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여행 방법은 이렇다. 

비행기 탑승을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전반은 내가 맡고 후반은 주로 남편이 맡는다. 여행지 선정 및 일정 짜기, 항공권 확보, 여권 관리 및 비자 신청, 가이드북 및 달러 확보, 숙소 탐색 및 예약, 배낭 꾸리기는 내가 전적으로 담당하는 데 물론 남편의 옷이나 소지품은 남편이 챙기긴 한다. 그것마저 내가 해주길 바라는 눈빛이 간절하지만 요것만은 아니 되옵니다. 중간 중간 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수시로 말해주지만 남편은 건성으로 들어줄 뿐, 나도 그저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고나 할까. 여행은 준비 과정 자체가 이미 여행에 들어간 건데 이 즐거움을 남편은 나누려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내가 완벽하게 꾸려놓은 배낭(이번 여행에서는 세 식구 모두의 배낭 무게를 합쳐도 10kg을 넘기지 않았다.)을 남편이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서면 그때부터 내 임무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일단 비행기에 탑승하면 무수리였던 나는 이제부터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남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지 탐색에 나서기 시작한다. 준비 과정에서 온갖 잡다한 정보를 미리 확보한 나를 데이터베이스삼아 지도부터 머리에 각인시킨다. 훌륭한 참모 덕택인지 아니면 타고난 공간지각력 덕분인지, 남편은 내가 그간 노력해온 과정을 단숨에 소화해내는 건 물론 지도력과 통솔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현지에 도착하면 고개를 몇 번 두리번거리면서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잡는다. 내가 남편을 보고 이 부분에서 매번 놀라는 것은 마치 사전 답사를 갔다온 사람처럼 현지 지리를 금방 파악한다는 점이다. "우리 몰래 먼저 와 봤었어?" 한마디 해주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남편, 귀엽다.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지만 어쩌다 서점에 가게 되면 꼭 들러보는 곳이 여행관련서적 분야인데, 이곳은 갈 때마다 조금씩 놀라곤한다. 진화라고 해야할까, 진보라고 해야할까. 자고 일어나면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는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가이드북이 나와있고 여행 에세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런 변화는 여행 과정에서도 일어나는데... 

분홍색과 하늘색(파랑색)으로 알록달록한 쿠폰북 모양의 항공권을 만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게 이제는 e-ticket이 일반적이다. 이 e-ticket에 겨우 적응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 술 더 뜬다. 발권을 무인 발권기에서 하라는 거다. 이 무인 발권기를 kiosk라고 부른 다는 것도 대한항공의 집요한 홍보 때문에 알게 되었다. 이메일로 무인 발권 방법을 알려주기- 이 이메일을 읽어봤는지 확인 이메일 다시 보내기- 출발 전날 휴대폰 문자메세지로 kiosk 사용하라고 압력가하기...완벽한 확인 사살이다.   

항공권 구입 과정에서 처음에는 애를 먹었다. 여행사(<여행박사>)에 대마도행을 일단 예약부터 하고보니 부산대리점으로 자동 연결이 되어서 부산 사람들의 구수한 사투리를 듣게 되었다. 개별 여행은 힘들 거라는 직원의 상담에 의기 소침해져 며칠 대마도행을 고민하다 취소하고 결국 홍콩행 항공권 구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런데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이 인천이라고 말을 했었건만 부산 출발의 비행편을 예약하는가 하면 인천 출발은 서울 본사에서 알아봐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자판 몇 번 두드려보면 다 나와있을텐데..귀찮아하는 게 역력하여 모두 취소시켜 환불 조치해버렸다. 

