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라닥 지방을 유명하게 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이다. 그의 책 <오래된 미래>가 청소년 필독도서로 자리 잡기도 했는데, 하여튼 라닥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의 이 책을 읽고 가거나 들고 간다. 나도 예전에 이미 읽은 책이지만 여행 가방에 챙겨 넣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공사장의 흙무더기 같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산으로 에워싸인 레(라닥 지방의 수도)는 이미 외국인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동네가 되었다. 이미 나부터가 그런 여행자 중의 하나가 되어 레를 오염시키고 있었으니 레에 머무는 나흘 동안 얼굴이 붓는 고산증과 더불어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말만 들어도 정겨운 자급 경제라는 용어. 이들은 병풍처럼 둘러싼 고산 꼭대기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젖줄 같은 물로 세심하게 물길을 내어서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며, 서로 얼굴 붉힐 줄 모르며, 서로 도와가며 늘 웃는 얼굴로 살았다는, 전설 같은 동네가 바로 이 라닥 지방이다. 지금은 낯선 이에게 던지는 “줄레,줄레”(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라는 인사말에서 그 희미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자급자족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 못해, 호기심 찬 눈빛을 번득이며 오늘도 여행자들은 라닥 지방을 휩쓸고 다닌다. 라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소위 문명이라는 세례를 받고 옛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지고 있다. 나는 뭘 보려고 왔나?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잃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려고 왔나? 이 그림 같은 삶의 원형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관찰자가 되어 세상 저 바깥쪽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쓰레기를 하나 보탤 뿐이다. 




(위 사진)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말로만 듣던 오아시스가 이런 모양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위 사진) 레의 한 호텔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이다. 새벽에 이 풍경을 바라본다면 틀림없이 외계라고 착각할 것이다. 세계의 비밀을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참으로 별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달빛 어린 그 기막힌 풍경을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 살짝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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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왼쪽은 비행기에서 나눠준 간식 봉지, 오른쪽은 눈알만한 청포도 사탕. 

라닥 지방의 수도 레(해발 3,505m)에서 찍었다. 그곳 사람들의 말대로 15%의 산소가 부족한 곳이어서인지 과자 봉지도 이렇게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 이후인 사람들은 오히려 고산증에 덜 걸린다는 게 맞는 말인지, 약간의 두통 외에는 이렇다할 증세를 못느끼는 우리 내외와는 달리 중2짜리 딸아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자리에 눕고 말았다.(물론 나 역시 과자봉지처럼 얼굴이 퉁퉁 부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영 낯설기만 했다.)

구토, 설사, 온몸 저림 등등 나중에는 열 기운까지 합해져 일정에 들어있는 판공호수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차로 넘을 수 있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은 길인 창라(5320m)를 넘어 가는 일정이었다. 

 

 

 

 

 

 

 

 

 

 

 

 

다른 일행들이 판공호수에 발을 담글 무렵 우리 가족은 이틀에 걸쳐 레에 있는 정부 운영 종합병원을 드나들었다. 첫날, 2루피(1루피=약26원)를 내고 진찰을 받은 후 처방전을 갖고 약국에 가서 10루피어치 약을 사서 딸아이에게 먹였다. 열은 가라앉는 듯했는데 밤새 몇차례 설사를 했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구토증세가 가라앉지 않아서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찰비를 다시 낼 필요가 없단다. 어제 받은 처방전을 그냥 들고가서 진료를 받으란다. 인도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예를 딸아이에게 설명해 줄 좋은 기회였다. 터무니없는 진료비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아파도 병원에 못가는 미국의 의료제도와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이 무료에 가까운 진료는 오바마도 따라오기 힘들지 않을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라닥인들 사이에서 딸아이의 순서를 기다리자니 몇 명의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온다. 딸을 가리키며 나이를 묻는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어떤 젊은 엄마는 고작해야 20살을 넘겼을까말까. 그 틈새에 처녀같은 소녀가 앉아있으니 헷갈릴 수밖에. 외국에 나오면 만 나이를 써야할 것 같아서 어제 진료권을 끊으며 13살이라고 했더니 다름아닌 소아과로 우리를 보냈던 것이다.

