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길 - 축적의 시간 두 번째 이야기
이정동 지음 / 지식노마드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한국산업의 성공이 놀랍기는 하지만 기적은 아니다. 모든 국가의 발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설비를 도입하고, 매뉴얼을 학습하면서, 실행 역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산업발전을 시작했다. 나아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드물게 개념설계에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버티면서 세계적 수준의 제품을 만든 사례를 만둘어냈다. 그 결과 27,000달러가 넘는 일인당 국민소득을 달성했다. 그러나 성장이 멈추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새로운 도전이 사라지고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면서, 20년전 성공한 혁신적 도전의 잔상으로 버티고 있다.(p235)

변화를 위한 핵심 열쇠는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고수의 시대(축적의 형태),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축적의 전략), 위험공우 사회(축적지향의 사회시스템), 축적지향의 리더십(축적지향의 문화)(p244)

「축적의 길」의 전작 「축적의 시간」을 읽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주가가 고공행진을 하던 ICT산업과 조선, 자동차 등 한국 주력 제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빠른 속도로 성장한 중국 제조업의 현실을 알려주는 책 내용은 아팠지만, 현실을 바로보는 유익함을 주었다.

그리고, 「축적의 길」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답으로 나온 후속작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축적의 시간」은 산업 분야별로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담겼기 때문에 보다 문제의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었던 반면, 「축적의 길」에서 제시하는 해결책, 대안은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과거를 맞추는 무당은 많으나, 미래를 예언하는 무당은 적다고 했던가. 그래서, 추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작에 미치지 못한 내용은 아쉽게 느껴진다...

ps. 기술 축적이 되기 위해서는 성형외과 의사보다 엔지니어가 되었을 때 더 좋은 대우가 보장된다는 신호를 보낸다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벤처 창업 후 기술을 빼앗기지 않고 몇 년 뒤에 구글, 아마존, 알리바바와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마치 4대강 보개방 후 철새가 돌아오고, 물이 맑아진 것과 같이 기업 생태계가 살아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축적의 길」은 이 부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8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8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 바탈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마비시키는 숙명철학을 몰아내기 위하여 최후의 반발을 찔러 일으키는 지독한 고통이 필요하다.(p449)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인‘한 사람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민족적 성격이 되기까지에는 길고 긴 세월이 들어서 된 것이다. 낙심할 것 없다. 우리가 가만히 손을 대어보면 이 상한 가슴 밑에 오히려 ‘인‘의 일맥이 할딱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너져가는 초막 속에 다른 것은 없어도 아직 ‘인‘이 남아 있다. ‘인‘은 알맹이다. 그것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의 명이다. 없어질 수 없다.(p459)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으로 더럽혀진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p4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권과 순수성 -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0
프라센지트 두아라 지음, 한석정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조선의 3.1 독립운동 이후 식민체제 내 여러 집단들은 기존의 식민정부를 개편할 필요를 지적했다... 그러나 실험은 계속되지 않았고, 아이디어와 에너지는 만주국으로 이월되었다. 만주국이 일본 식민주의의 궤적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아시아주의적 동맹, 엔 블록(yen bloc), 발전과 동원의 새 전략을 포함하는 자급자족권의 실현에서 시작이요, 첫 단계를 나타냈다.(p429)

만주국은 일본 제국의 성질에서 근본적 변화들의 신호탄이 된다. 조선과 타이완의 본격 산업화 단계와 발전은 1931년 이후에 도래하는데, 만주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 자급자족체 계획의 한 부분으로 등장했다.(p430)

만주국은 제국주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외래인들에 의한 직접 통치와 노골적 착취로부터 간접 통치, 지방 엘리트들과의 협력 장치, 자치, 유사 독립성, 그리고 여타 수단들과 같은 대안으로 이행한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지구적 제국주의와 일치했다.(p432)

만주국은 어떤 점에서 내가 ‘동아시아적 근대‘라 부르는 것의 예시가 되었는가... 역사적 자원들은 국가 만들기와 통치성의 목적으로 국가의 주도권에 도덕적 힘을 불어넣고, 민간사회와 가족을 복속시키기 위해 동원되었다. 신생활 유교운동과 ˝도덕적 교화˝가 국가가 관리하는 대중조직을 통한 동원을 허용하고, 중심부의 전통을 변방에 확장시킴으로써 변방의 문화적 투자가 내면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주국의 경험은 한국, 중국, 일본의 것과 일치했다.(p43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7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p7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에서 주인공 '나'는 아버지가 준 오페라 입장권을 가지고 공연장에 간다. 오페라 극장에서 '나'는 <페드르 Phedre> 와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예술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부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 게르망트 쪽1> 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오페라 공연 후 주인공은 예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림] Phedre by Jean Racine(출처 : https://ticklemebrahms.wordpress.com/2013/06/01/phedre-by-jean-racine/)