환불 조치 전에 그 여행사 사이트를 자세히 살펴보니, 항공권 구입을,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내 마음대로 항공사를 선택하고 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환불을 요구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예약금을 환불하지 않고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여행사이니까. 그러나 귀찮아하던 그 직원과 다시 통화하기가 싫었다. 사람이 오히려 불편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사 직원이 친절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항공권 구입부터 공항에서의 발권이 모두 컴퓨터를 상대로 이루어지니, 80년대 초반 일찍 결혼한 친구들의 제주도 신혼 여행 때의 왁자지껄한 공항 배웅같은 것은 구전되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행은 배웅도 환영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이렇게 컴퓨터를 상대로 한 일방적인 구입 행위를 통해 그나마 저렴해보이는 대한항공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숙소는? 어느 여행관련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홍콩 시내 중심가(침샤츄이지역)에 한인 민박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주소이다  

http://www.hansungmotel.com/ 

http://www.monicamotel.com/ 

http://www.parkmotel.co.kr/

http://www.motelgreenhouse.com/ 

이 외에도 더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우리는 이 중에서 모니카모텔에 묵었다. 이 숙소에서 좀 놀라웠던 점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여행층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부모 따라온 10대부터(우리 딸) 머리 희끗희끗한 60대까지를 이 짧은 기간에 모두 보았으니 말이다. 정해진 밥 시간에 식탁에 앉아서 밥을 넘기고 있으면 이들을 향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말을 걸고 싶고, 누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해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런 얘기도 오가지 않는다. 묵묵히 밥만 먹는다, 모두들. 낡은 작은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는 이 모텔의 숙박객은 모두 한국인이다.

외국에 있는 한인 운영 숙소를 단순하게 구분하면 이렇다. 한국인만 찾느냐, 아니면 외국인도 찾느냐. 외국인도 이용하는 숙소라면 일단 기본 서비스는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별 무리가없다. 그러나 한국인만 이용하는 숙소라면 최소 한가지 이상은 눈을 감아줘야한다. 화장실의 수도 꼭지, 샤워기, 변기 등의 시원찮음은 보통이다. 있잖은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70~80년대 관광지의 민박집같은 시설을 떠올리면 된다.  

내가 경험한 최악은 파리의 한인 민박이었다. 때는 90년대 중반. 허름한 창고 같은 임시 건물에 칸을 막고 합판을 깔아 마굿간 비슷하게 만든 조악한 시설물이었다. 게다가 아침, 저녁 밥으로는 김치 한 가지가 반찬의 전부였다. 같은 밥상에서 먹던 장기 투숙생이 남긴 계란 부침 한 조각이 그나마 주인 아주머니가 베푼 관용이라면 관용이었다. 그 계란 부침 한 조각에 남편은 끝내 눈살을 찌푸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당시 임신중이었던 나는 그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멸감이라니. 그 주인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기독교 성가를 크게 틀어놓고 늘 흥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뽕짝이라도 틀어놨더라면 덜 미웠을 텐데... 

우리가 3일간 묵었던 홍콩의 모니카모텔은 나의 오래된 구원(오래된 원망)을 한 방에 날아가게 해주었다. 아침, 저녁 식사가 모두 훌륭했다. 반찬을 세어보니 8가지, 국도 얼큰해서 하루의 피로를 풀게 해주었다. 물론 이삼일 있다보니 그 국이라는 것도 먹다 남은 반찬을 한꺼번에 넣어 끓인 것이긴 하지만 아침밥의 국은 그래도 늘 변한다. 해외에서 이 정도의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던가. 밥상만으로 이 모니카 모텔은 훌륭했다. 화장실 변기가 시원찮아 늘 물이 줄줄 새는 정도라든가, 세탁 건조기가 없어 세탁한 침구를 실내에서 선풍기로 말리는 바람에 숙소 전체가 세제 냄새에 잠겨있다던가 하는 열악한 부분이 있지만, 허나 숙박비가 저렴하지 않은가. 그래도 깨끗한 숙소가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늙어가나 보다. 그런데 왜 깨끗하고 멋졌던 숙소보다 늘 꾀죄죄하고 더럽고 보잘 것 없는 숙소만 기억에 남을까.

이 글은 믿을 수 없는 내 기억력을 위해, 나를 위해 남기는 정보이다. 다음에 홍콩에 다시 갈 때를 위한 글이다. 그래서 하나 더.  

