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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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울고 있다.

한국의 학교는 통곡하고 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제도 교육은 사회의 일부분이다.

사회가 아플 때, 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아프게 마련이다.

성장통?

성장한다는 비전도 없이 아픈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모두 죄인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열등생 과정을 충실히 수료한 작가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교사라고 하면, 마치 내가 자기를 괴롭힌 교사였기라도 한 양 화를 내는 녀석도 있고,

간혹은 '공부 잘 하는 녀석들이 나는 싫더라.'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학교'라는 기관은 별탈 없이 지내온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고통이 적었을지 모르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교육 내용과, 교육 활동으로 남았던 시-공간일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30)

 

많은 교사들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한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교사들은 '학교 밖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그들의 시각에 자신을 두들겨서 맞춰야 하는 아이들은 늘 두려움에 싸일 수밖에...

 

초등학교때부터 교사들이 너무나 싫었다.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아저씨 아줌마들이 잘난 척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늘 불만이었다.

"사회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대학 나와서 곧바로 교사가 된 당신도 학교 일 말고는 아는 게 없잖아?" 하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

"어른들의 사회에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나 아이들을 상대하는 교사가 되는 거야.

그런 녀석들이 마치 우리에게 교육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싫어한 것은 교사만이 아니었다.

나는 주의 어른들 대부분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들 자신은 색과 욕망과 돈밖에 흥미가 없는 주제에,

상대가 어린애라고 훈계, 설교를 늘어 놓는다.(히가시노게이고, 동급생 에필로그에서)

 

많은 사람들의 경우, 학교에서 아이들과 뛰어 놀고 장난쳤던 추억이 오래 남는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일어났던 학습 장면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진 지 오래다.

그런 활동에 왜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인지, 돌아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놀이는 고독한 수치심에 빠져드는 순간에 덮쳐오는 우울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해야할 일을 결코 해내지 못하는 수치심에 잠긴 열등생의 고독은 얼마나 끔찍한지!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그 마음... 나는 아주 일찍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로? 그건 꽤나 모호한 일이다.

말하자면 나로부터 도망치되 내 안으로 도피하는 것이다.(33)

 

그래서 아이들은 멍때리고, 딴전을 피우며, 낙서를 하고, 급기야 졸음에 빠진다.

이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쉬는 시간에만 존재했고,

수업 시간에는 위험인물이었으니까.(35)

 

슬픈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이 있어서 아이들은 존재감이 살아난다.

그런데, 쉬는 시간조차도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들도 있어서 학교는 더 아프기도 하다.

아파하는 아이들 곁에서 나는 해결책을 찾아 내었다.

내 마음 속으로 찾은 해결책.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와 같다.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눈썹이 움찔한다. 만족스러운 눈빛, 그렇지. 우리는 전문가니까. 자, 그 방법이란?

나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기다리는 겁니다."

그는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68)

 

다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너희가 지금은 학습면에서나 교우관계 면에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곤란은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질 수도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기다리는 것.

그 일은 쉽지 않지만, 삶에서 그 이상의 애정을 품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배우고 교육을 받았던 것은 사회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문이었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즉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반을 그 역할에 바쳤다.

역할에서 벗어나면 더이상 배우도 아닌 것이다.(86)

 

그렇다.

교육은 인간을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신화가 있다

그러나, 그 신화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정말 그 역할을 맡기 위해서,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기다리는 슬픔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른과 아이는 시간을 동일하게 지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십 년 단위로 계산하는 어른의 눈에 십 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 십 년은 금세 지나간다.

그렇게 빠른 속도감 때문에 어머니들은 아들의 장래를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이의 눈에 자신의 미래는 뒤이은 며칠 안에 몽땅 달려 있다.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골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장래란 최악의 상태의 나를 말하며,

바로 그것이 나는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선생님들의 말에서 내가 대충 이해한 바였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간이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111)

 

공부란 걸 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장래 희망이란 걸 갖지 못했던 아이들도,

지금 자라서 멋진 부모가 되었고, 훌륭한 직장인이 되지 않았는가?

학교밖에 모르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너무 슬프게 만드는 일임을 반성해야 한다.

