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1192

 

김예슬씨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전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우리들의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25년간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큰 배움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겐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탐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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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29일. 10여분 전 11시. 예술의 전당 앞. 누가 아는 체를 하여 고개를 돌리니 바로 옆에 내 오랜 친구 J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는 거다. 얼마 전 여행도 함께 하였던 친구다. 11시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단다. 나 역시 11시에 친구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한 친구들은 연중행사처럼 일 년만에 만나는 대학 때의 친구들이다. 

우연의 해후에 마음이 붕 뜬다. 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역시 친구가 좋다. 

각자 친구들을 만나고서 함께 관람한 전시가 바로 이 루오전이다. 이리저리 흩어져서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또 제각기 오디오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충분했던 것 같다. 

루오라는 화가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 보도자료만 보아도 될 것 같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8778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에 붙인 작품 제목이다. '가끔은 여정이 아름답다'처럼 시적인 울림이 있는 제목이 많은 데 루오가 직접 붙였다고 한다. 특히 <미제레레>라는 일련의 작품에 붙인 제목에 눈길이 가서 작품도록을 사볼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참기로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먼저 위 기사에 실린 글에서 조금 인용해보면,

다만 루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강박증이 있었다. 한 일화로 당시의 드가, 세잔, 마티스, 피카소의 수집가로 유명한 화상 볼라르(A. Vollard 1865~1939)가 있었는데 그는 루오를 높이 평가해 그 작업실을 통째로 산다. 그런데 그 화상이 1939년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 이후 루오와 볼라르집안 사이에 소유권문제로 재판이 열리고 1944년 루오가 승소해 그의 작업실작품을 돌려받으나 그 중 315점은 공증인이 보는 데서 태워버린다. 1958년 루오가 죽자 그의 미망인이 그림을 1963년 국가에 기증했고 퐁피두미술관에서 보관해왔다.


전시회 한 코너에서는 루오가 그 315점의 그림들을 불 속으로 던지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치열한 작가 정신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온통 불 속으로 던질 것 만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나름 충격적이었다.

다만 우연히 해후한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쁨처럼 그저 가끔은 삶의 여정이 아름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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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들과 함께 한 짧은 여행

-홍콩 찍고 심천 찍고 (2010.1.8~1.13)

1. 2009년 해가 저물기 몇 시간 전. 한 통의 문자가 왔다.

“건강하고 즐거움이 함께하는 2010년 되길 기도한다.”

이 친숙하고 도발적인 반말투라...짐작은 가지만 확인 문자에 들어간다.

“뉘시더라.”

득달같이 걸려온 전화, 자기도 몰라본다고 기막혀하는 친구, 종학이었다. 전화 연락이 없어도,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도, 늘 내 마음 속에 늘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랜 옛 친구였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나온 한마디가 나를 질투의 광풍에 휩싸이게 했는데, 며칠 후에 성란, 인자와 함께 중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인 동관이란 곳은 종학이의 남편이 사업차 둥지를 튼 곳으로 남편 보러 가는 길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라, 나만 두고... 말도 붙여보지 않고...

종학이는 나의 오랜 친구이다. 1973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29번이었고 나는 30번이어서 일 년간 짝이 되어준 친구였다. 그러고 다음 해 2학년에 올라가서는 내가 23번, 그가 24번이 되어서 다시 짝이 되었다. 키순으로 정한 번호였는데 일 년 사이에 키가 자란 그와 성장을 멈춘 나와는 그때만 해도 거기서 거기였었다.

그러다가 3학년에 올라가서 나는 10번으로 급추락했고 한 뼘을 자란 그는 그만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던가. 내 눈높이를 벗어난 그는 인자란 친구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성란이란 친구가 그들 옆에 있었다. 질투어린 시선을 감춘 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종학이와 나는 같은 여고를 가게 되었다.