  • 가이드북:"여행박사"에서 나온 소책자 <여행박사가 먼저 다녀온 홍콩배낭노트>와 얇은 가이드북 한 권이면 족하다. 이 이상이면 책에 치이게 된다. 가이드북이 진정 본연의 빛을 발할 때는 여행을 끝내고 나서이다. 가기 전에 읽으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여행 후에 읽게 되면 내용이 확실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마치 오답노트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나는 때때로 가이드북 없는 여행을 꿈꾸어본다. 잘 만들어진 각종 여행 안내서 덕분에 실제 외국어로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할 일이 거의 없다. 외국어를 잘해야만 외국 여행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수정되어야한다. 적어도 홍콩 같은 대도시에서는 말이다.
  • 교통카드:공항의 customers service center에서 옥토퍼스 카드 구입(보증금 50$ 포함 150$). 온갖 탈 것을 택시를 제외하고는 다 타는 것 같음. 심지어 자판기의 음료수나 뽑기도 할 수 있음. 다 쓰고 나면 출국 전에 구입한 곳에서 Refund, please. 하면 7달러를 떼고 정산해준다. 
  • 우리의 남대문 시장이라는 몽콕 시장은 사람에 치이는 곳, 차분히 쇼핑하기에는 shopper's lane 이 좋음. 몽콕 시장에 있는 왠만한 브랜드는 거의 다 이곳에 있음. 가격도 같음. 
  • 한여름은 피할 것. 야외 사우나라고나 할까. 
  • 홍콩을 상징하는 한 곳을 뽑는다면?....홍콩섬의 에버딘이라는 곳. 잠깐 눈길만 주고 왔지만 참 묘한 풍경을 보여준다. 현대식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포구에 여러 가지 선박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꼭 합성 사진 같다. 
  • (2010.8.12 추가기록) 지하철 Centra Staion 과 연결되어 있는 홍콩역에서 간단하게 출국 수속을 밟을 수 있다. In-town checkin이라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간단하게 짐을 부칠 수 있어서 나머지 홍콩 여행을 가볍게 할 수 있다. 단, 약간의 수수료가 부과되는 데 수속시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옥토퍼스 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몇십 달러가 드는 것 같은데 멋모르고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바람에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다.(마트에서 물건값 생각지 않고 마구 집어 넣는 습관 때문이리라.)이렇게 몸을 가볍게 한 후 란타우섬으로 가서 케이블카도 한 번 타보고 쇼핑도 하면 되는데, 주말에 케이블카를 타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엄청난 인파 때문이다....실컷 시간을 보낸 다음에 공항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빙빙 돌아가고 갈아타고 하는 전철은 무시하시라. 란타우섬의 통총역 가까이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S1 버스를 타면 10분이면 공항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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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2009년 8월 14일~8월 17일 /*환율: 홍콩1$=약 162원

서울 사는 사람이 부산이나 혹은 광주쯤 갔다와서 기행문 따위를 쓰는 일이 있을까?  

홍콩이 그렇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라기 보다는 좀 멀리 떨어진 여느 도시 같은 인상이기 때문이다. 홍콩과의 실제거리라는 것이, 서쪽 끝인 인천에서 동쪽 끝인 강릉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연휴나 휴가 때면 10시간 정도는 너끈히 걸리고도 남는 국토 동서횡단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홍콩까지의 비행 시간, 3시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비행기를 싼 맛에 몇 번 타보면 언젠가는 홍콩에 내릴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내 얘기다. 그래서 홍콩은 애써 피했다. 어차피 한번쯤 가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유럽 갈 때, 인도 오갈 때, 툭하면 들르는 도시가 홍콩이었다. 그러니 나의 홍콩 경험이란 것이, 참새 방앗간 같다고나 할까, 다음 비행을 기다리며 공항에서 시간 죽이기와 하룻밤 잠을 자면서 날짜를 보내는 bed city(?)가 전부인 셈이다. 결국은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다. 흠, 부산에 몇 번이나 가봤던가. 광주는?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라도 갔다올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 그런가. 