 

뭔가 된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125)

 

아이들에게 이런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래. 인간에게 확실한 사실의 미래란 없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뭔가 되어가는 것이다.

기왕이면 조금 더 가치있는 일을 한다면 좋을 것이지만, 아무튼... 이다.

 

앎을 가로막는 데는 슬픔보다 더한 차단벽이 없다.

웃음은 시선으로 멈추게 할 수 있지만 눈물은...(150)

 

슬픔으로 가득한 아이에게는 '앎'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눈물은 멈추게 하기 힘들다.

어른들은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모범생과 문제아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구현 속도다.

문제아는 선생들이 흔히 꾸짖듯 생각이 딴 데 가 있기 일쑤다.(156)

 

구현 속도가 다를 뿐, 모범생들이 금세 다다른 곳에, 문제아들도, 열등생들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다.

그리고 닿게 되고, 더 너머까지 나아갈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 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162)

 

작은 오케스트라에는 트라이앵글도 캐스터네츠도 있는 법이다.

제1바이올린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을 밀어붙이는 공간이 학교라면, 그 문제를 알아차리고 개선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장관님 생각엔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뭔가요?

모르겠소.

자 여러분,

그러니 그게 무엇인지 반듯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228)

 

학교는 지금까지 충분히 실패해왔다.

아이들 중 열등생만 우울한 것도 아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선 1등의 스트레스가 가장 높을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는지,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교사의 일이고, 교육부의 일이다.

그것은 큰 깨달음이다.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235)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교원노조를 '불온시'하는 교육부가 노조를 '불법'으로 간주한 사태를 직시하는 듯 한 뉘앙스다.

복종하지 않는다고, 이해받지 못했다고 평행선을 그리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제도권 교육인 모양이다.

 

그 애들을 폄하하지마.

그 애들의 에너지를 고려해야지.

그들의 명석함도.

일단 청소년기의 위기가 지나면 달라져.

많은 아이가 잘 견뎌내거든.(291)

 

어쩔 수 없는 아이도 있다.

견뎌내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부적응 학생도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많은 아이들은 잘 견뎌내고, 위기를 지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지난 주말, 전국을 불안케 했던 '임병장 살인 사건'은,

살인범이 억지로 끌려간 군대 제도의 희생양이란 측면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물론 가장 잘못한 사람은 임병장이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다.

그러나, 적어도 책임자라는 장관이 '가장 큰 문제는 임병장이다' 같은 무책임한 말을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선생과 도구의 차이가 뭔지 알아?

모른다고?

나쁜 선생은 수선이 불가능하다는 거야.(328)

 

슬픈 학교의 교육을 작가는 <일상적인 분노를 키워가던 시절의 더러운 추억>이라고 말한다.

수선이 불가능한 교사들로 가득한 학교.

수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꼰대들의 학교를 뜻한다.

수선이 불가능한 도구는, 재료들을 다 망쳐놓는다.

어떤 재료들이라도 도구를 사용하여 쓸모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 명장의 역할인 셈.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슬펐던 학교의 더러운 추억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침뱉아 버리고 말 기억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지금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그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줘야 하는 책임을 임무하도록 학교를 수선해가며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 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글고 지하철 광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을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348)

 

아이들을 도구로 여기면 안 된다.

아이들은 장래 국가의 <인적 자원>이 아니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서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로운 <목적>으로서의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도 결코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진 않아.

나는 내가 무지한 게 아니라 그냥 한심하다고 생각했거든.

그건 전혀 다른 거야.(365)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방법이 있기나 한 걸까?

이런 회의를 품는 교사에게 작가는 외친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 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367)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

그뿐이다.

 

아픈 아이들,

슬퍼하는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할 뿐이라고 한다.

 

울림이 깊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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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학교가 뭐길래! - 이상석 선생과 아이들의 공고 생활기
이상석 글, 박재동 그림 / 양철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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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목표 실종'이다.

공고에 들어올 때, 공장에 취직하러 오는 아이들이 거의 없는 실정이고 보면,

공고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오는 하위급 실업계 고교로 자리매김된다.

