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1.


늦밤 책을 마무리하면서 일찍 잠을 청해봅니다. 일어나보니 제법 이른 시간이어서 <결핵>이란 단어로 책에서 스며든 생각들을 모아봅니다. 그리고 제미나이를 돌려 해석해보라고 했더니 역시 요약의 천재답군요.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구석들이 여지없이 보입니다.


<네 주요한 맥락과 요점을 비틀고 있어요. 과도한 확신을 갖는 경향도. 이래서 무섭습니다> 왜곡*왜곡의 누수같은 현상으로 번질 수 있다는 느낌이 다가서더군요. 우리는 또 다른 사고양식에 잡혀 살고 있는 겁니다. 애석하게도 그래서 제미나이가 알려준 질문을 돌려봅니다. 그래요. 혹 궁금하시다면 돌려보세요. 


2.

토머스 쿤은 프렉에게 엄청난 감명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 머릿말에 여러 구차한 사실들을 넣긴 하지만 그는 과학혁명이라는 말을 버리지 않고 싶던 것 같습니다. 프렉이라면 분명 이 혁명은 과정의 일부분이자 경험의 하나로 해석될 수 밖에 없어요.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이론으로 고전역학을 한 부분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미리 깨달은 것일까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3.


<방법론적 전회>. 프렉은 이미 현재 뇌과학이나 철학이 기반하고 있는 경험이란 것과 과정이라는 것에 천착해있습니다.  다원론자임은 물론 실패, 시도, 오류, 오해라는 경험에 기반한 칸트의 물자체란 개념의 성자체를 무너뜨려버렸습니다. <경험자체>라는 것도 없고, 개인이란 것도 없고 특출난 개인이 발견하고 발명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4.


그의 생각 결을 따라가다보면 거저 얻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선입견들을 되새김할 수 있는 겁니다. 하물며 우연히, 필연적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며 세상을 다른 색깔로 물들이거나 번지게 할 수 있다는 순조로운 생각도 덤으로 얻게 됩니다. 


5.


뒤에 책의 원문 밑줄들을 살펴보시면 더욱 자세히 저자의 생생함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지식이란 추상에서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편에서 특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단 밑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겁니다.


6


시간은 소외이자 반성입니다. 청년 맑스의 말이지만 모든 사물을 니체의 말처럼 춤추기도 하고, 시간을 통해 용해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용출됩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이 살아내는 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묵묵히 제3의 것들을 소화시켜내는 자들이 세상을 바꿔놓은 겁니다. 혁명이란 결과론적 해석물은 이 대양에 그저 소금 한 점일 뿐입니다. 끓어넘치는 것들만의 세상이기도 한 듯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은 빠르게 낡은 것들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결핵'

낭만적인 병은 화류병인 매독처럼 학문의 눈길을 받지못한다. 점성술.종교.피갈이.세균학.병인학.혈청학인 바서만반응검사가 되고나서야 장구한 사고양식은  바다에 이르른다(중력장) 개인ㆍ집단ㆍ현실은 인식의 삼요소다. 사실의 한 주기는 관찰ㆍ저항ㆍ강압의 발전 사이클을 밟는다. '사실'의 자연사는 이러하다.

물리학과 출신인 쿤과 질병학을 평생담고  산 의사 프렉의 책*을 사후에 언급해 끌어낸다. 400부밖에 팔리지 않은 책을 근 30년뒤에. 과학혁명이라는 통약불가능한 정상과학의 머릿말로.

사실과 관심. 과학적 사실의 기원은 오리-토끼놀이 퍼즐이 아니라 '관심'의 자연사에 가깝다. 홀로인식론은 이렇게 허물어지지만 우리는 늘 이렇게 선행이념에 붙들여 산다. 사고양식과 사고집단을 벗어나지 못한다.물론 시대도.

*루드비크 프렉,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

그러면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비길만 하다고도 한다.




요약

 

보여주신 글은 단순한 질병의 기록을 넘어, 지식의 고고학을 탐구하는 한 편의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특히 루드비크 프렉(Ludwik Fleck)과 토마스 쿤을 교차시키며 '결핵'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이 어떻게 '사회적·역사적 구성물'로 변모하는지를 예리하게 짚어내셨네요.

제시하신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시적/철학적 해석입니다.


1. 낭만적 낙인에서 세균학적 데이터로


글의 서두에서 언급된 '결핵'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예술가의 병' 혹은 고귀한 영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냉소하며, **매독(화류병)**이 바서만 반응(Wassermann test)이라는 과학적 진단명을 얻기 전까지 방치되었던 것처럼, 결핵 역시 '관심'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저 모호한 고통에 불과했음을 말합니다.


해석: 질병은 몸의 현상이기 전에 인식의 현상입니다. 점성술과 종교의 손을 떠나 혈청학의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비로소 질병은 '치료 가능한 사실'이 됩니다.


2. '사실'의 자연사: 관찰, 저항, 그리고 강압

프렉이 주장하고 쿤이 완성한 핵심 논지는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조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기적 사이클: 낯선 현상을 관찰하고, 기존 체계가 이를 저항하다가, 결국 새로운 사고양식이 이를 강압적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입니다.
사고집단(Denkkollektiv): 우리는 홀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시대와 학문적 공동체라는 '사고집단'의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봅니다. 결핵균 역시 코흐(Robert Koch)가 현미경 아래에서 이를 '관심'의 대상으로 호명하기 전까지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3. 오리-토끼 퍼즐을 넘어서
토마스 쿤이 게슈탈트 전환(오리이기도 하고 토끼이기도 한 그림)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설명했다면, 프렉은 그보다 더 끈적한 **'관심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선행이념의 굴레: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며 홀로 서려 했다면, 프렉은 "우리는 우리 이전의 생각들에 붙들려 있다"고 말합니다. 《방법서설》이 근대 이성의 출발이었다면, 프렉의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은 그 이성이 얼마나 사회적인 '공모'에 의해 유지되는지를 폭로한 반(反)방법서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총평: 인식의 삼요소가 빚어낸 결핵


결국 이 글에서 '결핵'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개인의 고통이 집단의 언어(의학)를 만나 현실이라는 데이터로 확정되는 과정. 30년간 잊혔던 프렉의 책이 쿤에 의해 부활했듯, 사실이라는 것도 결국 시대가 허락한 '관심'의 빛이 비출 때 비로소 화석에서 생물로 깨어난다는 통찰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결핵을 앓는 것이 아니라, 결핵이라고 정의된 '사고양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의 흐름이 무척 깊이 있고 묵직합니다. 혹시 이 분석을 바탕으로 루드비크 프렉의 '사고집단' 개념이 현대의 AI나 알고리즘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 볼까요?



 

펼친 부분 접기 ▲





프렉의 생각에는 사고양식사고집단이라는 두 개의 사고 체계에 의해 과학이 발전해 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9

 

과학적 사고는 적절한 사회적 요건을 갖춰야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프렉의 생각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 대한 고려없이 과학을 말하는 것은 마치 중세 교부철학 시대에 뉴턴을 찾는 것과 같다. 우리는 르네상스에 대한 역사적 고찰 없이 과연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프렉에게 이러한 사회학적 방법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것은 콩트와 뒤르켕학파였다. 19

 

사회적 농축: 과학에도 사회적 농축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사고 방향이 기존의 사고와 부딪치는 저항 속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20 프렉은 올바름과 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는다. 물론 올바름과 참이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라면, 어떤 사고나 관찰도 올바르고 참일 수 없다....사고의 전환은 인식론의 문제이고, 사실의 변화는 사회학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인식사회학의 문제다. 21 프렉 사상의 독창성은 그 당시의 주류 사상인 논리실증주의에 맞서 공공연히 사회학적 인식론을 주장했고 옹호했다는 점이다. 26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주어진 전제조건 아래서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확정 짓는 것을 말한다. 이때 전제조건은 능동적 연결과 일치하고, 인식할 때 집단이 담당해야 할 몫을 형성한다.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수동적 연결과 같고, 객관적 현실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형성한다. 확정 짓는 작용은 개인이 담당해야할 몫이다. 32

 

과학은 역사적으로 발전되고, 사회학적으로 제약되며, 과학 상호 간에 작용한다. 이 구조의 역동성이 과학의 발전적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발전을 진보나 진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과학의 발전은 사고 양식과 관련 있고, 사고 양식이 바뀌면 이와 관련된 특성이 상실된다. 양식과 관련 없는 것들은 모두 부적절한 것이고, 더는 자명한것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인식이 부상하면, 낡은 것은 사라진다. 36

 

프렉이 발표한 최초의 과학이론은 1926<<르뵈브 의학사 애호가 협회>>에 수록된 의사의 사고를 결정짓은 몇몇 특수한 특징들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논의되어 온 사례와 반대로, 의학에서 일어나는 이론적-실험적 계기와 치료적-실천적 계기의 유형적 결합이 처음부터 이 연구의 협동적이고 학제적, 집단적 주장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57 자연과학의 분야와 달리, 의학의 특수성은 두 개로 본다. 그 하나는 의학의 인식론적 관심이 합법칙적이고 규범적인 현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벗어난 유기체의 병든 상태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질병의 실체를 규정하는 일은 오직 개별적 관찰을 고도로 추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의학에서 개념화는 이따끔 통계적으로 일어난다.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의학의 인식 목표가 먼저 인식 자체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이라는 점이다. 의학에서 추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따금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된다. 58 의학에는 하나로 통일된 고찰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질병 현상을 각기 다르게 개념화할 수 밖에 없다는 필연성은 여기서 질병의 이론이 지닌 통약불가능성을 나타낸다...의사들이 인식하는 것은 끊임없는 흐름과 같다. 이 흐름 속에서 언제나 특정한 방법적 이념과 지배적인 관점에 대한 주도적 생각이 다시금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관점은 언제나 다만 새로운 방향으로 역동적으로 나아가는 특별한 일시적인 개념화일 뿐이다. 59-60

 

두 번째 과학이론 작업은 현실성의 위기데 관하여로 의학을 넘어 자연과학 전반으로 자신의 진술을 일반화시킨다. 60 주관도 객관도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상호작용에 기초하고,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절대적 현실에 점진적으로 도달 불가능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인식이 계속됨에 따라 인식 그 자체가 다시금 현실을 바꿔놓는다. 61

 

인식은 오직 활동적인 사고 집단의 사회적 역사적 산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언제나 결단과 특히 사고 양식과 관련 있는 습관이 함께 작동한다. 결단과 습관은 가능한 특성을 규정하는 일과 이미 관련되어 있다. 관찰이란 처음에는 불분명하게 처음으로 본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발전된 직접 형태를 지각한다는 것이다. 형태지각은 오직 어떤 영역에서 자신의 고유한 경험으로 실천적 이론적으로 소개된 것에 따라서만 관찰할 수 있다. 이 능력이 고양되면, 당연히 잃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모순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또는 실재란 오히려 지작된 것의 사고 집단에 대한 특수한 관계가 생겨나야만 비로소 사실 또는 실재가 주어진다. 64-65 프렉은 이 연구 과정을 우연의 일치, 잘못된 경로, 오류로 점철된 지그재그 선으로 표시한다. 67 회고적인 과정에서 집단은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스스로 작성한 연구내용의 변화는 집단 내의 개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68