이번 여름 애초의 목표 여행지는 대마도였다. 늘 예산 걱정에 여행지 선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올해는 특히 대공사에 들어간 남편의 치과 치료로 선뜻 여행에 나서기가 두려웠다. 게다가 늘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내 불우하고 불쌍한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우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방과후 수업으로 몸의 균형이 깨져 몸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여름방학마저 열흘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방과후 수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별도로 받는 이 방과후수업 수당 덕에 옴짝달싹할 수 있었으니 한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일찌감치 대마도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의외로 공부하는 맛이 났다. 그간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다는 한탄 내지는 자책도 들어 모처럼 겸손해질 수 있었다. 대마도와 관련된 덕혜옹주까지 접근하게 되니 대마도의 역사 지도가 머리에 그려지기도했다. 특히 주강현의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통해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육지에서 바다로 확장되는 경험도 하게 되었는데 특히 바다를 무대로 세계를 주물렀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활약상(?)은 정말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였다. 이 책은 주로 우리나라를 둘러싼 식민 제국의 내용들이지만 이 책이 제시한 관점으로 아시아 일대의 국가들을 들여다본다면 무척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홍콩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대마도행이 홍콩행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여행사 직원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이었다. 대마도는 대중 교통이 여의치않아 패키지로 가거나 자동차를 렌트해야한다고 하면서 걱정스럽게 상담을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운전면허증마저 없고, 남편은 해외 운전 경험 전무. 패키지 여행은 아직 할 나이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고....부산 한 번 제대로 못봤다고 날 잡아 부산 가듯 그렇게 가게 되었다, 홍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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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치 솔레길 트레킹(2009년 8월 5일)  


 *법수치의 소재지는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리이다.   

 

 등산로가 아닌 임도를 따라 트래킹을 다녀왔다. 법수치 계곡에 작은 오두막을 지은 지 4년 만에 실행에 옮긴 일이었다.

   임도. 내가 이 단어를 접한 지는 몇 년 되지 않는다. 임도란 산불방지 등 산림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산에 만든 폭 3m~7m의 인공 도로이며 당연 비포장이다. 아무리 보아도 2m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3m 너비 도로의 실제가 궁금해서 언젠가 직접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다. 30cm 자를 두 번 연속해서 60cm를 재는 것처럼 내 몸이 자가 되어 도로에 누워보니 내 키로 딱 두 번 길이다. 정확하다.

   임도는 주로 7~9부 능선 높이쯤 되는 것 같은데 물론 아무나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니리라. 남편과 딸아이는 초입에 있는 바리케이드를 돌아서 길에 들어섰고 나는 바리케이드 밑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몇 해 전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양양군인지라 산불 관리는 엄격한 편으로 산불이 많이 발생하는 기간에는 산의 초입에 산불 감시인이 상주하다시피하며 산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내게는 입산금지 지역에도 들어갈 수 있는 ‘증’이 하나씩 있다. <명예산림보호지도원증>이 그것이다. 2007년 1월, 닷새에 걸친 산림청 연수를 받은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증’이다.

  그런데 이 ‘증’이 먹히지 않는 녀석이 있으니 바로 뱀이다. 그렇잖아도 뱀과 공생하는 동네인데 아무래도 이 뱀의 존재에 자꾸 온신경이 집중되는 거다. 이곳은 청정 지역이라 모기마저 얼마나 에너지가 충만한지 한 번 물리면 몹시 가렵고 그 자국도 한참이나 남아있어 주위 사람들이 피부병으로 오해할 정도가 된다. 이런 곳에 뱀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한 번 물리면 고생깨나 할 것이다.

  하루 전, 양양 시내에 나가보니 마침 장이 서는 날이다. 좌판에서 생산지 불명의 작은 금속 방울 두 개를 5,000원을 주고 샀다. 이것들을 남편과 딸아이 등산화에 매달아보니 나름 낭만적이고 음악적이면서 무슨 부적마냥 마음 한 구석이 평온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뱀이 청각이 발달했나? 하여튼 방울을 달고 출발은 했는데 그래도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트래킹용 샌들을 겁도 없이 맨발에 신고 있는 나는 방울도 없어 더욱 불안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걸을 때마다 스틱을 땅바닥에 치면서 땅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스틱이지 마당가에 굴러  다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남편이 내 키에 맞게 잘라준 것일 뿐, 남편 말마따나 뱀이 나타나면 뱀을 때려잡아야 할 텐데 제발 땅울림에 스스로 물러나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 뿐이다, 뱀아, 제발.....

