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들


 밝게 읽으려는 마음때문이었을까. 시인의 말과 시집의 문틀말들을 새겨둔다.  전시작품들을 시로 새겨놓은 것들까지 읽다보니, 모두 시에 있는 새김말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경멸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지나치도록 경멸해서 거꾸로 삶에 대한 집착을 너머서서 건강함과 강함에 경도된 세상에 살아지는 군상들인지도. 젊은이들이 젊지 않다. 노숙하다는 말도 아니고, 어떤 말로도 그들을 에워쌓을 수 없다. 우울과 신음에 겹쳐 살 수 밖에 없고 그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도 거의 없다. 시대와 세상의 결핍이란 모서리에 짓이겨져 사는 것이 우리 젊은 군상의 소묘일른지도 모르겠다. 나이든 사람들이 죽음을 직접 대면하거나 강도를 강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다. 삶에 대한 맥락을 잡지못하는 만큼 주검에 대한 맥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주검의 결을 느끼거나 죽음의 현실적인 체감력이 높은 청년의 아이러니가 세상이다. 세상이란 다행은 없다. 거꾸로 그 결들을 느끼거나 좀더 나은 대면을 바라는 확장은 거꾸로 삶의 결들을 나을 수도 있다. 뭉쳐진 세상은 결코 도망가는 법은 없다. 이렇게 트여진 시야는 어느 삶들의 곁으로 번질 수밖에 없지는 않은까. 그래서 강한 작품일 것이다. 뜨거운 작품이라고 말이다.

















2. 중년


 중년 여성작가 이름을 빼곡히 적어둔 작품을 만난다. 젊은 청년은 말한다. 외삼촌의 죽음과 자신의 위태로움을 겹쳐 말하며, 그가 삶의 방편으로 삶는 책들과 저자들의 시대넘음을 다시 한번 굵은 글씨체로 모아둔다. 뜨거운 것들은 중심도 아닌 가장자리로 밀려나며 그 많은 것들은 감싸안는다. 아픔들이 보자기 안에 들끓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엔 늘 좋은 것들이 불쑥 솟는다. 삶의 거름이자 비료, 윤기나는 흙빛이다. 누구나 그 토양안에서 한 점의 씨앗들은 볕을 찾아낸다.싶다. 건필하기를 바란다. 안작가.























3. 문어


ph. D 박사. 실력보다는 학위를 선호하는 하버드. 미국대학의 문제를 문어권력처럼 묘사한 글이다. <아더 마인즈>의 실제 문어와 다른 문어다.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다른과학은 가능하다>를 읽어내자 곳곳에 출현한다. 황수영의 의학사를 짚는 대목이거나 도나 해러웨이 책에서도 자주 출몰한다. 번역자인 이유선작가는 로티와 제임스의 실용주의 계보를 친절히 설명해주고, 이 작품이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 관련지어 덧붙인다. 랑시에르는 알튀세로 <자본의 읽자>의 멤버이기도 하고 현재도 엄청난 저작을 쏟아내고 있는 듯하다. <미학적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19세기 예술, 미학의 무의식에 빚지고 있음을 밝혀낸 책이기도 하다. 빠른 과학. <닦달>하는 과학의 세기는 경도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가는 폭탄과 같다. 정치인 한명이 얼마나 세계사를 갈지자로 쓰게되는 지, 우리는 여기저기서 목도하고 있다. 핵폭탄 자체를 제거하거나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공멸한다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 에이아이. 현실이다. 곳곳에 괴물로 출현하는 가장 약한 곳을 골라 찾아다니는...아니 우리는 목도했다. 매일 식사하며 에이아이 트레이로 감원된 식당과 레스토랑과 자영업자들과 등등등....마치 못본 것 처럼 확대해서 보지 않으려고 할 뿐은 아닌가.


















