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자폐(신경 다양성), 타자는 없는가?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의 서문에서 이전의 스타일로 철학 책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기술한다. ‘둘이서 쓰다’라는 실험은 이 예언을 문자 그대로 실천해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간접화법을 이용해서 철학자를 논하고 있던 때처럼, 말하고 있는 들뢰즈는 말해지는 쪽에 있는 가타리로 생성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두 사람이 말하고 있던 것처럼 ‘나’라 말할지 말하지 않을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어디를 들뢰즈가 쓰고 어디를 가타리가 썼는가 하는 억측은 전혀 의미가 없다.
「기계와 구조」 가타리
(1) 구조와 기계:
구조는 일반성의 차원에 속한다. 거기서는 각 항이 교체 가능하다. 그에 비해 기계는 반복의 차원에 속하고 있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하나가 다른 것이고, 완전히 동일 사태가 반복되는 일은 없다. 반복에서부터 ‘뭔가 새로운 것’, 즉 ‘차이’를 ‘훔쳐내는’ 것으로 일반성 차원에 위치하는 ‘습관’이 성립된다. 가타리는 이 일반성의 차원을 구조에, 특이성의 차원을 기계에 배분하고 있다. 기계는 날짜가 있는 사건을 다룬다. 즉 역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시간이나 역사나 변화를 다룰 수 없다. 물론 이 개념은 서로 이견이 있었고 『천 개의 고원』이후 다른 개념으로 치환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 속에, 혹은 에스에 최초의 시니피앙인 Φ가 억눌려져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인간은 인간이 된다. 인간은 이 Φ를 계속 구하지만 그것은 결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원의 결여’이다. 따라서 그 대신이 되는 것을 계속 찾는다. 라캉에게 상정되고 있는 욕망은 항상 단 하나이다. 최초에 있던 모자 간의 욕망의 어긋남, 단 하나의 상실, 결정적인 결여를 채우려고 하는 것, 그 이외의 욕망은 없다. 그렇게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시니피앙이 주체 그 자체를 대리=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가타리는 기계의 수준을 도입하면 주체(무의식의 주체성)는 대리=표상되지 않는다고 라캉의 설정에 변경을 더한다. 그것은 욕망을 단일한 ‘결여’라는 원인에서부터 설명하기를 그만두고, 욕망을 복수의 흐름으로서 파악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훗날 안티오이디푸스는 ‘결여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욕망의 복수성을 주장하게 된다. 정신병은 원억압이 정상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라캉파는 설명한다. 가타리는 라캉파적 구조에서 인간을 보면 정상적 원억압이 있고 상징계로의 진입이 일어난다고 설명되어버리지만, 실제로는 원억압은 그렇게 강고한 것이 아니고 팔루스는 용이하게 이탈한다. 그리고 기계라는 시각에서 상상계와 상징계가 모호하고 명확히는 구별할 수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3) 구조와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왜 그렇게 불리는가」
라캉은 무의식을 개인적인 것으로서도 집단적인 것으로서도 아닌, 간주관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무의식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덩어리로서 형성되지 않고,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상징적 심급과 관계 속에서 계열을 짜내면서 형성되어감을 의미한다. 다음 기준에서 나타나는 ‘공백의 칸’이란 그러한 계열 사이를 왕래하고, 구조 간의 항이 끊임없이 이동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팔루스 대상a. 자신의 동일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렇게 얘기한다. 여러 계열들을 계속 돌아다니는 대상=x를 지정하지 않고 구조는 정의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그것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작품도, 사회가 야기하는 성과도, 질병이 야기하는 성과도, 생 일반이 야기하는 성과도, 사회가 야기해서 명령을 내리는 이 대단히 특수한 대상을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온갖 구조는 대상=x, 기원적인 ‘제3항’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단, 이 항은 스스로 기원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 결론에서 발견되는 실천적 태도는 구조에 사고accident가 찾아와 시니피앙이 사라지거나 시니피에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 이외의 무엇도 아님이 명백하다. 이 최후의 기준, 주체로부터 실천으로는 가장 모호한 기준, 미래의 기준이다 고 한다.
법(사법, 종교, 정치, 경제, 나아가서는 사랑과 노동, 친족과 결혼, 예속과 자유, 삶과 죽음 등 온갖 것에 관계하는 광의의 법)은 하나의 체계이고, 따라서 한 번에 주어진다. 그러나 사회에 의한 ‘자연의 정복’은 점진적으로만 행해진다. 형식적으로 말하면 사회는 조금씩 새로운 사태와 조우한다. 그 때문에 법은 그것이 무엇에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사전에 명백하지 않는 채 그 모든 체계가 적용된다. 시니피앙(법, 규칙)과 시니피에(그 적용 대상) 사이에는 반드시 불균형이 존재한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사회변혁의 동인이다.
