쟁금지 세계지도자, 제2의 평화협약, 아프리카전역기본소득확대시행 예기치못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조금 분기점은 마련할 수 있을까.  작고 조그마한 생각씨들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듯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확율을 높여가는 작은 일씨들의 범벅이 모여 흘러가면서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정해진 날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삶이 깨우침들이 강물로 흘러가다가 또 다른 우연과 겹쳐 또 다른 흐름길로 갈 것이다. 집단의 기억은 이렇게 지금-여기와 다르게 만나 과거를 바꾸며 미래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것은 명확하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긴 하지만, 지금과 다른 방식이 유효한 것 같다.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거대한 폭포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거대한 전환을 예측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불쑥 올 것은 확실하다. 68혁명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 극도로 지난한 전쟁들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 새로운 흐름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낙관의 확율은 커지고 전쟁의 상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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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쉽사리 입에 맴돌지 못한다. 비문이기도 하고, 한참을 다시보고 나서야 뒷말을 있는 말이 앞 문단을 가르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르그송 당신 말을 잘 못알아 듣겠으니 한마디로 정리해달라는 사교계의 부인들의 조크에 이렇게 반응했다 한다. <의식적....어쩌구 저쩌구의 시론>은 초기에 잘 읽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질과 기억>이 인기를 끈 후에서야 읽히지 시작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그송은 <의식적 어쩌구...>를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싶은 듯하다. 시간과 자유의지.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베르그송에게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관념. 결정론과 목적록. 분석의 기초를 무엇으로 가져갈 것인가? 이분법의 울타리에 갇혀 진자처럼 왔다갔다만 하는 사유의 철학의 유물론과 관념론이란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끝까지 제 것으로 꼬리표를 달려고 하는 아집.  필연은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우연에 풀려날 수 있다는 미지의 것을 사유하지 못한다. 


토끼와 거북이. 제논의 역설처럼  우리는 공간을 잘게 쪼개서 무한으로 근사하는 사유에 집착하면, 시간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베르그송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과 자유의지.  자연스럽게 공간 속의 한 물체로, 공간이나 장소 가운데 관조하여 바라보는 고체로서 사유를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물은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사물 내부의 변화. 시간을 통해 소외, 반성 의외의 면들이 포착되는 것을 포함하여야 전일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름이 아니라 정지한 찰나의 순간으로 사유한다. 그것이 문제다. 더구나 고질적이다.


그래서 지속을 말하며, 기억을 말하며, 경험을 논하며, 느낌을 얘기해야 한다. 심신은 이렇게 제3의 생각을 끌어들였을 때만 분리되지 않는다. 경험, 느낌, 깨달음은 과거를 가져오며, 현재를 다른 미래로 이어준다. 과거-현재-미래가 결코 분절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스피노자가 얘기하고 베르그송이 다짐하듯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이란 삼요소로 삶은 느끼고 자신의 관심사와 관점으로 이루어나간다. 그때 그때 감정들은 신체와 어우러지며 감정의 파노라마를 이루어 앞으로나를 이루어간다. 그 세가지 요소때문에 각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홀로 살 수 없기에 나와 집단, 현실이라는 인식의 삼요소 역시 저 바다라는 인식의 지평을 향해 달리 지천으로 강으로 모여가며 사회적으로 농축된다.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살아있내는 모든 것들은 서로로 향한다.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했듯이 스텡게르스는 문명화되기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의 성을 만들어갔던 과학의 물결 역시 연관성의 게임이라는 자각이 있었더라면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라는 것은 직선으로 이어진 평탄대로가 아닌 것이다. 지나온 모든 돌보지 않았던 모든 부분적 연결의 생태를 인지하고 느끼거나 깨달을 때야 비로소 모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학문의 재학문이 있어야 하고 사상의 재사상의 역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더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지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아직도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따로 보는 공간론자이기에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양자터널링처럼 당신의 작은 앎이 과거-현재-미래를 스치듯 잇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마 시간의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작은 깨달음들이 모여 번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우연의 여신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도 우리의 미래세대들도 다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우리만 잘 살아내야한다는 강박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한 방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길게보는 길로. 지금도...


#달팽이책방

#이런이론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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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더블 베이스,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들었을 때, 내장감각을 자극하는 걸 느꼈다. 가슴 아래 뱃 속을 울리는 느낌이 묘하다. 콘트라베이스 반주에 노래하는 주인장의 모습이 다른 반주 보다 훨씬 멋지게 보인다 싶다. 단체 예약이 잡힌 날, 들어오시라고 해서 프런트에 앉게되어서, 그 얘기를 건넸더니 요즘 사람들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런 악기는 별반 관심없다고 한다. 그래도 따로 찾는 사람들이 늘거라고 새겨둔다.