4. SF


SF. 한 때 학위를 하는 친구가 있어 덩달아 읽어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보았지만 모임과 일반인의 관심과 격차는 가늠할 수 없었다. 또한 그렇게 까지 관심사들을 확장하고 있지는 못했다. <로빈슨 연대기>, <기가메시>와 서평 서문을 보면서 그야말로 빨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르헤스를 넘어선 기획과 작품이라니...기대된다  고인이 된 김한수의 쿠옹의 재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SF를 철학과 사상의 전개 방편으로 보는 해러웨이도 겹치고,  전설의 작품인 <빼앗긴 자들>까지 여러 편이 동시에 몰려오며 읽어낼 수밖에 없구나하는 감정까지 생긴다. 잘이겨내며 쾌차를 기원해본다.


볕뉘


죽음은 없다. 죽음은 모른다. 거기서부터가 0이다. 이제 살아낼 수 있다. 이천년 삼천년도 더 된 얘기다. 기본으로 돌아가도 괜찮다. 삶이란.


한 중년여성작가가 서울 전시에 다녀갔다. 한 젊은 청년작가도 어머니와 여동생과 다녀간다. 그렇게 같은 시공간이 겹친다. 아마 다른 언제 같이 만나게 되는 날도 없으란 법이 없다.  우연이란 이렇게 강렬한 선물투성이다. 미래 폭죽처럼 터지는... ...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3-18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른바 비주류 문학인 B급 문학을 좋아해서 상당히 많은 책을 읽고 수집했는데 실제 미스터리,무협,공포판타지,SF소설중에서 SF소설이 제일 매니악한 편인 것 같으며 실제 애독자들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도 이천년대 이전까지만해도 국내 작가들의 SF소설들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해외 번역 작품들도 손을 꼽을 정도였지요.실제 한국에서는 SF소설은 어린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취급받았고 그래서 SF소설은 공상과학소설(현재 일부 매체에서도 아직까지 이 표현을 사용중)이라고 할 정도니까요.
사실 이천년대 초반까지도 한국에서 SF소설을 번역 출간한다는 것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매우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습니다.당시 SF소설을 구매할 이들이 대략 3천명 내외라고 출판계에서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요.그리고 이 당시 간행한 SF책들은 간행 부수도 적고 또 판매 부진으로 절판된 책도 많아서 현재는 중고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실정이지요.
하지만 70년대 아이디어회관 SF소설을 읽고 자란 분들이 출판사 사장,편집자들이 되면서 위험을 무릎쓰고 이천년대 이후 꾸준히 SF소설을 출간하면서 국내 SF소설시장의 저변이 넓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읽고 자란 MZ세대 작가들이 SF작품들을 출간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재기 발랄한 그래픽 노블.  감상하는 내내 점점 초점이 맞춰진다. 드디어 탄다. 그 마음이 곱다 싶다.  아르키메데스가 어쩔 수 없이 전투무기를 발명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을 때, 그는 집광경을 이용해 적들의 선박을 태우는 무기를 발명한다.는 전설같은 일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실제로 재현실험도 해보았다.


반지하거주자의 삶으로부터 나오는 연결에 대한 사실감들도 앎들을 애태우지 않겠는가? 요지부동하지 않는 지구인들의 삶에 적반하장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매치나 저렇게 매치나 어쨌든 매치다보면 패대기라도 치지 않겠는가? 


이런 시작들이 지구란 막의 간절함도 읽어내리라 여긴다.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들어올 릴 수 있다고 했듯이, 이런 시작이 지구인의 마음을 다른 각도에서 활활 태워버릴 단초라고 여긴다.


볕뉘.


가족 작가집단의 번창을 꿈꾸어 본다. 재미발랄한 가족이여 그 기운 번져 스며나가길 바래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3-14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르키에데스의 집광경은 말씀하신대로 21세기에도 수차례 실험을 했는데 곌론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반사울 낮은고대 청동기 거울을 가지고 수백명의 인원이 정확한 촛점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지요

여울 2026-03-14 15:4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카스피님은 관심사가 넓고 깊으시군요. 닿지 않는 곳이 없으신 듯요. 감사합니다.
 


















1.