 우리는 한 세계에서 느끼고 다른 세계에서는 생각하고 명명하며, 그리하여 이 두 세계 사이에 어떤 일치점을 설정할 수 있지만,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넘어서야 했던 거리감이자 균열이었다... 한 인간 또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과 아름다움의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는, 그 인간이나 작품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과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이나 찬미의 관념을 알아보지 못한다.(p8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이 느낀 거리감과 균열.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배역 자체에는 문학적 가치가 없었지만, 라 베르마는 이 배역에서도 페드르 역 못지않게 숭고했다. 나는 비극 배우에게서 작가의 작품이란 탁월한 연기 창조를 위해 그 자체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저 하나의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84)... 하나의 운(韻)을 듣고, 다시 말해 앞의 운과 비슷하면서 다른 뭔가가 앞의 운에 의해 유발되어 새로운 관념의 변주를 끼워 넣을 때, 우리는 사상과 운율이라는 두 체계가 포개지는 걸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이미 조직화된 복잡성, 아름다움의 첫 요소가 아닐까?(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주인공 '나'는 라 베르마의 연기를 통해 오페라에서 배우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라신(Jean Baptiste Racine, 1639 ~ 1699)의 비극 <페드르>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비극이지만, 관객은 배우의 해석과 표현에 따라 감동(感動)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인공이 오페라를 통해 느꼈던 감정, 그것은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1874 ~ 1940)의 <연극에 대해 О театре>에서 '연극 - 이것은 배우 예술이다.'에서 말한 '관객의 수동적 경험' 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관객은 오직 무대 곁에서 인지하고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배우들과 관객 사이는 한쪽은 단지 행동하고 한쪽은 단지 받아들이는, 서로에게 낯선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 버리는 경계가 나타난 것이다.(p87) <연극에 대해> 中


 메이예르홀트가 말한 간극은 '배우 - 관객'의 다른 역할에서 온다. 때문에, 배우의 세계와 관객의 세계가 다르다는 주장을 한다. 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나'는 연극에서 '배우 -> 관객'의 일방적 관계안에서 라 베르마의 연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와 '배우의 세계'가 다르다는 생각 대신, '배우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다르다는 다른 간극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가 '작품 = 질료(質料, hyle)'이며, '배우 = 형상(形相, eidos)'의 도식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찾는 것은 밑감(질료)의 원인이며, [이것은 꼴(형상)이다.] 이것 때문에 밑감은 어떤 (특정한) 것이 되고, 그리고 이것은 (그 사물의) 실체다. <형이상학 Metaphysica> (제7권, 1041b 8 ~ 10)(p35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는 <형이상학>을 통해 세계는 위계질서로 모습을 드러내며,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들은 비물질적인 실체들인 반면, 현실태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형상안에 많은 질료가 복합되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W.D 로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로 돌아와 주인공에 따르면, '작품'은 '질료'가 되고, 배우는 '형상'이 된다.  연극(오페라)에서  작품은 배우를 통해 관객들에게 나타나기에 질료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론과 주인공의 깨달음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의 깨달음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페드르>와 같은 비극(悲劇)관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시학 Peri poietik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철저하게 '모방(Mimesis)'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해당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제로 연기하기 때문에, 첫째로 볼거리가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노래와 조사(措辭)가 필요하다. 이 둘이 모방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바로 운율의 배열을 의미하며, 노래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하는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의 측면에서 특정한 성질을 지니기 마련이다.(6장 1449b 30 ~ 38)(p362)...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갖기 마련이며, 이 여섯 요소에 의해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 성격, 조사, 사상, 볼거리, 노래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둘은 모방 수단이고, 하나는 모방 양식이며, 셋은 모방 대상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6장 1450a 8 ~ 11)(p363) <시학>  中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짜임새(플롯 plot)이며, 이는 비극이 인간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공 '나'에게 중요한 요소는 형상으로 나타난 '배우'이며, 배우의 발성(發聲)과 음운(音韻)에서 감동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주인공 '나'에게 큰 감동을 준 라 베르마의 연기는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는 이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겨진다. 짜임새가 결국은 작가의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라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감동의 근원은 작가일 것이다. 그리고, '모방'을 제목으로 한 <미메시스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의 저자 에리히 아우어바흐 (Erich Auerbach, 1892 ~ 1957) 역시 <페드르>가 주는 감동의 근원을 작가 라신에게서 찾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이 대상으로 한 소수 계층의 성격을 통하여 특히 그 사회적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바로크의 고양된 형식과 그것이 어떻게 예술 취미의 이성적인 개념과 결합되었던가를 이해하고 또는 적어도 그것을 공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비극의 인물을 치켜올려 보는 바로크 형식이 그 대표적 예가 되는 바, 비극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극단적인 분리를 설명할 수 있다.(p524)... 라신의 비극에 그려 있는 사랑의 정열은 관객을 압도한다. 결과가 비극적이라고 해도 비극에 그려 있는 거대하고 장엄한 운명을 찬양하고 모방하라고 관객을 유도한다. 이것은 특히 <페드르>의 경우에 그렇다. 페드르는 신의 은총을 거부했을 뿐 기독교적인 면을 가진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영향은 전혀 기독교적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p525) <미메시스> 中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에서 주인공 '나'는 '분리된 세계'의 간극 측면에서는 메이예르홀트와 의견을 달리 하며, '감동의 근원' 측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우어바흐의 입장과는 다르기에 독창적인 예술관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에서 주인공의 예술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이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두 세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반의 '시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들렌 과자 등의 어떤 기제(機制)를 통해서 현재와 구별되는 인식되지 않는 '잃어버린 시간'의 이야기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배우로 표현되는 '기억된 이미지'인지, 아니면, 나타나지 않은 숨겨진 '실체의 이미지'인지. 작품 전체를 통해 우리가 고민해야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안의 <페드르> 공연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전체의 축소판으로 생각된다.