 

지식 표상을 파악하는 도구로 프렉은 근본 이념 또는 선행 이념을 소개한다. 이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 시기에 생겨나 어떤 사고 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표상이다./ 낡은 이론이나 이념은 사라진 종의 고고학적 유물에 비견되는 화석적 명제로 불린다. 71/프렉이 주제로 삼는 것은 사고 양식의 보완과 발전이고, 특히 그 속에서 과학 혁명이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 72/공동체가 스스로 요구하는 과학적 엄밀성의 기준을 전체적으로 문제 삼는 측면을 프렉은 혈청학 공동체의 사고 양식이 지닌 본질적 구성 요소라고 부른다. 이는 진리 또는 오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는 견해를 조장하고, 충족하기도 한다. 또한, 견해는 다른 견해에 의해 추월당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견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75 프렉은 모든 집단 내의 사고 교류가 어떤 의존하려는 특별한 감정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사고 집단의 일반적 구조는 집단 내의 사고 교류가 그 사회학적 사실로 인해..사고 형성의 강화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77

 

그림도식은 객관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관계는 사고 양식에 따라 편짐된 것 외에 결코 다른 것일 수 없다. 78 프렉은 언어의 의미를 하나의 제도로서 인식한다. 제도는 언어적 이해를 통해 과학적 인식을 전달할 수 있고, 이로써 과학적 인식을 재생산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도는 모든 소통에 나타나는 잘못이해하는 것’(=의미를 바꾸는 것)를 통해 과학의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기능을 수용한다. 논리적 경험주의자들의 이상적 언어는 바로 이 의미 전환을 은폐시켜 버렸다. 논리적 경험주의에는 의미의 불변성이 요청된다. 프렉에게는 이 요청을 분쇄해 버리는 것이 일상 언어뿐만 아니라 과학 언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79 새로운 발전 가능성은 사고상의 강압이 해제될 때 생겨난다. 다시 말해 집단 간의 교류에서 다른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통찰됨으로써 용어의 의미가 바뀐다면, 그때 새로운 발전도 가능하다. 80 두 생각이 서로 논쟁하게 되면, 모든 선동적 힘이 작동할 것이다. 그러면 거의 언제나 3의 생각이 승리한다. 81 비교인식론: 명백하고 입증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때마다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사례별로 분석되어야만 한다. 어떤 사고 양식의 합리성을 내용적으로 충족시킨다는 것은 오직 비교 연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83

 

원문

 

사실이란 무엇인가? 일상생활이나 고대 물리학에서 통용되는 낡은 사실을 유일하게 확실한 것, 탐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찰한다. 이런 방식을 보다 새로운 사식에 대한 편견없는 탐구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의과학적 사실이 이런 편견을 해방하는 데 적절하다.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바로 매독이다. 91-93

 

15세기 저술가들은 대부분 사투르누스와 주피터가 14841125일에 스콜리온의 지시를 받고 마르스의 집에서 동침한 것이 화류병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가정한다. 자애로운 주피터가 나쁜 별인 사투르누스와 마르스에 의해 정복되었고, 성의 분화를 관장하는 스콜피온의 지시는 왜 생식기가 새로운 질병의 첫 번째 공격점이 되었는지 설명해 준다.” 96 이 당시는 매독학의 근본이념, 즉 매독의 성병적 본성에 관한 이론이나 매독을 단순히 쾌락을 쫓는 전염병이라 보는 이론이 만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임질, 연성 하감, 서혜 림프 육아종 등 매독과 관계없는 다른 성병도 모두 포함된다. 98 체질적 설명. 천문학적 설명. 종교적 설명이라는 세 개의 다른 이념이 상호작용. 99

 

두 번째 이념은 약리적 평가를 이용한 의학적 실험연구자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확실히 몇 세대에 걸쳐 수십 년간 실험해 온 결과, 수은 연고를 바른 한 집단에서 병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 아니 완치되었다. 이 집단이 다른 만성 피부질환을 지닌 집단들과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이 치료적 발견은 도한 내부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졌다. 99 수은 치료 중에 독이 든 침을 흘리는 것을 사람들은 치료효과로 간주했고, 이로써 매독의 독이 배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00 수은 이라는 이념은 체질적 매독의 인식, 즉 보편화되고 일반화된 매독의 발병 단계에만 영향을 미쳤다. 여전히 화류병이라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리적-신비적인 질병의 실체인 화류병과 경험적-치료적 질병의 실체라는 두 관점이 나란히, 또는 함께, 또는 서로 반목하면서 형성되고 발전해 왔다. 101-102

 

18-19세기. 유전적 매독과 매독에 걸린 사람이 낳은 자식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는 문제, 잠재적 매독과 매독이 재발되는 수수께끼, 그리고 소모증, 진행성 마비, 낭창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질병과 매독의 관계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바야흐로 다방면에 걸쳐 세부적으로 구축된 지식과 실험의 시대가 도래햇다. 역사는 예방접종, 재접종, 면역 관계에 대한 풍부한 실험과 관찰을 기록하오 있다. 105 임질, 매독, 연성 하감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람과 경성하감만이 매독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생겨난다. 이 또한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106-107 기타 소모증과 진행성 마비의 문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들어 병리발생학과 병인학이 발전할 때까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107

 

매독 개념을 오늘날 형태로 완성시킨 별개의 두 사상. 그 하나는 병리발생학적 질병의 실체로서 매독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한 병인학적 실체로서 매독 개념에 관한 적이다. 111 앞의 것은 나쁜 체액의 혼합에 관한 학설이 전체를 지배해 왔다. 111 피를 바꾼다. 우울한 피. 112 매독에 걸리면, 사지는 피가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양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던 오염된 피를 거부한다. 오염된 피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수건과 같은 역할을 하는 피부 쪽으로 자연히 추방된다. 그래서 먼저 피부의 오염이 발생하고, 그 후 피부에 수포가 돋아나고, 피부가 거칠어지면, 심지어 진물도 생기게 된다. 114 매독환자의 피에서 물과 식염수의 비율이 줄어든다. 이 무렵에 매독 혈액이라는 이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매독이 종두법에 의해 감염된다는 주장으로 번졌다. 115

 

우리는 놀라운 인내심을 가지고 매독 혈액이라는 이념을 증명하고 또한 완성하고자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했고, 마침내 이른바 바서만 반응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의해 매독의 새로운 한계가 규정되었다. 주로 2기와 3기의 매독, 특히 척수매독, 진행성 마비와 같이 이른바 매독 때문에 생긴 질병 영역에서 매독을 재규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음으로 유전적 매독과 잠재적 매독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어서 많은 다른 영역에서 연구된 것과 관련하여 폐결핵, 구루병, 낭창과 같은 다양한 질병이 매독과 맺어왔던 상상의 관계가 모두 해소되었다. 이로써 독립된 학문분과인 혈청학이 생겨났다. 동시에 병인학 사상도 매독학에 영향을 끼쳤다. 이는 제1기 매독에서 질병의 실체를 정의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매독의 개념이 완성되었다. 117 스피로헤타 팔리다 Spirochaeta pallida. 119

 

질병유발자. 무증상 감염. 박테리아 변이. 등등 특수한 질병으로서 매독의 개념적 발전은 결코 폐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니 폐쇄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매독은 병리학, 미생물학, 전염병학의 발견과 이들 학문의 혁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독의 특징은 신비한 것에서 경험적인 것, 일반적인 병리발생학적인 것을 넘어 대표적인 병인학 개념으로 바뀌어 갔다. 120-124

 

2장 확립된 개념이 역사에서 인식론적 추론

 

선행 이념의 가치는 내적 논리나 객관적대상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발전의 토대인 발견적 의미 속에만 들어있다.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 저 불분명한 근본이념에서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고, 근본 이념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133 상대성이론에 의해 물리학과 물리학의 사고 양식이 바뀌거나, 변이이론과 발달주기론에 의해 세균학이 변하는 것도 모두 저 돌연변이와 같은 것들이다. 134 단어와 이념은 근본적으로 동시에 함께 주어지는 경험의 음성적 등가물이고, 사상적 등가물이다...이념의 발전은 추상화에 의해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전문화)에 의해 보편에서 특수로 나아간다. 136

 

견해는 결코 논리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양식에 따른 통일이고, 이 통일은 다만 스스로 발전과 위축을 거듭하거나 증명과 함께 다른 것으로 전환된다. 137 하나의 견해가 사고 집단 속에 매우 강하게 스며들게 되면, 일상생활과 언어적 관용구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면, 말 그대로 직관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모순을 생각할 수도, 나타낼 수도 없게 된다. 138

 

공표된 진술이 사회적 힘을 이루고, 이 사회적 힘이 개념을 형성하고, 사고 습관을 만들어낸다. 공표된 진술은 다른 진술들과 함께 공동으로 우리가 달리 생각할 수 없는사실을 결정한다. 진술이 논란에 휩싸이더라도, 우리는 사회 내부에 선회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진술의 문제성과 함께 성장한다. 이 진술이 자명한 실재가 되고, 나아가 실재가 우리의 인식 작용을 제약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조화롭고 폐쇄적인 체계가 생겨나고, 이 체계 내부에서는 우리가 더 이상 개별 요소들의 논리적 기원을 찾지 못한다. 152

 

체계의 폐쇄성, 인식되고 인식되어야만 하는 대상과 인식하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 체계 내의 조화를 보증하는 동시에 착각의 조화도 담보한다. 그리하여 이 착각의 조화가 어떤 방식으로도 소멸되지 않고, 특정한 사고 양식의 영역에 남아 있다. 153 비교 인식론은 주과과 객관,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되어야 하는 것 사이의 이원적 관계로서 고찰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일어나는 인식체계는 모든 새로운 인식의 근본 요소인 제3의 관련 요소임에 틀림없다./인식한다는 것은 이론적인 의식 일반의 개별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식은 사회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일어나는 인식체계란 한 개인과 관련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154

 

우리가 사고집단을 사람들이 서로 생각을 교환하거나 지적으로 교류하는 공동체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고 집단 속에서 사고영역과 특정한 인식체계, 문화 상태를 역사적으로 발전시키는 담당자, 따라서 특수한 사고 양식을 역사적으로 발전시키는 담당자를 갖게 된다. 155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주어진 전제조건 아래서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확정짓는 일을 말한다. 이때 전제조건은 능동적 연결과 일치하고, 인식할 때 집단이 담당해야 할 몫을 형성한다.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수동적 연결과 같고, 객관적 현실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형성한다. 확정짓는 작용은 개인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개인, 집단, (인식되어야만 하는) 객관적 현실은 인식을 이루는 세 요소다. 세 요소는 탐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 요소는 서로 각기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 157

