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집은 새롭고 신선하고 신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 집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모든 가구와 창문과 램프가 일깨웠을 의무가 잊혀졌다는 것은 집에 안식일과 같은 평화를 가져다준다. 처음 몇 분 동안, 단 한 번만 존재하는 방과 구석이나 복도 안에 있는 듯이 느끼며, 이러한 느낌은 그곳에서의 나머지 삶이 거짓말처럼 보이게 만든다. 세상이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다면, 세상은 지금과 다르지 않고 별로 변한 것이 없지만 나날이 축제 같을 것이며, 휴가에서 집에 돌아온 아이처럼 의무는 휴가 때 놀이만큼 가벼울 것이다.  153

 

반짝 1. 시선이 따듯하다. 우리집에 돌아온 몇 분의 행복이 세상이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다면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축제 같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후기 자본주의에 살아지는 우리는 그 쳇바퀴같은 일상을 반복한다고 하지 않는가? 노동의 법칙 아래 있지 않게 하려면... ...


좌파 낙관주의는 '사람들은 악마를 벽에 그려서는 안 되며 밝은 면만을 보아야 한다'는 음흉한 시민적 미신을 되풀이한다. "이 세계가 그 신사 마음에 들지 않는다구요? 그럼 그는 더 나은 세계를 찾아야겠군요." 이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일상어이다.  정통 노선 이탈  156

 

반짝 2. 난 좌파 낙관주의자다. 유토피아를 꿈꾸고 더 나은 세계를 자꾸 찾으려한다. 그 이면을, 아니 다면을 살피려하지 않는 우둔함이 잠복해있다는 사실을 애써 있으려 한다. 아도르노는 여기서 노동과 계급의 문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좌파 낙관주의, 그대 세상은 흘러가고 놓치거나 만들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쓸데없는 낙관이 가리고 있는 그림자들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기나 한 것인가 되묻고 있다.


어떤 손님이 아무리 오래 기다렸더라도 그 사람을 담당하는 종업원이 다른 일로 바쁜 경우 다른 종업원이 주제넘게 나서지 않는다. 제도 자체를 신경 쓰는 일-이런 것은 감옥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이 병원에서처럼 사람을 배려하는 일보다 앞서게 되며 주체는 단지 객체로 관리될 뿐이다. 159

 

반짝 3. 후기자본주의는 제도에 갇힌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손님은 늘 객체다. 마음도 살피지 못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그저 처분만 하는 구조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불편을 모아 나름 종합적으로 대접을 한다고 하나, 그 노회한 장사꾼의 본심은 조금 거리를 두자마자 드러난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그때그때 가장 새로운 방식을 소비하려는 열광은 최신의 방식에 의해 무엇이 제공되었는가보다는 최신의 방식 자체를 중요시하며 쓰레기더미로 변한 정체 물량과 계산된 백치 행태를 조장한다. 이런 백치 상태는 포장만 조금 고친 낡은 조악품을 최신품으로 간주한다. 기술적 발달의 고마운 조력자는 더 이상 수요가 없는 재고품을 사지 않으며 고삐 풀린 생산 과정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한심한 소망이다.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의식, 구름처럼 몰려가기, 장사진에 한 다리 끼기 등이 사방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자 하는 욕구를 밀어낸다. 161..사람들은 개봉한 지 벌써 석 달이나 지난 영화보다 방금 나온 영화를 기를 쓰고 더 좋아할 것이며-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석 달이나 지난 영화에 대한 혐오감은 아주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작곡에 대한 혐오감 못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광적인 사랑에는 무숙자의 감정이 상당한 역할을 한다. 그 근본에 깔려있는 것은 시민들이 부당하게 '자기에게서 도피', '내적 공허에서 도피'라고 부르는 것이다. 함께하려는 사람은 달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심리적 공허감은 사회가 개인을 부당하게 흡수해버린 결과이다. 사람들이 도망가고 싶어하는 '지루함'은 오래전에 시작된 도망 과정을 재투영한다. 그 때문에 오직 괴물같은 유흥장치들이 더 번창하고 있지만 누구도 거기서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88

 

반짝 4. 소비, 소비, 소비 그 뒤에는 쌍으로 건망, 건망, 건망...이 시공간에는 합리적인 욕구가 없다. 신상이나 새로나온 영화에만 열광 속에 아둔함은 없어보이는가? 끊임없이 잊기 위해 해소하는 그 일상이 보이지 않는가?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의식, 그 위축.......뭔가 이상해보이지 않는가?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쇼윈도우에 갇힌 우리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가? 아 저기 내가 보인다. 쇼윈도우 속에 넋이 빠져...도통 세상이 왜 틀어졌는가 궁금하지도 않는 내가 새책을 보며 처박아두는 모습이 보인다.

