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에게서 시작해보자. 그에게 생성은 시간과 동의어이다. 시간은 작용한다. 작용하는 시간은 족적을 남긴다. 시간의 족적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시간의 작용은 곧 창조이다. 352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들은 본질이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측과 반복이 가능하다. 반대로 자신보다 상위의 힘에 종속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사건은 각자가 최초로 세상에 던져지는 한에서 탄생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측가능하기는커녕 자신의 독자성과 더불어 생겨나고 또 그렇게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건은 세계에 단 한 번 주어진다. 일회성과 현존재성이 바로 그것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352
이질적 사건들은 전개되면서 단지 흩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나름의 틀로 어렵사리 인식할 수 있는 ‘경향들’을 보여 분다. 경향은 단어 자체의 의미에서 필연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발성이 어떤 방향성을 띠고 집적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들의 축적이 곧 기억과 역사를 이룬다. 역사는 생성의 운동이다. 353
창조로서의 시간의 또 다른 특징을 이루는 것은 ‘생산적 순환성’이다. 사건들은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복수의 사건들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무언가는 되풀이되고 다시 돌아온다. 기억과 역사는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정한 경향들로 응집되면서 스스로를 자신 안에 반영하는 ‘자기지시적’체계를 이룬다. 베르그손이 제시하는 다양체 또는 잠재성의 현실화 도식은 바로 이러한 복잡성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잠재성의로서의 초의식은 상호침투하는 무수한 경향들을 내포하며 생명적 약동의 폭발을 통해 현실화된다고 가정된다. 353
베르그손에게서 유전이란 현상은 고정된 법칙이 아니라 약동의 전달이다. 하지만 약동은 유한 한 힘이고 생명의 사건들은 무엇보다 지나간 흔적 위에서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환경 속에서 자신의 다른 얼굴을 만난다. 생명 현상들은 내적 역사이든, 외부 환경이든 간에 주어진 조건들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들 자체외 일체를 이룬다. 354
깡길렘은 유기체가 가장 하위의 형태에서부터 이미 긍정적 가치에 대한 선호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 이루어지는 역동적 양극성을 보여 준다고 한다. 역동적 양극성의 작용으로 생명체는 부정적 변화에 대처하고, 긍정적 변화를 전유하는 자신만의 규범을 설정한다. 규범을 설정하는 유기체의 능력은 자신의 내부에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기억을 축적하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는 규범성의 능력이 생명체가 수행하는 고도의 자기지시적 활동이자 생산적 순환성임을 알 수 있다....깡길렘 역시 베르그손과 같이 생명체게게 환경은 물리화학적인 필연적 현상의 총체가 아니라 매번 달라지는 ‘사건’의 형태로 나타난다. 생명체에게 환경의 변화가 불확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깡길렘이 “새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이지 탄성의 법칙이 아니다...환경의 불확실함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그 생성이며 역사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생명의 세계가 법칙적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수준의 현상이라는 것, 즉 생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356
시몽동은 깡길렘과 달리 물질계에서 출발하여 그 생성의 특징을 찾아낸다. 이 점에서 베르그손과 대립점에 위치한다. 결정의 형성과정은 물질이 단지 흐름이 아니라는 것, 그것조차도 개체화과정을 겪음으로써 개체로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로써 그는 물질적 연속성에 단절이 도입되는 정확한 계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정화 과정은 마치 생명체가 엔트로피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주어진 에너지 조건을 이용하여 구조화되는 비가역적 과정이다. 시모동은 개체화과정이 모든 종류의 실체주의에 대립하는 생성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결정화과정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난다. 357
결정형성과정은 생산적 순환성을 나타낸다. 시몽동이 정보이론으로부터 차용한 ‘내적공명’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개체화가 진행될 때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은 계의 다른 모든 지점들에 반향된다. 결정의 형성은 싹으로부터 극성을 띠고 응집되면서 이 특징을 주변의 다른 분자들에 계속 전달하는 과정이다. 구조의 탄생은 에너지 조건이 내적 공명에 의해 계 전체에 반향됨으로써 가능한데 이는 일종의 자기지시적 활동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몽동이 생성을 존재와 대립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적극적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 생성이 “존재가 자신과 관련하여 스스로 상전이라는 능력, 그러면서 스스로 용해되는 능력에 상응한다....베르그손이 생명과 의식의 현상에서 생성의 문법을 발견하고 물질게에 대해서는 이를 소극적으로 적용하고자 했다면 시몽동은 그것을 물질계와 생명계에 공통적으로 확립하고 그 관계를 공고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358-359
