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황금시대 - 인간 정신의 위대한 경지를 보여준 禪의 역사와 그 정신
존 C. H. 우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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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믿는 종교(宗敎)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구도자(求道者)들이 자신의 삶을 바쳐 진리나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이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믿지 않는 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교리(敎理) 또는 가르침을 이해하려는 노력 외에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信仰) 문제가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가톨릭)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불교(佛敎) 특히, 선불교(禪佛敎)가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이 어렵게 느껴진다.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세계관(世界觀)과 개인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함이 불교 이해 어려움의 원인으로 다가온다. 그런 면에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공사를 역임하기도 한 존 C.H우(John C.H.Wu)가 저술한 <선 禪의 황금시대>는 나와 같이 선(禪)에 대해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을 선의 세계로 편안하게 안내해주는 친절한 책이라 여겨진다.


  육조 六祖 혜능 慧能(638 ~ 713)부터 법안 法眼 문익 文益(885 ~ 958)까지 선(禪)의 불꽃을 이은 이들과 이들에 얽힌 짧은 예화를 저자 자신과 불교 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 그리고 기독교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 ~ 1968)의 해설과 함께 소개된다. 무엇보다 <선의 황금시대>의 큰 장점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는 토머스 머튼이 책을 소개하며 쓴 <기독교인이 바라보는 선> 속에 잘 드러난다.


 이 간단하고 보잘 것 없는 글이 기독교의 경험과 선의 경험을 '비교하려고'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언젠가는 둘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종교적 희망을 피력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글을 읽고 기독교인이나 서구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펼칠 수 있다면, 잠시라도 판단을 내리려는 생각을 멈추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선이란 난해하고 괴상한 것이라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p393) 


 나 역시 기독교의 경험을 통해 선의 경험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절 속에서 성경의 구절을 느끼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몇 구절을 옮겨본다.


1. 대승의 그릇과 악마의 유혹


 대승의 그릇


 황벽 黃檗 희운 希運( ? ~ 850)은 어린 나이에 중이 되었다. 한번은 천태산 天台山을 여행하다가 기이한 중과 마주쳤다. 그 중은 마치 황벽의 오랜 친구라도 되는 양 말을 트고 농담을 건넸다. 하루는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다가 불어난 개천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은 황벽에게 함께 건너가자고 했다. 황벽은 건너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노형! 건너가고 싶다면 혼자서 가 보시오." 중은 딱딱한 땅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리고 황벽에게 말했다. "따라오라니까, 따라와!" 황벽이 말했다. "빌어먹을, 이 혼자서 다 해먹는 놈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놈의 정강이를 분질러 버렸을 텐데." 그 중은 이런 반응에 감동을 받은 듯 이렇게 말했다. "자네야말로 진정한 대승의 그릇이네! 나는 자네 상대가 아니야."(p134)


 악마의 유혹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 : 9 ~ 13)


2. 손님의 대접


 손님의 대접


 시중을 드는 중이 스승(조주)에게 물었다. "세자가 왔을 때는 방석에서 내려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장군에 불과한데도 당장에 내려와 그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예법이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너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 제일 가는 손님이 오면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맞이한다. 둘째 가는 손님이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제일 하찮은 손님이 오면 문 앞까지 나가서 맞이할 게야."(p156)


첫째가 꼴찌가 되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


 저자는 서문에서 머튼 신부의 소개글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으며, 머튼 신부는 소개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 외에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음도 밝히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모두 동등하게 충분히 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말로 이루어진 교의와 언어적 편견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순수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이다.(p376)... 주관적인 신비(혹은 형이상학적) 체험과 객관적 교리는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기독교와 선에서는 이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 보거나 높은 위치로 보거나 늘 우선했다. 선에서는 체험이 항상 우월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도 그렇고 중요성에서도 그렇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에, 어떤 계시에 대한 관념이든 모두 폐기하고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서는 대단히 독립적인 견해를 취하는 선은, 존재에 대한 자연적인 존재론적 입장을 관철하는 길을 찾기 때문이다.(p377)


 기독교 교리가 top-down 방식이라면, 불교는 bottom-up 방식으로 수행을 한다고 느껴지는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예화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가르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러 종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봄꽃 (출처 : 한국관광공사)


  봄이다. 얼어던 땅이 풀리면서 싹이 올라오고 있고, 머지않아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서로 다른 색깔의 많은 꽃들이 있지만, 봄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 하나의 꽃때문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생명력 때문이리라. <선 禪의 황금시대>를 통해 선불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알지 못했던 다른 아름다운 깨달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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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8-03-13 0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이 읽으시는 책들을 보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고 미뤄둔 책들을 쭉쭉, 쉽게 읽어내신다니까요. 그 사람이 선택하는 책을 보면 성격과 인격이 묻어난다는 생각도 들어요.