지난 흔적을 추스릴 겸 책을 살펴보는데, 밑줄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초저녁에 잠들어 한밤중에 일어나 살펴보는데, 베그르송과 에머슨의 연관성 아래에서 보지 않은 연유이기도 했다.  에머슨은 피터슬로터다이커의 <인간공학>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독립운동의 초석이기도 하며 삶의 다기성 긍정성을 내내 언급해주기도 한다.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의 혁신성을 존듀이를 읽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는데, 이렇게 뒤늦은 깨달음은 베르그송을 다시 읽고서야 그 물결들이 이어지고 있음을 눈치챈다.  기억이란 이리 중첩되면서 밀려가기도 하고, 다시 중심을 잡고 서면 더욱 선명해지기도 하는 듯싶다. 









2.


저강도 운동이 지지부진한 이유와 베르그송의 <근육의 단련> 또는 근육힘쓰기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짚어본다. 시간의 공간화. 예를 들면 운동을 부위별로 한다든가? 시간을 양화시켜서 질적으로 달라지는 부분을 보거나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3.


신발을 사러가는 길. 이거는 공부다. 선택불안을 가중시키는 노동이기도 하다. 안정화 쿠션화 카본화와 왜 해부단어들을 알아야만 하는가? 그러고보니 아웃솔이 다 닳아 바꾸어야 한다고. 부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아치깔창으로 긴급보완을 잘했다고 해준다. 그렇게 주말 작업과 소소한 휴일일상들을 바쁘게 보내본다. 프리지어 세 단을 사서 세 네 곳을 밝혀둔다. 춘삼월. 사무실의 반려식물들도 <자태>로서 보답하는 모습이 참 좋다.  어서 어서 기분좋은 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수영의 책을 읽은 뒤 <차이와 반복>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동안 놓치고 있던 부분이 물밀듯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차이와 반복>을 꺼내들고 여기저기 키링처럼 들고 다닌다. 














<이런이론>모임에서 다음 주제작가는 해러웨이로 정해 텍스트는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다. 읽었는지 말았는지 어디까지 봤는지도 가물한데, 일단 찾고보자.


해러웨이의 책이 책꽂이 어디쯤 있어야 하는데 없다. 어디로 간 것인가 대전 소소에 있나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사택에선 찾지 못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원서>, <선언문>, <겸손한 목격자>만 찾아 합방시켜둔다. 해러웨이는 오래 전부터 찾아 읽기 시작하고 원서 번역까지 맡기면서 읽었다. 하지만 선언문의 내용을 재독할 때, 처음독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재독을 완료하고 나서이다. 제대로 읽기 어렵겠지만 다시 한번 소화시켜낼 기회가 온 것이다.


더불어 책을 찾다가 의학사의 인물들을 미리 읽어냈음에도 기억에 없어 아련해진다. 그 책은 <근현대 프랑스철학의 뿌리들>이고 밑줄도 선명히 그어져있다. 이렇게 과거는 비의식 어느 편인가 꽂혀있긴 한 것이겠지. 아연해지지만, 먼 곳으로 우회하지 않고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운 마음도 든다. 시몽동을 이런 흐름으로 읽어내지 못한 부끄러움도 살짝 들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지만, 이겨넘칠 기회가 온 것이니 설레기도 한다.







경험론자인 윌리엄 제임스를 인상깊게 읽던 기억이 새로운데 여전히 읽는 책 속에서 언급이 많이된다 싶다. 책들 사이 그가 대학교육만이 아니라 우주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긴가민가 했다. 그런데 책꽂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세상에나. 읽어보지도 않은 것인가?  다원주의자로서 제임스, 다중우주의 앞선 주장자인지 좀더 살펴봐야겠다. 





볕뉘


책들을 찾다가 못찾고 모둠별로 따로 모아두기만 해둔다. 읽겠지. 어디 도망가지는 않을꺼야. 흥미로운 독서가 봄처럼 기다리고 있다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속을 발견한 베르크손은 이제 모든 것을 진정한 존재인 <지속의 상하>에서 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시론>>은 자유의 문제를, <<물질과 기억>>은 심신관계를, <<창조적 진화>>는 우주와 생명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행동의 문제를 지속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시도들이다. 그 결과 전통적 형이상학은 완전히 뒤집힌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그것은 서양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311

 