 

수업 시간에도 맥이 빠져있고,

무엇보다 가장 큰 결함은, 가정이 가난한 아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하다 보니 중학교에서 형편없는 성적으로 공고로 진학하게 되는 것.

예전처럼 공고를 졸업하면 공장에 가서 먹고살 길을 찾던 시절만 해도,

중학교 내신 40% 정도 학생들이 모였던 시절만 해도, 물리 또는 기술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던 때도 있었다더라만,

요즘엔 마지못해 등교해서 온갖 갈등에 시달리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쳐야 할지... 학교에서는 목적이 없다.

기술인을 양성할 것도 아니면서 아직도 '전국 기능 대회'에 출전하고,

아이들은 거의 아무 공부도 하지 않은 상태로 전문대학에 진학한다.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한 해법을 은근히 제시하는 책이다.

 

이상석 선생님은 50이 넘어 공고로 간다.

그런 지긋한 나이의 남교사에게도 아이들은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함께 돌볼 수 있는 부모가 없다는 데 큰 어려움이 있고,

말만 전문계(실업계는 실업자를 연상시킨다고?)인 학교의 전문교과 교사들과 일반교과 교사들은 소통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쓰는 글들은 눈물겹다.

이 책을 읽으면, 이상석 선생과 아이들의 사이에서는 재미있는 일들만 그득했고,

졸업 후에도 쏘주잔깨나 나누는 듬직한 제자들로 그득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이 내 눈엔 훤히 보인다.

 

전문계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참 적다.

원래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법이지만,

일반계 아이들과는 수업 시간에도, 상담 시간에도 제한적이나마 이야기가 가능한 반면,

학교 자체를 오지 않아도 그만으로 여기는 아이들을 보듬어 안는 일은 교사로서는 언감생심... 불가능에 가까울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은 교사의 본마음은 원래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자본이 판을치는 이 시대.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버림받았듯,

'자본'의 쓰임에 필요치 않는 존재는 한낱 벌레 취급을 받는 곳이 아닌지,

정말 고귀한 인간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비참한 하루하루를 맞이하도록 세상이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지...

 

기계의 부품처럼 쓰임이 있을 때만 뽑아다 쓰는 전문계 아이들...

진급 같은 것은 꿈도 꾸기 힘든 아이들...

그 털끝보다도 가치없는 지식 나부랭이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가

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으로 인간을 평가하게 되는 사회가

아이들을 얼마나 힘겹게 만드는지,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물음표만 그득하고, 도무지 해법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다스한 온기를 한 명씩 한 명씩 전해주는 사람을 보았다.

 

이 책이 개인적인 체험담을 넘어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작가가 학교에서 교육 개혁을 말하면서도,

교육의 주체로 학생부장을 맡는다든지, 그렇게 교사들과 호흡한 경험들도 적혀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으려나...

자기와 뜻이 맞는 몇 사람과 아이들과 소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개인의 자리보다는, 그래서 혁신학교들처럼

관리자나 부장들의 협력으로 아이들을 살리는 구조를 이뤄나가는 모습을

특히 교육의 소외지역인 전문계에서 이뤄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만 가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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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rosa 2014-05-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시내 일반고도 공고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
읽는 내내 스무살짜리 울 아들 친구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빠 치킨 집 닭 배달하다 다리 다쳐서 깁스하고 다녔던 아이,
경제적 문제로 위장 이혼한 부모를 가진 아이,
알바비 90여만원으로 사는 아이.
말이 알바지 그냥 일반 직장 생활과 같은 시간을 근무하는데도,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월급이 터무니없이 적더군요.
더 슬픈 건 그 아이 버는 돈이 울 아들 재수학원비 수준이라는 거겠지요.
좋은 부모라는 게 걍 우리 아이 하나 잘 돌보는 걸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다만 넘 우울해서 기분 전환하려고 선택한 책이었는데
서문을 보다 또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글샘 2014-05-21 08:21   좋아요 0 | URL
좋은 부모라는 게 우리 아이 하나 잘 살도록 재산을 물려주면 끝나는 게 아니겠죠.
우리 아이의 아이도 행복할 수 있는 국가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지금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아서 지금 부모들이 제자식만 돌보는 것이지만,
좀 더 넓게 세상을 봐야하지 싶습니다.
멀리 봐야하구요.
 