겨울호랑이 2018-03-13 07: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amadhi님^^:) 제가 모르는게 많아 밀린 숙제하듯 책을 읽고 있는 요즘입니다. 들려주신 격려 말씀에 큰 힘 얻게 됩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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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 ~ 1970)의 종교(宗敎)관련 에세이(essay)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는 종교에 대한 러셀의 생각이 담긴 여러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목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대한 주제와 연관된 글 두편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그림] 버트런트 러셀( 출처: http://bonlivre.tistory.com/474)


1.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The Existence of God


 우리는 러셀과 F.C코플스턴(Frederick Charles Copleston, 1907 ~ 1994) 예수회 신부간 이루어진 토론을 정리한 이 내용을 통해 기독교의 신 존재(存在)에 대한 한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는 많은 존재(存在)들이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갖지(內在) 못하여, 존재 이유를 밖에서 찾게 되고 이러한 존재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다.


'코플스턴 :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 속에 지니지 못한 존재들이 적어도 일부는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둘째로, 세상은 실제의 혹은 상상의 총체이거나 개별 대상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데 그 어느 것도 오로지 자신의 존재 이유만 지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이나 사건들이 존재하는 이상, 어떤 경험의 대상도 자체속에 존재 이유를 가지지 못하는 이상, 그 이유는 대상들의 총체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반드시 실재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p247)


코플스턴 신부의 이런 존재이유의 외재성(外在性)에 대해 러셀은 '실체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석적 명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분석적 명제에서 '주어(主語)'가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실재의 의미를 '술어(述語)'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의 기술 이론 (description theory)에서 지적한  '황금산 문제' 또는 '웨이틀리의 문제'가 여기서 다시 언급된다.


'러셀 : 신부님의 이론에 답하는 가장 적합한 출발점은 필연적 존재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필연"이란 말은 명제에 붙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분석 명제 같은 것들 다시 말해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그런 것에만 붙여야겠지요. 만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자기 모순이 되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나로서도 필연적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수 없겠지요. (p248)... 신부님이 지금까지 하신 얘기는, 제가 보기엔 우리를 존재론적 증명으로 되돌려 놓는 것 같습니다. "실재를 포함하는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그의 실재는 분석적이다."고 하는 증명 말입니다. 나로서는 그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실재의 의미가 무엇이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여기에 대해 나는, 이름 붙여진 주사(主辭: subject)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으며 서술된 주사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상 그 실재가 술어(術語 : predicate)가 아닌 것은 너무도 명백합니다.'(p251)


 기술이론의 내용을 신(하나님)의 실재 문제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의 주어(명사)로 놓았을 때 '세상의 원인'과 '실재'는 각각 이를 설명하는 술어(동사/형용사)에 해당하고, 이들 술부들은 각각 주어를 설명할 뿐이지 이들간 관계를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세상의 원인은 실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분명 의미가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신부님이 "그렇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인이다."고 말한다면 그 경우 당신은 하나님을 고유 명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것은 의미를 가지는 진술이 아닐 것이며,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혹은 저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석 명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p252)


 러셀의 이러한 내용에 대해 코플스턴 신부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토론은 이후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코플스턴 신부의 주장 속에는 기독교의 원인론과 목적론에 대한 주장이 담겨 있는데 러셀은 이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첫 단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자세히 담겨 있다.


