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 탐정과 명탐정 코난 그리고 소년탐정 김전일.

셜록 홈즈의 영향을 깊게 받은 세 작품들은 각기 다른 직품의 특성을 갖고 자신들만의 팬층을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사건의 대부분이 살인사건인 김전일의 팬층은 상대적으로 남성팬이 많은 반면, 인물 구도상 ‘도일-미란-코난‘의 러브 라인이 깔려 있는 코난은 여성 팬층이 많아 보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르게 이들의 팬층을 분류할 수도 있겠지요.

반면, 엉덩이 탐정의 팬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어린이층입니다. 똥, 방구, 트름에 열광하는 아이들. 커다란 엉덩이를 얼굴로 하고 위기의 순간에 독한 냄새를 풍기며 적을 제압하는 주인공 엉덩이 탐정에게 아이들은 열광합니다.

똥은 배설물입니다. 심한 냄새를 풍기며 불쾌한 느낌을 주에 어른들은 이를 대변이나 볼 일 등으로 돌려서 표현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심한 냄새가 나지만 이를 혐오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받아들입니다. 똥을 보고 피하더라도 그 모습에서조차 장난기가 묻어나는 것을 보면 어른들보다 아이들 마음이 더 열려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엉덩이 탐정을 좋이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다름을 호기심과 재미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발견합니다. 엉덩이 탐정 시리즈는 이러한 동심을 잘 파악했기에 꾸준한 인기를 가져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덭붙여 권정생 선생님의 「강아지똥」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나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또다른 매력을 갖는다 생각됩니다.

나와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아이들의 열린 마음을 배워야할 때가 아닌가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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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 세계의 고전 사상 7-002 문지 스펙트럼 2
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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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가 보기에 위대한 배우란 무엇보다 자기 감정에서 벗어나 ‘감각의 지속적인 관찰자‘가 되고, 역사나 상상력으로부터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그것을 제대로 모방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천재적인 자연의 모방자들은 ˝아름다운 상상력과 위대한 판단력과 섬세한 촉각과 매우 확실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덜 감정적인 사람들˝이라고 못박는다.(p138) - 옮긴이 해설-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1713 ~ 1784)는 <배우에 관한 역설 Paradoxe sur le comedien>에서 위대한 배우를 감정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모방하는 이로 정의한다. 디드로의 정의에 따르면 배우는 작품의 캐릭터(character)를 해석하고, 이의 이데아(idea)를 만들어 이성(reason)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무당(巫堂, shaman)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무당이 저승과 이승의 중개자, 신과의 교섭자로서 자신을 비우고 신(神)을 자신의 몸에 태우는 반면, 배우는 자신의 주관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분석하고 관찰한다. 무당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저승과 이승, 신과 인간을 매개한다면, 디드로의 배우는 의식의 영역에서 캐릭터와 관객을 중개한다는 점에서 이들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감성적인 배우는 자신의 역할 속에서 어떤 소외의 순간들을 한두 번은 겪을 겁니다. 그 순간들이 아름다울수록 더 강력하게, 나머지 순간들과 불협화음을 이루지요.(p113)... 감성적인 것과 지각한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는 영혼에 속하는 일이고, 다른 것은 판단에 속하는 일이거든요...어떤 위대한 역할의 모든 범위를 포용하는 것, 거기서 명암과 부드러움과 허약함을 조정하는 것, 고요한 곳과 격발된 곳에서 똑같이 보이고, 세부 속에서 다양하고, 전체 속에서 하나되고 조화롭고, 시인의 재담과 변덕들을 구원하는 데까지 갈 만한 낭독으로 지지되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은 차가운 머리와 깊은 판단력과 섬세한 취향과 각고의 연구와 오랜 경험과 보기 드문 기억력의 작업인 것입니다.(p117)

감정을 느끼지 않는 조정자로서의 배우. 디드로가 말한 이러하 덕목을 갖춘 배우가 정말 위대한 배우일까. 계몽시대에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절대 믿음 속에 태어난 이러한 예술관이 오늘날에도 유효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배우에 관한 역설>에서는 감정과 이성을 분리해서 어느 하나만을 취하는 것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길 때는 그들이 격분했을 때가 아니라 그 격분을 잘 연기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감정들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어떤 때는 화내는 체하고, 어떤 때는 두려운 체하며, 동정하는 척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감정들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 입니다.(p131)