작은 학교의 힘 - 아이의 학력, 인성, 재능을 키워주는
박찬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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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교는 아이들을 살리는 곳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이 책에선 작은 학교가 거대 학교에 비해 어떤 점이 좋은지를 고민하고 있다.

 

작은 학교는 보통 시골 학교이다.

시골 학교에서 몇몇 아이들이 대도시 아이들을 꺾고 큰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사례를 보고,

작은 학교가 거대 학교보다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작은 학교의 장점들을 충분히 많이 나열하고 있다.

 

나도 이전에는 한 학년이 10학급~15학급인 대도시 학교에 근무했다.

같은 학년을 데리고 올라가지 않는 한, 아이들 이름 외우는 일은 언감생심, 무망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 학년 5학급의 소규모 학교로 오니,

아이들 얼굴과 이름이 쉽게 외워지는 장점도 있다.

 

학력 면이나, 인성 면이나, 작은 규모의 학교가 인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연과 환경이 어우러진 학교까지 욕심을 내지만,

그건 힘들더라도, 일단 대도시 거대 학교부터 작은 학교로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점이 많다고 역설해도, 교육부가 내는 정책은 '고육'지책일 경우가 많으니...

이론은 이론일 뿐이겠지만...

 

교육은 학생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이다.

발전 속도가 빠른 아이들을 위한 커리큘럼 만들기는 쉽다.

지금한국은 이 속도전에만 불을 켜고 있다.

 

교육부가 뒤늦게 뒷북으로, 성취평가제나 선행학습 금지라고 외쳐봐도,

그걸 듣는 학부모는 없다.

기다려주는 교육을 하자는 것인데,

이미 이 사회는 '경쟁' 일변도의 사회임에랴...

 

학교 폭력과

학원에서의 사교육과,

경쟁의 억압에서 시달리는 학생들을 구하는 길은...

찾자고 들면 많다.

 

그러나,

내 새끼 입에 따순 밥 들어가기만 바라는 이기심으로는,

아무리 좋은 해결책도 내팽개치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다.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으라고...

 

자식을 시골학교로 전학보내는 일도 해결책은 아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어찌어찌 홈스쿨링이든, 대안학교든 별차이 없을 수 있으나,

고등학교와 대학 진학 문제는 아이의 진로와 밀접한 관련을 짓게 되니 말이다.

 

작은 학교는 힘이 있다.

큰 학교는 힘이 없다.

그러나... 교육부는 정작 '교육력 제고'에는 무관심하다.

아이들만 '디태치먼트(무관심)'에 버려진 게 아니다.

이미... 일반계 고등학교들도... 디태치먼트의 혼란 속에 빠진 지 오래다.

그 무섭다는 중학생 역시 마찬가지...

 

이런 책을 읽고 힘이 나야하는데, 더 기운이 빠지니... 나도 늙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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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4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4-03-25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찻잔, 찻종지, 찻주전자... 웃기죠?
사이시옷을 받쳐 썼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는 우리말이라는 의미인데...
잔(盞)은 한자임이 분명하니...
차를 우리말로 '생각했음'이 또한 분명하네요. 한자로는 '다도, 다기' 등으로 쓰고,
우리말로 찻물, 찻집 등으로 쓴다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 대사전에도 茶盞이라고 한자로 병기한 걸로 보아, 좀 애매한 규정이긴 하지요.
전셋방도 웃기는 짬뽕이긴 매한가지이구요. ㅋㅋ

2014-03-24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5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선생의 학교폭력 상담실 - 따사모 선생들의 생생한 교실 밀착형 상담기
김경욱 외 지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기획 / 양철북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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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교육주체의 세 측면 - 교사, 학부모, 학생 - 의 입장에서

학교 폭력에 대한 곤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작금의 '학교 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2년도 너머 전에, 한미 FTA 여론을 물타기하려고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을 정도로

학교 폭력은 관심 밖의 이야기다.

