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짐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오고가는 길, 부담되는 무게는 은근히 지치게 만든다. 두껍고 부피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 책 가운데 하나가 이어진다. 한권은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한권은 새로 구입해 비닐을 뜯지 않은 신상이다.


읽게될 지, 아니며 그냥 가방 안을 돌다가 다시 내려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일처럼 책의 일도 그러하다. 찰라의 만남도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물을 챙기고, 서명 받을 책도 챙기고, 도록까지 챙기니 짐이 양손으로 버겁다 싶다. 하지만 내려올 짐이 아니라 해방될 짐이니 일단 참자고 한다.


<<내가 없는 쓰기>>는 막 오월 편에서 시작한다. 책가늠줄이 거기에 자리잡고 있다. 결혼식장에 가는 길. SRT열차가 가깝다고 안내하길래, 이십여분 남은 17번 플랫폼에서 읽다. 청량감이 도는 그늘은 얕은 바람도 있어, 읽히는 책은 스스로 빛을 뿜는 듯하다. 한 줄 한 줄 꼭꼭 씹어 읽히는 기분이다. 오월을 차곡차곡 밟고 있다니.  유월을 남겨둔다.


<<정적과 소음>>으로 갈아타기 직전,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 ...

또 다른 오월을 읽어낸다. 어제를 훑어낸 짐가방은 그래도 견딜만 하고, 가방 속 에코백을 꺼내 들면 가볍다는 느낌이 와서 좋다. 


<오월>이 한 주 남다. <오월>이 다 가기에 앞서 오월을 읽어내는 기분이 새롭다. 그렇게 올해도 어김없이 색다른 오월을 깡총거려본다.

피부란 시간이 투과하는 얇은 유리문이다. 시간뿐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스며든다. 멀리서 들려오는 원인 모를 경보음에서부터 비 온 뒤의 습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온종일 피부에 배어든다. 아침에 비어 있던 얼굴은 오후가 되면 온갖 기미들이 들어와 차곡차곡 쌓인다. 얼굴은 무거워진다. 이윽고 하루에 속하게 되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안에서 움직인다. 하루가 얼굴을 점령한다. 나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계에 가담한다. 오후에 다시 - P107

갈수록 대기는 높아지고 촘촘해진다. 잎들의 색은 조금씩 진해지고 두꺼워진다. 온도가 한 단계씩 오르고 공기는 쉽게 젖고 마르기를 반복한다. 어떤 곳이 되었든 가기를 바라지 않고 나서지도 않았는데, 5월에는 날마다 어딘가에 도착해 있는 느낌이다. 내가 5월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5월이 나를 맞이하는 중이다. - P123

5월과 함께 걷는다. 뒤돌아보면 나무들이 두꺼운 잎을 달고 따라온다.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도 난다. 그 찰랑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5월에는 천천히 걷고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 P103

그늘을 본다. 모든 것이 그늘을 떨어뜨린다. 바닥으로 길게 떨어뜨린다. 떨어진 그늘이 흔들린다. 나뭇잎의 그늘이, 나무의 그늘이, 사람의 그늘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을 본다. 흔들리다보면 이 그늘이 저 그늘이 된다. 자전거의 그늘이 내 그늘이 된다. 내 그늘이 없다. 다른 그늘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늘을 따라 걷는다. - P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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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7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보‘

합리성은 시간은 직선이란 관념*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생긴 미래는 계획해서 만들 수 있다는 착각 또한 낳은 겁니다.

그럼 시작점을 직선이 아니라고 가정해보는 겁니다.

예를들라면, 여러분은 곡선이라 답하겠죠.

음, 그러지말고 뒤엉킨 고무줄이라고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어떻게 되겠어요.

곡선도 보이겠죠. 보면서 만져보는 겁니다. 당기면 늘어나기도 하고, 누르면 줄어들기도 하겠죠. 어떤 놈은 풀려나기도 할 겁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읽는 동안 시간을 경험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시간은 직선이다‘라는 추상에 사로잡혀 생각과 일상을 전개한 거예요.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안타깝게도 놓쳐버린 거예요.
미래에 사로잡혀 현실의 여러가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돌아가봅시다. 어제 난 시간을 다루는 세공사 둘을 만나, 밤이 고운 뒷고기 집에서 얘기를 만진 겁니다. 그리고 오늘 밤 다른 시간 속으로 접혀들어 또 다른 시간을 만져볼 겁니다.

*도미니크 르쿠르, 《진보의 미래》동문선

1.