그렇지만, 이들을 서로 분리할 수 있을까. 냉철한 이성으로 작품 전체를 내려다보고, 뜨거운 감성으로 순간을 연기해서 관객들을 몰입시켤 수 있어야 진정 위대한 배우라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에 관한 역설>에 나타난 이성의 강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이성의 시대인 계몽시대(Age of Enlightenment) 지식인들의 예술관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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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 경제학고전선, 개역판
존 메이나드 케인즈 지음, 조순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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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의 양은 총수요함수(總需要函數)와 총공급함수(總供給函數)의 교차점에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기업의 예상이윤이 극대화되는 것은 바로 이 교차점에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총수요함수가 총공급함수와 교차하는 점에 있어서의 D의 값을 유효수요(有效需要 : effective demand)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이 고용의 일반이론(一般理論 : general Theory)의 요지를 이루는 것이다.(p31)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에서 경제가 완전고용이 아닌 과소고용(過少雇傭)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Y(총소득) =C(총소비)+ I(총투자)

고전경제학(古典經濟學, classical economics)에서 (S(저축)과 I(투자)가 이자율(r)의 함수로 파악하는 반면, 케인즈는 소비와 투자를 인간의 심리(心理)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파악한다. 투자는 자본의 한계효율 이나 기업가의 장래 수익에 대한 기업가의 기대가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통해 결정되고 있으며, 소비 역시 소비성향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케인즈 주장의 요지다.

일반적 경제상황이 일정한 경우, 임금단위로 측정된 소비지출이 주로 산출량과 고용량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그 밖의 모든 요인을 ‘소비성향‘이라는 하나의 합성함수(合成函數 ; portmanteau function)로 총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된다. 임금단위로 측정된 총소득액(總所得額)이야말로 원칙적으로 총수요함수에서 소비부분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p113)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그렇다면, 케인즈에게 소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계소비성향(mpc : 소비의 증가분에 대한 소비의 증가분)이 클수록 투자의 승수효과(乘數效果)가 크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재정지출(財政支出)로 완전고용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서이다.

우리는 한계소비성향(限界消費性向)이 크면 클수록 승수(乘數)도 크고, 따라서 투자의 일정한 변화에 대응하는 고용(雇用)의 교란(攪亂) 또한 크다는 것을 보았다.(p146)... 그러나 한계(限界)소비성향의 효과와 평균(平均) 소비성향의 효과를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높은 한계소비성향은 투자에서의 일정한 백분율(百分率) 상의 변화로부터 더욱 큰 비례적 효과를 가지고 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평균소비성향도 또한 높다면 그 절대적인 효과는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p147)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다만, 케인즈는 한계소비성향과 평균소비성향의 구분을 통해 과소비(過消費)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다. 완전고용수준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소비가 감소하는 일반적인 경향 대신 소득의 증가분보다 높은 소비증가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험적(先驗的)으로 큰 확신을 가지고 준거(準據)로 삼을 만한 기본적인 심리범칙(心理法則)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통상적으로 그리고 평균적으로, 그들의 소득(所得)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消費)를 증가시키는 성향을 나타내되, 소비의 증가는 소득의 증가에 미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p113)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이러한 이유로 케인즈 경제학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소비는 미덕(美德)으로, 저축은 악덕(惡德)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결국, 케인즈 경제학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과소고용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완전고용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소비가 더 많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 정부 재정지출이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질 것이며 기업가들의 낙관적인 전망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업가들의 투자 결정 결과 완전고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란 기업가들이 그들이 고용하기를 결정하는 경상고용량(經常雇用量)으로부터 획득하기를 기대하는 총소득(總所得)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63)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소비성향과 투자유인의 상호관계를 조정하고자 하는 일에 관련되는 정부 기능의 확대는 19세기의 정치평론가나 현대 미국의 금융업자에게는 개인주의에 대한 가공할 침해로 보일지 모르나, 나는 개인의 창의(創意)가 성공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것을 옹호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만일 유효수요(有效需要)가 부족하면, 자원을 낭비한다는 공공(公共)의 비방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이 자원들을 활용하려고 하는 개인 사업가는 그의 진로를 가로막는 불리한 조건하에서 활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유효수요가 충분하다면, 보통의 기술이나 보통의 행운으로도 충분하다.(p458)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

이러한 이유에서 케인즈는 유효수요의 확대를 위한 재정지출 확대, 소비증진을 외쳤고, 이것은 케인즈 경제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 영향으로 경기가 얼어붙고 있습니다. 특히 졸업시즌을 맞았지만, 졸업식과 입학식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큰 힘은 아니지만, 화훼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어려움을 덜고자 꽃집에 들러 꽃바구니를 샀습니다.

˝무슨 좋은 날이 있으신가봐요?˝ 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경기가 어려워서요...˝
라고 말하다보니, 결혼기념일이 며칠 안 남았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가족여행을 잡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꽃바구니선물을 미리 준비한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덕분에, 소 뒷걸음치다가 쥐잡은 격으로 좋은 남편이 되었습니다.