-1


창고같이 생긴 건물에 문이 어딘지 모르겠다. 방화벽같은 곳에 문고리가 보여 열고 들어간다. 빼곡하게 쌓인 LP판들에 음향음질이 어둑어둑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벽에 손님들이 남긴 메모지를 살펴보는데 2012년의 것도 있다. 찰나의 순간 달팽이책방 쥔장이 가끔 간다는 곳이 여기였네 싶다. 제주에일을 마시고 사진을 찍다나니 쥔장이 신청곡도 받는다고 메모지를 건넨다. 밥말리  두 곡, 존 레논 두 곡을 신청하니 한 곡씩 틀어주신다. 엘피판 표지를 보이는 곳에 게시하고 선곡한 곳을 찾는 모습이 익숙하다.


-3


이 곳이 악기 거리인지는 <고바우식당>이란 노표에 여러 번 온 뒤에 눈치챈다. 민화방이란 액자를 한 끝머리 부분에 드럼연습과 악기 소리가 나고서야 아 그랬군 했다. 


0


책 벗이 내려와  장대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지만 이곳으로 정한다. 작업실에서 실론티 홍차 한잔 하며 진행중인 주제와 컨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소를 옮긴다. #두루치기오징어반반 안주는 두루치기보다 비싸지만, 아는 손님들만 찾는 메뉴이다. 끝무렵에 한 공기 볶아 달라하면 허전한 배를 달랠 수 있다. 포항, 도구막걸리와도 제법 잘 어울린다. 빗방울이 조금 긋기 시작하자 차수를 옮긴다.  짙은 가수의 노래를 반주하고 있고, 리허설 준비도 하고 있는 연주자들이 앳되다. 시작하기 전, 시간이 조금 남는지 쥔장이 직접 연주에 노래다. 떠블베이스다. 언제 들어보겠어. 신기한 듯, 궁금한 듯 테이블이 연신 폰으로 촬영각이다.


1
















빗 속을 뚫고 돌아와 그간 책 이야기를 나눈다. 책 벗은 종교와 역사, 그리고 국내 소설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팔로우하고 있는 이시영노시인의 근황과 작품, 산문집은 놓치지 않고 봤다는 김훈의 <허송세월>을 추천받는다.


2




























종교란 믿음에 대한 부분인데, 그 이력을 알고있는 책벗의 반응이 궁금해서 추천하고 피드백을 받기로 한다. 유머나 농담, 웃음에 대한 관심사는 작업의 주제이기도 한데, 부채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집안 내력, 사상에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자본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지만 <부채>란 책이 스케일이 더 크고 다른 맥락을 잇게해주는 매력있는 책이라고도 전한다. 


3


이분법, 이원론에 대한 부분도 #연일물회 집까지 이어진 토론 주제이기도 한데, 얽힘이나 중첩, 다시선 등 삼분법의 출발점으로서 그나마 쉬운 책이라고 <객체란 무엇인가>를 전한 셈이다. 양자 역학을 안다고 하는 자체가 모른다는 증표이듯이, 들뢰즈 역시 그 이상이라는 말.


도서실에 출근하는 독서가이자 애서가이기도 한 책벗은 이렇게 다짐한다. 이 번에는 읽게 될 것 같다고 말이다. 맥락도 살피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볕뉘. 


시집이 있나해서 책방을 들러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플레이 사장님은 락매니아란 소식이다. #팝스 소식은 핫한 모양이다.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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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엄마가 있다면 100개의 서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엄마들의 일 서사를 발굴해 일 아니면 육아였던 이분법적 선택지가 아닌 여러 갈래의 길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대기업의 높은 자리에서 일하지 않아도, 연 매출 몇억 원 같은 성공 신화를 이루지 않아도 내일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들의 서사를 모으고 싶었습니다.

또 엄마들이 내 옆의 다양한 레퍼런스를 발견하고 연결해 나만의 방식을 찾아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환상 같은 롤모델을 좇다 “난 역시 안 돼”라며 좌절하기보다 작은 부분일지라도 내가 시도하고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가능성이 모여 길이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엄마를 만났습니다. 이미 연결된 분들을 인터뷰이로 섭외하기도 했지만 새로 만난 인물이 더 많습니다. 다양한 서사를 모으기 위해 인터뷰이를 공개 모집했고 여러 분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신청해주셨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분이 신청해주셔서 감사했지만 지면의 한계로 모두 만날 수 없었습니다.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앞으로 또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009

볕뉘

1. 잡지를 이렇게 맛깔나게 만드는분들을 직접 뵐 수 있다니. 그것도 매거진을 만드는 과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꾸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이렇게 멋진 잡지를 한 지방도시를 거점으로 만들어나가다니 신기하고 놀랍다. 그것이 준비호까지 하면 여섯 번째. 거기에다가 안내서를 선보인다. 서문을 읽어가다가 더 잘 나가는 일만이 그들의 소명이 아님이 읽혀진다.