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 담긴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


 러셀은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입각될 수 있다는 교리에 물음을 던진다. 코플스턴 신부와의 대담은 이러한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많은 분량을 기독교의 신 존재에 관한 주요 원인인 제1원인론, 자연 법칙론, 목적론, 신성을 위한 도덕론, 불의 치유론 등에 대해 물음을 제시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 ~ 1274)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Schola 哲學)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가. '제1원인론'에 대한 물음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은 제1원인론일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의 원인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는가?] 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p22)


나. '자연 법칙론'에 대한 물음


'"그러나 자연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순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러한 자연 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하나님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도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p25)


다. '목적론'에 대한 물음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p28)


라. '신성을 위한 도덕론'에 대한 물음


'칸트의 도덕론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에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거라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선(善)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p29)


마. '불의 치유론'에 대한 물음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不義)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p30)


3. 종교란 무엇인가와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시한 러셀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두려움 때문이고, 이러한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파생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두려움, 큰 공포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현상을 통해 확인한다.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함이 나온다면, 종교의 기반을 두려움이라고 했을 때, 종교가 잔인함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 된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p40)


 러셀은 이러한 종교의 문제에서 벗어나 결국 우리가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을 통해  훌륭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p41)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기된 신 존재에 대한 러셀의 물음은 과학적이고 치밀하다. 러셀의 물음에 대해 대답이 명확하지 못한 이유는 '신 존재 증명'이 명사적인 의미의 신(神)을 지시하는 선에서 멈췄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기존 교단의 논리에 대해 철학적 비판을 가한 후 러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이 지향해야할 삶을 제시한다.


"The good life is one inspired by love and guided by knowledge." - 러셀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제시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훌륭한 삶을 지향하는 러셀의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통찰을 제시한다. 종교가 가져온 폐해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찾자는 러셀의 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러셀의 논리를 우리는 비판없이 수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러셀은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고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종교의 모든 폐해가 서양의 전통이 아니라, 동양에서 흘러든 이른바 적폐(積弊)로 규정하는 러셀의 글 속에서 '기독교의 폐해'를 동양으로 넘기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626)이래 서양에서 강조된 과학적 탐구자세를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겨난 기독교가 유럽으로 전파된 이후 많은 공과(功過)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중세(中世) 천 년을 지내면서 신(God)을 강조한 기독교는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유럽 전통(傳統)의 주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관념을 동양적인 사상으로만 몰아갈 수 있을까. 또한, 러셀이 말하는 훌륭한 삶에서 '사랑'이라는 개념 역시 세계 문명에 공통된 황금률(黃金律)에 기반했다는 사실과 함께 서양의 많은 '지식'이 '신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中世) 1,000년의 시간적 영향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지향하는 '훌륭한 삶'이 과연 서구의 과학적인 전통만의 산물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러한 러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선 러셀의 통찰과 그가 지적한 문제가 현재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유익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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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23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어려워 보이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4-23 17:50   좋아요 0 | URL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전체 15편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는데,2개 장(1장과 13장)을 제외한 다른 13개 장의 내용은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1장과 13장의 2개 장은 ‘존재론‘, ‘인식론‘ 관련한 내용이라 정리가 필요할 거 같아 이번 리뷰를 썼어요..^^; 주제는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다른 장을 통해서도 종교에 관한 러셀의 생각을 충분히 맛보실 수 있을 것 같네요....

AgalmA 2017-04-24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양 탓으로 돌려 버리다니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로 빠지는 것처럼 황당하네요 ㄷㄷ

겨울호랑이 2017-04-24 16:35   좋아요 1 | URL
^^: 그러게요. 러셀 형님을 그리 안 봤는데, ‘저엉말~ 실망입니다.‘ ㅋㅋ
 
바가바드 기타 - 함석헌저작집 28 함석헌 저작집 28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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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는  성스러운 신에 대한 기타(歌頌(가송))라는 뜻이며, 기원전 4∼2·3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에 대한 신애(信愛)의 실천은 카스트나 남녀의 구별을 초월하여 모두 최고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정통적 브라만교 사상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열렬한 신애(信愛)의 정은 사상적 입장의 차이를 초월하여 브라만교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 위키백과)


<바가바드 기타>의 주요 화자(話者)는 '아르주나'와 '크리슈나'다. 친척간의 다툼은 큰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를 괴로워하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 Vishnu의 화신)은 해탈을 통해 진정한 답을 찾도록 이끌어준다. 크리슈나는 지식의 최고의 경지인 브라만에 이르는 길을 아르주나에게 알려주고,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아르주나는 각성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근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가에 힘써 브라만에 이르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5/Krishna_shows_Arjuna_his_universal_form_%28bazaar_art_by_C._Konddiah_Raja%2C_c.1950%27s.jpg)


1. 요가에 힘써야 하는 이유


제2장 상캬 요가


27. 난 자는 반드시 죽는 것이요,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마라.

