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다수는 돈을 벌어야만 하는 운명의 노예이다. 그들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도록 압박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본업 밖에서 즐거움이나 여가를 얻기 힘들다. 중년의 막바지에 은퇴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권태에 시달리는데 이는 그들이 막상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며, 한때 일 이외의 활동에 지녔던 흥미가 이미 고갈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경우이다. 대다수는 눈앞에 도사린 빈곤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년까지 일을 해야 한다......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기 일의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내지 못한다. 일하는 동기는....일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처럼 즐거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
...웃음을 사게 마련이다." (버트란트러셀의 자유로가는 길에서)

 

 

 



일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처럼 즐거움일 수 있다는 교과서에 밑줄치는 얘기 아닌가? 사자가 풀 뜯어먹는 소리?! 맞지 않는가? 한번도 놀아보지도 못하고 삶과 끝장나게 만드는 사회의 아버지 어머니는 얼마나 불행한가? "놀아봐야 논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가끔은 안해와 딸래미가 말한다. 당신은 좋겠어...짤려도 하고 싶은 거 많아서.....난이나 치시구 책이나 보구.....그래!! 그런데 짤리는게 더 걱정이거든...돈을 벌어야만 하는 운명이 떡 버티고 서있거든... 헌데 그래도...솔직히 일을 예술처럼, 창작활동처럼 한번을 살다 가고 싶기도 하다. 이제 그만 손 놀까?? 아니라구!! 아~ 짤릴때까지 다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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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다. 그것을 일이 아니다. 과로는 소수에게 사치재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의 복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은, 노동은, 생리적으로 필요한 것, 몸에 축적된 힘을 소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자체가 건강이자 삶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부문의 유익한 일들이 마지못해 이루어진다면 이는 단지 그 일이 과로이기 때문이거나 부적절하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버트란트러셀 자유로가는길에서)

 

 

 

 

 

일, 노동의 기쁨은 있는가? 4시간제를 파격적으로 주장한 러셀씨를 좀 황당한 친구로 폄훼할 수 있을까? 못하겠다. 헌데 노동의 기쁨은 조금은 쫌 과한 거 아닌가? 노동이란 말에 방점을 찍는 것도 그렇구 말이다. 요즘 어떤 세상인데, 일자리도 없고 짤리기가 책장 넘기기보다 쉬운데 말이다. 그런데 이 말 듣고 조금 숨이 죽는다. 과로는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란다. "일"이 아니라고 못밖는다. 시민단체 활동가도 일을 줄였으면 좋겠다. 일이 일을 낳고 낳아 일 앞에 무너지는 일만을 피했으면 좋겠다. 줄이고 줄여, 정말 일하고 싶어죽을 때까지 참아도 좋겠다. 일하고 싶어 죽고 싶을 때, 그 때 자랑스럽게 "노동"의 "기쁨"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과로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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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을 유발하는 장학금 제도는 아예 없느니보다는 낫지만 여러 관점에서 비판할 만하다. 그러한 제도는 한참 어린 아이들의 학업에 경쟁심을 불어넣는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지식을 그 자체에 내재한 흥미나 중요성보다 시험에 쓸모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느긋이 생각하느라 둔해 보이는 인재보다 일찌감치 판에 박힌 질문에 술술 대답하는 인재가 더 높이 평가받는다. 가장 해로운 단점은 아마도 어린 나이에 과로한 나머지 장성했을 때 활력과 흥미를 잃는 경향일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영재들이 이러한 이유 탓에 촉이 무뎌지고 감이 떨어지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다. "(버트란트러셀의 자유로가는 길에서)



공부에 물리거나 질리는 삶은 치료하기가 힘들다. 책을 보기도 싫었고, 군대에 가서야 난독증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듯하다. 공모도 이런 공모가 있을까? 세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런 공모!! 공부 잘하는 일 감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공부 못하는 일 주눅들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제발! 학교갈 때 공부 열심히 하란 소리 한번도 안한 무심한 부모지만, 러셀씨 말듣고 다짐해보자. 당신 아들딸 촉과 감 떨어지는 것에 예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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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요구없이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인권운동가 Frederik Douglass 

 
힐링과 치유가 대세다. 힐링도 해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것이나마 있는 것이 다행이 아닌가라고 했다.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아픔을 달래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루만지기만 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물로 달래는 마음은 자고 일어나도 또 다시 현실은 버티고 서있다. 이런 연유로 현실 문제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제도와 법, 정치가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vs 급진주의
 

419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사이에는 2가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는 관념적이다. 사회현실을 파헤치다 보면 그 핵심을 관념과 개념, 언어, 태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다. 그와 대조적으로 급진주의자는 유물론적이다. 그들은 사회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실제 제도의 합므오 보고, 그 제도들이 폭력을 비롯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기본 사회 단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주의적이어서 사회의 기본 조직을 개인으로 본다.  따라서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전략은 거의 항상 개인행동에서 출발한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의 기본 조직을 계층이나 단체로 본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을 단체의 성원으로 보는 것 자체가 해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급진주의자들은 함께 박탈당한 사람들과 공동의 이익을 찾고 동지에 대한 충성심을 길러 나가는 것을 해방 운동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억압을 실수, 오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교육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급진주의자들은 억압을 서로 맞물린 제도와 체제의 문제라고 간주하고 권력과 직접 대결해 문제의 제도와 체제를 해체하는 것을 최선의 전략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와 급진주의를 구분한다. 개인과 계층,단체, 관념적인 것과 유물론적인 것, 문제해결 방법의 차이로 나뉜다. 지금 여기에서 흔한 방법인 '내탓이오'류와 대안문화를 만드는 해결책들이 그것에 가깝다. '도를 아십니까'나 근본생태주의가 개인을 중심에 두고 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개인에 방점을 둔 해결책들이 너무 일상화된 것이 아닌가하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홀로해결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그 한계가 명백하다. 현실은 요지부동 벽처럼 버티고 서있다. 스스로 해결책이라고 문화를 지켜나가는 이도 흔들리고 흔들린다. 그 벽을 부수거나 제도를 바꾸어내어 받는 수혜에 민감하지 못한 건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라고 한다.