 

상상력은 무의식의 소관으로 넘겨지고 인식 이론에서는 판단력이 결여된 유치한 퇴화된 기관으로 배척되지만, 오직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판단의 절대적 원천인 대상들 간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상력이 추방되면 진정한 인식 행위인 '판단'도 추방되는 것이다. 지각으로 하여금 갈망이나 예상을 못 하게 막는 통제 장치가 '지각'이라는 것을 아예 거세시켜버리면 지각은 이미 알려진 것을 무력하게 반복하는 쳇바퀴 속에 갇히게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성의 희생을 초래한다. 고삐 풀린 생산 과정이 최우선시되고 '무엇을 위하여'를 묻는 이성이 사라지고는 이성이 스스로에 대한 물신주의에 빠지면서 외부의 권력에 굴복하게 됨에 따라, 이성 자체는 도구로 전락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능인들의 사유 장치는 사유를 막는 목적에만 사용되며 이성 또한 이러한 기능인들과 유사하게 된다. 167

 

개성을 시장에 팔기 위해 내놓은 사람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언도한 판결을 스스로의 판단인 양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이 당한 불의를 객관적으로 정당화한다. 그들은 사회의 보편적 퇴행을 사적인 퇴행으로 축소 재생산하며, 그들이 목청을 높여 저항하는 것조차 대개는 약자의 노회한 적응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183

 

반짝 5. 상상력이 추방되면 판단도 추방된다. 지각을 거세시켜버리면 이미 알려진 것을 무력하게 반복하게 된다. 무엇을 위하여... ...일터에 다니고 다른 정당에 대한 입장을 갖고 바뀌지 않으며 진자가 반복되어 움직인다. 왜 생각하지 않는가? 사유라는 것은 창고에 폐기된 것처럼 살아지는 사람들로 넘쳐나는가?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진보를 떠나 일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은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더 너머서려고 조차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평범성은 또 비슷한 박자를 타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실증주의는, 현실 자체에서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사유의 거리를 다시 한 번 깎아내린다. 위축된 사유가 자신이 파악한 사실들을 요약하는 임시 처방 이상이 되려 하지 않을 때, 현실에 대한 사유의 자율성과 함께 현실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는 사유의 힘도 사라진다. 삶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사유의 삶은 전개되며 경험계에 제대로 관여할 수 있다. 사유가 사실과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한 비판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동안 사유의 운동은 적지 않게 '차이'에 대한 감각에 의존한다. 171

 

반짝 6. 삶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만 사유의 삶은 전개된다. '차이'에 대한 감각에 의존한다. 실증주의, 데이터, 객관을 가장한 이야기들 속에 삶이 없다.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거리를 유지할 때다. 그래야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뒤따르는 것이다. 살고 있는 일상을 끊임없이 새겨보고 다시 보려하는 감각, 그래야만 최소한의 올바른 삶들이 기웃거릴 수 있다.

 

관심사를 추구하고, 실현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소위 실천적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는 접촉 인물들이 자동적으로 친구와 적으로 변한다...다른 사람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기능으로 보지 않고 인물 자체로 보는 능력, 생산적인 대립 관계로 만들 능력, 자기와 모순되는 것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위축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은 판단적인 인간 지식으로 대체되는 바, 이런 지식에서는 결국 가장 좋은 사람은 더 적은 악이 되며, 가장 나쁜 사람도 최고악이 되지는 않는다. 177

 

반짝 7. 친구를 가려서 사는 사람들, 관심사를 밀어붙이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 의욕과 목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낸다. 그들의 무지를 탓한다. 인물자체를 보는 능력, 생산적인 대립관계를 만드는 능력, 모순을 포용하는 능력을 애써 보지 못한다. 자본주의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너도 ..... 나도...  늘 나에 머물러 있다. 너가 되지 못한다. 한번도 나-너는 되어보지 못하면서 살아진다.