40. 여기는 힘써서 헛된 법이 없고 잘못에 빠짐도 없다. 이 법(다르마)을 조금 지킴으로써만도 너를 큰 두려움에서 건져줄 것이다.

48. 부의 정복자야, 너는 집착을 내버리고, 요가에 굳게 머물러 서서 되고 안 되고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평등으로 보는 마음을 요가라 하느니라.

50. 이성의 요가를 닦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도 능히 선행과 악행을 다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일어나 요가에 힘을 쓰라. 요가는 행동의 훈련이다.


2. 온전한 요가


'만일 인생의 목적은 알면서도 행동이 결과에 집착하고 있으면, 그는 카르마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크리슈나인 것은 알면서도 크리슈나를 깨닫기 위해서 하는 명상에만 빠져 있다면, 그는 즈나나 요가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알고 온전히 크리슈나 의식과 헌신하는 믿음에서 크리슈나를 찾는다면, 그는 바로 박티 요가 곧 부디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요가다.'(p314)


3. 브라만에 이르는 길 : 지식의 최고의 경지


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50. 쿤티의 아들아, 완선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니라.

51.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52.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여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이욕(離慾)에 의지하며,

53.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54. 브라만과 하나로 되어 마음이 안정에 든 사람은 근심도 바람도 없고, 일체 만물을 평등으로 보며, 나에 대한 최고의 믿음에 이른다.

55. 정성된 믿음에 의하여 그는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크며, 내가 정말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참으로 알게 되면 그러면 곧바로 내게로 돌아온다.

56. 언제나 온가지 행작을 하면서도 그는 나를 의지하고 내 은혜에 의하여 영원불멸의 경지에 들어갈 것이다.

57. 마음으로 일체 행작을 내게 맡기고, 나를 최고의 돌아갈 곳으로 알고, 이성의 요가에 의지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내게 두어라.

58. 생각을 내게 두면, 나의 은혜에 의하여 일체의 고난을 초월할 것이요, 만일 네 아집을 가지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는 멸망할 것이니라.

63. 이처럼 모든 비밀 중의 비밀인 지혜를 나는 너에게 말했으니, 깊이깊이 생각한 후 네 하고 싶은 대로 하여라.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의 경전(經典)이다. 한 문장도 수 많은 해석이 가능하기에 책이 주는 의미는 개인에 따라 매우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교가 기독교(가톨릭)이고, 민족으로는 한(韓)민족이기에 이러한  틀(frame) 속에서 <바가바드 기타>를 접하게 되었다. 함석헌 역의 <바가바드 기타>에는 다른 고전을 활용한 풍부한 구절 인용이 있지만, 역자의 인용/해석외에 인상깊었던 내용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리(眞理)의 길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1.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 영장군의 유언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바가바드 기타>의 다음 구절을 통해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6강 진정한 요가


8. 요가를 닦은 자가 만일 지혜와 지식으로 혼의 만족을 얻고, 감각을 제어함으로써 부동의 자리에 서서, 흙이나 돌이나 금을 평등으로 보면, 그를 가리켜 요가의 통일을 얻은 자라 하느니라.


고려시대 벽란도를 통해 많은 이슬람 상인등이 오고 갔었고 , 원나라 간섭시기를 거치면서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리던 외국인들이 고려에 들어온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이들을 통해 이슬람, 인도 문물이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단순한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 영장군의 유언도 물욕(物慾)을 버리라는 말씀을 넘어서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으라는 보다 깊은 의미도 이 말씀에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2.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元素)론


<바가바드 기타> 에는 자성(自性)을 다음과 같이 8갈래로 구분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앞의 5가지의 요소를 우리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제7장 즈나나/비즈나나 요가


4.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에테르(空), 마음(識), 이성, 나(我執, 自我意識), 이것이 내 바탈(自性)의 여덟 갈래다.