딸아이는 이렇게 고생한 덕분인지 보름새에 몸무게가 3kg이나 빠졌다. 비싼 돈들여가며 뺀 살이니까 이후부터는 관리를 잘하려무나, 딸내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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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북극과 더불어 세계 3대 극지 중의 하나라는 히말라야. 그 세계의 한  끝을 만나고 왔다. 그러나 그것이 자랑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두 다리로 직접 걸어갔다면,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가능한 일이라면 뭐 자랑할 만 하겠지만 사실, 내가 그곳에 닿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많은 도움과 손길이 필요한 일이었다. 자동차로 넘을 수 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고개라는 탕그랑라(해발5,360m)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타고 있는 지프차의 운전기사에 대한 절대적인 의탁과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 높이까지 길을 닦고 포장하는 일에 종사한 무수한 사람들의 노고 없이는 절대 가당치도 않을 일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길을 닦느라고 땡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너무나 까맣게 그을려 이목구비도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10대로 보이는 어린 사람들도 많다. 누구는 그렇게 피땀 흘려 길을 닦고, 누구는 이렇게 냉방이 잘 된 지프차에 앉아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자동차 추락 사고에 겁먹으며 벌벌 떨고 있다.


천 길 낭떠러지의 벼랑 길을 구비구비 자동차로 달리는 기분. 그건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강원도 한계령이 해발 920m이니까 약 6배 정도 곱한 기분이라면 설명이 될까. 비좁은 천 길 낭떠러지 도로 위에서 맞닥뜨리는 추월이나, 맞은편에서 오는 차량을 위해 도로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경우에도 오금이 저리긴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그 아찔함에 차라리 눈을 질끈 감거나 의도적으로 다른 생각에 빠져드는 방법 밖에 없다. 만의 하나 운전기사의 찰나의 실수로 자동차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저 아래에 처박혀있는 차량 신세가 되었을 터. 누구의 모토처럼 '여행하다가 죽어버려라'의 장렬한 문구처럼 장렬한 죽음이 될 터. 살 빼고 싶은 사람은 이 험준한 산맥을 한 번 넘어보시길...강추! 

  

  

 

 

 

 

 

 

 

 

 

히말라야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서 감정의 소용돌이는 극에서 극까지 넘나들었다. 극지가 주는 저 끝모를 극과 극을 사진 몇 컷과 문장 몇 개로 정리하자니 너무나 미흡하고 개운치가 않다. 4~5천 미터급의 준봉들이 내 눈높이와 나란히 달릴 때는 목이 메어오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그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산들은 태초의 세상 모습이거나 혹은 지구 멸망 후의 마지막 모습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통해 둘러 본 히말라야이긴하지만. 

그런데 정말 용감한 사람들도 있었다. 30대 초반쯤의 어떤 미국인 커플은 오토바이로 그 험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주유소에서 마주친 그들을 보고 비명처럼 한마디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You are great!" 뉴욕에서 왔다는 그들의 시퍼런 젊음이 너무나 눈부셨다. 그렇게 얼마쯤 달리니 이번에는 자전거 커플이 눈 앞에 들어왔다. 이번엔 남편이 유리창을 내리며 그들을 향해 비명을 지른다. " Awesome!!!"

이렇게 글을 덧붙여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히말라야 자락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라고 다짐하듯 여행을 마쳤지만 말이다. 온갖 세상사에 대한 시름을 한방에 날리며 원초적인 세계의 한 끝을 살짝 보여주었던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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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나가르 신문
 

 이 사진은 2010년 8월 3일 스리나가르에 있는 달호수의 하우스보트에 머물 때 숙소 주인이 건네준 우르드어로 된 그 지역 신문이다.

현재는 폭우 때문에 인도 북부의 마날리-레-스리나가르 구간이 폐쇄되어서 그 지역에 갇힌 여행자들의 안위를 걱정해야하지만, 불과 일주일 전에는 카시미르 지역의 분리투쟁 때문에 여행자들의 발이 묶인 상태였다.  

이 신문을 전해준 나이 지긋한 주인은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아무런 관련도,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여행자인 우리에게 카시미르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이 신문을 가져가라고 했다. 사진이 많이 실린 왼쪽 신문만 가져간다고 하니 "Only one?"하며 서운한 기색을 보이길래 읽지도 못할 오른쪽 장과 몇 장을 더 가방에 챙겨넣었다. 