예전에 읽은 책이 잡혀, 서울 가는 기차안에서 다시 본다. 이해되지 않던 말들이 바로 집혔다.

2.

세공사 가운데 한 분이 다시 한살 토크쇼에서 준 편지도 다시 밑줄그어 읽다. 시간이란 단어에

#나다이즘
#서울대호암교수회관
#나다이즘전
#Nada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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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컨벤션홀로 통하는 로비는 비가 오는 내내 바람골을 만든 듯 춥다. 손님이 없을 듯 싶지만 기다림이란 그리 어설프지 않다. 몇 권의 책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수명의 <내가없는 쓰기>의 몇 개월을 읽다보니 벌써 여름 가까이 온 듯하다. 그러다가 빛과 실을 건네든다.



2. 


이런 뒷부분의 일기가 묘하게 겹친다 싶다.


<빛과 실>에는 글쓰는 작업을 위해 공개한 루틴이 나온다. 더 오래, 더 길게는 작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헌데 공짜는 없다. 꽂힌 것은 스트레칭이다. 오십견을 겪은 뒤 느낀 것은 잔근육을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다. 


3. 


전시 뒤풀이를 못한 사위와 딸. 지난 비내리는 주말 틈을 타 일정을 잡고 함께 한다. (어머님과도 한잔) 음주에 대한 흑역사를 거침없이 말하는 제멋대로 여사 앞에서 얼굴도 화끈거린다. 하지만 없는 사실도 아니니 어찌할 수는 없다. 짬을 내서 달려주지만 많이 마신 술에 장사는 없다. 여독에 더해진 일정이 말해준다 싶다. 그림 작업 역시 노동이 들어간다. 과한 작업을 하면, 노가다처럼 쓴 막걸리 한잔 해줘야 마무리되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간다. 문제는 말미의 기분이다. 몸은 넘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은 정신승리 편이 아니다. 그렇게 술병은 생기고 다음날의 밀도와 농도는 구멍이 생기고 허술해진다.


4. 


몸의 무게가 내려오다가 증권차트처럼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점을 내려오기 위해 얼마만큼의 강도와 길이가 필요하지도 지난 몇 달간 과정으로 배우게 된다.  조금 더 내리기 위해서 하는 글쓰기도 일환의 하나다. 하지만 달리기도 노동이다. 마지막이 문제다. 매듭을 어떻게 지어주느냐다. 절주의 요령이다.


조금은 비겁해지기로 한다. 어제 숯불꼼장어 뒤 얼큰라면이 문제였다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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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상처나 난다. 흉터가 생긴다. 누구나 갖고 있다. 아픈 기억과 나와 다른 환경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충격들은 나와 섞이지 못하고 동거한다. 불쑥불쑥. 트라우마다. 한가롭고 싶지만, 정작 한가한 시간들이 주어지면 못참는다. 지루한 것이다. 인간은 그렇다. 좋다가도 말고, 나쁘다가도 좋아진다. 생명은 그렇다. 그렇게 자신을 지워내며 남을 이겨내며 면역이 생기며 살아가는 존재다. 


능동태와 수동태.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들은 이렇게 언어에 의해서도 갇혀있다. 그들에게는 나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줘야 한다. 주어와 가끔 명사만 반짝거리고 그렇게 반짝여야 한다. 대명사의 사소한 그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지금을 살아내는 존재는 그래서 경계가 없다. 심문의 언어, 자책의 언어만이 있어, 정작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볼 수 없는 환경이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교과서에나 있다. 역사와 기억을 가진 존재는 말과 환경이라는 폭력에 끊임없이 자가교정을 하는 존재다. 그러니 교과서 밖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성통증이라는 것은 신경에도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기억이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윤과 국힘 정권의 삼년은 이런 배제와 이분의 늪과 같은 과정이었다. 끊임없이 혐오와 수치심과 자극으로 한편을 적으로 몰라내고 폐기시키려는 것이 본질이었다. 한 번도 품으로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언론과 미디어의 지난 십년의 수사를 보라. 심문과 자책의 단어, 그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 늪에서 누군들 온전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어쩌면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트라우마다.


당사자연구라는 것이 이 책들 사이 여러 번 나온다. 정신병, 우울. 나의 서사를 타인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병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섞여나가면서 알아지며 달라지는 관계, 그러면서 정작 갇힌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쯤에서야 달라지고 낫는다 한다. 