'그래서 그(데미우르고스Demiurgos)는 생물들을 이처럼 다시 종류들과 부분들로 나누었다. 모든 생물의 요소들(stoicheia)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식으로 나누고서, 바로 이것들을 그는 다섯 가지의 형태들(skhemata)과 물체들(somata)이라 일컬었는데, 에테르(aither), 불, 물, 흙, 그리고 공기가 그것들이다.)' 박종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p156 주석


[그림] 플라톤의 입체 도형( 출처 : https://www.soobakc.com/Knowledge/Study_Infor/images/si_87/si87_img8.jpg)


3. <성경>과 <바가바드 기타>


<바가바드 기타>를 읽다보면, 많은 경우 <성경> 속의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등장인물인 '크리슈나'가 '인도의 그리스도'로 불리워지며, 그의 일생이 '나자렛 예수'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역자의 해설 외에 연상되는 구절을 정리해 본다.


제8장 브라만 요가


7.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도 나를 기억하라. 그리고 싸워라. 네 마음과 네 이성을 다 내게 바칠 때 너는 의심없이 내게로만 오느니라.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구약> (신명기 6장 4~6)


제9장 왕지식과 왕신비


3. 오, 파란타파야, 이 길을 믿지 않는 자는 내게 이르지 못하고 다시금 죽음의 세상 길로 돌아가느니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신약>(요한복음 11장 25)


제10장 거룩하신 능력


20. 구다사카야, 나는 모든 산 물건들 피조물들의 속에 있는 자아요, 나는 또 모든 산 물건들의 맨 첨이요 중간이며 또 나중이니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요한 묵시록 1:8)


아직 <금강경>, <반야심경>, <아함경> 등 불경에 대해 잘 모르기에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불교'의 틀을 가진 독자들은 이외에 또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배경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따라 이 책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1901 ~ 1989) 역주(譯註)의 <바가바드 기타>는 간디, 라다크리슈난 등 인도 철학자들의 해석에 노자, 장자, 공자, 기독교 성경 등에 대한 역자의 해박한 해석이 덧붙여져 있어,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바가바드 기타>라는 점에서 곁에 두고 읽을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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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4-0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교와도 통하네요. 함석헌 역이라니, 그것도 재미나고요. 수행의 길이 적혀있어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4-01 21:48   좋아요 0 | URL
^^: 네 본문에 ‘삼매‘에 대한 언급이 있어 samadhi님 생각 했었습니다.. 불교를 종교를 가지신 분들은 더 깊이 있게 다가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yureka01 2017-04-01 2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이나 신령을 믿는 종교는 어쩌면 상호 공통점이 없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리뷰를 보니 이해가네요..ㅎㅎㅎ여튼 겨울호랑이님의 지적인 탐구는 브라만 요가!!!이네요..ㅎ

겨울호랑이 2017-04-02 07:23   좋아요 1 | URL
^^: 지적 탐구라고 하기엔 수박 겉핥기 정도 수준이지만, 유레카님 말씀처럼 모든 종교는 어떤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된 시간이었습니다. 좀 더 많이 읽어야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올 것 같네요. 유레카님 감사합니다.^^:
 
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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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위대한 질문>은 <인간의 위대한 질문>과 함께 서울대 배철현 교수가 쓴 2부작 중 하나의 작품이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 신약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면, <신의 위대한 질문>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서, 지혜서, 예언서로 구성된 구약성서를 다루기 때문에 자칫 논점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저자는 <인간의 위대한 질문>와 마찬가지로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주제에 관해 역사서의 인물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글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 책은 매 장(章)마다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저자의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저자의 해석이 곁들어진 구조로 되어있다. 저자는 해석을 할 경우 전체 흐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기보다는 히브리어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의미를 해석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똑같이 우주 창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신의 이름이 다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장 1절 ~ 2장 3절까지는 "엘로힘(Elohim)"으로, 2장 4절부터는 신을 "야훼 엘로힘(Yahweh Elohim)"으로 각각 다르게 쓰여 있다. 그 이유는 각 구절을 쓴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성서에서 신을 "엘로힘"이라고 표기한 저자는 "엘로히스트(Elohist)"라 부르고, 이들이 만든 문서를 "E자료"라 한다. 또한 바빌론 유수 때 사제들이 집대성한 것으로 알려진 글은 "사제(Priest)"의 첫 글자를 따서 "P자료"라 부르고 이들을 "P저자"로 구분하는데, 이들 역시 신을 "엘로힘"으로 부른다. 반면 신을 "야훼(Yaheh)"라 표기한 저자는 "야위스트(Yahwist)"라 부르고, 그 문서를 "J자료"라 하며, <신명기(Deuteronomy)>와 관련된 글을 쓴 저자들은 "D저자"라 하고 그 문서를 "D자료"라 한다.'(p46)