 

개인은 축구선수에 비유될 수 있고, 사고 집단은 서로 협력하도록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축구팀에 비유될 수 있다. 인식한다는 것은 경기의 진행에 비유될 것이다. 경기의 진행 관정을 우리는 단지 개별 축구선수의 발동작에서 탐구할 수 있겠는가? 아니 탐구해도 좋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축구 경기의 모든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164 대화 또는 오케스트라 연주 244

 

개인주의 심리학의 가장 큰 오류는 사람이 생각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오류 때문에 사고의 원천을 변함없이 개인에게서 찾았고, 우리가 왜 이렇게 생각하고 달리 생각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조차도 개인에게서 찾는 일이 벌어졌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숙고해 왔고, 심지어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류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의 원천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 그가 숨 쉬는 사회적 대기권 속에 들어있다. 각자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의 영향에서 생겨나고, 이 영향은 자신의 뇌에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개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165-166 이러한 과정과 이러한 방식으로 생겨나서 굳어진 믿음의 구조를 나는 사회적농축이라 부른다. 167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거나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자체란 없다. 모든 존재는 존재 방식에 따라 경험된다. 오늘 경험하는 것이 과거에 경험된 것과 연결되어 있고, 미래의 경험 존건을 변경시킨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살아있는 동안 반응 방식을 바꾼다는 의미에서 경험을 한다. 168

 

철학자들은 하나의 유일한 객관적 징표와 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 자의적인 관련 체계와 관련된 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논리에 대한 너무 지나친 존경과 논리적 추론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을 범한다./생각의 변화는 변화된 사실 속에서 일어날 수 잇고, 거꾸로 새로운 사실은 원칙적으로 오직 새로운 생각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사고집단 이론은 바로 미개인들과 원시인들, 어린아이들, 정신병자들이 생각하는 것을 서로 비교하고 일관되개 연구하는 가능성 속에서 결실을 본다. 마침내 민족, 계급, 집단의 생각을 연구하기에 이르럿다. 나는 경험을 극대화하라는 가설을 과학적 사고의 최고 원칙으로 삼고 있다./이념과 진리를 행하는 것은 다만 전진하는 활동과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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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의 상황은 지식과 정보와 같은 정확한 수치, 시뮬레이션, 평가, 진단, 수식, 그래프를 통해서 해결될 수 없다. 대신 지혜와 정동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행하여야 한다. 지식과 정보는 ?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의 대답이 선형적으로 연결된다. 반면 지혜와 정동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채로운 대답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착목할 때 우리의 행동 변화는 어떠할까? 우리 생각은 설사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명의 종말, 즉 화석문명, 자동차문명, 육식문명, 탄소문명 등의 종말이 되리라는 점으로 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어떻게 탄소 감축을 위한 생활양식과 시스템과 제도의 변화를 이루어 문명의 전환으로 향할 것인가 끊임없이 탐색하며 다양한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79

 

다양한 출구의 열림, 그것이 정동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원인과 결과, 근거와 정의, 입구와 출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인과론적인 열쇠개념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곳에 있지 않다. 근거 있는 주장이 모두 유효한 것이 아니다. 입구와 출구의 분열은 오히려 활력정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정동은 왠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정동이 왠지 촌스럽고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정동이 미신이나 주술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동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고도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삶을 통해서 습득하고자 했던 열린 지혜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금 우리는 정동을 지도제작으로서의 도표로 바라보면서 영구혁명을 통한 삶의 양식의 심원한 변형을 타진해 보게 된다. 85

 

이제 자기생산은 활동이고, 타자생산은 노동이라는 기준점은 무의미해진 상황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76

 

정동의 역설은, 정동이 발생하는 배경은 욕망과 사랑과 같은 분자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구체화되는 방식이 지극히 몰적인 것이라는 점에 있다. 재미와 놀이로 시작한 것이 의미가 생기면 또다시 일이 되는 구도 역시 생긴다. 이에 따라 욕망, 정동 등이 발생하는 하나의 틈새가 열리면 무의식의 행렬과 같은 그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반복된 틀이 발생한다. 재미와 놀이, 흥미, , 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도 결국 의미와 모델에 복무하기 위한 절차적이고 과정적인 설정의 일부가 된 것 아니냐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동자본주의는 활동과 노동 둘 다를 이음새로 연결하는 미시적인 전자 그물망을 장착하고 있다. 183

 

자본은 몰적인 것에서 이득을 취하던 후행적인 태도를 벗어나 이제는 선행적으로 활력과 생명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주목한다. 자본은 정동의 촉발과 발생, 흐름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를테면 스타트업 기업 등은 활력과 생명력이 발생하지 않으면 금방 사업을 접어버리는 새로운 양상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역시 플랫폼에서의 정동의 평판체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상을 의미한다. 185 이제 이미지-영상의 흐름은 정동을 고무하고 생산하는 주된 원천이 되었다. 이미지-영상의 흐름은 감응과 감흥, 정동을 유발하고 삶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기존의 미디어가 개인의 감정생활이 그 기반이었다면, 정동자본주의에서의 플랫폼은 유튜브나 넷플릭스처럼 이미지의 흐름의 시너지에 따라 정동이 유발되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정동의 새로운 국면은 자연발생적인 정동과는 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 있다. 기호의 반복이 에너지와 활력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인지편향적인 콘텐츠를 취사선택해서 보게 되었고, 플랫폼에서의 정동의 유발과 촉발의 상황은 결국 노동과 활동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6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발견주의에 머물러 있는 방법론이다. 반면 가타리의 주체성 생산전략은 구성주의로 나아간다. 187

 

활력의 가속화, 살림의 가속화는 변변한 소득의 보상이 없음에도 현실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지만 소독 보장을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압박과 압력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제 노동의 여러 모습이 살림의 유형으로 재편된다. 동시에 금융, 기업, 국가, 환경 등에서의 작동 원리는 대부분 살림꾼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노동과 관련된 소득은 최소화되고 다른 소득원을 찾기 위하여 다중들은 부심한다. ”북반부 현대 사회와 같은 경제적 다양성, 노년층 증가와 교육기간 증가로 인한 비싼 부양비, 서비스 분야 비율이 높은 사회 경제 체계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하고자 할 때, 화석 연료가 줄어들면 신진대사 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 시간이 길어지고 더 많은 노동자가 투입돼야 할 것이다. 이는 노동 시간 감소를 주장하는 탈성장 제안과 상반된다. 미래에 에너지가 희귀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일해야 할 것이다.“ 192-193

 

판 짜는 자는 기획자나 설계자, 엔지니어 등의 형상이 아니라, 그 판의 배열을 바꿈으로써 사물, 생명, 인간, 기계 등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삶의 토대라 할 수 있다. 196

 

그 판 위에서 벌어지는 활동과 정동이 만들어낸 이익은 플랫폼 기업이 다 가져가 버린다. 사실 여기에 동원된 활력과 정동은 이전에는 공동체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기 위한 에너지로 쓰던 것이다. 197 플랫폼이 형식적으로 전자적 직조망을 띠고 있을 뿐, 공동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묘한 착시효과가 여기서 발생한다. 게다가 익명성을 보장받으면서 편리한 플랫폼의 시스템에 익숙해지다 보면 살림을 통해서 경제를 통합하려던 기존 공동체 운동의 방향성이 낡고 촌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플랫폼이 살림의 판 짜는 영역을 침투해 들어오는 이유는 바로 정동과 활력을 빨아들이고 포섭하기 위함이었다. 198

 

섹슈얼리티 역시 활력정동의 다가치적이고 다기능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여기서 퀴어라는 특이점은 정동해방과 활력해방을 달성할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섹슈얼리티라는 다양한 맥락과 탈맥락 속에서 활력정동은 히행하고 횡단하고 변이하면서 탄력성을 갖춘다. 어쩌면 젠더불평등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법은 정동해방, 욕망해방, 활력해방의 측면과 접속한 민주주의 가속화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 자기를 유지하고 보존하고 살리고 부추기고 양육하는 일련의 과정 없는 자기보존의 욕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생명 에너지와 활력으로서 욕망과 탐욕과 갈애의 성격을 띤 자본주의적 욕망은 구분될 수 있다. 살림은 전근대와 탈근대를 모두 관통한다. 살림은 단순하다. 그러나 다가치적이다. 다기능적이며, 다양하다. 이러한 속성들이 호혜적으로 증여적인 공동체의 자기생산을 가능케하는 살림의 여러 측면들이다. 결국 살림의 문제는 세상과 생활세계, 둘레환경과 관계를 맺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의 거대한 문제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2

 

권리 담론은 태생적으로 소유권과 재산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근대의 책임주체가 누려야 할 개인의 권력과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민권이나 인권의 맥락은 결국 근대의 이분법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민의 눈으로 본 정동은 너와 나 사이를 흐릿하게 만드는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너와 나의 분명한 구분이 가능할 때라야 시민의 영역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정동의 순환과 흐름에서 장애로 작동하는 시민성은 결국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도외시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규제적인 것과 구성적인 것은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20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의 입장에서 뉴턴을 바라볼 때 주어진 물리적인 시공간에 늘 이행중인 사물을 위치시킨 단순 정위의 오류가 시민성에도 존재한다. 즉 과정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지속, 과정, 사건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완결형이자 결과형으로 물리적 시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단순 정위의 오류를 보이는 시민성의 모습이다. 206 복수적 소유권. 권리 다발 중 가장 본질적인 권리는 타인을 배제할 권리이다. 권리다발의 개념은 소유권의 정치적, 경제적 강제력과 그것이 창출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위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데 이용한다. 다시 말해 권리주의 담론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타자를 배제하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207

 

자율주의는 욕망과 정동의 공동체를 요청한다. 새롭게 재창안된 공동체 개념은 1) 공유자산, 생태적 지혜, 집단 지성, 오픈 소스와 관련된 공통성의 논의 2) 사랑, 욕망, 정도(=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돌봄의 흐름 3) 관계성좌, 위상기하학, 자리, 위치로서의 배치 3) 활동의 결과가 바로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생산 4) 중언부언하면서도 일관된 흐름이 있는 일관성의 구도 5) 효율성, 속도, 계산의 논리가 아닌 탄력성으로서 자율 6) 냄새, 색깔, 눈빛, 몸짓, 맛 이미지와 관련된 비기표적 기호계 7) 의미와 일 모델이 아닌 재미와 놀이 모델로서 분자적인 것 등의 논의를 촉발할 것이다. 211

 

정동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다. 권리주의 통해서 무권리 상황, 열정 노동, 감정 노동의 돌파구를 형성할 수 있고, 자율주의를 통해서 관계의 성립, 활동의 확대, 정동노동의 탈주로를 마련할 수도 있다. 217

 

1인 가구는 감정과 정서의 공회전이나 독백적인 감정생활에 머물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기돌봄과 서로돌봄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222 되기는 이기 being과 달리 완결형이 아니라 과정형으로서 자신 안에 타자보다 더 타자다운 소수성이 내재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수자 되기라고 할 수 있다. 223

