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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게 가난한 사회 - 이계삼 칼럼집
이계삼 지음 / 한티재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밀양송전탑 싸움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학습은
정치 공간이 '허당'이 되어버릴 때, 국가와 시민이 직접 부딪힐 때 재난이 도래한다는 것이다.(229)
한국의 정당은 '김영삼당'과 '김대중당'만이 있었다.
그들이 죽은 지금, '야당'은 세월호 앞에서도 침묵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탄핵 지점에서 국민들이 촛불을 드는 것도, 그 야당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터널', '판도라', '해운대' 같은 재난 영화처럼,
세월호와 최순실 사태 이상의 재난은 만나기 힘들다.
이 정부 5년 안에 폭탄이 어떻게 터지든, 그로 인해 사회가 어떻게 격랑 속으로 빠져들든,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반복된 투쟁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음을 예감하게 된다.
이 거듭된 반복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리라.(259)
광장의 촛불은 이 반복을 사랑하게 된 지점이기도 하다.
눈이 내려도 오히려 촛불은 더 거세게 들불로 타올랐다.
이계삼의 칼럼집은 수년 전의 이야기들인데도, 세세한 사건들을 짚어가면서 의견을 제시한 측면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유용하다.
보통 칼럼집들이 지난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서 맥이 빠지는 것과 다른 이 책의 '가치'다.
이계삼의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건'들을 통해 '맥락'을 잡아낼 줄 알고,
이 '사태'들의 핵심은 '정치'이며, 그 정치가 '권력 쟁취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삶을 위한 '녹색'의 그것이어야 함을 철학으로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힘이 생긴 것이다.
홀로 공부하여 성공했고, 지금도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되는 히키코모리형 관료들로 채워진 나라.
히키코모리형 지도자.
타자성을 체험하지 못한 교육은, 정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 정권에 필요한 것은,
무수한 말, 토론, 수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이며 거기서 얻게 될 타자성의 체험이다.나라 망한다고?
세상은 지배자들의 탐욕과 사치로 망했으면 망했지,
민주주의를 향한 분출과 혼란의 소용돌이 때문에 망한 적은 없다.(263)
3년 전의 칼럼인데도, 마치 요즘 시국을 읽는 듯한 힘이 있다.
교단을 떠난 그가 요즘 화두로 삼은 단어가 <교육불가능>이다.
나를 있게한 모든 것들이 내 발목을 잡는다.(공각기동대, 98)
요즘 대학 입시 시즌이다.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꿈도 희망도 아니다.
체제에 적응하도록 스스로 거세하는 자만이 승자처럼 보이게 되는 현실. 그것이 발목을 잡는다.
우리에게는 '가설극장' 같은 정당 정치를 구경할 시간이 없다.
자기 터전에서 벗들과 함께
일상과 공부를 나눌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한다.
오래오래, 질기도록 싸우기 위하여.(103)
이 구절에서 '벗'이 마음에 남는다.
정당 정치에 마음을 주고 쉬면 안 된다.
벗들과 함께 꾸준히 광장에 나서야 한다. 질기도록...
탈핵운동과 반올림, 밀양송전탑의 흐름은 같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탈핵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는 알고 있다.
교육의 자리도 적당한 개혁은 있을 수 없음을 잘 안다.
훌륭한 교육 체제를 갖춘 나라들은
거의 200년에 가까운 갈등과 시행착오의 역사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 역시 우리가 200년 뒤에 이룩해야할 교육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한국에서는,
가난을 겪은 세대가 아직 살아있는 여기에서는, 학교는 계급 상승의 장이기도 하다.
자식의 삶에 미칠 수 있는 부모의 영향력 또한 더없이 가녀린 시대에
부모가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울이는 관심은
대개 이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 스스로의 불안과
그간의 좌절의 기억에서 배태된 보상심리를 투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경우, 가르치려 드는 부모보다 아이들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88)
386 세대의 부모들은 무식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어도 그들은 잘 자랐다.
'실눈뜨고 볼 것'
이것을 배워야 한다.
이계삼의 칼럼들은 녹색 평론과 밀양 싸움 등을 통해 많이 접했던 것이지만,
책으로 만나니 새롭다.
칼럼이 몇 년 묵은 뒤에도 새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한 좋은 글들로 가득하다.
이 촛불의 광장에서,
박근혜만 물러난다고, 김기춘을 벌준다고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 믿지 않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런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하고 싶다.
좋은 세상은 어떤 곳일지를...
같이 꿈꾸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