성란이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지만 중학교에 와서야 친하게 되었다. 성품이  소탈한 그를 한때 “코빼기”라고 부르며 삼각자를 가지고 코끝을 콕콕 장난삼아 찌르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그런 재미없는 별명을 붙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의미 없는 이름 쓰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아마 그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2년간의 단짝을 버리게 한 종학이의 새 친구 인자. 그는 정열의 화신 같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도 잘하고 흥분도 잘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던 우리가 종학이를 제치고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길고 긴 백수로 암울한 세월을 죽이고 있을 때 내 옆에 있어준 친구가 인자 이 친구였다.

 

더 따질 것도 없었다. 비자랑 항공권은 진작부터 준비해놓고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이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로 했다. 비자? 항공권? 그거야 내 전공이란 말씀이지.

2. 1월 4일. 서울. 25.8cm의 폭설이 내리다. 41년 만이란다.

연휴가 끝나고 실질적으로 한해의 업무가 시작되는 날이다. 제일 비용이 저렴한, 3박4일이 소요되는 관광 비자를 이날 신청하지 않으면 여러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동네 여행사에 신청하면 좋으련만 시간상 하루의 여유조차 없어서 직접 서울 종로에 있는 중국비자 전문 대행업체를 찾아가기로 한다.

오전 6시. 모처럼 서울 간다면서 쫄랑쫄랑 따라나선 중1 짜리 딸아이를 깨워 아파트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냥 눈이 내리나보다, 했다. 이른 새벽이라 생각되어 너무 일찍 가는 건 아닌가하고 우려했으나 서울에 내린 폭설 때문에 하마터면 제시간에 닿지 못할 뻔했다. 출근 대란이 있던 날 아침이었으니 8시 30분 이전에 도착한 건 아마도 행운이라고나 해야겠다. 늦어도 8시 40분까지는 와야 한다는 절대 시간 엄수로 전날 밤 밤을 새우다시피 했었다.

종각 입구에서 밖으로 나온 순간, SF영화에서나 봄직한 지구 말세 분위기에 온몸을 떨었다.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낯선 광경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마치 전투에 나선 양 사무실 탐색에 들어가자니 자못 비장감마저 들었다. 대단한 아침이었다.

 

3. 항공권 문제도 해결했다. 처음엔 친구들이 예약한 출발시간과 비슷한 외국항공사 항공권을 탐색해보았으나 결국 친구들이 예약한 OZ 721 홍콩행 아시아나항공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트래블게릴라>, <탑항공> 등은 여의치 않아 <여행박사>에서 확인해보니 4석이 남아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예약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지난여름(8월) 홍콩에 갈 때는 대한항공으로 tax 52,900원 포함 413,900원이었는데 이번에는 tax 93,000원 포함 593,000원이 들어갔다. 홍콩은 겨울이 성수기이던가? 하여튼 항공권은 미리미리 확보해야할 일이다.

지난여름, 홍콩엘 다녀와서는 ‘언제나 홍콩에 다시 가보나’했었는데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까짓 항공권 좀 비싸면 어떠랴. 친구들과 가는 해외여행도 처음인데.

4. 1월 8일 출발일.

잠 못 이루는 밤, 새벽 3시에 일어나 홍콩 가이드북을 뒤적였다. 홍콩에서의 체류시간은 7시간이다. 지난여름에 이곳을 다녀왔으니 아는 체 좀 하려면 예습이 필요했다. 시험을 앞두고 남 몰래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가슴이 펄떡거린다.

오전6시.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가벼운 배낭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니 늘 보이던 택시는 보이지 않고 터미널행(전철역) 시내버스가 온다. 새벽이라 빠르겠거니 생각하고 일단 버스에 올랐다. 넉넉잡아 30분 예상했던 버스 탑승 시간이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50여분이 걸렸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계속해서 일이 어긋나듯 꼭 그 꼴이 될 줄이야. 잔머리 굴려, 버스에서 바로 연결되는 예술회관역에서 내렸건만 하필이면 백화점 연결 통로와 맞물려있는 곳이라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출입구를 향해 뛰다보니 신기할 정도로 빙판 길도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왜 있잖은가. 긴 휴가 끝이나 개학 전날, 출근하는 꿈을 꿀 때 그 기분 말이다. 출근 날, 계속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엉켜버리는 데 그 꿈을 꾸면서 그래도 ‘이건 꿈이야, 어휴’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험 말이다. 내 꼴이 바로 그랬다. 당황스러웠다. 허나 이건 꿈도 아니고... 아찔하기까지 했다.