그의 운동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로 지속인데,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운동하여 자기동일성을 잃고 변해 버렸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을 말한다. 사실 모든 운동은 항상 필연적으로 타자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운동을 했는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은 그러한 타자화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운동이다./ 설탕이 물에 들어가 녹아들어가기까지 시간, <> 자체가 시간이다./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 생명 또는 순수지속이라 부른 것이다. 비결정성 자체의 자기동일성은 한사코 유지하는 비결정성이다. 필연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여 자신의 비결정성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는 비결정성이다. 비결정적인 것은 비약한다/베르크손은 그것을 <생의 비약>이라부른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라는 것이다./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313-315

 

시론의 배경

 

내가 출발한 것은 과학적 시간 개념이었지 절대로 심리학이 아니었다. 심리학에 도달한 것이지, 거기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지속을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의 밖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순수 지속을 살고 거기에 다시 잠기는 것이 나에게만큼 모든 사람에게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몇 해가 걸렸다. 322

 

<<물질과 기억>>에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실어증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5년간 실어증에 관한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다/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제논의 역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역설을 깰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 지성의 가장 근본적인 착각을 깨는 길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철학사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방도도 그의 손에 쥐어졌음을 의미한다. 324-325

 

모든 과학적 발견과 철학적 탐구의 중요한 걸음걸음마다 우연이 개입한다. 아니, 그런 발견을 한 사람들의 탄생 자체가 우연이 아닌가. 오묘한 것은 그러한 우연이 아무에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것이다. 326

 

시론의 내용

 

1<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이 장 전체는 깊은 감정들, 미적 감정, 도덕감, 근육의 힘쓰기, 주의, 격렬한 감정들, 정조적 감각들, 표상적 감각들, 정신물리학의 순으로 의식의 심리상태들을 하나씩 분석해 가면서, 의식의 각 상태가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질과 양을 혼동하는지를 구명한다. 329

 

1. 우선 깊은 감정의 부분에서는 욕망, 희망, 기쁨, 슬픔 등을 분석한다.

2. 미적 감정에서는 우아함의 느낌과 아름다움의 느낌을 분석한다. - 하나의 감동은 수많은 사실들이 녹아 있는 유일무이한 어떤 상태이며, 예술가는 그렇게도 풍부하고 개인적이며 새로운 세계 속으로 우리를 단번에 끌어들인다. 그것의 풍부함에 의해 우리는 예술의 깊이를 말하며, 그러한 각성상태들은 또한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다.

3. 도덕감으로서 연민의 감정을 분석한다.

4. 근육의 힘쓰기로 단번에 옮겨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깊은 감정과 표면적 노력의 강도에서 공통적인 정의를 찾기 위해서이다.

5. 주의는 단지 정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운동을 동반한다. 긴장이 더해감에 따라 압작, 피로, 고통 등으로 면적을 넓혀가거나 성질을 바꾸는 근육 수축의 느낌이 된다.

6. 격렬한 감정들(격렬한 욕망, 분노, 사랑, 증오 등)은 영혼의 긴장성 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한 관념에 따라 전체가 조정되는 근육 수축의 체계라는 점에서 주의의 노력과 본성상 차이가 없다. 이는 비반성적 관념인 것만이 다르다.

7. 감각은 쾌락과 고통의 감각인 정조적 감각과 표상적 감각으로 나눌 수 있다.-감각은 자유의 시작이다. 그것은 미래 행동의 선택지를 밑그림으로 그려 보여줌으로써 자유로운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쾌락과 고통의 감각은 미래로 향하는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견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바로 그 고통에 동조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다....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라는 명령이라면,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다.

8. 정조적 감각이 거기에 수반되는 신체적 반응 운동에 따라 강도가 평가된다면, 표상적 감각도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정조적 요소를 지니며 따라서 거기에 동원되는 신체적 반응에 의해 그 강도가 평가된다.

