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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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야바라밀다심경 大般若波羅蜜多心經>의 핵심을 담고 있는 <반야심경 般若心經>. 불자(佛子)가 아닌 가톨릭 신자로서 불교 경전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부처님의 자비를 사랑으로 어렴풋하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비춰보면 대강의 느낌을 짐작한다. <신약성경>에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한 내용이 바오로의 편지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부처님 이후의 보살의 말씀이 더해지면서 대승불교가 성립되었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깨달음(自覺)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성령(聖靈)의 인도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추구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대승불교는 이미 싯달타의 가르침을 준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닌, 보살들, 즉 스스로 싯달타가 되겠다고 갈망하는 보살들의 종교입니다. 자각의 종교이지 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자리리타 自利利他˝, ˝자각각타 自覺覺他˝(스스로 깨우침으로써 타인을 깨우침)의 목표를 제1의 목표로 삼습니다. 철저히 구도의 과정이 사회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p177)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中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후대에 등장한 보살의 말씀으로 지고의 경전이 성립했다? 이것이 바로 대승경전의 특징입니다.... 보살이 성문 聲聞을 가리친다! 이것이 바로 대승의 정신이지요.(p202)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中

<반야심경 般若心經>은 철두철미한 ˝무 無의 철학˝입니다. ˝공 空이다˝라는 규정성조차도 부정해버리는 철두철미한 부정의 논리이지요.(p222)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中

마지막으로,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다의 주문 안에서, <영광송>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복잡한 계율(戒律)과 유대교의 율법(Mosaic Law)에서 민중을 벗어나게 한 것이 대승불교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통하는 바였음을 <반야심경>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揭諦揭諦 波羅揭諦)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모지사바하(苦提娑婆訶)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p238)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中

Gloria Patri, et Filio et Spiritui Sancto, Sicut erat in principio et nunc et semper et in saecula saeculorum, Amen.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영광송 Doxology>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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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1-30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라는 고백이 얼마나 엄청나고 위대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1-30 08:0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반야심경>과 <영광송>의 짧은 문구 안에 담긴 사상(일반 대중들 역시 기도를 할 수 있고, 깨달음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은 종교사에서 위대한 전환이고, 사건이라 여겨집니다.
 
행복의 연금술
알 가질리 지음, 안소근 옮김 / 누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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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인식은 신께 대한 인식에 이르기 위한 열쇠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신을 안다˝고 말한다.(p23)... 진정한 자기 인식은 다음을 아는 것이다. 네 자신 안에서 너는 무엇이며, 너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너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위하여 여기에 왔고, 너의 진정한 행복과 불행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네가 지니고 있는 속성들 가운데 일부는 동물들의 것이고, 일부는 악마의 것이며, 일부는 천사의 것이다. 너는 이러한 자질들 가운데 어떤 것이 우연적인 것이며 어떤 것이 본질적인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p24)

인간에게서 최고의 기능은 이성이며,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관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어떤 사람에게서 이것이 우위를 차지한다면, 세상을 떠날 때에 그는 격정과 분노의 모든 성향들을 뒤로 하고 천사들과 결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p28)

신에 대한 사랑은 가장 고귀한 주제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향해 온 최종 목적지이다... 인간의 완성은 신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고 완전히 차지하는 데에 있다.(p121)... 이 사랑의 본질은 유쾌한 것을 향하는 성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오감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그 각각이 감각에 즐거움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 안에 심어져 있는 인지 능력은 동물에게는 없다. 이로써 우리는 영적인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인식하게 된다.(p123)