인천도시철도의 종점인 계양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내려서는 다시 뛰어 탑승수속을 밟는데 자동기기인 kiosk는 하필이면 내 앞에서 다운되어버리고, 제복 입은 직원에게 부탁하여 긴 줄 제쳐가며 겨우 탑승수속을 마치고나니 출국심사대에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겨우 겨우 탑승게이트 앞에서 원망의 눈초리 가득한 친구들 얼굴을 보니 그제야 비로소 요의가 느껴졌다. 비행기를 수십 번 탔어도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5. 홍콩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종학이의 신랑이 렌터카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렌터카 여행이라... 웬 호강? 늘 ‘나 홀로 여행’에 익숙하다보니 공항에서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은근히 부러웠는데...ㅋ ㅋ ㅋ  


지난여름에 홍콩에 다녀왔다는 내 경험 덕에 졸지에 홍콩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가이드는 무슨... 짧은 일정이지만 지난번 가봤던 곳만 갈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빅토리아 피크와 하버시티, 그리고 지난번에 가보지 못한 홍콩의 명동이라는 코즈웨이베이를 넣었다. 말만 하면 데려다 주는 렌터카 기사 덕에-물론 친구 남편 덕에- 아주 편하고 우아하게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다. 고맙고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코즈웨이베이 쇼핑몰에서 발이 묶일 줄이야. 친구 인자의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된 것이다. (친구야 미안해 이런 표현 쓰는 것) 쇼핑 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뒤집어썼는지 이 친구, 무아지경에 빠져 쇼핑에 나선 것이었다.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빠져있는 이 정열의 여인의 그 거룩한 몰입에 전염돼 감히 아무도 이의를 달거나 거역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나니까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게지 다른 친구들은 불평 한마디 없다. 대단한 인내심이다. ‘오랜 친구’란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나할까.

6. 1월9일 Shopping Day

호텔방은 두 개가 예약되어 있었다. 종학이 남편 기홍씨의 철저한 준비 덕택이었다. 인자와 내가 하나, 성란이와 그의 고3 짜리 딸아이가 하나.

새벽까지 이어진 인자와의 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들어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짠하고 아팠다.


오전부터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 까르프와 월마트가 있는 곳으로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고, 평소 기홍씨와 거래가 있는 상점들이라 마음 놓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기홍씨는 이미 물건 가격까지 꿰뚫고 있었다.

해외여행은 처음인 인자. 여행 간다고 주위 사람들 여럿이 여비를 챙겨주었다 한다. 몸 전체가 기쁨 바이러스인 이 친구의 그 도저한 매력을 어이할까나. 주위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 선물을 고르고 또 고르는 이 친구의 못 말리는 쇼핑 몰입에 오늘도 묵묵히 동참할 뿐이었다.

쇼핑 바이러스 탓이었다. 성란이도 인자 못잖은 품목을 확보하였고,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친구들의 쇼핑을 비웃던 나 역시 덩달아 가방 몇 개를 골랐다. 내게는 여행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자는 나처럼 뻔뻔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나이에 해외여행은 처음인 것도 그렇고, 여행 와서도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도 그렇다. 인자야, 다음엔 선물일랑 잊어버리고 여행 자체에 빠져들기 바래.

7. 거대한 중국을 만나다.

우리가 머문 동관이란 곳은 이를테면 신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흔히 중국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옛 모습을 살펴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저 그들의 일상 속에 잠시 며칠 있어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니..