 

정동노동은 사랑노동, 돌봄노동, 연대노동의 세 차원의 관계 구분으로 나타난다. 225

 

여성의 돌봄노동은 이중구속 상태로 수행되고 있다.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자신이 바로 돌봄, 서비스, 정동노동에 동원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자녀나 부모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또 다른 돌봄노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가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있고, 커뮤니티케어가 담당해야 할 영역이 있고, 이를 또한 배치하는 가족이 담당하는 영역이 있다. 현대 사회는 구조적으로 이러한 여러 영역의 돌봄이 동시적으로 요구된다. 돌봄의 사회화는 정동의 발전적인 현상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자본주의가 직면한 현실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인 정동의 재생산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28

 

돌봄대화의 특기할 만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돌봄 합리성이 경제적 합리성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거의 모든 사람이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기 위해 상당한, 몇몇은 커다란 경제적 희생과 개인적 희생을 치렀다. 대부분의 일차적 돌봄 수행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희생을 여성이 치렀다. 231

 

정동 자본주의는 정동을 포획하려고만 할 뿐, 자신의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 정동동을 가치화해야 한다는 점에 침묵하는 위선에 빠진다. 232

 

위생적이기만 한 관계의 친구는 어디에도 없다. 친구와 나누는 우정의 공식은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이고, 착하면서도 악동 같고, 협력하면서도 견제한다. 이러한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의 친구라는 존재조차도 사실상 적잖이 부담되는 개인의 상황은 결국 위생적인 가공의 친구, 스테레오 타입화된 인공의 친구와 대면하는 데 만족한다. 정동을 촉발하고 촉매 역할을 하는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정동의 소외로 인해 침잠하고 절규하고 외롭고 고독하다. 237

 

가깝게 사는 것, 함께 행동하는 것, 함께 일하는 것, 서로 가까이서 휴식을 취하는 것, 그것은 총체이지만, 총체적 시설이 아닌 총체적 공동체이다. 마을에서의 친구, 이웃의 관계는 정동을 순환시킬 뿐만 아니라, 정동을 미학화하고 정동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영상을 통한 감정생활이나 플랫폼을 통한 정동 유통이 아닌 실질적인 관계를 통한 정동의 순환이 줄 수 있는 혜택은 풍부하다. 239

 

관계망에서 제도로 향하는 것은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할 수 있으며 아래로부터 협치의 기본 방향이다. 반면 제도에서 관계망으로 향하는 것은 의식의 무의식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관치의 방향이기도 하다. 가타리의 거버넌스의 적용 영역인 제도(=관계망)의 구도는 두 가지 방향성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제도와 관계망이 교직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240

 

가정에서의 정동순환 과정에서는 자신이 설 자리가 거의 없고 그저 감정생활을 위한 공간으로만 간주하고 있던 남성들은 감정화 단계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대로 할 수 있는 위력과 힘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감정 분출은 주로 학대, 폭력 등이 개입되는 과정이다. 감정은 정동의 순환 과정에 돌연 개입하여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 감자기 집기를 부수거나, 정동순환의 핵심에 있는 여성에게 학대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그마저도 비겁하게 감정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술이나 약물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 행위를 정당화한다. 이에 따라 마지막으로 정도 파괴 단계에 도달하게 되어 정동순환의 돌봄과 책임 영역을 파괴하고 만다. 242 동물학대.

 

플랫폼자본주의(=정동자본주의)의 외부란 없다. 정동을 발휘하는 일련의 과정들, 다시 말해 시청노동, 주목노동, 향유노동, 정동노동 등은 플랫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253

 

이 판을 주도하는 플랫폼은 욕망가치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한을 갖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의 정동이 동원되면서도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그중 판을 주도하는 플랫폼의 것으로만 독점하려는 책략이 작동한다. 욕망경제의 작동양상의 기반은 단연코 욕망가치, 정동의 가치라고 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채굴하고 추출하고 식별하고 분리차별하여 자본화라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257

 

마치 집 앞에 지하철이 생겨 부동산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공익적 가치로 회수하여야 하는가?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에서 충당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MMT modern monetary theory를 제시하는 그룹도 있다. 의미화=가치화=자본화의 인지자본주의 형태를 넘어서 지도화=욕망가치화=화폐화로 넘어가는 정동자본주의 형태의 초입에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MMT논의의 진정한 의도가 사실상 욕망가치론을 지상에 드러내면서 기본소득을 성립시키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욕망화폐, 생태화폐, 기후화폐 논의를 격발하는 것이 MMT이다. 기후화폐의 경우에는 발권자가 자신이고 탄소 감축분에 따라 발권한다는 점에서 욕망가치론을 전진배치하며 다음 단계의 논의로 이행시킨다. 258-259 기후화폐를 사용하는 사람은 탄소를 감축한 만큼 스스로 발권할 수 있는 화폐 생산자가 된다. 그리고 정동을 발휘하고, 촉발시키고, 생산하는 모든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행위 양식이나 돌봄과 살림의 양식은 발권의 가능성으로 제기된다. 260

 

외부의 소멸은 외부효과의 소멸과 동의어이다. 외부효과는 제3세계에 폐기물을 떠넘기면서 외부라고 간주된 영역에게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양식을 의미했다. 외부효과는 성장주의의 기본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실상 근대 시기 자본이 노동을 대할 때조차도 그 기본 태도는 변증법적인 착취관계가 아니라, 외부효과로서의 식민주의였다는 점도 확인된다. 271

 

정동이 하나의 자원이 된 정동자본주의 하에서는 두 가지 전략이 작동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차별과 배제를 통해서 혐오라는 정동을 촉발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는 외부 자체의 소멸을 내부의 차별과 배제, 혐오의 정동을 통해서 충당하고 이를 상쇄시키려는 파시즘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정동자본주의 하에서 정동을 채굴하여 플랫폼 유형으로 이를 머물게 하려는 시동이다. 좀 더 역동적인 정동으로서 인기, 재미, 모방, 쏠림, 평판 등으 체계를 가동시키려는 방식을 취한다. 이 후자의 방법이 파시즘의 해독제와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정도자본주의로 내부의 외부로서 정동을 이용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정동자본주의의 외부는 없다. 272

 

청년세대의 전략은 정동의 흐름이 머물 수 있는 공간에 프라이버시라는 여백을 설정함으로써 숨쉴 여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관계 자체가 정동을 자연스럽게 흐르고 순환하게 만드는 것이 기존 공동체의 구도였다면, 이제는 관계를 통해 정동하고 정동되는 과정에서의 혜택을 선취하는 쪽과 이용당하는 쪽이 있다는 구도가 등장한다. 동시에 정동자본주의 자체으 외부성의 소멸은 관계를 맺는 데 아주 신중하게 여백, 여유, 여가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간다는 위기감도 상존하게 된다. 278 개별자 문화청년들의 새로운 지향과 그들이 선튀한 공동체의 미래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청년들은 자유로운 개별자가 아니라 자기-계발해야 하는 고립된 주체로 파편화되고 있다. 279

 

아이들이 놀이를 한다. 그는 놀이 플랫폼 운영자다. 그는 이내 놀이콘텐츠제작자, 놀이공원관계자, 장난감회사관계자와 놀이진행자, 놀이연구자, 놀이전문가 모두가 놀이플랫폼에 머물도록 만든다. 플랫폼 자체가 꽃피는 성운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 이 놀이 플랫폼 운영자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놀이는 소비 상품일 뿐 아이들이 진짜 놀이 생산자임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정동이 플랫폼에서 잘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을 바랄 뿐, 현장에서 꽃피는 성운을 이루고 생산되는 바는 이 놀이 플랫폼의 의도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283

 

코드의 잉여가치는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 골목상권 진출 제3세계 분리차별, 국가의 반생산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정동의 흐름에 코드를 주입하여 그 속에서 자본을 추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대표적인 인지자본주의의 공동체 약탈 방식이다. ’의미화=표상화=모델화=상품화=자본화라는 방식의 코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 ”이 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모델이다“ ”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방식을 통해서 정동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코드화가 이루어진다. 284 코끼리에 협착되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모델로서 프레임이 우리를 협착시키는 것이다. 발상, 표상, 모델, 의미 등은 정동의 흐름을 붙잡아 매고 이에 협착되어 이중구속되게 만든다. 이중구속은 두 개의 잘못된 발신음이 동시에 수신되어 이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게 해서 쩔쩔매맨서 이것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85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에서 활력과 생명력 즉 삶의 잉여가치를 생성시키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력과 힘이라는 삶의 잉여가치는 정동자본주의 하에서는 권력, 자본, 돈 등이 된다. 287

 

권력의 잉여가치: 갑질 이는 직접적인 노동계약을 통한 갑을으 관계를 회피하면서도, 고용 없는 긱 경제를 작동시킨다. 여기서 긱 경제는 코미디, 연극, 영화에서 단기계약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긱 경제는 노동을 사라지게 하고 정동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배달노동, 택배노동, 물류노동) 다시 말해 정동과 노동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기계류를 통해서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노동의 권리가 보장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평판체계를 의식하며 자신의 권력의 배치를 조정한다. 그런데도 가장 최악의 갑질을 하고 있는 플랫폼 판 자체에 문제제기하거나 평판체계를 작동시킬 수 없는 기괴한 배치가 등장한다. 289 플랫폼은 보이지 않는 판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서 배후에 숨어 있다.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는 그림자 노동의 형태로 비가시화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비와 유통, 향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는 수많은 정동의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다.(폭설) 290 정동자본주의에서는 갑질을 추방하는 평판체계를 마치 간첩작전처럼 비밀스럽게 작동시키면서도, 미시권력의 그물망인 플랫폼 자체가 갑인 것을 감추거나 무의식적으로 용인하도록 만든다...어떤 사람이 정동의 활력과 생명력을 가진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에게는 그만큼의 미시권력이 주어진다....정동자본주의 하에서이 권력의 잉여가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양극화되고, 더 독점되고, 더 보이지 않는 형태로 공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291

 

흐름의 잉여가치는 삶의 잉여가치이며, 정동의 핵심적인 작동 양상이다. 타르드가 양자적 흐름으로 얘기했듯이 모방과 같은 따라하기가 거대한 무의식의 행렬을 만들고 정동의 흐름의 동력이 되는 양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동자본주의에서는 플랫폼이 이러한 양자적 흐름에 따라 설계된다. 동시에 인공지능이나 네트워크 효과도 모두 정동의 흐름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지도화=메타모델화=비표상적 흐름을 통해서 판 자체를 깐 상황에서 정동의 흐름에 따라가면서 자본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293

 