 추억은, 내가 불완전하게만 소유하는 추억은 이따금 내게서 빠져나갔다.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처럼 내 마음속에 몇 시간 떠돌다가, 그 이미지가 나타나기 전에 품었던 낭만적인 관념과 더불어 점차 하나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연상 작용으로 발전했으며, 따라서 추억이 가장 잘 떠오르는 바로 이런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그 추억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추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p98)... 추억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추억을 간직하는 행운을 가졌던 이런 짧은 시간 동안 추억은 정말로 매혹적이었으리라. 그러다 점점 이 관념이 추억을 보다 결정적인 형태로 고정하면서 추억은 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추억 자체는 보다 흐릿해졋다. 나는 더 이상 추억을 되찾을 수 없었다.(p9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우리는 한 존재에 대한 감정에, 그 존재가 일깨우지만 그 존재와는 무관한, 이미 예전에 다른 여인에 대해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특별한 감정을 뭔가 우리 마음속에서 보다 일반적인 진리에 이르게 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해 인류 전체에 공통된 보편적 감정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 보편적 감정과 더불어 개인과 개인이 우리에게 야기하는 아픔은 과거의 우리와 소통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p19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中


 그리고, 이러한 배경 위에서 주인공의 게르망트 부인에 대한 사랑, 독백 등의 의미가 작가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읽은 페이지가 이제는 제법 많아졌지만, 그 이상으로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짙은 어둠 속을 헤매는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다음 권으로 넘어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8-0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 이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루트비히 폰 미제스 외 지음, 전용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약에 화폐의 절대량이 감소한다면 화폐 수요가 줄어들 것이고, 가격들은 하락할 것이 틀림없으며, 심각한 공황이 올 것이라는 것이 진실이다.(p50)

은행의 예금 축소는 경제 상황을 뒤집고 축소와 버스트가 붐을 뒤따른다. 은행들이 신용을 줄이면서 재계는 빚을 상환하고 신용을 줄이라는 압박이 더해짐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다. 은행화폐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그다음에는 재화들의 가격이 일반적으로 떨어진다. 화폐 공급과 소득이 떨어지고 국내 재화들의 가격이 폭락함에 따라 재화는 외국 제품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이게 되고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면서 국제수지가 적자에서 흑자로 바뀐다. 금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증가하고 있는 금 베이스 위에 있는 은행화폐는 줄어들면서 은행의 상태가 훨씬 더 건전해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경기변동에서 공황 단계라는 뜻이다.(p85)

미제스는 경기변동의 원인으로 정부와 중앙은행의 간섭에 의해 추진된 인플레이션적 은행 신용창조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p96)... 따라서 미제스의 공황 분석에 따르면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p97)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9-08-05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제스의 인플레이션 분석에 핵심 주체가 빠진 것 같습니다. ‘기업’... 정부와 중앙은행이 그런 일을 하는 궁극적 주체 말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5 19:13   좋아요 1 | URL
오스트리아 학파 사상이 학자별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모든 화폐정책은 완벽하게 무력하고 통화공급은 일플레이션만 불러올 뿐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의견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미제스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학파가 정부의 무개입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시장의 자율조정을 강조하는 만큼, 굳이 ‘기업‘을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미제스 때부터 이미 ‘기업‘을 ‘그림자 정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05 19:48   좋아요 1 | URL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가 아닌 ‘기업 때문에 정부는 하지 않을 수 없다’로 미제스는 글을 썼어야 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8-05 19:54   좋아요 1 | URL
만약 그렇게 했다면, 신자유주의가 아마도 이토록 세를 불리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8-15 14:22   좋아요 1 | URL
아, 제가 마제스 이론을 잘못 알았네요. 미제스의 타겟은 정부지 결코 기업이 아니었네요. 미제스 이론에서 어찌보면 기업도 피해자네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8-15 18:07   좋아요 0 | URL
미제스가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미제스의 이론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