(4) 계열, 팔루스, 원억압
들뢰즈는 에스와 자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에스에는 여러 국소적인 자아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복수형으로 말해지는 “국소적 자아들”이란 부분대상을 구하는 흩어진 부분욕동의 집합이다. 그에 비해 이“복수의 미세한 수동적 자아를 그러모아”, “능동적”으로 통합하고 에스로부터 구별되는 형태로 생성한 이른 바 자아는 단수형으로 “대역적인 자아 moi global”로 불린다. 전자(국소적 자아/쾌락원리/수동적 종합)는 후자(대역적 자아/현실원리/능동적 종합)에 선행한다. 그러나 양자는 동시에 지속하고 있고, 또한 후자가 전자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자가 동시에 지속하는 한에서다. 이는 프로이트 학설을 발전적으로 재정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거세, 원억압이라는 ‘기원의 일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억압하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반복하므로 억압하는 것이고, 반복하므로 망각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종류의 경험을 우선 처음으로 반복이라는 양태로서만 살 수 있으므로 억압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반복강박이라 불리는 것을 완전히 뒤집어, 사람은 반복하기 때문에 비로소 억압하는 것이라 한다. 반복이야말로 어떤 종류의 경험을 살기 위한 조건인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억압의 존재는 인정해도 원억압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반복이 억압을 낳는 것이라면 최초의 기원적 억압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이는 ‘위장하므로 억압한다’를 살펴봐야 한다. 도라의 히스테리 역시 위장이 있고 그 효과 억압이 있다. 위장의 반면이 억압이다. 대상=x, 요컨대 팔루스가 대상a로 끝없이 뒤쫓기게 되고 차례로 새로운 시니피앙으로 치환되어가는 모습이 위장에 겹쳐지고 있다. 그것에 의해 반복이 행해지는 것이다. 위장, 즉 대상=x에 배정되는 치환이야말로 반복을 구성한다.
“사람은 반복하기 때문에 위장하고 위장하기 때문에 억압한다.”
애벌레 자아가 나오기까지 들뢰즈는 프로이트=헤겔대립모델, 프로이트=라캉 계열모델, 프로이트=라이프니츠 미세지각 모델을 참고하면서 너머선다. 타나토스 개념을 넘어선 것처럼 흥분을 구속한다는 과정의 반복에 의해 심적 장치를 지배하는 습관을 개념화한데 이어 더 깊은 곳에서 반복의 정념=수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차이로서 흥분이 그것만으로 이미 하나의 요소적인 반복의 응축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욕동은 구속된 흥분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복수의 ‘국소적 자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5) 분열분석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는 국경선이 뻗어 있는 것인가?」
들뢰즈=가타리는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어떠한 본성상의 차이도, 어떠한 국경선도, 어떠한 경계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경증과 정신병은 정신분석에서 명확히 구별된다. 신경증은 생활사에 기원을 갖는 내적인 갈등이 야기하는 심신의 기능장애를 가리키고 거기에서 인격의 장애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신병에서는 자아가 에스의 지배하게 있고 인격의 장애를 보인다. 라캉파에서는 원억압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신경증이고 원억압이 실패하고 있는 것이 정신병이다. 원억압의 실패는 시니피앙 연쇄가 미약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신병 환자에게는 “세계의 총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의미, 즉 ‘수수께끼’로서 주체에게 나타난다. 그것에 비해 신경증에서는 시니피앙의 연쇄는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고 일상생활을 의미 가운데서 살고 있다. 신경증은 그 의미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가벼운 신경증 환자로서 ‘정상인’ 같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원억압의 정상적 작동을 의심하는 분열분석은 정신분석과 같이 신경증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증화한다. 이것은 가벼운 신경증 환자로서 정상인의 이미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정상인의 존재가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원억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널리 가족도 포함한 사회영역에 있어서 신경증화의 체제 혹은 억압의 체제가 분석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분열분석의 목표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리비도 집중의 특수한 본성을 분석하는 것. 다음으로 이것에 의해 욕망하는 주체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억제를 욕망하게 되는가를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상된 욕망을 바라보았을 때 우선 최초로 발견되는 것이 사람은 왜 스스로 억제하는가, 환언하면 왜 자신들의 예속을 바라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4. 전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