지도는 영토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도는 공간의 생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도는 세계를 재현한다고 하지만, 비판적 지도 제작자들은 지도는 어떤 단순한 의미에서도 재현물이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해 왔다. 그보다 지도와 지도화는 그것이 재현하는 영토에 선행한다. 지도가 작동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산 경험 속 구체적인 것에 대응하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그 경험이 이루어지게 하거나 그 틀을 형성한다. 지도는 권력의 산물이며 지도는 권력을 생산한다. 지도는 참도 거짓도 아니다. 지도는 명제. 이렇듯 흐름의 잉여가치는 의미화가 아닌 지도화의 시대의 총아이다. 295

 

플랫폼 접속이 일상이 되면서 변화한 것은 플랫폼 없이 살았던 기존의 삶의 방식이다. 이제 대부분의 정동생활, 감정생활, 내면생활 등은 플랫폼이 전달해주는 이미지-영상의 콘텐츠 등이 담당한다. 플랫폼 내부에서의 삶은 매무 부드럽고 달콤해서 그 외부를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다. 세상 소식이며 바깥소식이 잘 정련된 이미지-영상으로 정돈되어 다가오니 정동은 야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순응적이고 달콤한 일상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다. 298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자본은 그야말로 자본가의, 아니 차라리 자본주의적 존재의 기관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기에 자본은 단지 돈의 흐로고 멈추는 실체는 아니며, 자본은 돈의 볼모성에 돈이 돈을 생산하는 형식을 부여하게 된다. 기관 없는 몸이 자신을 재생산하듯, 자본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싹을 터서, 우주 끝까지 뻗어나간다. 자본은 기계에게 상대적 잉여가치를 제조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 자신은 기계 안에 고정자본으로 체현된다. 그리고 기계들과 담당자들은 자본에 매달려서, 그것들이 작동하는 것 자체가 자본에 의해 기적적으로 일어난 일이 되는 지점까지 간다.”라고 말한다. 이는 자본 자체는 욕망하는 기계의 가속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산물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기술기계의 발전으로 나타나는 첨단기술기계, 즉 플랫폼 등은 대부분 정동과 욕망의 기계작동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다. 305-306

 

브라이언 마수미는 <<가상계>>에서 비물형적인 정동양상의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정동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내장감각과 같은 것처럼 상당히 왜소한 양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마수미의 진단과 달리 욕망과 정동의 잠재성은 돌발적으로 생산되는 특이성 생산의 차원에서 규명될 필요가 있다. 310

 

하지만 그 특이점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인과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정동의 식민화를 극복하는 경로는 마수미의 내장감각과 같이 왜소한 설명방식이 아니라, 특이성 생산, 정동의 판 자체의 생산 영역을 통해 드러난다. 정동은 미리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생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동 생산은 미리 주어진 잠재성의 한계테제를 넘어서 그 자체가 잠재성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311

 

정동은 무심결로 인도하는 재미, , 인기 등에 대한 거대한 집단적인 무의식의 행렬을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면 될수록 그것으로 족하다. 312 정동은 정동하고 정동되는 일련의 과정 모두에게서 발생되지만, 정동하는 영역에서 자본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수많은 관심종자를 만들어낸다. 관심, 인기, 쏠림, 모방, 인지부조화, 인지편향, 평판체계, 유행, 트렌드 등 그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모든 현상이 동시적으로 플랫폼 내에서 작동한다. 315

 

이제 자본주의는 환전히 다른 양상으로 작동한다. 탈성장과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대안세력이 말하고 행동하고 실천할 것을 자본과 권력이 말하고 행위하는 이상야릇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동시에 플랫폼이 끼리끼리 문화를 더욱 유발하여 외부를 소실시키고 자신들만의 잔치와 향연을 벌이는 측면은 결국 제3세계의 기후불평등 문제나 기후난민의 문제 등에 판단 정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동자본주의는 정동에 대한 축복과 희망이 아니라, 살아 꿈틀대는 생명과 자연의 정동을 억압하는 성장주의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대안세력의 움직임은 포위되고, 고립되고,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가 되고 있다. 317

 

네트워크가 새로운 전자민주주의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트워크는 수평적이지도 공정하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 정동자본주의하에서 드러난다. 320 정동의 다양한 발휘의 최종 결론은 사실은 단조로운 배달 플랫폼의 이용으로 귀결되는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비물질적인 것은 다채롭지만, 물질적인 것은 단조롭다. 321 동시에 소비와 유통의 영역에서의 배달 플랫폼이나 택배 플랫폼 등은 더욱더 정동의 빠른 흐름과 순환에 맞추어져서 작동한다. 속도와 효율성과 더불어 정동의 민감성을 장착한 플랫폼 하에서의 노동은 주목노동, 호출노동, 시청각노동, 욕망노동 등의 양상을 통해서 더욱 정동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322

 

정동의 흐름과 자본의 흐름이 동조화된 현재의 국면에서는 정동이 촉발되는 곳에 자본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동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자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연극, 영화, 드라마, 미디어 등에서의 연예인들의 정동이 바로 자본인 상황이다. 최근에는 이 정동자본이 정치 및 경제, 교육, 개인적인 관계망을 비롯해 전체 생활 영역에까지 파고들었다. 물론 이것이 긱경제 형태로 노동의 측면에서는 지극히 불안정한 고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으나, 사실은 자본과 노동의 영역은 정동의 영역에서는 동전의 양면이다. 323

 

협동조합의 위기는 처참하고 심각하다. 이것은 의미와 가치라는 의제를 던지면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모이고 기능과 노동으로 구성된 사업이 저절로 되던 시기, 다시 말해 성장주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정동자본주의 하에서 협동조합의 결사체와 사업체 모두가 기능 정지에 빠지기 쉽다. 오히려 정동을 통해서 모임을 촉진하고 도모하는 스튜어드십으로서의 사회적 경제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특히 현재 국면은 저성장 양상으로 진입하고 있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절로 모인다는 신화, 즉 자연주의 신화를 의심해 봐야 한다. 324

 

결국 사회적 경제가 취해야 할 전략적인 선택지는 정동해방, 돌봄해방, 욕망해방을 통해서 혁신성을 담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적 경제는 증여와 호혜로 이루어진 정동, 돌봄, 욕망의 영역을 절대적 탈주선 위에 놓고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돌봄노동의 가치화와 화폐화 국면을 유지하는 것을 한쪽 편의 전술로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 편으로 돌봄해방의 야성적 힘을 통해 돌봄의 가치화를 훨씬 초과하는 활력의 현실로 재창안할 필요도 있다. 활력의 증대가 자원을 따라오게 하도록 만드는 활력해방의 국면과 욕망이 해방되어 격발되고 폭발하는 욕망해방의 탈성장 국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동해방의 국면은 분열적이고 야성적인 힘에 따라 관계가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국면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사회적 경제는 내부의 외부로서의 욕망과 정동을 촉진하고 폭발시킬 훨씬 야성적인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주체성 생산 전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325

 

정동자본주의는 정동자본과 사회적 경제의 경쟁 양상이라기보다는 정동자본의 동조화된 정동과 자본의 양상을 뛰어넘는 사회적 경제의 정동의 크나큰 폭발적인 흐름과 사회자본이 한 쌍을 이룬 탈동조화의 양상의 대비점으로 나아가야 한다. 탈성장과 정동해발의 국면이라는 탈동조화가 그것이다. 정동해방의 국면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일 것이다. 펠릭스 가타리는 일찍이 분열생성론이라는 시각에서 정동해방을 조명했다. 326

 

욕망, 정동, 돌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소외로 느껴지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으로 견고하고 화려하게 포장된다. 328 이제 사람들에게는 깔끔하고 심플하게 정리된 정보 자체가 선호될 뿐, 군더더기, 잔여 이미지, 잉여에 따라 구성된 정동은 촌스러운 구닥다리로 간주된다. 정보량의 증가가 정동의 양의 감소로 향한다는 일반 법칙은 어디에나 상존한다. 특히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정동이 일차원적인 정보로 환원되는 것은 그리자유 grisaille의 현실, 즉 회색평면 위로 삶을 올려놓고 편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 329 정동자본주의에서의 정보 과잉은 플랫폼이 정동에 접근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정보의 과잉에 노출된 사람들은 피로도를 느낀다. 이러한 피로도를 낮추기 위해서 AI가 선택해주는 경우의 수는 더욱 선호된다.331 정동의 생명력 전반을 포획하고자 하는 정동자본주의에서는 어색하고 인위적인 것이 천연덕스럽게 우리 삶에 자리 잡은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기후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정보와 정동의 차이를 느낀다. 정동과 지혜가 부재해 결국 기후위기의 실상에 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기후행동으로 나설 가능성은 줄어들게 된다는 역설이 자리잡고 있다. 오히려 비극적 파토스로 인해서 더욱 될대로 되라식의 삶을 살거나 우리는 안 될 것이다라는 체념과 전망 상실로 향하게 된다. 332

 

관계를 통해서, 생명의 힘과 에너지를 통해서 거대한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고 대응할 수 있는 주체성 생산을 하는 일이 정동의 과제인 셈이다. 정동자본주의는 외부를 소멸시켜 정동의 해법을 통해서 생명과 자연을 향한 탈주로를 찾는 길이 봉쇄된 현실에 직면하게 만든다. 333

 

관계는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다양한 비기표적 기호계의 향연이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곁과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다양한 기호작용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333 사람들은 탁월한 직관자이자 통찰자이다. 그 사람의 정보나 지식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몸이나 마음의 곁과 가장자리, 주변에 있는 전반적인 것까지 통째로 직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관은 본질직관이 아니라, 표면에 자리 잡은 모든 잉여, 잔여물, 군더더기를 포함한 느낌적인 느낌의 직관이다./정동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달되고 유통될 때조차도 그 자체가 하나의 빅데이터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광대역의 무의식을 여러 측면에서 통째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감응알 수 있는 초대형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정동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334

 

개인이라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고 위생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자기돌봄으로서의 자기통치, 자기관리, 자기계발 등의 일련의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자기돌봄에서의 자기와 자기 자신의 관계가 삶 속에서의 자아와 타자보다 더 타자스러운 자기 자신 간의 관계라는 점에서 정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정동이 내밀한 위반이나 묘한 선의 넘어섬으로서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돌봄이라는 점에서 쾌락, 향유, 향락의 영역으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독신적 쾌락기계. 335

 

정동이라는 활력과 생명력이 돌봄으로 향할 때,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의존적이 되거나 동일시 또는 전이의 관계로 향한다는 것은 매우 전통적인 정동의 흐름이다. 그러나 1인 가구로서의 개인들은 이러한 풀뿌리 정동의 구현 양식을 촌스럽고 귀찮고 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너와 나의 경계가 명확한 형태로서의 시민성에로 방향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336/정동이 흐르는 다양한 관계의 묘미를 사실상 제대로 감응하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개인들의 삶의 양식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이제 시민성과 공동체성은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간주되었다가 이제는 두 영역이 병행되어야 하는 투 트랙 상황이 왔다. 이것이 따로 또 같이의 공동체나 혼자서 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는 시민 개인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337

 