기홍씨가 동네에 있는 발 마사지 하는 곳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그렇게 여러 번 여행을 다녔어도 발 마사지는, 내게 어색하고 낯선 분야이다. 패키지로 백두산에 갔을 때 딱 한 번 받아보았는데 그저 흉내만 내다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곳은 규모부터가 상상을 초월한다. 워낙 이쪽으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기도 하겠지만 호텔방처럼 죽 늘어선 대단한 규모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관광지도 아닌 동네에 있는 마사지 가게들이 원래 이렇게 거대한 지는 잘 모르겠다.

두 시간에 85위안(약 15,000원)하는 마사지를 받고 있자니 몸은 노곤해지면서도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같이 마른 몸매를 하고 있는 마사지 아가씨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들은 피곤하거나 아플 때 누구한테 몸을 맡기나, 하고. 에이, 쓸 데 없는 생각...

 

규모에서 나를 압도한 곳이 또 있었으니, 바로 식당이었다. ‘나 홀로 여행’에 익숙한 나는 (우리 가족은) 여간해서는 값 비싼 식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서민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식당에서 한 끼 식사 때우기는 예사여서, 음식이란 그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마카오에서였던가. 화려한 호텔 뒤에 있는 선술집 같은 식당에 들어가 그네들이 먹는 밥을 가리키며 똑같은 것을 주문해서 먹게 되었는데 끝내는 입맛이 맞지 않아서 도중에 수저를 놓고 말았다. 대만의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현지 식당에서도 우리는 입맛이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인도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인도식 만두 사모사를 사 먹을 때는 걸레인지 행주인지 모를 시커먼 행주로 닦아주는 그릇에 담아주는 것을 보고 남편은 끝내 장염에 걸리고 말았었다. 이런 기억은 아주 많은데, 일본에서도 값이 저렴한 대중식당일 경우에는 음식이 느끼하고 기름이 져서 소화해내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하나. 어느 나라든, 누구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놓는 곳은 고급 식당이라는 것이다. 몇 번 먹어보진 않았지만, 큰 호텔 뷔페 같은 경우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다닐 생각은 없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러던 나였으니, 기홍씨가 안내한 식당을 보고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무리의 일행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홀이 100여개나 있는 거대한 식당이었다. 한국에서도 먹어보기 겁나는 바닷가재를 주문한다. 차례차례 나오는 모든 음식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리란 이런 거야. 종학아, 이 웬수를 언제 갚냐?

옆에 앉은 성란이와 독한 중국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니 한층 흥이 났다. 여행 오기 전, 술친구 없을까봐 걱정했다는 이 친구. 20대 초반까지 어울리다 이후로 30대, 40대를 건너뛰었으니 모를 수밖에. 그래도 옛 추억에 잠겨 한잔 두잔 잘도 넘어간다. 술김에 한마디 나온다. “성란아, 내가 집에 내려가면 인자보다 너 먼저 불러낼게. 술 한 잔 하자 잉?” “그려, 그려” 성란아, 너가 이렇게 대답한 것 맞지?

8. 짝퉁 왕국, 중국을 만나다.

심천(Shen Zhen), 중국 최초의 경제 특구 지역이라 한다. 홍콩에서 자동차나 열차로 약 40분 걸린다. 이곳을 친절한 기홍씨 덕에 이틀에 걸쳐 구경했다.

흔히들 마카오, 홍콩, 심천을 한 번에 둘러보는 데 나는 시기를 달리하여 각각 따로 따로 경험을 했다. 대만도 따로 다녀왔다. 왜냐? 서로 다른 나라니까. ㅋㅋㅋ

소위 1국가 2체제라 하여 국가로는 중국이라는 한 나라이지만 각각 기존의 체제를 인정하고 유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대만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중국 측의 구상으로,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 회수를 위한 방안으로 우선 적용되었다. 즉,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를, 대만․마카오․홍콩은 자본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다.’(<홍콩, 천 가지 표정의 도시>유영하 지음)

따라서 이들 지역은 화폐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심천은 중국에 속해 있어서 중국 비자가 있어야한다. 물론 다른 지역은 무비자 입국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이들 지역을 중국이라는 한 나라로 인식하기에는 사실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마카오의 공기와 대만의 공기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심천은 분명 중국에 속한다. 전시적이고 획일적인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곳이 심천의 관광거리인 세계지창(Window of the World), 스플렌디드 차이나(Splendid China), 그리고 중국민속촌(China Folk Culture Villlage)이다.