 

 

 

 

 

 

 

 

뱀발. 천천히 보다. 우울과 허무를 들여다보는 이유는 그 허무와 우울이 이 기름기를 띄우고 있는 물같은 바닥이기 때문이다. 바닥을 치고서야 이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실체가 보인다. 버스와 비행기로 관전하는 것이 아니라 추체험이다. 오롯이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 블로거의 리뷰를 본다. 아도르노가 왜 우울과 허무를 캐내려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숲을 거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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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상향의 장미향기는-거기서 한 송이의 장미라도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말로만 된 행복이라 - 사무실의 담배 냄새를 풍기며, 소도구로 쓰이는 몽환적인 달은 시험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에게 희미한 빛을 비춰주는 등잔불을 본뜨고 있다. 스스로는 힘이라고 생각하는 허약성이 소위 부상하는 시민 계급의 사상을, 폭정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섰다는 그 시기에 이미, 이데올로기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휴머니즘의 가장 깊숙한 안방에는 이미 그 안에 갇혀 날뛰는 폭군이 있는데 이제 그 폭군은 파시스트가 되어 감옥을 만든다.

 

반짝 1. 휴머니즘의 깊숙한 안방에는 날뛰는 폭군이 있다. 장미향기는 담배 냄새를 풍긴다. 언어로 지은 집에 몰두하다보면 그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습속이 있다. 그 모호함과 낭만성이 유래하는 것은 비단 역사의 흔적만이 아니다. 현실 속에 오히려 더 악독하다. 개인적인 관심사가 인문, 철학이라 과도한 추상성에 머문다 싶다. 그런 연유로 실물이나 경제에서 가지 뻗는 철학과 인문의 촉수를 거두어 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깊다. 그 추상성으로 개인과 철학에 과도하게 기우는 문제가 지식인의 질투를 넘어서 공격으로 다가설 우려가 깊다. 강신주가 좀더 생각이 있다면 형평, 공평과 경제로 촉을 넓고 깊게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시일내에 여기 지식인들의 집중포화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51. 문필가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유의 사항은, 모든 텍스트와 모든 절, 모든 문단에서 중심 모티브가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사람은 쓰인 것에 대한 별다른 반성없이 붓 가는 대로 내버려두려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생각 속에서는' 자신의 의도에 밀착되어 있지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다......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길이는 아무래도 좋다. 분량이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유치하다. 일단 존재하게 되고 씌었다는 이유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단지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종종 저자가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그 무엇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시도해보는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반짝 2. '삭제하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몇몇 문장이 동일한 생각을 변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죽비로 제대로 맞는다.

 

48. 넘치는 건강은 그 자체로 이미 항상 병이며, 그 해독제는 병, 즉 삶의 제한성에 대한 자각이다. 이런 치유 효과가 있는 병이 미美이다. 미는 삶에 정지명령을 내리면서 동시에 삶의 파멸에도 똑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삶을 위해 병을 부인하려 들 경우 그런 삶은 다른 계기를 보지 못하는 장님 상태가 됨으로써 파괴적이고 사악하고 뻔뻔스럽고 허풍스러워진다. 파괴를 증오하는 사람은 삶도 함께 증오해야 한다. 죽은 자만이 왜곡되지 않은 삶의 비유가 된다.

 

반짝 3. 삶의 제한성에 대한 자각은 병이다. 병은 미다. 삶을 위해 병을 부인하려 들 경우 장님이 된다. 우리 사회는 넘치는 건강만 회자된다. 그러니 정작 삶은 없다. 삶을 건네고 부여잡고 나눌 수 없다. 병이 삶을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악착같이 병을 부인한다. 그래서 살아남지 못한다. 아픈 식구가 있다는 건 고통일 수도 있지만 조금 통증이 가라앉는 순간 복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어린아이가 통증에 버거워하는 모습은 부모로서 안타까움 이상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래서 그 아이의 삶, 과도한 경쟁에 대한 미련을 줄이고 스스로 좋아하는 것에 침잠할 수 있도록 삶에 관여하지 않는 건강함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약해지고 예전과 같지 않다는데 머리 숙인다. 좀더 몸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면서 그 약해짐이 좀더 또렷한 일상을 요구하고, 시간에 대한 지루하지 않을 궁리를 더 하게 된다.

 

21. 왜곡되지 않은 모든 관계, 유기체 내부에 있는 화해적 요소란 아마, 주는 행위, 선사하는 행위이다...진정한 선물 행위는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 즉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을 잊어버리려는 것과는 반대의 것이다.