들뢰즈의 경우 어떤 발견의 논리보다는 종합의 논리로 자신의 철학을 일구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베르그손과 깡길렘, 시몽동이 각각 생물학과 의학, 물리학에 직접 조회하고 그 자료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기초 개념들을 구성했다면 들뢰즌 무엇보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에 조회하여 주요 개념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새롭게 전유하는 것같다. <<차이와 반복>>에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화두로 삼는 것처럼 ”개념의 발명‘으로 이어져 생성철학의 역사의 중요한 획을 긋는다. 359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차이만이 즉자적이다. 생성으로서의 반복은 언제나 일회적이고 독특한 차이와 관계하고 있다. 이념의 세계에서 차이가 잠재태로 존재한다면 생성-반복의 세계에서 그것은 강도차로 나타난다. 강도차는 언제나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일종의 틈새와 간격들로 구성되는 역동적인 질서이다. 강도차로 나타나는 반복은 개체화 속에서 애벌레 주체의 강요된 운동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한다. 생성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영원성의 타락이 아니라 베르그손에게서처럼 잠재성의 현실화, 니체에게서처럼 유일무이한 힘이 자신의 역량을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이다. 360-361
볕뉘
목차의 2장에만 체크표가 있는 책이 <베르그손의 고고학>이란 책때문에 다시 불려나온다. 베르그손의 책들을 모으다가 어 이 책 왜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지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깡길렘을 읽고, 의사, 의과학에 대한 관심. 물리학, 화학과 다른 결을 갖는,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제야 나타날 수밖에 없구나 한다.
이 책에서는 비샤부터 의학의 역사와 독특한 프랑스 과학-철학사의 개요도 확인할 수 있다. 팩트체크라고 해서 우리는 사실이란 것이 명백히 있다는 착각을 은연중에 한다. 사실의 자연사에 따르면 이 또한 개인-집단-현실의 요동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질병의 역사로 보면 이러한 관점을 확연이 얻을 수 있다. 물리학 뉴턴-아인슈타인에 사로 잡혀 명확하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사실이 아님은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자유스러운 것이나 고정된 관점 사실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최근 핫한 블랙홀은 어떠한가. 호킹복사를 통해 사라지는 블랙홀이 관찰되기도 하지 않는가.
이처럼 진리하는 것도 지천에서 시작해 강물을 이루고 결국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개인-집단-현실의 역동적 인식으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프렉은 이 개념으로 중력장이란 표현을 쓴다. 통약불가능한 패러다임의 퍼즐이 아니라 사유양식과 사유집단이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퍼즐의 맞추거나 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퀼트같이 삶을 나누거나 삶을 만들거나 삶을 넘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기후위기라고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기후정의를 외치기 위한 활동가들의 퍼포먼스는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는 녹색을 칠하며 전쟁마저 서슴지 않는다. 빙하가 녹고 산호초가 죽어가도 여기는 딴 세상같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 미래세대와 어떤 교감이 실마리처럼 이어질 수 있을까? 진리는 있는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가?
위 책에는 주류철학이 아니라 비주류의 철학을 끌고가는 저자의 외침도 섞여있다. 사실이 아니라 관심이나 감식의 방법으로 모아낼 수 있을까? 아마 당위보다는 유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 아니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보다 나와 내새끼의 삶의 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쫓겨가는 삶이 아니라 달라지는 삶과 운명이라는 잣대가 조금씩 서로 물들어간다면 지구라는 얇은 대기권의 막에 대한 관심은 높아질까? 아마 그럴 것이다. 전쟁금지 주간이나 전쟁금지 세계지도자, 제2의 평화협약, 아프리카전역기본소득확대시행 예기치못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 조금 분기점은 마련할 수 있을까. 작고 조그마한 생각씨들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듯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의 확율을 높여가는 작은 일씨들의 범벅이 모여 흘러가면서 아마 이루어질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정해진 날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삶이 깨우침들이 강물로 흘러가다가 또 다른 우연과 겹쳐 또 다른 흐름길로 갈 것이다. 집단의 기억은 이렇게 지금-여기와 다르게 만나 과거를 바꾸며 미래로 흘러들어갈 것이란 것은 명확하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긴 하지만, 지금과 다른 방식이 유효한 것 같다.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거대한 폭포의 물결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거대한 전환을 예측할 수 없지만, 운명처럼 불쑥 올 것은 확실하다. 68혁명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 극도로 지난한 전쟁들의 형식을 빌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 새로운 흐름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낙관의 확율은 커지고 전쟁의 상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