11세기 이슬람 사상가 알-가잘리의 <행복의 연금술>은 신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영혼의 담금질을 강조한다. 이성을 통해 짐승과 다른, 신을 향한 선택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이슬람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의 <행복의 연금술>은 우리에게 이슬람-기독교-유대교 공통된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사실, 이들 종교는 타나크(Tanakh, Hebrew Bible)를 공유하기에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헤브라이즘(Hebraism)의 세계관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사상이 더해지면서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이렇게 제1원인이신 분께 돌려야 할 것을 이차적인 원인들에게 돌리는 것의 흔한 예는 소위 나태함에서 볼 수 있다.(p45)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prime mover)의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가잘리의 문장 속에서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에게로 이르는 다섯가지의 길 중 운동을 통한 증명(via ex motu)도 함께 연상하게 된다. 중동의 지혜문학의 토대 위에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공통적으로 받은 두 종교. 이들은 형제 종교라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들 2대 종교를 통해 상생이 아닌 대립으로 세계사를 써왔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아쉬움을 짙게 느끼게 된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이 그들의 신, 야훼와 알라가 원하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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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3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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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3 17: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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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 금강경 / 법화경 / 유마경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8
홍정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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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이여, 전혀 생기지 않고 과거에도 생기지 않고 미래에도 생기지 않으며, 또 없어지지 않고 일찍이 없어지지도 않았고 장래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무상(無常)'의 뜻입니다. 무릇 오온이 공성(空性)임을 이해하고, 따라서 고(苦)는 생기지 않는다고 이해함이 '고'의 뜻입니다. 아(我)와 무아(無我)는 둘이 아님이 '무아'의 뜻입니다. 자존재(自存在)도 없고 타존재(他存在)도 없는 것, 이것이 '공'의 뜻입니다. 타는(燃) 일도 없고 타지도 않는 것인만큼 적멸(寂滅)하는 일도 없으며 적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적멸'의 뜻입니다.(p326) <유마경 維摩經> 中


 보리(菩提)란 것은 모든 상이 적멸한 것입니다... 보리라는 것은 의지작용(意志作用)이 모두 움직이지 않는 것, 모든 견해와 무관계한 것입니다. 보리는 모든 분별과 떨어져 있고, 움직임과 생각과 마음의 동요 등 모든 것과 떨어져 있습니다. 보리는 모든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것, 모든 사로잡힘과 떠나 무집착인상태에 있는 것입니다.(p334)  <유마경 維摩經> 中


 좋은 집안의 아들이여, 예를 들면, 건조한 고원의 척박한 땅에서는 백련과 같은 향기 높은 꽃은 피지 않습니다. 그것이 피는 곳은 진흙과 물 속의 습한 곳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위의 궁극성을 얻은 사람에게는 불법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생기는 것은, 번뇌의 진흙과 물 속의 습한 것과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입니다.(p378) <유마경 維摩經> 中


선(善)과 악(惡)이 둘입니다. 선과 악을 탐구하지 말고 특질(特質)도 무특질(無特質)도 다르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불이(不二, 본체와 현상은 제각기 다른 것이 아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p390)... 유아(有我)와 무아(無我)란 것이 둘입니다. '나'라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둘의 본질을 보는 것에 의해 무이(無二)로 되는 것이 불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색(色)과 공(空)이 둘입니다.  색은 그대로 공으로서, 색이 없어져서 공이 되는 것은 아니며, 색이 본성으로서 공인것입니다. 이것은 불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p391) <유마경 維摩經>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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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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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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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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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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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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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2>(이하 도마복음 한글역주 2)는 도올 김용옥(檮杌 金容沃, 1948 ~ )교수가 본격적으로 <도마복음 Gospel According to Thomas>에 대해 풀이한 주석서다. <도마복음(토마스의 복음)>은 기독교 신약성경의 외경(外經)이고, 이 문헌은 1945년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최근 문서다. 때문에 이에 대한 통일된 해석보다는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도마복음 한글역주 2>는 이들과는 또다른 차별화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2>는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동양철학 특히 노자(老子, BC 533 ? ~ ?)적 관점에서 <도마복음>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도마복음>에 대한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저자의 <도마복음> 관련된 책은 총 3권이다. 그 중 도입에 해당하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를 제외하고, 주석에 해당하는 <도마복음 한글역주>는 전체 2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마복음 한글역주 2>에서는 전체 114장 중에서 25장을 주석하고 있는데 나머지 89장을 분량이 비슷한 <도마복음 한글역주 3>에서 할당하였음을 생각해본다면, 저자는 <도마복음 한글역주 2>에서는 복음서에 대한 전체적인 틀을 잡는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도마복음>의 전체 틀은 무엇일까? 이번 리뷰에서는 그 줄기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말씀의 해석과 영원한 생명