 

중국의 명승지를 모형화한 스플렌디드 차이나, 중국의 소수 민족을 모아 놓은 민속촌, 세계의 명소를 축소시켜놓은 세계지창.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짝퉁이라는 것이다.

중국민속촌에서는 그곳에 입주(?)한 소수민족들의 작은 공연들이 성황을 이루는데 그중 티벳의 장족 공연 마당이 내게는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그들 종교의 진언인 ‘옴마니밧메홈’으로 시작하는 공연은 구경꾼들에게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어버린 마당에 뭔 흥이 나겠는가.

힘으로 밀어붙이며, 세계를 삼킬 듯 거대한 입을 가진 중국의 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 내가 느낀 심천의 모습이다. 설마 전 세계를 접수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짝퉁 왕국으로 만족하길 바랄 뿐이다.

 

9. 누구나 진땀을 흘리지만...

내가 진땀 흘린 얘기는 이미 했었다.

성란이...아침마다 우리를 깨워 제시간에 아침밥을 먹게 하던 성란이가 마지막 날 아침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역시나 짐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다. 호텔 체크아웃을 앞두고 닫히지 않는 트렁크 뚜껑과 싸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다. 공항버스 놓칠세라 모두들 노심초사다.

 

종학의 딸, 도연이...공항버스에 올라 여권을 확인해보니 엄마 것을 잘못 들고 왔다. 항공권도 엄마 것이다. 엄마는 며칠 더 머물다가 나중에야 가기로 되어 있었다. 고도의 작전이 전개된다. 긴장감 넘친다고 해야 하나, 박진감 넘친다고 해야 하나. 이십 여분 후, 픽업 차 들른 다른 호텔에서 종학이 내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이 어려워....

인자...저 혼자 독야청청하랴. 설마 했는데 인천공항 세관에 덜미가 잡혔다. 짝퉁 물건을 좀 산 게 들통이 났지만, 이 매력적인 여인네의 진심어린 호소를 누가 무시할 수 있으랴. 무사히 통과.


성란의 딸, 혜원... 멋진 필름 카메라를 갖고 와서 정말 폼 나게 사진을 찍었는데 어쩐 일인지 사진 한 장 뽑을 수 없게 되었단다. 허무감에 진땀 좀 났을 게다, 어린 것이...


종학이 내외...친구들 대접하느라고 정말 진땀 꽤나 났을 게다. 말이 5박 6일이지, 나는 엄두도 못 낸다. 자손 대대로 복 받을 거야. 정말 고마워, 친구야! 
  

 

* 다 쓰고나니 아쉬운 부분이 남는다. 인자가 염색하지 않은 내 흰머리 보기 싫다고 작정하고 준비해온 게 있는데, 바로 일회용 장갑이다. 다행히 염색약은 깜빡 잊고 와서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너니까 내 생각해주지, 하는 감동을 잊을 뻔했다.  

 

** 심천에서 야간에 관람한 대공연이 여운을 남긴다. 말 그대로 '물불 가리지 않는 대륙적인(?) 공연으로 평균 등장인물 50여명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사실은 그 공연이 내게는 감당이 안된다. 내 감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쇼였다고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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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하면서 쪽팔리는 일 중의 하나가 이럴 때이다. 

툭하면 무단 결석하는 한 여학생이 있다. 일주일만에 등교하고서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감히 더 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한다. 눈치를 보는 입장에 서는 것은 선생인 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학생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절대로 받지 않는다. 그러면 문자를 보내본다. 절대로 답신 한 번 하지 않는다. 딱 한 번 통화한 적은 있다. 아마도 실수로 얼떨결에 받았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이후로는 절대로 전화에 응하지 않는다. "전화주십시오"라고 눈치를 보며 살살 문자를 보내보는 것은 선생인 나다. 