'이삭을 지칭하는 "이 아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건장한 청년"으로 되어 있다. 이 문장을 "칠십인역(BC 3세기 그리스 번역본)"과 "불가타(Vulgata, AD5세기 라틴어 번역본)"에서 자신의 외아들마저 신에게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송하기 위해 히브리 원문을 일부러 오역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건장한 청년"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나아르(naar)"는 다양한 연령층을 가르킨다.'(p138)

 

<신의 위대한 질문>에는 이와 같이 명사 하나, 단어 하나에서 그 의미를 찾아간다. 이를 통해 번역본에서는 인식하지 못한 문제를 독자에게 일깨워 준다. 이를 통해 '번역(translation)'과정을 통해 얼머나 많은 의미가 휘발(揮發)되는지를 다시 느끼게 된다. 이러한 언어적 해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문화사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약성서속의 문헌 안에 있는 사건들이 유대문명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아닌 인류 보편적 과제임을 일깨우고 있다.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소개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이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아케다(Aqedah)'사건이다. '아케다'는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놓은 사건을 말한다. 저자는 '아케다'를 해석하기 전 먼저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王>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Highway 61 Revisited>를 통해  자식을 죽여야 하는 비극과 아버지를 극복한 후 독립하려는 아들의 모습이 문명의 공통된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밥 딜런 <Highway 61 Revisited>


그리고, <이삭의 희생>이라는 동일의 주제에 대한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 1669)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 ~ 1610) 그리고 샤갈(Marc Chagall, 1887 ~ 1985)의 서로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그림1] 렘브란트 <이삭의 희생>,1634



[그림2]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1603


저자는 렘브란트와 카라바조의 그림에 나타난 칼의 날카로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표정, 날아오는 천사의 위치, 그림 배경(양, 기다리는 2명의 종 등) 등에 대한 의미를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두 작가의 차이를 넘어서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림3] 마르크 샤갈 <이삭의 희생>, 1966 (이상 그림 출처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4740)


또한, 현대 화가인 샤갈의 그림도 소개한다.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미드라시(midrash)적 해석과 함께 두 명의 작가는 다루지 않았던 어머니 사라의 슬픔(그림 왼편)과 예수의 십자가 죽음(그림 오른편)을 배치하여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저자는 아카다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이라는 종파의 차이, 근대와 현대의 시간적 차이를 이들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제시는 독자들의 폭넓은 사고를 도와준다.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는 새로운 관점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과 오류에 대해서도 저자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26절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인간을 만들자."라는 문장을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三位一體)'교리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엘로힘(Elohim)"은 "엘로아흐(eloah)"의 남성복수형이다.... 엘로힘은 삼위일체와는 상관없다. 엘로힘이 문법적으로 '신들'이라고 가정한다해도 셋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엘로힘이라는 개념 연구는 셈족인들의 신관(神觀)에서 시작해야 한다...<창세기>에 등장하는 엘로힘은 고대 지중해 지방을 지배하던 독특한 신관인 "신들의 모임"구성원이다.(p431)'


<구약성서>를 해석할 때 <구약성서>가 당대 문화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이를 해석할 때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함을 <신의 위대한 질문>의 전개를 통해 저자는 이를 알려준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신의 질문'은 무엇일까?