더 많이 읽히고 절심함이 번지면 좋겠다싶다. 더 많은 이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신을 멈추는 일이 줄어들면 좋겠다. 응원한다. 백호, 천호를... ...

2. 아이가 잘 크려면 내가 잘 자라야 한다. 함께 크는 일임을 여기는 너무 잊고 산다. 자신을 갈아넣어 아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힘들어지는 사이가 지금이기도 하다. 내 아이만이 아니라 옆에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같이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아직 멀었지만 그렇게 갈피를 잡지않으면, 기하급수적으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회에 살 수 밖에 없다. 기로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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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1-06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필은 여울님의 그림인가요?? 저런 섬세한 작품을 그리시고 바라보는 예술가의 눈이 늘 부러운 일인입니다. 엄마들의 서사를 모으신다니,, 저 인터뷰 집은 직접 엮으신 건가요?? 님의 다양한 창작 활동에 머리가 숙여지네요.

여울 2022-01-07 06:02   좋아요 0 | URL
취재ㆍ편집 방향이 마음에 들어 9쪽을 옮겨왔어요. 오해를 불러 일으켰네요. 포포포 No 5. 역시 마음의 눈이 밝아 뭉클하더군요.

라로님 감사해요. 늘 관심갖고 좋게봐주셔서요^^
 

''의 생성

너 자신을 알라

의 포로가 된 것은 그곳으로부터다.

 

우리가 부르짖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인가우리가 외치는 진보는 '진보'일 수 있는가? ''로 향한 강박과 엘리트의 전유의식인 '보다낫다'는 ''에게 다가갈 수 없으며 '함께해볼 수 있는 것을 낳지 않는다이는 ''를 대상화하면서 ''만을 돋보이는 유아의식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를 너에게서 발라내고 그 토대로 철학의 성을 쌓은 것은 서양이 한 일이다. ''로 환원하고, ''에 근거한 철학과 학문의 발달은 ''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끊어버린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로 갇힌 자유가 모두의 진보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나타난다. ''만을 배경에 둔 평등을 주장한다이런 되먹임의 반복구조는 모든 구조와 삶을 사회적 유아기에 머물게 만든다.

 

나와 너

 

''는 ''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로부터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몸이 아니라 애초에 한덩어리이자 하나다주관과 객관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객관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주체는 없다서사적인 나나의 곁에 이어진 너로 인해 사회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흐름 속의 나나만은 없다.

 

하나만을 지향하는 학문은 성립할 수 없다하나의 관념만 쫓는 학문은 살아남을 수 없다동시에 쫓기고 쫓고 만드는 학문만 겨우 뿌리를 내릴 수 있다나는 없다나의 환상을 쫓는 이상 아무 것도 만들 수도 움직일 수 없다나에 머무는 이념과 가치를 쫓을수록 곁의 너의 비참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너를 자각하지 못하는 나의 울타리는 거울같은 방이다온통 나만 보이는 사회적 유아방이다나만 봐달라는 유치원이다자유와 평등과 자매애 외 숨쉬는 공기는 형평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시체처럼 해부해서나 얻을 수 있는 가치다. ''만의 절대가치를 추구하였기에 구현될 수 없는 이상향일 뿐이다. (결코 나만 실패를 해보았을 뿐-너가 움직인 실패와 실패의 상처로 생긴 흔적은 없다찬란한 ''로 치장할 뿐이자 늘 머물 수밖에 없는 ''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나는 너로부터 자란다주어로부터 맺어진 것이 우리가 아니다동사나 형용사가 움직여야 ''가 드러난다나의 곁은 늘 ''였다너의 경중으로 인해 나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드러난다곁의 움직임으로 나의 움직임이 읽힌다.

 

,,우리,

 

너는 우연한 마주침이다만남은 마음의 겹침이다마음의 시공간을 따로 비워두는 일이다.

 

-너의 주춧돌이 세워진다면나의 곁에 너가 의식된다면 나-너 곁의 그물이 아주 희미하게 보일 수 있다아주 자그만하게 느낄 수 있다.

 

나만의 자유에 경도된 운신은 거울만 보고 달려드는 아이같은 짓이다나만의 평등에 경도된 운신은 어린아이같은 짓이다나만의 독선에 경도된 삶은 악몽이다.