장례식 행렬과 바리케이드가 처진 거리, 저항 수단이라고는 돌멩이 밖에 없는 시민들.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경찰과 군인들...80년의 광주사태를 지나온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아니 좀 싱거운 사진인데도 카시미르인인 이 주인은 시종 목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는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은 물대포를 쏜다고 한수(?) 가르쳐 주었다. 그나저나 60여년간 분쟁의 와중에서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체 얼마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역지사지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참혹한 삶일 것이다. 

7월30일부터 시작된 strike(그곳 사람들은 이런 시위를 이렇게 불렀다)로 21명이 죽었다고 방송에서는 떠들고 있으나 실제는 35명 이상이 죽었다고 주인은 주장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인 그의 어린 아들은 두달째 학교가 폐쇄된 상태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런 나라가 싫어서 미국,호주,캐나다 등지를 떠돌다가 돈을 벌어서 늦게 정착한 이곳이 이런 곳이라며 오직 카시미르의 독립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주인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No Pakistan! No India!를 부르짖는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 지역의 strike때문에 우리 일행이 이 스리나가르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레에서부터 우리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운전기사들은 두 명이 티벳인, 한 명은 라다크인이었는데 이곳 특유의 인종간의 갈등으로 스리나가르의 진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지는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리나가르에서 두 시간 거리인 소남마르그라는 곳까지 이 운전기사들이 우리를 데려다주고 그곳에서부터는 카시미르인들이 운전하는 지프차로 갈아타게 되었다. 

소남마르그에서는 동네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았다. 외국인들이 한무리로 몰려 있으면 극히 위험하다고 하여 우리는 일단 차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두 명씩 혹은 세 명씩 짝을 이루어 차에서 빠져나와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호텔에서는 방 세 개에 17명이 되는 사람들이 적당히 한무리씩 들어갔다. 전체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그리 긴장감은 없었다. 분쟁 지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여행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이런 상황에 담담한 내가, 대담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민방위 훈련을 받아온 덕이라고나할까. 분명 쇼는 아닌데 그것 참...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새벽 1시에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은데 군데군데 도로에는 돌무더기들이 한아름씩 떨어져 있었다. 저항군과 진압군이 대치된 상태에서 지나간다면 저 돌을 피할 수는 없었으리라. 이런 통행금지 상태를 이들은 curfew라고 불렀다.

이 통행금지 때문에 이곳을 벗어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6시에 아침을 먹고 7시쯤에 지프차에 올라 스리나가르 공항을 향해 출발했으나 공항 진입까지는 또 한참을 도로 위에서 기다려야했다. 오후 3시경에 출발하는 델리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아침 일찍 서두른 것은 우리 뿐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스리나가르 하우스보트에서 꼼짝없이 사흘간 갇혀있다가 새벽 2시에 공항에 왔다고 한다. 겨우 하룻밤 묶은 우리도 몸살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들의 기분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 일이었다.   

지상 낙원이라는 스리나가르의 옛 명성이 회복되는 날을 볼 수 있으려나.

 참고하시길...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81118100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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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여행을 시작해서 오늘 새벽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도북부 라닥(레) 지역 일대와 스리나가르를 돌아다녔다. 분리 독립을 외치는 카시미르 반정부 시위 때문에 호텔에 억류(?)되는 진기한 경험도 했는데,...눈가에 다크써클이 그려지는 고행 같은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할 것 같다.  

마무리 겸해서 들렀던 홍콩에선, 작년에 갔었던 어느 태국 식당의 주인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나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무척이나 감격스런 일이다. 그나저나 그 태국 식당의 모든 음식은 아무거나 시켜도 맛이 있었다. 인도 여행 끝이라 그런가...

인천공항을 빠져나와서 시내에 접어들 무렵, 딸아이의 한마디. "우리나라는 꼭 인도와 홍콩을 섞어놓은 것 같아."  TV를 켜면 역시 온갖 사고사건이 화면을 장식한다. 유치원 차량 폭발 사고, 시내 버스 폭발 사고...흠...홍콩 보다는 인도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돌아온게로 하루종일 빨래만 해대었다. 그 많던 옷걸이가 모자랄 지경이다. 

정신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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