저자는 13개 장을 통해 신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책을 구성했다. 그렇지만,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주어진 신의 질문을 다를 것이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는 그리스 문학 전통과는 달리 아브라함 종교의 경전들은 문장의 행간(行間)을 통해 말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을 "침묵 속의 웅변(eloquence from silence)"라 한다.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신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담을 수 없기에, 경전을 쓴 저자들은 침묵을 통해 자신들이 전하려는 내용을 독자들이 직접 찾아내기를 바란 것이다.'(p397)


'한자 "기도(祈禱)"를 풀이하면 "자신의 목숨(壽)을 자신의 도끼(刀)로 찍으려는 시늉을 하며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만을 무작정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오히려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행위다.'(p186)


결국, <신의 위대한 질문>은 스스로가 깊이 있는 묵상을 통해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여기에 나열된 질문과 이에 답하려는 저자의 노력을 본(本)으로 삼아 더 고민하는 삶을 저자가 요청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서인 <구약성서>를 민족적 관점이 아닌 '개인- 신(하나님)'의 관점에서 '신의 은총'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룬 반면 <구약성서>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고려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의 위대한 질문>은 히브리 원어 해석,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료를 제시하고 깊이 있는 고민을 제시한 '성찰서(省察書)'라는 측면에서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PS. 밥 딜런과 샤갈이 유태계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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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7-02-03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권 다 읽으셨네요 축~★역사적 관점에서의 관계가 아닌 신-나의 관점이라 하시니 케고르가 생각이 나요

겨울호랑이 2017-02-03 08:52   좋아요 1 | URL
^^: Theodora님 감사합니다. 키에르 케고르에 대해서는 ‘신 앞에 선 단독자‘ 밖에는 몰라서 다음에 기회되면 깊이 있게 읽어야겠네요^^:

AgalmA 2017-02-04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 딜런이 유대계 고리대금업자 같은 아버지 이미지를 몹시 싫어했다고 하죠ㅎ;;
렘브란트 천사 이미지가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치겠어라 매우 웃김ㅎ;; 렘브란트와 카라바조 나란히 두고 보니 둘다 이삭의 포즈에서 종교적 미술적 양식화를 볼 수 있군요.
샤갈은 역시 색채의 황홀경^^!

겨울호랑이 2017-02-04 13:33   좋아요 1 | URL
^^: Agalma님 말씀을 듣고 나서 다시 보니 적극 공감되네요^^: 역시 많은 작품을 접해서 안목을 길러야겠어요. 그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철학 공부와 같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AgalmA 2017-02-04 13:55   좋아요 1 | URL
그래서 예술과 철학이 엮인 미학이 있잖습니까^^ 미학자이자 철학자인 헤겔이나 진중권이 욕을 먹어도 대단한 건 대단함^^

겨울호랑이 2017-02-04 13:59   좋아요 1 | URL
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요즘입니다^^: 많이 알려주세요, Agalma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AgalmA 2017-02-04 14:36   좋아요 1 | URL
저도 겨울호랑이님처럼 세계에 대한 궁금함 탐험 중인걸요. 겨울호랑이님과 동지의식을 많이 느낀 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사마천 2017-02-04 2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서평입니다. 대단하세요. 많은 공부가 됩니다. 어찌 이리도 부지런하신지 정말 부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2-05 05:56   좋아요 2 | URL
^^: 사마천님 감사합니다. 사마천님 덕분에 시행착오없이 좋은 책을 접할 수 있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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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은 <신의 위대한 질문-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함께 서울대 배철현 교수의 2부작 작품 중 하나다. 책의 표지에 크게 JESUS라고 적혀있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을 배경으로 '인간 예수'가 성경에서 던진 질문의 의미를 찾아가는 책이다. 각 장에서 다른 주제로 질문된 예수의 질문을 통해 인간(人間)이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에서는 성경성립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유다복음>, <도마복음> 등 성경 외경(外經)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이 책은 성경의 의미를 영성(靈性)적으로 쫓아가되, 그와 연관된 역사, 미술, 유적등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때문에, 다른 책보다 성경 구절에 대한 문화적, 역사적, 예술적 해석을 깊이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 중 '10장 네 안에 있는 신성을 왜 보지 못하느냐?'에서는 네델란드의 화가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그림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살펴본다.