  <도마복음>의 1장에서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18장에서는 시작이 곧 종말이며, 여기에 서 있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도마복음>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제1장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p115)... 제18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말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 하리라."(p319)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2. 말씀의 해석에 이르는 길 : 고통과 경이로움


 그렇지만,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 고통을 겪고 고통 속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말씀의 해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나가는 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길은 다같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숫타니파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실존적 고독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런 고통을 통해 발견한 경이(驚異)는 무엇일까?


 제2장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p133)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제16장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p307)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3. 말씀의 해석에 이르기 위한 하나됨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지지만, 제25장까지 반복되는 주제 중 하나는 '둘이 하나됨'이 아닐까 여겨진다.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고(18장), 나라가 너희 안과 밖에 있으며(3장), 남자와 여자가 하나된 자로서 존재할 때(22장), 비로소 그는 말씀의 해석을 발견을 위한 출발점에 설 수 있다.


 제3장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희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너희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너희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p157)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제22장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들이 속을 겉과 같이 만들고, 또 겉을 속과 같이 만들고,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된 자로 만들어 남자가 남자 되지 아니 하고 여자가 여자 되지 아니할 때, 그리고 너희가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 손 있는 자리에 손을 만들고, 발 있는 자리에 발을 만들고, 모습 있는 자리에 모습을 만들 때, 비로소 너희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p355)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안타깝게도 말씀의 해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사실,  <도마복음> 전체에서 결코 '말씀의 해석'에 대해 결코 명료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나라'로 끊임없이 은유될 뿐이다. '아버지 나라는 ~과 같다.' 뚜렷이 볼 수 없는 그리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길을 외롭게 가되, 자신의 영(靈)과 육(肉), 자신 내면의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통합시켰을 때 그는 비로소 시작점에 설 수 있음을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림] 아니마와 아니무스(출처 : http://toma.daretodonate.co/anima-animus/)


 제11장 너희가 죽은 것을 먹던 그날에는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너희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는 과연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 너희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너희는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희는 무엇을 할 것이냐?"(p265) <도마복음한글역주2> 中


 <도마복음한글역주 2>에서는 이러한 큰 틀에서 <도마복음>을 해석한다. <도마복음>에 대한 해석을 성경(聖經)내에서만 찾지 않고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기존 신학(神學)의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독자들은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방법은 신선함과 낯섬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이 책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갈리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책과 해석에 대한 판단은 독자 개인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도마복음>에 대한 해석을 3권에서 이어가는데, 남은 이야기는 <도마복음 한글역주 3>리뷰로 넘기도록 하며 리뷰를 갈무리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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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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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06: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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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
파드마삼바바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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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목은 <바르도 퇴돌 Bardo Thos-grol>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라고 번역된다.(p10)... 생을 마치고 사후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대 앞에는 많은 빛들이 나타날 것이다. 임종의 순간에는 최초의 투명한 빛이 그대를 맞이하러 나타나리라. 그대는 그 빛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 빛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진리의 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p12) <티벳 사자의 서> 서문 中 


 <티벳 死者의 書>는 죽음을 맞이한 후 환생(還生) 이전까지 윤회(輪回)의 전체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티벳 전통 사상이 담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후 49일 동안 인간이 마주하게 될 여러 모습 - 빛의 인도, 평화의 신(神)들과 분노의 신들 - 을 확인하게 되지만, 보다 중요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이 모든 것들이 환영(幻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명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p12) <티벳 사자의 서> 서문中


 그렇다면, <티벳 사자의 서>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 완성된 부처임을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비어있음(沖)과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無形) 본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이 죽은 자들의 과제임을 깨우쳐 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가볍게 해주는 위로를 느끼게 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곧 참된 의식이며 완전한 선을 지닌 붓다임을 깨달으라.그것은 텅 빈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아무런 걸림이 없고, 스스로 빛나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텅 빔이다. 본래 텅 비어 있고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은 그대 자신의 참된 의식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고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세계다.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 그 하나됨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다.(p250) <티벳 사자의 서> 中