 

반짝 4. 선물은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다.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선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척이나 피상적이고 의도가 있는 일상으로 읽혀지고 있음을 짚고 있다. 관계란 무엇일까? 너를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과정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 너가 얼마나 있을까? 관계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곡되지 않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20. 소외는 바로 사람들 간의 거리가 소멸되는 데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주고받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실행하고, 통제하고 그 통제의 틀 안에서 역할을 행하고 하는, 즉 몸과 몸이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만 서로를 함께 묶는 정교한 그물망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며 한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바깥이 있을 때에만 안도 여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시간이 돈이라면 시간 -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간 -의 절약은 도덕적으로 보이게 되며 사람들은 그러한 시간 절약을 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사람들은 직선적이 된다.

 

반짝 5. '몸과 몸이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만 서로를 묶는 공간이 생겨난다. 한 인간이 여무는 것도 그 안에서이다.'  모임 속에서 때때로 헛된 욕심을 부린다. 속성 앎, 속성 관계라는 것이 마치 있는 듯 빨리 성장해야 된다는 강박이 그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몸과 몸이 만나 자라는 것이 그나마 온전한 관계를 만들었다는 돌이킴이 있다.

 

 

뱀발. 카페에서 쉽게 읽히지 않는 아도르노의 글에 메모지를 붙인다.  마음을 깊게 찌른다. 천천히 새기며 가고 있다. 지식인들이 얼마나 질투심이 많고 치졸할 수밖에 없는지도... ... 완 펀치!...올 킬?? 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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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흔적 - 중소업체 사장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어 듣게 된 흔적이다. 지역의 오랜 구력은 어떤 동네가 공기가 좋으며 공단 환경에 대한 정보와 사는 사람들의 삶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어 흥미롭기도 하다. 행정가나 정치인들 위에서 노는 것이 기업가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몇가지 건네듣다. 공단에 입주하다가(염가나 헐값에 임대...) 빠져나간 H, 혜택을 받고 중국으로 빠져나간 K건설 등..기본적인 혜택의 수준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점, 공동주택도 기본 계획인 80만으로 설계되어 있으나 50만규모의 인구 수준에는 너무도 많아 자영업자들도 분산되어 장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선친이 건설업에 있던 경험들로 인해 그 계통의 흐름을 자세히 꿰고 있다. 부도위험으로 무리한 거래를 하지 않으며 부부동업으로 운영하며 ...기술력으로 꾸려나가는 곳이다.

가까운 지인 가운데 먹튀사장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고의부도를 내고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버젓이 활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공무원 몇명 옷을 벗은 정도로 끝이 나긴 했다고 말이다. 토착인으로 연륜과 문화자산을 담보로 행정영역을 넘나드는 부류와 시스템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행정은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다. 여든 야든 (이곳에서 야권은 어렵다) 그 권력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틀기가 쉽지 않을 것이긴 하다. 일자리와 살림살이가 그래도 나은 이 지역의 보이지 않는 관행이란 통로를 보이게 만드는 것만 해도 큰 일이 될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지역연구들이 집중되어야 하지만...아마 어느 지역도 그 내력과 이력의 흐름에 예민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이 운동이나 활동의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드문 것 같다. 140108 

 

 

뱀발. 타인의 직업과 살림살이에 대해 관심있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묻지 않음이 습속이 되어 있음이 오히려 편치않다.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는 모습들에 대한 관심이 늘 추상에 머물러 있음을 느낀다. 요즈음은 아예 자세히 따지지 않는 모습이 보여 스스로 편치 않다. 실물에 대한 무지인 셈이다. 대전도 지역 상공인에 대한 연맥을 나타내고 관여하는 흐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이야기되긴 했지만 그런 자료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흐름들을 바탕으로 정책이나 전략을 세우는 밑거름이 되는지도 말이다. 최소한 권력의 집행과 흐름에 대한 감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순박함과 순진함을 넘어서는 길목... 이슈도 좋지만 뭔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 ...축적되는 맛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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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는 즐거움을 읽다가 걸린다. 파인만이란 대가가 그 곁에는 아버지가....그리고...큰 나무 사이사이 자란 묘목과 거름이 되어주는 이들이 늘 곁에 있다. 묵묵히 지켜주는 이들도...하지만 역사라는 가로등은 자꾸 드러난 것만 비추려한다.