 

  계속 임도를 따라 걷는다. 길은 셋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이지만 빗물에 쓸려 내려가서 생긴 바닥의 홈 때문에 딸을 앞세우고 종대를 이루며 걷는다. 장대한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서 산이 깊고 그늘도 더불어 깊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라서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불평 많은 딸아이도 소리 없이 잘 걷는다. 지리산의 오밀조밀한 오솔길이 살짝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인적 없는 산길을 호젓하게 걷는 맛도 일품이다. 숨바꼭질하듯 꼬불꼬불한 산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저 멀리 계곡과 집들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 저건 누구네 집이네! 반가움도 잠시 어느새 잡풀들로 좁아진 길을 헤쳐가면서 걸어야한다. 이때는 긴장감으로 스릴 만점이다. 꼭 풀 숲 어디선가 뱀이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것 같다. 막대기를 더 세게 땅바닥에 두드리며 걷다보니 팔목이 시큰거린다. 그러다가도 야생 산딸기라도 만나게 되면 금세 호들갑을 떨게 된다. “시식용이다.” 라는 남편의 너스레에 즐거워하면서 너 하나 나 하나 먹는다.

 

  2시간 30분이 걸리는 임도를 벗어나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산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그 품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산에서 내려와 이어지는 도로는 진부 방향 강릉 국도인데 아직은 비포장도로라서 옛 길을 따라 걷는 정취는 있다. 허나 너무 덥고 햇볕이 따갑다. 이때부터는 딸아이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다. “내가 (청소년이지) 성인이냐고...(궁시렁 궁시렁)”하면서도 잘만 걷는다. 다시 어성전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 더욱 고역스러워진다.

  어성전의 <주안식당>에서 메밀국수 한 그릇씩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법수치 계곡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펜션 단지가 이어지는 길이다. 처음 이 법수치에 왔을 때부터 제일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여기 어성전부터 걸어서 올라가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날이었는데....

  트래킹 전, 우리의 산행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시던 펜션 <산골여행>의 주인아저씨가 멀리서 우리를 보자 반가워하신다. 여기서 다시 8km 정도는 가야 우리 오두막이 나오는데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이다 싶었다. 맨발에 신은 트래킹 샌들도 별 수는 없었다. 물집이 잡히고 살갗이 벗겨져 쓰라렸다. 신제품 트래킹화만 믿었더니 역시 이 고전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나보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트래킹 신발을 개발한다면 대박 중의 대박일 텐데....

 

  결국엔 우리의 오랜 친구이자 이웃인 법수치 주민인 무엽이 엄마가 차를 끌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못이기는 척 차에 오른다.


  미완의 트래킹이었다.  

 

  이 길을 우리는 “솔레”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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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2009.7.25일자 한겨레 신문기사이다. 제목은 <'미래형 교육과정' 벼락치기식 개편> 

현재 10년(초1~고1)으로 돼 있는 국민공통 기본 교육과정은 9년(초1~중3)으로, 1년 단축된다. 이와 함께 현재 10개(국어, 도덕, 사회, 수학, 과학, 실과, 외국어, 체육, 음악, 미술)인 국민공통 기본 교과군이 7개(국어, 사회·도덕, 수학, 과학·실과, 외국어, 체육, 예술)로 줄어든다. 또 주당 수업시간이 1~2시간인 도덕·실과·음악·미술 등의 과목은 한 학기에 몰아서 수업하는 ‘집중 이수제’도 도입된다. 이에 따라 현재 최대 10개인 초등학교 학기당 이수 과목 수가 7개로, 최대 13개인 중·고교는 8개로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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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졸속이다. 학교 현장에 얼마간이라도 몸 담아봤다면 이런 식으로는 절대 밀어부치지 못할 것이다. 이러니 정책 따로 현장 따로라고 말할 수 밖에. 상식이 통할 여지는 없는가. 

소위 말하는 기타 과목이 살아 남아야하는 이유를 말해야겠다. (참고로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필수 중의 필수 과목이다.) 