지나친 소비는 분명 문제겠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유효수요를 증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케인즈의 주장을 되새기며, 이번 리뷰를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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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7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7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02-17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겨울호랑이님~~
멋져요^^
저도 내일 꽃한다발 사야겠어요^^

겨울호랑이 2020-02-17 22: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꽃을 보고 좋아하는 아내와 딸아이를 보니 꼭 불경기 때문이 아니라 자주 꽃을 든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프레이야 2020-02-18 0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좋은날엔 역시 꽃이죠^^

겨울호랑이 2020-02-18 08:48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꽃이 정답입니다 ㅋ 프레이야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나와같다면 2020-02-20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은 공동체 사회가 선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으신 분 같아요.
그래서 그 따뜻함이 전해져요.

겨울호랑이 2020-02-20 05:08   좋아요 1 | URL
^^:) 저 또한 나와같다면님과 마찬가지로 서로 조금만 배려하고 챙기면 훨씬 더 사람살만한 곳이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다석사상전집 5
박영호 지음 / 두레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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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나(自我)가 죽은 것처럼 없어진 이에게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얼생명이 니르바나님(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석가/예수에게 나타났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니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영원한 생명인 얼나(如來)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 길을 가는 사람처럼 꾸준히 전진해야 한다. 먼 길을 언제 다 갈고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자꾸자꾸 계속해서 가면 가게 된다. 가고 나면 그저 온 것 같다. 성불(成佛)도 마찬가지다. 자꾸 자꾸 참선을 하면 언젠지 모르게 번뇌를 벗어나 진리의 니르바나님에게 닿는다.(p170) <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中


 진흙(土)으로 빚어지고 불(火)로 구워져 만들어진 도자기(陶瓷器). 불에 구워진 자기는 깨진 후에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흙에서 태어났지만 불흙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진리의 빛을 만난 이도 이와 같은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석가붓다는 나고 죽는 상대세계를 차안(此岸, 예)이라고 하고,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절대세계를 피안(彼岸,계)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차안인 예서 피안인 계로 건너가자는 것이다. 그 피안인 계가 니르바나님의 나라요, 하느님의 나라이다.(p171)... 피안인 절대세계에서 얼생명이 오는 것이다. 도피안(度彼岸)은 삶의 중심을 제나에서 얼나(法我)로 옮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p172) <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中


  그리스 신화에서 사자(死者)가 건너야 하는 다섯 강 -  아케론(Acheron 슬픔/비통), 코키투스(Cocytus 탄식/비탄), 플레게톤(Phlegethon 불), 레테(Lethe 망각), 스틱스(Styx 증오) -이 인생의 고통을 의미한다면,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이를 건너 피안에 이르러 새롭게 태어난다는 <반야심경 般若心經>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揭諦揭諦 波羅揭諦 바라승아제 波羅僧揭諦 모지사바하 苦提娑婆訶

gate gate paragate parasam gate bodhi svaha


가자 가자 거기(니르바나님께)로 가자. 모두 가자 깨달음을 이루리.

솟나 솟나 우로 솟나 함께 얼나로 솟나리.(p366) <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中


 여기서 간다는 것은 시간, 공간적인 옮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바뀜, 주체의 바뀜을 말하는 것이다. 제나(自我) 중심의 생각에서 얼나(靈我) 중심의 생각으로 바뀌는 것이다.(p367) <반야심경 : 다석사상으로 본 불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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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 -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인문과 지혜 4
마르크 오제, 이윤영 외 옮김 / 아카넷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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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가설은 초근대성이 비장소들을 생산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인류학적인 장소가 아니며 보들레르식 근대성과는 대조적으로 예전의 장소들을 통합하지 않는 공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장소'로 목록화되고 분류되고 승격된 이 예전의 장소들은 초근대성 속에서 제한적이고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p98)... 비장소의 공간은 독자적 정체성도 관계도 아닌, 고독과 유사성을 창조한다. 비장소의 공간은 역사에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성과 긴급성이 비장소의 공간을 지배한다.(p125)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Marc Auge, 1935 ~ )의 <비장소 Non-Lieux>에서 초근대성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비(非)장소'로 말하고 근대의 시간, 공간과는 다른 또다른 세계를 규정한다. 주변과 통합되지 않으며, 과거와 연관되지 않는 시공간(Space-Time)인 비장소. 비장소의 세계는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의 세계처럼 기존 민족학의 틀로는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근대시대의 시공간의 왜곡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이를 '과잉 surabondance' 또는 '과도함'에서 찾는다.