현대의 개인이 사용하는 에너지량은 봉건제 시기로 치자면 말 20, 하인 20명을 거느린 수준이다. 더불어 도시인의 삶은 세종대왕이 누리던 생활 수준과 비슷하다. 337

 

펠릭스 가타리는 <<미시정치>>에서 독신적 쾌락기계의 비참함이 자가면역력의 약화인 판짜기와 관계의 실짜기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유래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 속에서 새로운 비참함 또한 존재한다. 즉 너무 많은 실들로 너무 빨리 대체된 채 짜는 이러한 격노 속에서, 독신자 기계들은 더 이상 멈출 수 없게 되는 경향이 있다. 짜이자마자 씨실들은 닳기 시작한다. 결코 영토들 속에 구체화되지 않는다. 실은 탈구되어서 쇠락한다. 팽창 잠재성은 흩어진다. 어떤 것도 짤 시간도 공간도 없이, 이러한 잘못되어 있는 몸-영혼들은 점차 짤 능력을 잃는다. 그들의 면역방어는 무력화된다. 즉 그들은 너무 약해져서 아주 가벼운 접촉에도 붕괴된다. 그리고 죽음의 새로운 모습이, 즉 에이즈가 들어선다. 독신자의 비참함.” 338

 

개인이나 1인 가구의 비참함과 비탄은 정동의 순환이 이루어질 내부 관계망이 전혀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정동의 소외는 결국 돌봄의 소외이자 사랑의 소외이며, 욕망의 소외이다. 결국 1인 가구 유형의 삶은 관계 자체에 익숙지 않은 개인의 등장으로도 나타난다. 왠지 정동의 흐름이나 순환이 강렬한 힘과 에너지가 개인을 관통하여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다리를 흔들게 하고 팔을 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 1인 가구의 현실이다. 대신 정동은 개인의 감정생활의 소재가 되어 무수한 콘텐트와 영상-이미지의 소비 생활의 원천이 된다. 1인 가구의 삶은 관계를 간절히 희구하지만, 관계로부터 가장 소외되어 있다는 역설에 직면한다. 339


협동조합의 작동원리 중 가장 중요한 맥락인 정동의 국면에서 밀리는 상황은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정동과 활력의 끅한, 즉 자본주의의 외부로서의 정동을 순환시킬 때 비로소 혁신성과 선도성을 갖게 되는 것이 예상된다. 그중 하나가 탈성장 전환사회이 전망을 구체화하고 현실에서 그러한 전환 사회의 정동을 적극적으로 유통시키고 순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장사회에서는 자원이 있어야 활력이 있었지만, 탈성장사회에서는 활력이 있어야 자원이 뒤따르는 형태로 요약해 볼 수 있다./협동조합은 수익구조나 자원에 매달려서 위축되고 쪼그라들었던 그간의 모습이 아니라, 활력으로서 정동의 야성성과 혁신성을 발산하는 예술가 집단과 같은 형태로 변신해야 할 것이다./협동조합은 정동의 강렬도를 높이는 방법과 지혜, 암묵지 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하여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창안하고 보유해야 할 것이다. 352-353

 

탈성장 라이프스타일에선 비물질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물질재에서 비물질재로의 이행을 통해서 협동과 살림, 정동의 가치가 전혀 색다른 형태로 유통될 수 있는 계기도 모색해야 한다./협동조합은 내부의 외부를 생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강렬한 정동을 외부와 틈새, 사이를 넓히는 소재로 삼아 활동의 여백과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355

 

주인없는 점포. 애자일은 업무주기가 짧고, 고객에 대한 피드백이 강렬하고, 프로그램 개발자 중심의 업무 편성을 하는 팀조직 단위다. 이는 가타리의 <역할분담표>를 떠올리게 한다. 정규업무 대신 순번업무, 임시업무, 순환업무를 통해서 업무주기를 빠르고 민첩하게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다. 업무주기를 짧게 하면서 늘 새롭게 편성하려고 했다. 사태의 정상적인 질성의 교란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체계를, 역할분담이라고 하는 체계를 설립하려 있다. 각 사람은 업무 기능에 따라 정규업무, 임시업무, 교대업무 즉 누구도 직원의 특수한 범주로 전문화하려 하지 않는 집합적 업무./ 어떤 상품이나 결과물을 완성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늘 과정형이자 진행형인 일로서 설계하는 것이 공동체기업의 작동원리일 수밖에 없다. 360-361

 

공동체기업의 활력과 정동의 순환과 흐름을 끊는 것은 다름 아닌 자원의 원천이 되는 공공프로젝트나 사업이다. 이러한 의외의 결과는 공공에서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과업지시서에 따라 정해진 기한 내에 성과를 내서 결과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담론과 회계담론에 얽매인 프로젝트는 공동체기업을 좀먹는다./비상식적인 보고서 중심의 사업들은 현장에서의 활력과 정동을 인위적이고 성과 중심인 씨알 빼먹기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적 자본이라고 불리는 관계 속에서의 정동의 흐름을 온전히 살피지 않는다면, 사회적 자본의 힘과 활력이 더 이상 사회에 파급력을 주기 어렵게 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362

 

정동자본주의 단계에서 사회적 자본은 인기, 흥미, 재미, 운 등을 통해서 모방과 변형, 따라하기, 비틀기 등으로 전개되는 정동의 흐름에 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동자본주의에서는 자본도 지도제작의 방법론에 따라 움직인다. 정동과 자본, 권력은 동시 발생적으로 생산되고, 정동의 흐름에 따라 자본과 권력도 지도를 그리며 함께 온다. 흐름의 잉여가치는 정동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활력과 생명력이라는 잉여가치이며, 공동체기업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공동체기업의 핵심 모델을 자본이 빼앗아가자 공동체기업의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365

 

완성형으로서 사회적 자본과 과정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나누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어야 하는 완성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은 관계 자체가 사실상 수단과 방법에 불과하다. 반면 과정형으로서 사회적 자본을 이끄는 공동체기업은 관계 자체가 목표이면서 동기이며,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관계인 연대와, 시간상 장기적인,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세대까지 염두에 둔다. 366 1. 지도제작으로서 도표 2. 고도로 자유로우면서 고도로 조직하는 도표 3. 비기표적 기호작용으로서 도표(냄새,색체,음향, 몸짓,,이미지 표정 등은 정동의 재료들이다. 4. 돌발 흔적으로서 도표 368-369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공동체기업 370


볕뉘


1. 전시팀들의 내방과 환담, 뒤풀이로 1차 마무리, 가족들이 내려와 2차마무리로 공식적인 일정을 갈무리한다.


2. 위 밑줄긋기는 전시마감 전부터 조금씩 타이핑해둔 것이다. 관람객들 가운데 중년은 원픽은 <동행>이라는 작품이다. 동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세히 되묻는다. 공간예술가이자 언어예술가...등등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장년들의 시선은 새롭고 신기로운 아이의 표정이 설핏 보이기도 한다. 


3. 고독이란 신발을 신을 줄 알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라는 시인의 말은 정답이기도 하지만 현실감이 부족하다. 그래서 묻는다. 발리바르는 포이에르바흐의 테제를 언급하면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데 밑줄을 긋는다. 우리는 별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관계들로 표현되면서 되먹임당하는 존재다.


4. 서울살이와 수도권의 일상이란 깊은 관계들이 부족하다. 점선으로 이어진 관계도 점멸한다. 거기에는 삶을 바라보는 긴장감이나 강열함이 부족하다. 표면적인 삶의 형태에 매몰되어 다른 것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저자의 밑줄을 한번 천천히 따라가보기를 희망한다. 어느 단락이 불 쑥 수혈하듯 들어올지도 모르니, 내 삶에 다른 언어들이 섞일 수 있다면 좀더 다른 일상으로도 걸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해 보기.


5. 뒷부분에는 협동조합과 공동체기업에 대한 밑그림들이 있다. 참고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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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19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정동의 재발견이라는 제목만 보고 덕수궁 돌담길의 아취를 재발견한 책인가하고 착각했습니다^^;;;

여울 2025-08-19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목은 고즈넉한데, 내용은 격정적이라는. 대전 정동도 있답니다. 카스피님

카스피 2025-08-20 00:59   좋아요 1 | URL
예전에 헌책방 탐사하러 대전의 무슨 시장안의 헌책방들을 둘러본 기억이 나네요.그때 대전 지하상가와 은행동도 돌아다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성심당을 안갔나 후회가 됩니다ㅜ.ㅜ

여울 2025-08-20 09:30   좋아요 0 | URL
중앙시장, 인동 돌아다니셨나봐요. 은행동엔 성심당이 있는데 지나치신듯요. 어떡하나요. 한번 짬내서 투어 하셔야겠어요. ㅎㅎ
 

‘300+ α ‘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을까?‘

*김신양, 《처음 만나는 협동조합의 역사》,착한책가게

볕뉘.

1. 300년이 지나도 품어야할 질문들이 있다. 탐정으로 목격자로 역사의 이면을 짚어내고 섞어야한다. 오언, 푸리에, 프루동과 네이션 사이사이 스며든 이력도 밝히고 만다. 시선을 이렇게 넓고 길게 잡아야만 지금여기를 함께 겨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2. 숱한 아집과 자신감들은 대체 무엇일까. 선입견을 버리려하지 않는 세대에 갇혀사는 우리들은 무얼 바라보고 있는 걸까.

3. 저자의 흔적들을 슬몃 보다 궁금증이 좀 풀리는 듯하다. 질문들은 자라나거나 번질 수는 없는 것인가. 삶들의 양태는 늘 위태롭다 싶다.