 

420 

미국 좌파는 자유주의를 너무 마음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실제 무언가를 실행에 옮겨 성과를 거두는 일과는 완전히 동떨어지게 되었다. 사회 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집단 치유로 둔갑했다. 이제 무엇을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가 중요해졌다. 어떤 행동이든 권력의 물리적 균형을 바꾸려는 목적이 아니라, '주체감'과 '공동체'를 느끼거나, 못된 엄마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유년의 나를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 사랑과 연민을 주려는 목적에서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자아를 중심으로 한 끝없고 쓸모없는 행위다. 이런 워크숍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자아 성찰 행위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지구는 학살당하고 있다. 자기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고 싶다면 결국 그것도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자는 힐링과 치유, 워크숍 문화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뭔가 바꾸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척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회운동은 이런 집단치유에 목매고 있는지 되살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극단적 채식주의나 문제 해결에 빠지는 것도 정작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법이라 충고한다. 그 방식은 정작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용기와 희생, 끈기, 명예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변화만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개인주의의 막다른 골목은 '생활 방식 운동가'들의 극단적 정결성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사회 운동가의 임무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 갈고닦아 체제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접근법(개인의 심리학적 변화 혹은 개인적 생활 방식의 선택) 모두 범세계적 권력구조를 깨뜨리는 데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들은 궁극적으로 불의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으로, 운동의 목표를 정치적 변화에서 개인적 변화로 변경해 버린다. 이 방법은 쉽다. 훨씬 쉽다. 우리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기나 희생, 끈기, 명예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우리 한 가족이 뱉어내는 소비재 쓰레기가 제3세계 마을을 하나씩 채우고도 남는 현실에서 지역 식량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방법 외에 좀더 다각적인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라고 한다.


 

427 우리의 모든 사회적, 영적, 성적 복지는 차 2대, 아이 둘, 행복한 이성 결혼 관계의 핵가족에 의존하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소비재 쓰레기는 제3세계 국가의 마을 하나를 채우고도 남는다.

 

이제는 우리의 책임을 다시한번 상기해야 한다. 유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책임을 절감해야 한다.  지구는 우리가 치유자처럼 생각하는 한 구체적인 변화는 없다. 새로운 대안문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지배문화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힘은 한번도 요구없이 내준 적도, 앞으로도 절대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인권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말을 남기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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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뿌리는 궁극적으로 지배-종속 관계를 에로틱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다." -  Sheila Jeffrery 성정치학자

 

여성 혐오증, 인종 차별주의, 군국주의가 사회에서 조금 희석되며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 여성성이 좀더 들어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세상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런 의문에 회의가 드는 지금이다.  제도적인 문제, 사회적 약자로 여성을 봐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애정어린 시선으로 남성성을 표현하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니다. 무척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문구로 과도한 여성성때문에 남자가 피해보고 있다라고 문제를 전혀 엉뚱한 구석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즉자적인 상황만 보려하고 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고사한 채, '그래 여자때문이야'라는 말들이 번지지나 않을까 우려스럽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이주노동자'때문이야.  '흑인'과 '동양인'때문이라는 인종차별처럼 말이다.

 

가부장제의 진짜 영리한 부분은 억압 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다는 점이다. '선'을 넘어 잔혹한 행위를 하는 주체는 성적 흥분을 느낀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런 행위는 증오로 가득 찬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  남자들이 벌거벗기고 굴복의 자세를 취한 채로 사진에 찍히면, 그에 나타난 권력과 억압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전 세계가 분노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소녀가 팔려 가 강간을 당하고 '전시'되면, 전 세계는 더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성매매 수입에 온 나라의 예산이 왔다 갔다하는 나라도 있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영악함과 남성성의 유지는 억압행위에 성적 의미를 부가한 연유라고 꿰뚫는다. 이라크전쟁에서 여군이 이라크 병사들을 끌고 벗기고 고문하는 사진에 전 세계가 일제히 문노한다.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이 강간하려고 한 사실에는 그 권력과 억압의 관계가 드러나기는 커녕 그 여자가 누구인지 더 보고 싶어하는 이중성있는 태도를 통찰력있게 설명해낸다. 전자가 미군의 야만성과 인권무시에 대해 철저한 규탄을 불러왔다면 후자는 그런 행태가 반복됨에도 그 뿌리깊은 권력의 남성성에 대한 반성을 여전히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이 바래버렸다.

 

 

지배라는 개념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덧입히는 한 여성 혐오가 사라지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인종 차별주의의 종식도 없다. 바로 이 문제야말로 좌파들이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도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선 남성성이 왜 자가증식하는지 느끼게 해준다. 에로틱한 이미지가 권력과 지배, 그 모순들 속에 겹치는 순간, 문제는 희석되며 상황은 계속 반복되기만 한다는 것이다.  파시즘의 뿌리도 과도한 남성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동때문이라는 성정치학자 쉴러 제퍼리의 말을 새겨듣지 않으면 안된다. 


(채식의 배신.  415-416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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