1. 성경의 문화적 배경

[그림]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 <십자가 내림>, 1443[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OXNl&articleno=2185&_bloghome_menu=recenttext]



'바이덴은 예수와 마리아를 새로운 세계의 아담과 이브로 묘사한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시신과 매우 유사하다. 마리아의 이러한 모습은 서양 미술사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바이덴은 독일의 종교 사상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1418년 출간한 <그리스도를 본받아(준주성범)>에서 표현한 신비한 감정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p216)


이처럼, 단순한 텍스트(text)의 제시뿐 아니라, 각 구절이 어떻게 후대의 사상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면서,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위와 같은 미술사적 해석외에도 당대 사용되었던 주화, 빌라도 석비(石碑) 등을 함께 제시하면서 독자의 깊이 있는 고민을 도와주고 있다.


2. 성경의 언어적 배경


<인간의 위대한 질문>에서는 또한 성경 번역본 비교를 통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접하는 또다른 장벽인 '언어(言語)'의 문제를 보여준다. 이것은 특히 '2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에 잘 드러난다. 저자는 이 장(章)에서 성경 한 구절을 한국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순으로 역으로 분석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읽고 있는 성경의 번역 근원을 쫓아가면서 번역을 통해 의미가 어떻게 차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소 길지만, 저자의 해설을 옮겨본다.


'이 구절에 대한 한글 성서 번역은 보통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이다. 이는 성서 원문의 뜻을 전혀 살리지 못한 번역이다. 이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본만 보아도 한글 번역과는 사뭇 다르다. 영역본은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라."이고 라틴어 번역본은 "네 자신을 인도해 깊은 곳으로 진입해라!"이지만, 그리스어 원문은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이다. '돌아오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파나고(epanago)'는 원래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먼 곳으로 진출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그러므로, 그리스 원문은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애써 나와 깊은 곳으로 진입해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 에파나고를 원래 예수의 구어인 아람어로 재구성하면 '어바르(ebar)'가 될 것이다. '어바르'는 히브리어에서도 발견되는 단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르(abar)'다. 이 단어의 의미는 '제한 구역을 넘어서다 / (법, 관습)을 어기다.'라는 심층적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는 시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따분한 일상에서 애써 탈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p63)


<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읽으며 다음의 구절이 연상되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1 코린 13:12)


At present we see indistinctly, as in a mirror, but then face to face. (1cor 13:12)"


[그림] 청동 거울 (출처 : http://m.blog.daum.net/kwon1564/4) : 성경 집필 시기 사용되던 거울의 일종


바오로의 유명한 '사랑의 송가' 중 일부의 구절이다. 우리 말로 옮겨진 성경 구절은 같은 내용이지만, 영문(英文)과는 길이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다. 그 차이는 언어적 배경 차이에서 오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또한, 현대 사용되는 '거울'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울'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차이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배경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에서는 우리가 성찰을 위해서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성경에 있는 모든 질문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몇 개의 질문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여 깊이있는 성찰을 도와준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과 고전을 접했을 때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언어와 문화적 이해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신약성경을 깊이있게 읽고자하는 독자들에게는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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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1-22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린도전서 13장의 거울 부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때의 거울이라는 것을 설명을 나중에 듣고 알았던 것 같아요. 2000년 전의 일이니 그 사이 많은 부분이 전해지면서 원래의 의미에서 달라진 점도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좋은오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01-22 15:3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오후로 갈수록 추워지네요 ㅋ 건강 조심하시고 일요일 잘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1-22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일전에 읽다가 포기했는데 겨울호랑이님 리뷰 읽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추운 밤이지만 편안한 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01-22 19:2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리뷰를 읽어 주시고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후에도 계속 영하권이더니, 밤이 되니 정말 더 춥네요. 따듯한 일요일 밤 되시고,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감사합니다.^^

:Dora 2017-01-22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의 위대한 질문...도??

겨울호랑이 2017-01-22 23:43   좋아요 1 | URL
신의 위대한 질문은 읽고 있는 중입니다 ㅋ

雨香 2017-01-23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시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따분한 일상에서 애써 탈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p63)˝

성경을 바라보던 기존 시각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보수기독교가 이를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합니다만,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을 읽은 교계 높으신 분들이 없으시거나, 이런 내용이었나 하고 보인들도 놀라지 않았을지....

어쨌건 시간 내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1-23 15:25   좋아요 0 | URL
^^: 네,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기존 해석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해석이 보다 보편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느낌이 들던데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우향님께서 즐겁게 읽으신다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월요일 오후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