 

 

 명문가? 문화자본의 향유는 몇대를 걸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집안의 문화가 그 테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약간의 불만이긴 하다. 암묵적인 지식, 앎의 수수관계,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과정, 묻고 답변하는 기술들이 친인척 사이에 알게 모르게 각인된 연유이기도 하다. 존스튜어트 밀, 막스베버, 크로포트킨, 러셀의 전기를 통해 알고자 하는 힘과 탐구와 연구능력 등을 보게 되면 그 문화 저변의 탄탄함에 놀라게 된다. 최근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을 읽다가 그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에 주목하게 된다. 아이에게 들려주는 독특하고 세련된 기술들은 놀라울 호기심과 해결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게 된다. 문화적인 저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놀이같은 자체의 즐거움에 기인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최근 온도계의 철학에 대한 저작을 내놓은 장하석의 집안도 학풍의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형은 물론 작은집까지 학자집안이다. 질투도 나지만 혜택을 받는다 점에서 더 응원하고 싶기도 하다.

 

 

 

 

 

 

 

 

 

물론 친구의 관계, 사제의 관계로 만남들도 도드라진다. 그렇지만 늘 그런 근육이 생기기 위해선 굴곡이 전전한다는 점이다.  명문가가 아니라 그런 문화적인 토양을 만드는 학풍이나 공동체?들도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걸출한 인재들이 만들어지는 습속과 문화를 짓기 위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도 되새겨보면 좋겠다. 이땅에서 아인슈타인이 공부했다면 그는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웃지 못할 곳이기도 한 현실을 핑계삼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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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시경 2014-01-0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것은 운이 크게 따라줘야 하지만...학습공동체를 만드는건 노력과 열정이 있으면... 어느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렵지만 멋진 일을 하시는 마당님이 부러워요~^^

여울 2014-01-06 08: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격려해주시고 고무해주셔서 더욱~~ 자주 대면하길 바랍니다 ㅇ
 

1.

 

 

노조의 인맥을 구워삶아(돈써서) 외동아들 무사히 취직시켰다는 얘기와 대졸인데 고졸 대기업의 직원이 월급도 더 많이 받고 더 안정되어서 죽겠다는 이십년전 퇴행을 듣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나는 더 못받아 배아프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삶이 거기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더 야속해지는 짙은 밤이다. 할 일 많아 좋아 죽겠다. 등잔밑은 늘 ㅡㅡ 등잔밑만 환하면 세상 반짝 번쩍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 끼워본다.

 

2.


 

출근길. 교사와 결혼한, 일년에 일터에서 추천하는 책 몇권밖에 읽지 않는 30대초반의 동료. 빤한 뉴스보다 나을 것 같아, 빨(간)책(방) 최승자와 이성복 편의 몇대목을 같이 듣다. 독서계의 컬투쇼라고 소개하고 괜찮은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검색을 해본다. 최승자! '강한데요.'"넓고깊다"라고 답한다. 소설과 시가 때로는 생산공정과 같다. 한 곳이 빵구나면 틀어지는 것처럼 치밀하고 고생이 우려나오는 것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 사소하고 소소하게 쌓이다보면 아마 정치색이나 그의 곁에 씌워진 딱딱한 것들이 말랑말랑해지고 여려질까. 느끼는 감도도 달라질 것이라고 여겨본다. 사람 일이란 늘 모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같은 가을날이 아닌 때가 오기도 할 것이다.

 

 

뱀발.

 

0. 산책한 뒤 얕은 잠에 취해 있는데 깨운다. 맥주 한잔하며 나누다보니, 정규직의 사고틀이나 한계가 엿보인다. 나보다 못한 놈이 더 많이 받고 더 잘나가 억울해 죽겠다는 시늉이다. 더 널린 못한 삶은 안중에도 없고, 얼마나 호가호식하는지? 아들 딸 20대 잉여의 삶은 관심조차 없이 항변인 모습이 애처롭다. 노조 이야기도 청* ***학으로 끝나는 회사 이야기다. 숙부가 그랬다고 하니 그냥하는 소리가 아니다.

 

-1. 부인이 교사인 신혼부부다. 관심 갖고 있는 것이 재테크다.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귀족이 달리 없겠지만 지금의 현실에 비춰보면 앞날이 보장된 신흥귀족인 셈이다. 운이 대부분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지 못해 무지의 삶이 얼마나 주위를 아프게 하고, 동정심 없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아픔을 느낄 때, 타인에 대한 배려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어렵지 않음에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만나 그 이야기만 듣고 살게 되면, 분명 그럴 것이다. 내아이, 그래도 내아이는 비싼돈 들여 과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떳떳하게 얘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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