9. 정신물리학......1장에서는 결국 의식의 상태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에 양을 집어넣거나 결과에 원인을 집어넣어 해석한 결과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2<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지속의 관념>

 

1. 수적 다수성과 공간: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지만, 그 단위들은 모두 동질적이며, 동시에 동일한 공간 위에서 장소만을 달리하여 병치되어야 한다. 수를 시간 속에서 셀 때도 하나하나 세어 갈 때마다 항상 지금까지 센 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켜야 한다. 결국 수의 관념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 수의 단일성은 이미 다수성을 내포하는 단일성이다. 또 각 단위들의 단일성도 이미 그 단위들이 무한히 나뉠 수 있다는 관념을 내표하고 있다.(분수가 될 수 있다.)

2. 공간과 동질적인 것: 텅 빈 동질적 장소를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정신, 또는 지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공간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공간을 동질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공간 속의 사물들은 불가입적이며 상호 회재적이지만, 의식의 사실들은 상호 침투적이며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 따라서 동질적 장소로 생각된 시간은 진정한 시간이 아니라, 순수 의식의 영역에 공간 관념이 침투한 사생아적 개념이다.

3. 동질적 시간과 구체적 지속: 순수한 지속은 우리 자아의 각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율의 음들처럼 서로 속에 녹아들어가 상호 침투하여 내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를 이룰 때를 말한다. 그때인 자아의 상태들은 모두 질적으로 다른 순수 이질성이며, 부분은 전체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4. 지속의 측정 가능성: 순수 지속의 <질적 다수성> 또는 <구별되지 않는 다수성>은 수적 다수성이나 동질적 장소 또는 측정 가능한 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 이질성이며, 따라서 측정할 수 없다.

5. 운동의 측정 가능성: 내 속에서는 의식적 사실들의 유기적 조직화와 상호 침투 과정이 계속되며, 그것이 진정한 지속이다. 결국 자아 속에는 상호 외재성이 없는 계기만 있으며, 자아 밖에는 계기 없는 상호 외재성만이 있다....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것인 한 정신의 종합이자 심리적이며 불가분적인 과정이다. ..의식이 그 이외의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정신이 계속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종합, 즉 선율의 통일성과 흡사한 종합니다. 바로 그러한 질적 종합이 운동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6. 엘레아 학파의 착각: 엘레아 학파의 역설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킬레스가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뉠 수 있지만 바로 그러한 공간을 단번에 지나가는 그의 운동은 나뉠 수 없다. 그러한 운동 그 자체를 공간과 혼동하여 공간처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논의 역설이 생긴다.

7. 관념과 동시성: 과학은 시간에서 지속을, 운동에서 운동성을 빼고서야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8. 속도와 동시성: 아무리 좁은 간격을 취하더라도 수학이 자리잡는 곳은 항상 양 끝점이므로, 그 사이의 간격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9. 내적 다수성: 의식의 다수성은 <질적 다수성>이며, 수와 공간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도무지 셀 수가 없다.

10 실재 지속: 상징적 표상이 아니라면 동질적 장소라는 형태를 띨 수 없는 자아는 동일성과 특수성이라는 이중적 특성을 가짐으로써 수적 다수성의 형태를 띠게 되고, 특히 그 양자가 결합하는 공간 운동의 도움을 받아 동질적 시간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11 자아의 두 측면: 의식적 삶의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비인격적 자아의 이면에, 한없이 움직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이며 살아 있는 자아가 있다./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339-345

 

3<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자유>


1. 물리적 결정론: 생명현상은 비가역적이다. 물질들은 영원한 현재에만 머무르지만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나 의식적 존재에게는 덧붙임(과거가 자꾸 불어나니까)이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347

2. 심리적 결정론: 그 이전의 의식상태가 이후의 의식상태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장미의 향기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억 자체를 마시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불변하는 장미의 향기가 있고 거기에 기억이 연상된다는 것은 그것을 공간화한 것이며, 앞장에서 말한 병치의 다수성과 상호 침투의 다수성을 혼동한 것이다. 348

3. 자유로운 행위: 사실 자유로운 행위는 드물다. 우리의 일상적 행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느낌들 자체에서 얻는다기보다는 그러한 느낌들이 붙어 있는 의식 표피의 불변의 상으로부터 얻는다. 우리의 감정, 감각, 관념들이 기억 속에 응고되어 우리 행동의 기저를 형성하며 많은 경우 우리는 자동기계처럼 행동한다./갑자기 의식의 심층으로부터 반란이 일어날 때도 있다...그것은 마치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인격 전체로부터 나온 것이다. 350