나의 이런 무능에 보다못한 학년 부장이 한 번 거들고 나왔다. 이판사판 귀싸대기에 온갖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한판 맞붙었다. 결국 녀석이 두 손 들었다. 그 후 얼마동안은 고분고분해졌다. 이런 기싸움, 나는 절대로 하지 못한다. 나는 말싸움조차 싫어해서 절대로 싸워야하는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다. 기싸움으로 학생들을 다스려야하는 경우, 나는 정말 선생하기 싫어진다. 

어제. 이 녀석이 무단 조퇴를 해버렸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너무나 당차고 맹랑하다. 오늘 아침, 심호흡을 하고 녀석에게 묻는다. "한마디쯤 해야하지 않겠니?" 돌아오는 답변에 그냥 모든 걸 접기로 했다."어떤거요?"  

몇마디 말로도 충분히 지도가 가능한 대부분의 나머지 아이들을 위해 솟구치는 부아를 꾹꾹 눌러 담는다.

악다구니로 학생과 싸워야하는 일,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 고상하게 대화로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것도 낯 간지럽고 우스워서 그것도 못하지만 이런 소모적인 전투(?)에도 절대로 적응하지 못해 매번 쩔쩔맨다.  

아, 당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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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비고사 세대다. 커트라인이라는 게 있어서 지역별 합격, 불합격 점수가 분명했었다. 보통 340점 만점에 200점은 넘어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커트라인이라 부르는 점수였다. 당연 지방의 커트라인은 20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진학하고자 하는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고사를 치르고서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예비고사를 치르고나서 2년 후, 학력고사라고 불리우는 시험이 예비고사를 대체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수능이 생겨났다. 대학입시와는 관계없는 시절을 보낼 때라서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고 교직에 들어온 이후 몇 번인가 대학입학관련 시험에 감독으로 차출되었다. 2010년 수능감독으로, 그러니까 어제도 그 몇 번째의 시험감독으로 차출되었는데 모처럼이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감히)수험생 못지않은 긴장감을 풀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시험 감독관이라고 말할 수있다. 감독을 해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감독 잘 못하면 일년치 재수 비용까지 물 수도 있다는 사전 교육까지 받고나면 이건 스릴만점의 초특급 영화 한 편 보는 것 이상이라고나 할까. 흠,온몸으로 보는 영화가 있다면 모를까....과장이 좀 심했다. 

하여튼 초긴장 무료함(이 말 뜻을 아실런지)의 감독을 모두 마치고나니 이미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학교 교문밖 도로엔 학부모의 차량들로  빈 틈이 없었고, 학부모들이 초조하게 서성이며 자녀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능시험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며 세계다. 그것도 교묘하게 진화하는 세계다. 예비고사에서 학력고사로, 다시 수능으로 진화하면서 확실하게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세계다. 인간이 만든 제도에 옴짝달싹 못하고 매어있는 꼴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한심한 세계임에 틀림없는데 감히 이 세계를 이탈할 꿈을 꾸지 못한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예비고사 시절의 영어 문제와 지금의 영어 문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원시성에 가까운 예비고사를 치렀던 세대에겐 지금의 문제 수준이 가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학습과 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고도로 진화되고 발달된 학습 덕택에 시험 수준이 상당히 높은 단계에 진입했다. 이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몇 년에 한번씩 수능 감독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수준이 한없이 높아진 문제에 잠시 넋이 빠져버린다. 이래도 되는가?하고. 시험이라는 이 비본질적이고 물질적이고 몰인간적인 거대한 권력 앞에 그저 눈치나 보며 하나라도 더 정답을 맞추기위해 온갖 굴레와 비굴함을 언제까지나 참고 견뎌내야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그것도 자자손손 대대로. 언제까지나. 

참으로 재미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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