그래서, 가해자는 생활기록부에 기록하고, 졸업할 때 삭제한단다... ㅎㅎㅎ

삭제할 것을 왜 기록하나? 황당하다.

 

왜 아이들이 더 잔인해지고, 집요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했을까?

그걸 아이들 탓으로 돌린다면... 이해의 길을 잘못 잡은 것이다.

 

여기 문제가 있다.

아이들이 교사를 팰 정도로 문제가 있다.

교사도 맞는데, 아이들 사이의 문제를 어찌 해결하랴.

 

한국 학교의 <생활지도>라는 애매한 항목 안에는,

병원에서 치료해야할 수준의 학생, 오랜 상담을 거쳐야 할 학생, 애정을 쏟아줘야 할 학생 등

그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결국, '복지'의 포괄적 개념이 없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을,

오로지 교사들에게 맡겨둔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과 해결과 관련된 요소들을 늘어 놓고 있다.

그러나...

오늘도 두려움에 떨고 있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도 말발이 먹히지 않는 교사들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학교 폭력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다만,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뿐이다.

 

박근혜보다 전두환이 낫다?

 

박근혜한테 사람들이 돌을 던지진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집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살인마였고 공공의 적이었기때문에, 애매한 보수인사들도 그를 욕하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의 집권 역시 국정원 같은 폭력적 기관과 선관위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선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두환은 폭력적이고 박근혜는 사랑의 화신인 건 아닌 것이다.

 

일제 강점기, 교사의 폭력은 일상다반사였고,

해방 이후도, 교사의 폭력, 학교내 주먹들이 폭력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교사는 양지에서 패고, 주먹은 음지에서 팬다는 차이뿐.

그 폭력은 한번도 정당한 적도 없고, 정의로운 적도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폭력을 당해도 말하지 못하고 자랐다.

학교에서 수업료 안 가져 온다고 패도 말하지 못하고 당하며 살았다.

올림픽 치르고 하면서 아이들도 돈을 쥐는 세대가 되고,

그 폭력은 다른 양상으로 변화해 갈 따름이다.

 

지금의 학교 폭력이 마치 '새로운 생물체'라도 되는 양, 요즘 애들과 요즘 학교를 욕하는 일은 좀 우습다.

언제는 '사랑이 공동체'였던 것 마냥 구는 구세대는 구역질난다.

 

오히려 지금이 학교가 더 민주적이고, 더 환하고 깨끗하고 밝다.

다만, <사회적 이동>이 알게 모르게 슬며시 사라지는 사회를 반영하듯,

어떤 학교들은 더 환하고 밝으며,

어떤 학교들은 더 음습하고 어두운 학교로 전락하는 그 틈에서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는지 모른다.

 

학교 폭력이 새로운 발명품이나 발견인 것처럼 외치는 자들은,

자기들의 잘못은 없다고 말하는 자들 같다. 구역질난다.

 

앞으로 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날 것이다.

교사들도 이제 못견디겠다고 '명예퇴직'을 줄줄이 신청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지급할 명퇴금이 없어서, 신규 교사를 뽑아는 두고 발령을 못낸다는 블랙 코미디가

이 나라의 교육 행정이다.

 

자, 명퇴신청 했는데, 국가 사정상 못하고,

또 올해도 담임을 하고 있는 담임이, 과연 학교 폭력에 대하여...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

정답은 하나다.

오늘도 무사히...

 

이 책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학교 폭력에 대하여,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자기 반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담임 교사,

또는 자기 아이가 외로움을 호소하는데 어쩔 줄 모르는 부모,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학생... 그들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할지, 조금은 가르쳐 주는 방향지시등이 된다.

 

그렇지만...

큰 틀에서... 한 고비 넘긴다 해도,

문제는 더 크게 부풀어 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과학고를 늘리고,

자사고, 영재학급 등을 늘려서,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육 진공 상태를 조장하고,

오로지 진학 일변도의 교육 풍토에서 연합고사도 없는 중학교의 맹탕 교육과,

초등의 과열된 사교육 열풍을 조성하는 현 교육 사태에서는,

학교를 전쟁터라고 봐야 한다.