4. 실재 지속과 우연성: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망설이는 자아일 뿐이고, 자유로운 행위는 거기서부터 과일처럼 떨어지는 것이다....우리의 의식 상태를 X,Y라는 도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을 시간을 공간으로, 계기를 동시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도식을 제거하면, 결국 결정론은 <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것을, 자유론은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러므로 자유의 문제를 건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351,352

5. 실재 지속과 예견: <모든 전건을 알면 후건이 도출된다> 이런 논의의 밑바닥에는 반성적 의식의 착각이 깔려 있다. 첫째는 강도를 고유한 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특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구체적 실재, 즉 의식의 동적 진행을 완성된 사실의 물질적 상징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착각은 시간과 공간의 혼동이라는 마지막 착각에 기인한다. 353

6. 실재 지속과 인과성: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리고 근대 물리학은 모두 원인과 결과 사이에 논리적 필연성을 확립하고, 지속의 작용을 파기하여 계기의 관계를 내속의 관계로, 외면적 인과관계를 근본적 동일관계로 환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필연적 결정의 관계로 만들려고 할수록 지속의 작용은 배제된다. 355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가 수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은 분해되지만 지속은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하려면 그것을 고정시켜야 하지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진행은 사물로 지속은 연장으로 그리고 자발성은 타성으로, 자유는 필연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357

 

결론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인 장소로 간주한 것이다. 지속과 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자유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롭고 실재하는 자아를, 지속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식능력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또 시간이 동질적이라면 동일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인과성은 필연적 결정이 될 것이므로 자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칸트는 거기서부터 지속과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유를 시간 밖에, 즉 우리에게 입장이 금지된 물자체의 세계로 넘겨 버렸다. 358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독특한 삶의 입장에 선다면, 즉 동적인 통일성과 질적 다수성의 구체적이고도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359


볕뉘


읽지 못한 해설이 삶의 이력 배경과 요약이 잘 되어 있어 옮겨놓는다.


요약 ▼

 

제시해주신 텍스트는 앙리 베르크손(Henri Bergson)의 철학, 특히 그의 저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지속(durée)'**과 **'자유'**의 개념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을 5가지 주요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1.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 '지속(Duration)'

  • 지속이란? 시간이 단순히 시계 바늘처럼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선율(멜로디)처럼 앞뒤 상태가 서로 침투하며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질적인 흐름을 의미합니다.

  • 자기동일성의 유지: 운동하면서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나'라는 본질을 잃지 않는 운동이 바로 지속입니다.

  • 생의 비약(Élan Vital): 물질의 필연성(정해진 법칙)을 극복하고 비결정적이고 자유로운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힘입니다.

2. 공간과 시간의 혼동 (지성의 착각)

  • 공간화된 시간: 우리가 흔히 쓰는 '과학적 시간'은 시간을 공간 위에 나열된 점들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시간이 아닌 '사생아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 수(Number)의 함정: 숫자를 세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공간적 배치를 동반합니다. 하지만 의식의 상태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숫자로 측정하거나 양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3. 제논의 역설과 운동의 본질

  • 역설의 원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은 '운동 그 자체'와 '운동이 지나간 궤적(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 해결: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지만, 운동은 심리적이고 불가분적인 하나의 도약입니다.

4. 자아의 두 가지 측면

  • 표면적 자아: 사회 생활과 언어 소통을 위해 고정되고 정형화된 자아입니다. 결정론의 지배를 받으며 자동기계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 심층적 자아: 내면 깊숙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질적으로 다르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본래적 자아입니다.

5. 자유와 결정론

  • 자유로운 행위: 자유는 심층적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입니다. 이는 분석하거나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석하는 순간 '살아있는 지속'이 '고정된 공간'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 칸트 비판: 칸트는 시간을 공간처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유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의 영역으로 넘겨버리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 결론: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지속 속에 머문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지속은 분석되지 않으며, 자유는 정의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