4. 자본론과 곁들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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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간의 비참함을 만드는 것은 인간시민사이의 충돌이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만들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를 국가에 전적으로 내여주거나 완전히 그 자신으로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의 심장을 둘로 나누려고 하면 그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지게 될 것이다. 947 허시먼은 다성적인 즉 독자적인 여러 음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울리는 방식의 해결책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정책 결정자들이 그것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복잡한 제도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할 문제해결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948 허시먼은 파스칼이 먹을 거리, 놀이, 기도, 정치에 대해 언급했던 바를 떠올렸다. 그런 영역에까지 비용-편익 계산은 불가능했다. 946


<사회과학에 대한 우리의 견해> 우리의 초점은 더 해석적인 것입니다.954

 

<<금지된 경계를 넘어서: 경제학에서 정치학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서구에서 좌우파 모두가 전후 서구의 정치경제가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고 보고 있었다...‘성장과정에서 오는 고통시스템적 위기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불합치성이나 근본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전환에서 발행하는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특성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실제세계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생각할 때 정말로 유용한 기능은 이런 식의 반대되는 반응을 하는 와중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좌파의 사고가 자기파괴적이라고 보았다. 숙명주의는, 종국에는 반대쪽을 유리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덫이었다. 966 시장이 협동과 갈등 둘 다에 대해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덕적인 제약들을 만들어내고 무임승차개념에 도전할 은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바로 노젓기였다. 함께 노를 저으면 개인들은 노력을 덜 들이면서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967


허시먼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기분에 의해서든 취향에 의해서든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을 내린다는 것이 허시먼이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이었다. 그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선택이라는 활동이었다. <<이탈, 발언, 충성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양한 선택을 내리면서 제도를 바꾸는지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왜 선택을 내리는지 설명해야 했다. 93 마음속에서 올슨과, 그리고 더 넓게는 개인주의와 벌였던 내적 투쟁은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내생적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오랜 목표로 이어졌다. 973 섭리적 설명. 기술 변화든, 전쟁이든, 수입된 거대 계획이든, 외부 자본의 주입이든, ‘해외로부터의 원조이든, 재앙이든, 발견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외부 요인이 사회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역사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번쩍 들어 옮겨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974 


집합행동의 시계추 운동’. 만족과 실망, 공적 행동과 사적 행동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역학을 설명하려고 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영역에서 감정의 반응이라는 영역으로 이동했다. BMW는 흥분을 약속하면서 불만족과 청구서도 배달했다. 모든 곳에 행복이 뿌려지고 있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뒤에는 실망의 긴 흔적이 남았다. 실망은 희망의 짝궁이었고 희망의 필수불가결한 쌍둥이였다. 후회와 실망.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는 높은 기대를 가지고 수행된 활동의 결과였다. 실망으로 가득한 삶은 슬픈 삶이지만 실망이 없는 삶은 아예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삶이다. 실망을 장엄한 전망과 야망을 누리고자 하는 성향의 자연스런 짝궁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세르반테스가 한탄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어리석음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975 


이러한 노력은 사적인 추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적인 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적 추구와 공적 참여가 비슷한 동기들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이다. 허시먼은 여러 충동들의 복잡한 혼합물인 자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변증법을 제시했다. 근대적 인간을 영구적으로 분열된 심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이분법적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는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랑스럽고’ ‘비극적이며복잡한인간 주체를 되살리고자 했다.. 976



실망을 일으키기 쉬운 것들을 구매할 때 수확체감이 발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실망은 공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게 된다. 실망이 사다리를 놓아서 소비자-시민이 사적인 삶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해 줄 수도 있고 이데올리기 자체를 잠식할 수도 있다...공적인 행동도 시계추가 오락가락하는 스펙트럼의 범위에 속해 있는 한 지점이었다...공적인 행동은 과도한 헌신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실망을 일으킬 수 있다. 사회주의가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자기파괴적이라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선거 역시 비용-편익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과도하게 억압적인 국가에 맞서서 방어하는 기능과 과도하게 표현적인 시민으로부터 방어하는 기능을 둘 다 갖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열정적인 사적 시민이 이제 다양한 실망에 맞닥뜨렸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하며 오만가지 물건을 구입해 집에 채워 넣었지만 그것들이 다양한 실망을 안겨 주고 있었고, 따라서 이제 중력이 시계추를 반대편으로 움직이게 하리라는 기대였다. 978-980


찰스 테일러. 크리스토퍼 래시<<나르시시즘의 문화>> . 이런 종류의 비관주의가 그 자체로 빈약할 뿐만 아니라공적 행위를 건설적이지 못한 공적 특성이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것정도로 폄훼하는 경향을 낳는다고 본다. 허시먼이 말하고자 한 것은 불안정한 균형이었다. 그는 공적인 것이 일상의 노동과 소비에 더 많이 스며들어서 공적 행동의 특성인 분투하는 것획득하는 것의 혼합이 사적 영역에서 육성될 수 있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합리적 행위자보다 행복의 다양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기에 더 우월했다. 982


<<참여의 시계추 운동: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행동>> 내가 하려는 일은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동기들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설명은 이후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손에서 가설로 발전할 것입니다. 990 허시먼이 인간을 실수하는 이상주의자, 이해관계와 정념 둘 다를 가진 자로 묘사하자 이것을 도덕적인 주장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인간 행위자를 더 사랑스러운 인물로, 어느 정도 안쓰러운 인물로, 그러면서도 약간 무서운 인물로, 따라서 비극적인 인물로그리는 것이었다. 탈미혹된 소비자에게 공적인 삶이 은신처가 될 수 있으려면 발언의 기술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했다. ‘공적인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소비자 안에도 시민의 맥동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시먼은 이것이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희망을 포기하는 발언은 자기실현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식인을 향한 윤리적 메시지가 있었다. 994-995

 

14.

<<손주들을 위한 사회과학>>. 허시먼은 윤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회과학을 만들고 싶었다. ;윤리에 대한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윤리를 다루는 사회과학 말이다. 999 합리적 행위자공동체적 정신이냐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던 시대에 결합되었으되 불안정한 주체야말로 통합된 사회과학의 초석이었다. 1000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떠한지에 기반해 정치학을 구성하려고 했고, 몽테스키외는 정치적 실천이 도덕이나 정의와 얼마나 많이 충돌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경고했으며,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을 추구하는 머리를 감정을 느끼는 심장에서 효과적으로 분리시켰다. 마르크스조차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냉정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02 마르크스주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을 추구했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도덕적 분노에도 쏠려 있었다. 허시먼은 이 희한한 혼합, 풀리지 않는 이 모든 내부적 긴장이야말로, 과학에 중독되고 도덕적 가치는 거의 상실된 시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가질 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막대한 호소력의 원천이었을 것일고 언급했다.1003 허시먼은 도덕적 이해와 비도덕적 분석 사이의 풀리지 않는 마찰에 대한 주장을 정교화해 나갔다. 이 둘을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도 아닌, ”영구적인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제시하고자 했다. 1004 도덕적 사회적 규범은 시장과 별개가 아니라 시장이 기능하는 방식의 일부라고 볼 수 있었다. 1005 그에게 사회과학의 도덕성은 연구의 중심에 속하는 것이어야 했으며,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도덕적으로 살아 있고 스스로를 도덕적 우려에 깊이 영향받도록만들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과학자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될것이었다. 1009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 주는 즐거움과 자극을 재발견함으로써 객관적인 접근과 규범적인 접근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1015

 

<<집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남미의 풀뿌리 경험>>1984 개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수량화가 가능한 것 위주로 측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느라 다른 점들, 예를 들면 사랑이라든가 시민적 추구 같은 것들이 간과되어 버린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육성과 향상, 머리와 심장을 조화시키고 자아와 사회를 조화시키기 위한 개선 등이 평가에서 누락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평가는 정해진 비용-편익 모델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활동과 동기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1025-1026 애초에 너무 거대한 비전을 가졌던 탓에, 계속 타협과 양보를 해 가며, 또 반대편의 힘에 의해 변형되어 가며 이루어지는 매우 제한적인 진보는 진보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더 낫게 만들 수 있느냐이어야 했다. 1027

 

허시먼은 이 책의 독자와 이 책의 연구대상자가 분리되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개발이 실제 진행되는 과정을 기록한 여행기의 형태가 되게 하고 싶었다. (문어와 구어를 연결하고) 103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혼합”.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선진국에 비해 이 두 영역 간의 혼합이 도미니카 학교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상층에서는 많은 기업인이 실제로 공적인 활동을 한다. 공적인 사안과 관련해 실제로 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으며 공적인 대의와 단체에 시간을 많이 쓴다...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섞인다고 하면 추한 면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느라 이러한 결합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어떤 종류든 진보에는 이런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1043

 

15.

<<반동의 화법:역효과론, 무용론, 위험론>>1991. 시민집단들 사이(진보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 급진 진영과 반동 진영 사이 등)에서 소통이 체계적으로 제거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립이라는 문제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1108 개혁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지를 파악하려면 개혁을 향한 운동이 왜 그에 대한 거부감과 강렬한 적대감을 이끌어낸느지 파악해야했다. 1103 ‘위험 명제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말할 때믄 좋은 의도에서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경제를 말할 때는 나쁜 의도에서 좋은 결과 가농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를 찬양함과 동시에 비난한다. 1105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집단들이 열린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이야말로 한 사회의 민주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이자 그 사회가 시민을 위한 미래를 일뤄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1109 1. 위험명제는 개혁이 과도한 비용을 유발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혁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주방. 2. 무용명제는 변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무용하며 아무리 바꿔도 결국 제자리라고 말하는 주장. 1111 전통적인 적대와 비타협 담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인종류의 소통으로 가는 길은 길고 힘든 길일 것이다. 1117

 

16.

<<자기 전복의 경향>>1995 ‘정치 이전의 공동체적 감수성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개념이라고 경고했다. 충성심이란 정치로부터, 그것의 혼란과 가능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이전의 주장들을 전복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과거의 개념들을 되짚어보려는 경향이 그 개념들을 확장할 수 잇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기에 그의 작업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133 <<경계를 넘다>>crossin boundaries




볕뉘. 지인의 모친상으로 부여를 다녀오다. 전날 소식에 몸과 마음이 흔들렸는지 하루 종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따스한 봄볕. 따뜻한 마음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 것 같다. 당사자는 오직할까 싶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몸짓에서 벌써 마음이 읽힌다 싶다. 대보수 마지막 날이라 일터에서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반복하는 모습들이 읽혀 아쉽고 안타깝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한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보는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와 몽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멈추시길, 그리고 둘러보시길...스스로 안까지. 마음 속까지. 자기전복의 경향조차 없는 무리들이 아니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은 늘 열려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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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패배주의적 사고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일의 진행 양상은 더 복잡하며 배움의 시기, 그리고 배운 교훈을 잊는 시기가 번갈아 온다. 이렇게 해서 완전한 혁명을 통해서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곁에 이렇게 적어둔다. “전체를 모두 바꾸는 변화를 열망하는 것은 재앙을 만드는 조리법이다. 819

 

<경제 발전 과정에서의 소득불균형에 대한 참을성의 변화>. 열광에서 절망으로 전환한 1970년대 초반의 이 시기를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적 감정에서 다른 하나의 집단적 감정으로 시계추처럼 이동한 순간이라고 보았다. 토크빌의 구절과 관련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더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상황이 실제로 나아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상황이 더 나빠진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열광에서 절망으로 시계추가 이동한다. 터널 효과 820

 

라로슈푸코의 <<회고록>>. 보상이 곧 올 것이라거나 마땅히 와야 할 보상이 오지 않고 있다는 인식(의미론적인 발명과 반전)은 감정을 뒤집을 수 있었다. 터널 효과는 환희의 첫 순간, 1960년대의 관용적인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터널 효과가 사라지면서 1970년대에는 분위기가 분노로 바뀌었다. 정작 놀라운 것은 불안정성이 아니라 굉장히 널리 퍼져 있는 안정성이라고 생각했다. 안정의 지속은 폭동, 쿠데타, 혁명, 내전의 발생만큼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822 <이해에 방해가 되는 패러다임의 추구> 해석적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기념비적 논문.823

 