전쟁터에서 폭력이 일어났다고 왈가왈부하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인 셈이다.

 

지금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비교적 착실한 학생들이어서, 폭력적 갈등까지는 일으키지 않아,

상담과 대화만으로도 해결되는 지점에서 숨쉬는 나는 조금 낫지만,

일반계나 실업계(전문계)에 근무하는 교사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교 폭력...

결국, 학교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적, 역사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교 폭력은, 새로운 생물체처럼 변화하고 진화해갈 것이다.

변하지 않는 학교는 여전히 덜떨어진 짓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관리감독하는 교육청 역시 뒤치닥거리에 땀이나 흘릴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이럴진댄,

하나의 해결책은 없지만,

이렇게 답을 찾아 땀흘리는 사람들이 있어,

한 고비 넘기는 일만으로도... 감사해야하는 현실이 쓰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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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3-17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TV 다큐중에 학교 폭력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걸 잠시 봤었는데
거기 인터뷰 한 사회학자가
학교폭력은 사회 양극화가 심한 나라 일수록 더 심하다고 하더군요.
학교폭력은 절대로 학교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저 학교다닐때도 폭력 교사는 있었고
일진도 있었고 왕따도 있었지만,
지금은 굉장히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잔인해져가고 있는거 같긴해요.

글샘 2014-03-17 13:22   좋아요 0 | URL
갈수록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이 약화되는 거 같아요.
공동체가 붕괴되는 느낌이랄까...
가정이 해체되는 일이 너무 많기도 하구요...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 - 흔들리는 부모들을 위한 교육학
현병호 지음 / 양철북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의 현대사는 어른들에게만 시련은 아니었다.

농부의 자식이 그저 농부로 살던 시절에 뼈저린 수탈의 기억으로 남은 상처는,

유례를 찾기 힘든 '교육열'로 부모를 치닫게 했다.

 

조선의 과거 공부나,

일제 강점기의 고시 공부나,

지금의 수능 공부나...

공통점은,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경쟁 일변도의 시험 공부>일 따름이다.

 

이런 것은 '공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한번도 '공화'(함께 잘 살자)의 이념을 생각해본 일 없던 국가에서,

교육은 항상 '각개 전투'식 '사교육'이었다.

학교를 공교육 기관이라 부르는 건, 한국에서 어불성설이다.

 

자식의 성적을 위해 부모들이 촌지를 바치기도 했고,

자모회를 만들어 회식을 시켜 주기도 했다.

스승의 날이면 상품권을, 심한 경우 봉투에 수표를 넣어 보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안녕하지 못했다.

 

한때 제도권 교육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 교육'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대안 교육은 또다른 '내 자식만' 생각하는 '사교육'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는 늘 문제되는 '개인'을 이야기하지만,

그 역사에 묻어지나가는 '나머지 숱한 개인들'도 같은 상흔을 입게 된다.

강의석이 종교의 자유를 내걸고 사학 재단과 싸웠지만, 그도 서울대 입학생으로 신문에 실린다.

그리고 이런 강의석들 역시 '안녕들 하지 못한' 시대를 함께 살아 간다.

 

공교육이라면, '저항과 연대'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만, 오로지 '선착순'의 줄세우기 경쟁과 '순응'에 너무도 익숙한 한국 교육 현실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문제집만 팔리는 도서 시장도 다 한국 사회가 만든 기형적 사고이며,

의대로 쏠리는 성공 신화도 IMF 외환 위기 사태 이후 겪는 공통의 트라우마의 결과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중학교 내신 상위 2% 안쪽의 학생들이 생활하는 학교다.

아이들은 열정적이고 똑똑하고 활발하지만, 경쟁의 틀 안에선 역시 줄을 서게 된다.

 

이 책을 읽고 태도가 바뀔 부모는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이 책은 애초에 여러 가지 지면에 실린 잡문들이 모인 것이라

독자들에겐 불편한 이야기로만 가득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아파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현실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문제는, 언제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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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삶과 생각을 바꿀 부모와 교사와 아이들 나오도록
저마다 힘을 쏟을 노릇이라고 느껴요.
정치로는 바꿀 수 없기에 교육이 아름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