 

 

결사

 

결사는 지독한 덧셈이다나만 바로 설 수 없기에 끊임없이 너를 탐하고 기댄다곁의 너로 인해 간신히 디딤발을 한 걸음반 걸음 디딜 수 있는 것이다-우리그리고 모임이란 결사지금여기 결사가 왜 이리도 허망한 것인가아무 것도 구제해내지 못하는 조직의 단위는 여전히 ''를 뿌리삼고 있기때문이다조직-단체-특정 ''로 이어지는 위계에는 대리자만 있다. ''의 대행으로서 ''만 있다너를 느끼지 못한다너를 느낄 필요가 없다너의 고민이 나로 스며들지 않는다나의 아픔이 너를 타고 '--'의 그릇에 고이지 않는다나의 삶이 섞이지 않는다살아지는 일상을 돌이키지 못한다배회하는 욕망에 결박되어 풀려나지 못한다. (---모임단체 가운데 마음이 번지는 속도는 다를 수 있다삶이 미치는 기울기도 다를 수 있다차이를 갖고 만나고 차이가 삶에 섞이고 부대끼면서 일상은 마음으로 버무려진다.)

 

모임

 

모임은 그릇이다생생한 현장이다차이의 마법사이다파격을 어루만지는 곳이다삶의 예비기지다주고 받고 나누고 격론과 쟁점이 충만한 곳이어야 한다사발통문같은 그릇에 ''는 오목하여 ''를 받아 안을 수 있다고민은 자라고 숙성된다생각은 너로 번지고 깨달음의 길목과 노력시련의 흔적을 가져갈 수 있다삶의 충전소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 곁으로 가는 길이다. ''만의 삶이 아니라 '-'의 삶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모임은 마음을 닮아있다마음의 끈으로 움직이는 모임들은 살아있다살아있는 것은 긴장을 유지한다긴장하는 것은 빈공간과 만일을 예비해둔다의식적이되 무의식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만을 '우리'만을 위한 모임이지 않기때문에 열려있어야 한다.

 

도시와 삶

 

구획된 도시는 삶을 섞을 수 없다보이는 삶만 존재한다비참을 목도할 수도삶의 실패도 일상에 섞이지 않는다거대 도시 속의 삶에서 사람들은 실패를 맛볼 기회를 잃는다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삶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세상은 그렇게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직선과 같은 삶 속에 세상은 자신에 도취된 ''만을 뱉어낸다너로 향한 발성은 나로 옮겨올 수 없다너로 향한 외침은 나에게로 메아리친다나도 없고 너도 없고 삶이란 나와 관계조차없는 시간의 뭉텅일뿐이다--삶에 깃든 웅성거림이나 옹알이조차 들을 길이 없다들리지 않는다나의 생존만이 눈앞에 보이는 경주견의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사회

 

사회적 옹알이가 필요하다. ''만을 지지대로 쌓아올린 학문의 상아탑은 '학문의 격벽'을 만들었으며 학문과 학문은 삶의 저수조에 흐르지 않고 손내밀지 않는다사상의 누각을 버티고 있는 ''는 더 이상 쓸모도 필요도 없다사회도 삶도 처음부터 간극도 벽도 없었다하늘아래 남도 없어 사람의 호흡으로 지내야한다.

 

 

지역

 

지역은 늘 나만 있어 너를 의식하지 못한다너를 눈치조차 챌 수 없으므로 ''가 한 일들의 여파를 알지 못한다. ''의 목적과 가치만이 계몽의 너를 거느리고 다녀야하기에 나에게 보이는 건 가치와 목적이다. ''도 아닌 것이다그래서 ''는 없는 이상에 끌려다니는 것이다앞만보고 달리는 경주견이다나도 너도 없다시간을 담지 않는다지나온 시간을 담고 나누지 못한다다가올 시간도 품지 못한다.

 

 

그리고 삶

 

삶은 계속된다아주 작은 물빛햇빛에 비치는 웅덩이 속의 잉크 한방울 그렇게 번지는 것이 나-너이다그렇게 출렁이는 그물코에 바뀌는 색은 너로부터 온다나는 너의 여기저기에 있다너는 나의 저기여기에 있다.

 

 

볕뉘.

 

모임과 민주주의의 변주 결사

 

(0) 서사적인 나서로주체나와너

(1) 왜 다른가

(2) 결사학은 왜 없는가

(3) 악마의 변호인묵자의 동이덧셈

(4) 결사는 왜 독특해야 하는가



덧붙임. 6년전 오늘이었구나. 이렇게 생각에 코를 꿰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밖을 바라본다. 숭숭 빠져나간 것들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 건져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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