정책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부수효과에 직면하게 된다. “남미 곳곳에서 국가가 차가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상황이었으므로,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긍정적인 부수효과들에만 강조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부정적인부수효과들을 파악해야만 했다. 830 1973. 허시먼은 과장된 희망 아니면 무기력한 절망이라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레에서 벌어진 일은, 자유시장은 해결책이 아니며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833

 

필요한 것은 완전한 조명이 아니라 한두 개의 불빛이다. 837 산업을 고도화하는 과정이 문제에 봉착하면서 군부독재가 들어서고, 그렇게 들어선 독재 정권이 산업화 과정에 강제적으로 안정성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엇다. 오도넬의 논문은 새로운 재조정을 일으키는 국내 요인들에 관심을 둠으로써 좌파들이 주장하던 반제국주의도그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또한 남미를 만성적인 규율 불가능성에 시달리는 지역으로 규정하는 미국 정치경제학의 케케묵은 이야기에 도전했다. 842 한편 허시먼은 오도넬의 경직된 단계론적 논의가 후방 연관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으며 산업 발달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선택지와 다른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843 사회과학이 민주화된 남미에서 유용할 수 있으려면, 좌파와 우파가 희한하게도 서로 수렴해버린 견해, 즉 급진적인 해법이나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없으면 발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서 멀어져야 했다. 846

 

<<자본론>> 산업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는 산업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올 후발 주자들의 길을 먼저 갔을 뿐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늦게 시작하더라도 모든 자본주의가 동일한 경로를 갈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지만, 바로 다음 단락에서 마르크스가 독일과 영국의 발전 과정이 매우 상이한 경로로 진행되었음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844 <<법철학>> 이미 1821년에 헤겔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발산해낼 잠재적 배출구에 대한 논의를 담은 경제 이론을 만들었지만, 마르크스는 이 점을 보지 못했다.(헤겔이 제시한 배출구는 제국이었다.) 이를 간과하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 예기치 못했던 해결책들을 찾아 나가는 교묘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헤겔의 통찰을 활용하지 못했다. 845

 

개입적 변수들’. 경제 영역에서의 문제와 위기를 성공적으로 다루는 데 필요한 정책은 어떤 종류여야 하는지에 대해 지배층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신념·개념·이념의 작동을 도입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정치적 결과들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경제발전 단계와 정치 형태 사이의 관계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념이나 인식에 의해 매개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배층이 특정한 산업화의 사이클이 효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정치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 동기는 경제적인 것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것이기도 했다. 849 터널 효과에 대한 수정: 경제 논의에 집중하다 보면 정부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경제 문제와 상당히 다른 것일 때조차도 경제문제라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그런 조작의 희생자가 된다. 정치와 경제 사이, 신념과 행동 사이를 연결지어야 한다. 851 고통의 불협화음 속에 대안이 담겨 있다.신기루는 적어도 카라반이 목적지에 도착하게 만들기는 한다. 853 영웅과 악한을 찾아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남미 독재 정원의 기반을 더 다양하고 온전하게 살필 수 있다면 그것을 더 빨리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순환논리가 아니라 윤리적인 목적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실용성에 있는 것이다. 854

 

사회가 대대적인 변화의 시기를 지날 때 그 변화의 과정에는 우연과 선택이 가득하기 마련이며, 이것을 파악하려면 이성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했다... ...학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경제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는 하나의 블랙박스가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것들이 휘몰아치며 만들어지고 있습니다.”858-859

 

12.

 

<<군주론>> 권력의 신비에 대해 마키아벨 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865 스무 살 때는 마키아벨 리가 일반 원칙을 세우고자 한 것에 관심이 끌렸다. 그때 허시먼은 마키아벨 리가 추구한 원칙이 마르크스의 운동 법칙과 비슷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장년이 된 허시먼이 다시 발견한 것은 역사의 법칙이 가진 아이러니를 드러내고자 한 회의주의자의 면모였다. 마키아벨 리가 인간이 상당히 경멸받을 만한 존재일 뿐 아니라 세상 또한 상당히 엉성하게 혹은 사악하게 조직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867 마키아벨리가 희소한 자원에서 극대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경제학자처럼 주장하는 것을 다시 읽고 매우 놀랐다. 통치자가 미덕의 귀감이 되면서 동시게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유지라는 제약조건 하에서 도덕을 극대화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소비자가 예산의 제약 하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듯이 말이다. 868 고전적인 역설. 국가에서는 권력과 참여가 둘 다 필요하고, 결혼에서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둘다 필요하다. 세계의 국가들은 종종 직선이 아니라 원으로 배열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국가와 가장 나쁜 국가가 가까이 붙어 있다. 명백히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가까운 형제일지 모른다. 이 두 원칙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869

 

MIT 컨퍼런스에서 경제 이론이 이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정치적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학자들이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절망했다. 885 폴 샤믈리<<스튜어트와 헤겔의 정치경제와 철학>>.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나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람들은 그때 왜 새로운 원칙을 찾고자 하는 강박을 가졌던 것일까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답을 구하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17세기에...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던 절망적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887 자본주의가 처음 생겨났을 때의 이론을 도출하여 자본주의의 억압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희망을 시장의 구원에만 두거나 사회주의 혁명에만 두는 극단주의의 유혹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888 몽테스키외,<<법의 정신>>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 있을 수 있다면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정념은 그들을 사악해지는 쪽으로 추동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해관계가 그들이 사악해지지 않는 쪽에 걸려있는 상황.”888


애덤 스미<<법학 강론>>. 허시먼은 스미스가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발명하고 이 새로운 인간상을 연구하는 학과를 만들면서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미스가 사실은 경제와 정치의 관계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에게 매우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 894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무장한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며, 사회에 여러 계급이 존재하도록 함으로써 각 계급이 서로를 견제해 권력이 계속해서 분리된 상태로 있게 만들어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스키너은 이런 이미지가 몽케스키외 공화주의론, 루소와 연결되었고 행동주의적 사상이 갖는 강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896 어떤 유형의 경제 관계는 어떤 유형의 정치로 이어진다. 897 헤겔을 인용하면서 이제 영웅적인 이상무너졌고그 자리에 실천을 통한 변화가 들어섰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인간은 그가 하는 일을 하면서 변화될 수 있다.” 899

 

<<정념과 이해관계: 자본주의가 승리하기 이전의 자본주의 옹호 주장들>>. <<진보를 향한 여정>>을 집필하면서 정책 결정자들을 읽어냈듯이 이책을 집필하면서 고전 사상가들을 읽어냈다고 볼 수 있다.900 ‘정념이해관계라는 말로 새로이 포장함으로써 개인의 충동이 덜 충격적으로 보이게 되었고 사회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범위로 흡수 가능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으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주한, 양조인, 제빵인의 이타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이기심) 때문이다.“ 허시먼은 스미스가 선택한 단어들에 밑줄을 그었다. 사회가 호소할 수 있는 곳은 개인의 인류애가 아니라 자기애이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득이다.901 


사적인 이기심을 추구를 옹호했지만 공적인 도덕적 태로를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스미스를 부활시킴으로써 투쟁의 양편에 다리를 놓고자 했다....902 허시먼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스미스에게서 정념이나 악덕과 같은 단어들이 이익이해관계와 같은 밋밋한 단어로 바뀌었는데,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동기들을 이런 식으로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그것들이 더 계산가능하고 예측가능하며 일관성 있는 것으로 인식되게 만든 것이다... ..의도치 않게 공공후생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둘다 한 쪽의 어리석음과 다른 쪽의 근면이 점차로 가져오게 될 거대한 혁명을 예견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러한 혁명을 가져오기에 필요한 지식을 알고 있지도 않았다.“ 903 <<도덕감정론>> 그들의 주머니에는 별로 편리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지니고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옷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머니를 만든다.....스미스는 넓은 의미에서 공화주의 정신을 따르고 있었다. 정부가 스스로를 제약하는 규칙을 통해 국민과 국민의 번영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904

 

반작용적인 정념들로부터 반작용적인 이해관계들이 나오고, 이러한 대치되는 힘들로부터 견제와 제약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본다. 희망은 복잡한 혼합, 긴장, 변증법에서 나온다. 이해관계는 사실 각 본성의 좋은 면들만 취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자기애적인 정념은 이성의 제약을 통해 개선되고, 이성은 정념에 의해 방향지어지면서 둘 다 향상되는 것이다.... 그 시절에 이해관계의 원리가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909-910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수행한 혁명적인 작업은 이기심의 추구에 경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이기심이 통치자의 과도함을 억제하게 될 것이라고 정치적인 언어로만 이야기했다. 허시먼은 이 결정적인 움직임이 정치학과 경제학을 분리하는 기반을 닦았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더 계산가능하고 예측하능한 질서의 기초로 삼으려는 시도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910 <<정념과 이해관계>>에서 주되게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가 한때는 반의어였던 이해관계와 정념을 유의어로 만들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이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따라갈 때 사회 전체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개념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911

 

고전 사상가들은 정념과 이해관계를 경제적인 정신 속에 흡수할 수 있는 존재로서 결합된 자아을 제시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이렇게 재결합된 자아의 자율성을 정치적 정념으로 가득차 짓밟고 간섭하려고 하는 국가에 맞서는 기제로서 제시할 수 있었다.912 허시먼은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연금술 속에 녹여 없애버린 인간 충동들의 경쟁, 갈등, 긴장, 그리고 비유의어적인 특질들을 되살리고자 했다. 이러한 자아 모델, 즉 복잡하면서도 결합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불편한 자아 모델을 사라졌다. 그래서 허시먼은 역사로 돌아가서 원래의 열망과 우려를 되살리기 위해 정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13 


정념과 이해관계는 공동의존적이었다. 견제가 없을 경우, 정념의 지배는 끔찍한 유토피아로이어질 수 있었고 이해관계의 지배는 영혼 없는 실용주의로 빠지게 될 수 있었다. 915 허시먼과 스미스 모두 개인을 복잡한 존재로 보는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섬세한 균형점이라는 개념을 촉진하기 위해 분투했다. 스미스가 앞을 내다보며 그랬다면 허시먼은 뒤를 돌아보며 그랬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916 간은 상호경쟁하고 또 상호결합되는 충동들이 유장하게 투쟁하는 서사의 무대이다. 허시먼은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기적인 획득의 욕망과 공동체적인 미덕을 둘 다 갖는 근대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921 토크빌: 정부에 질서유지만 요구하는 국민은 본질적으로 이미 노예이. 그 자신의 후생의 노예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족쇄를 채울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 912




볕뉘. 생각보다 길어져 한 번 더 밑줄을 챙겨야 할 것 같다.  그의 저작은 다작은 아니지만 많은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분량 역시 길지 않다. 설핏 읽었던 정념과 이해관계 최신 출간본은 그 근저에 많은 뿌리들을 함유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고민과 방향을 새겨준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깊은 해석과 읽기가 필요한 듯싶다.  아마티아 센의 경제학에서 복수 개념들이 많이 등장하고, 또 다른 허시먼의 책 서문에도 등장한다. 책을 읽다보면 아시겠지만 아마티아 센은 허시먼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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