숫한 비평과 날선 정치인들에겐 책임의 언어가 부재하다. 비난과 비판만 있지 회복적 비평이 없는 세상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일상의 미세한 틈의 말들도 바꾸ㅕ야 조금씩 바꿀 수 있고, 타자의 반면도 나라는 사실을 알아채가는 과정이 있어야 바뀐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험하게 몰아부쳤다. 


헌법수호의 날. 민주회복의 날에 지금을 너머서는 우리를 상상해본다.


볕뉘


정정. 실수, 실패. 우리는 무수한 환경과 면역을 이루어내는 존재다. 순간순간 실수, 실패가 우리를 이겨내는 전부다. 인정한다는 전제아래. 이 암울이 비처럼 내리는 세상에는 질투가 힘이 아니라 실수을 정정해내는 힘.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 자신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힘들이 우리를 겨우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회복해야 한다. 말할 기회를 변론할 기회를 인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타인과 그릇된 자신을 함께 비추거나 봐 줄 광장도 필요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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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으로 가다가 돌아선다. 한밤 중에도 꽃들은 지천이고 흐드러진다. 오르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나눈 이야기들의 단맛이 입안에 남아있고 환한 맛도 섞인다 싶다. 오랜만에 들른 선술집의 고정석에 앉아 나눈 얘기들. 팝스 사장님은 클로즈 문패를 걸어두고 열심히 노래 연습중이다. 일찍 문을 연 라이브 카페의 깔끔한 곳에서 한잔과 한보따리 얘길 나눈다.


살다보면 우리를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지도 못하는 아이러니나 수수께기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일상이고 대부분이다. 식사 메뉴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만든 상황일까 만들어진 상황일까? 그래, 섞여있다. 그래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다. 꼬이기도 하고 얽히기도 하고, 삶의 능선에서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막 이어진 새로운 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일조를 했고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굳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늘어놓는 것이란 말이야. 한 나라의 역사가, 각 나라의 역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기점을, 드러나 사건들을 색다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산불, 수해, 태풍에 대한 피해 등등 산사태에 이르기까지 선을 넘는 것들의 행태와 양상이 우리의 상식이란 고속도로와 더 멀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갇는 시야와 폭을 훨씬 초월하여 다른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체제는 더욱 옭죄이고,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쓰레기더미를 찾아 일자리를 구한다. 정상적인 판단도 줄거나 부재하며 논쟁이나 회의나 하물며 토론 같은 것들도 갈수록 드물어진다. 그러니 기획기사같은 것도 미디어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갈수록 메인을 벗어나는 것들의 품질은 떨어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뇌를 밖에 꺼내놓고 살아지는 좀비들 같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피맛만 찾을 뿐, 자기가 왜 여기 이렇게 서 있는지를 묻지 못한다. 물어보지 못한다. 답하지 않으려한다. 이런 와중에 내새끼 우리새끼는 그나마 귀여운 맛이라도 있다. 더 챙겨준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가혹했던 지난 날들을 지워버린다. 맥락이라고는 개나 줘버려하고 자신을 지우고 살아낸다. 그래서 좀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그렇게 맞닿아 있다. 맹신의 끝엔 자신을 돌아보거나 밖에 서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만의 예외다.


총칼을 들고 국회에 난입한 일들. 사건. 세계민이 모두 보았는데도 없던 일이란다. 그래서 그 혐오의 끝은 바른 사고를 할 수 없다. 이건 제 자식이 또 그런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무수한 사람들이 한 배에 탄 듯, 선장이 가르키는 곳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리도 많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말은 거품이 되고 법은 누더기가 되고 신조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파고 후빈다. 말인지 된장인지. 어처구니 없는 언론과 매체 미디어는 홍수가 범람하듯 한다. 






































  여기 서 너분은 여기 지금의 문제가 구석기가 아니라 신석기때부터라고 한다. 농업혁명때부터 정착하면서부터라고 말이다. 구석기의 유전자가 지금처럼 공복을 부르짖고 꺼르륵 소리를 몸에 챙겨줘야 하듯이 아직 신석기이후를 유전자를 갖을 준비를 못하고 있다한다. 1만 2천년전부터가 문제다.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300-400년전 자본주의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다니지는 않지만 시동이라는 버튼을 매일 매순간 말 50마리 백마리를 끌고 누비고 다닌다. 이 비좁은 지구 안을 돌아다닌다. 이렇게 말을 걸기도 한다.


좁은가 비좁아지는가 우리 일상이 어떻게 되돌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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