 초근대성의 관점에서 시간을 사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동시대의 세계의 사건의 과잉 때문이지 오래전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진보의 이념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임박한 역사라는 테마, 바로 발뒤꿈치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역사라는 테마는, 역사가 의미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테마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현재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요구로 인해 우리가 가까운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p44) <비장소> 中


 초근대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과도함의 두 번째 형상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다. 공간의 과도함은 우선, 여기서 약간은 역설적으로, 지구가 축소되었다는 사실의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주 공간에 내딛은 인류의 첫 걸음 때문에 우리의 공간은 극도로 작은 점으로 축소되었고, 위성 사진은 우리의 공간에 정확한 척도를 제공해준다. 이와 동시에 세계가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p44) <비장소> 中


 강력한 중력이 블랙홀(black hole)을 만들듯이, 지나친 과잉으로 우리의 시공간은 극도로 압축되었다. 강력한 중력이 시공간의 왜곡을 불러오듯, 초근대사회에서 표준화된 인간을 가정한 연구 방법으로는 더이상 분석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초근대 시대의 개인은 모두가 특수한 개인이다.


 민족학은 오랫동안 의미 있는 공간들, 스스로를 온전한 전체로 생각하는 문화에 동일시된 사회들, 즉 의미의 세계를, 세계 속에서 분리시켜 파악하려고 전념해 왔다. 이 의미의 세계 안에서 그 표현에 불과한 개인과 집단들은 동일한 기준, 동일한 가치, 동일한 해석과정에 의해 규정된다.(p47)... 마르셀 모스 Marcel Mausss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족학적 연구에 정당화될 수 있는 개인성의 정의에 중대한 한계를 설정했다. 그는 사실상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인간이 근대의 엘리트처럼 분할되고 억제되고 통제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 규정될 수 있는 평범한 인간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개인성은 한 문화를 대표하는 개인성, 전형적 개인성이다.(p31)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에게 비장소는 과잉의 공간이며, 단절의 공간이다. 근대의 공간이 과거의 역사인 시간이 녹아져 있는 곳이라면, 비장소는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는 선(線)이다. 수많은 선들이 우리 공간을 갈라놓으며 개인은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이용하며 다른 장소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비장소에서 개인은 디지털(digital) 정보로 취급되며, 익명의 존재로 전락된다. 이러한 사실은 디지털 정보 자체가 2진법 체계의 단속적 정보라는 사실과 함께 불연속의 연장으로 다가온다.


[사진] Non-Places(출처 : http://www.sarahpetersphotography.com/non-places)


 공간적 과잉은 규모의 변화로, 이미지화된 가상적인 준거 reference의 증가로, 이동수단의 괄목할 만한 가속화로 표현된다. 이 과잉은 구체적으로는 엄청난 물리적 변화로 귀결된다. 도시 집중, 주민의 집단 이주, 우리가 '비장소'라고 부르게 될 것의 증가가 그것이다. 비장소는, 마르셀 모스 및 온갖 민족학적 전통이 시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문화 개념에 결부시킨 '장소'라는 사회학적 개념과 대립한다. 비장소는 승객 및 재화의 가속화된 순환에 필요한 설비일 뿐만 아니라 교통수단 그 자체, 또는 거대한 쇼핑센터, 그리고 지구상의 난민을 몰아넣은 임시 난민 수용소이기도 하다.(p48)...앙드레 말로 이후 우리가 사는 도시는 박물관으로 바뀌고 있지만, 우회로, 고속도로, 고속철도, 초고속철도는 이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다.(p93) <비장소> 中 <비장소> 中


 그렇지만, 비장소와 장소의 관계는 단절로 그치지 않는다. 비장소는 장소를 나누지만 또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비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은 장소에서도 이루어지며, 장소에서 만들어진 시간이 우리에게 역사(歷史)로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큰 틀에서 익명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장소의 세계는 비장소의 개인의 방향을 정한다. 이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이루는 서로 다른 부분인 것이다. 마치 태극(太極)을 음(陰)과 양(陽)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장소와 공간, 장소와 비장소는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에게 침투한다. 비장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다.(p129)... 말의 씀씀이는 핵심적인데,그것이 습관들의 씨실을 짜고 시선을 가르치며 경관에 관한 정보를 주기에 그렇다.(p130)... 비장소를 경유하는 말과 이미지들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상생활의 일부를 구축해가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장소들에 다시 뿌리 내린다.(p131)...  장소와 비장소는 명확히 잡히지 않는 양극성에 가깝다. 전자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후자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들은 정체성과 관계의 뒤얽힌 게임이 끊임없이 다시 기입되는 양피지들이다.(p98) <비장소> 中


 우리는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에서 외롭고 단절된 개인과 단절된 사회 공간인 비장소를 만나게 된다. 현대사회의 과잉이 가져온 시간과 공간의 과잉.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지금 이순간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단절된 시간과 비장소. 우리는 <비장소>를 통해 우리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외로움을 넘어선 연결(connection)의 희망도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과잉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고독.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 이것이 <비장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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