 <티벳 사자의 서>의 깨달음이 죽은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때가 바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기 때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 ~ 2004)이 '결정적 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사진 한 장에 표현하는 바와 같이 죽음의 순간,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내야 한다.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갖는 마지막 생각이 그 다음 환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믿는다.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때 자신의 생각을 올바르게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인도의 현자들은 가르친다.(p40) <티벳 사자의 서> 서문中


[사진] <국민당 최후의 날, 중국 1948> by Henri Cartier-Bresson (출처 : http://photovil.hani.co.kr/213534)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모든 것이 환상이고, 죽음의 순간에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살았을 때 과연 착하게 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답을 하고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깨달음으로 대자유에 이를지라도,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수는 많고 악한 카르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무지는 너무 깊고 나쁜 습성이 오랫동안 뿌리내렸기 때문에 무지와 환영의 수레바퀴는 힘이 떨어지지도 않고 가속이 붙지도 않는다.(p317) <티벳 사자의 서> 中


 이처럼 <티벳 사자의 서>는 죽음을 맞이한 인간이 이전에 가보지 못한 길을 걸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을 긍정하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모습을 않는다면 고통의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는 이러한 내용으로 죽은 자에게도, 이를 읽어주는 이들에게도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티벳 사자의 서>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서>이기도 할 것이다.



PS. 티벳의 전통 장례는 천장(天葬)으로 치뤄진다. 사람의 시신을 토막내어 독수리에게 던져주는 그들의 장례 문화는 외국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날아오르는 독수리와 함께 하늘로 돌아가는(歸天) 모습을 담은 천장의 준비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다음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사진] 티벳 천장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7520)


 그대의 몸은 카르마의 성향만을 지닌 사념체이기 때문에 베이고 잘리고 토막나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대의 몸은 실제로는 텅 비어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죽을 수가 없다. 그대의 몸이 조각조각 난도질당해도 그대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거듭되는 난도질은 그대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리라.(p351) <티벳 사자의 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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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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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2 1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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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12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의 내용과는 생뚱 맞을 지도
모르겠지만...

국민당 최후의 날, 이란 제목의 사진
이 압권이었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18-06-12 15:39   좋아요 0 | URL
^^:) 어쩐지 이 사진이 끌리더군요. 제목이 ‘최후의 날‘이어서 때문인지, 내일 지방선거 어느 당 때문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ㅋㅋ

양철나무꾼 2018-06-12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
제가 워낙 감정이입을 잘 하는 편이라,
몇번 들춰보기만 했을뿐 제대로 읽지를 못했네요.

제가 이 책을 버거워한 이유는 다른 사진책에서 ‘천장‘하는 사진을 보고나서였습니다.
무섭거나 두렵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달까요.

암튼, 언젠가는 읽어야할 숙제로 남겨두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꾸벅~(__)

겨울호랑이 2018-06-12 16:42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천장‘의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느꼈습니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양철나무꾼님께서 말씀하신 경이로움이 무엇이었는지 공감하게 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6-14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14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6-16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에 너무 제 사념에 빠져서 이 책을 읽은 게 아쉬워서 다시 읽어야지 읽어여지 하다가 어언....-_-; <이집트 사자의 서>는 이 책과 달리 백과사전식이라 이게 뭐야-ㅁ-), 영적이지 않잖아! 흥미를 잃고;;....죽기 전에 제대로 중심 좀 잡아야 카르마에 안 잡힐텐데 말입죠;

겨울호랑이 2018-06-16 10:50   좋아요 1 | URL
저는 버스에서 할머니에게 자리 양보하기, 연의와 놀아주기 등으로 작은 선업을 쌓은 후 죽기 전 ‘모든 것이 다 뻥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세상을 떠나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집트 사자의 서>도 지금 들여다 보고 있는데, 이집트 신화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