1.아이들은 몸을 제대로 부릴 줄 모른다. 예를 들어 칠판 분필가루 제거시 손걸레질 한 번 시키면 속 터져 죽는다. 도대체 걸레를 다를 줄 모른다. 걸레를 꼭 짜서 닦아내야하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로 대강 닦아낸다. 그래서 전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아이를 창턱으로 데리고가 시범을 보여준다. 구정물이 쭈르륵.....계속 나온다. 시범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아이들도 배우라는 뜻인데 다음 날 다른 아이를 시켜보면 똑같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 아이들은 교복에서 단추가 떨어져도 제 손으로 다는 아이가 별로 없다. 손은 모셔두었다가 어디에 쓰는지 도무지 제 손 사용법도 모른다. 단추 하나 못달고, 형광등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고, 변기 막힌 것 뚫어볼 엄두도 못내는 인간 길러서 뭐하나. 언제까지나 남에게 기대서 살게 만드는 머리만 큰 바보 만드는 게 이 나라의 교육과정인가?  

가정과 기술 과목에서 손을 사용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2.우리의 교육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교육이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하위 30% 범위의 학생들은 예외를 빼고는 대부분 온순하고 성실하다. 수업 시간에도 열심히 듣는다. 그런데도 교사의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척 어려워한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부분은 기가 죽어있고 의기소침해서 감히 손을 들어 물어본다거나 하는 유별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져왔다. 나름의 생존전략을 터득했다고나할까, 불쌍하고 안타깝게도. 

이런 아이들에게는 음악, 미술, 체육이 숨통 과목이다. 체육시간이라고 눈을 빛내며 기대에 차있는 아이들을 본다면 절대로 체육 시간 없앤다는 말 못한다. 다른 과목에서는 기가 죽어도 체육시간에는 팔팔 날아다니는 아이들을 본다면 그들의 숨통을 더 옥죄지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공부는 되지만 체육이 힘든 아이들에게는 체육 시간에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살아가는 데 머리보다 몸이 우선임을 조금이나마 깨칠 수 있는 시간이 체육 시간이다. 

3. 음악이나 미술을 제대로 가르쳐야한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지방의 소도시에 있는 신설 사립학교였다. 한 학년에 2학급씩, 전체 6학급이 전부인 작은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음악과 미술과목을 음악을 전공한 한 선생님이 모두 가르쳤다. 그런대로 배우긴 배웠다. 색종이 모자이크로 무엇인가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미술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검정색으로 표현했다. "눈은 흰색이잖아?"라는 선생님 말씀이 들려왔다. 내가 이때 "눈은 흰색인데 왜 검정색으로 표현했니?"라고 묻고 내 말에 귀기울여주는 선생님 모습을 봤더라면 적어도 그 선생님을 마음에서 지워나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미술대학 입학을 꿈꾸고 그림 공부를 할 때 알게 되었다. 중학교라는 기간이 그림의 단절기였다는 것을. 물론 별 볼일 없는 재주였기에 그림에서 손을 떼었지만 중학교에서 배워야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원망은 길게 남았다. 음악이나 미술은 자신에게 있을지 모르는 작은 재주 하나쯤 발견해서 삶을 다양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소양을 쌓게 해주는 과목이다.  

 

필수 과목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기타 과목에서마저 소외된다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나? 배움은 곧 지겨움이 될테고 더욱 더 진한 패배감과 열등 의식으로 지루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할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제 몸을 제대로 부릴 줄 모르고 삶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하고 즐길 줄 모르는, 그저 머리만 멀뚱하고 크게 남아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반편이로 만드는게 이 나라의 교육이라는 것인가? 물론 반편이로 만들면 통치하기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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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내 피부는 검은 색                                 
WHEN I BORN, I BLACK
 
자라서도 검은 색                                                        
WHEN I GROW UP, I BLACK
 
태양아래 있어도 검은 색                                             
WHEN I GO IN SUN, I BLACK
 
무서울 때도 검은 색                                                    
WHEN I SCARED, I BLACK
 
아플 때도 검은 색                                                        
WHEN I SICK, I BLACK
 
죽을 때도 여전히 나는 한 가지 검은 색이죠              
AND WHEN I DIE, I STILL BLACK
 
그런데 백인들은                                                        
AND YOU, WHITE FELLOW.
 
태어날 때는 핑크색이잖아요                                          
WHEN YOU BORN, YOU PINK
 
자라서는 흰색                                                               
WHEN YOU GROW UP, YOU WHITE
 
태양아래 있으면 빨간색                                                  
WHEN YOU IN SUN, YOU RED.
 
추우면 파란색                                                                
WHEN YOU COLD, YOU BLUE.
 
무서울 때는 노란색                                                         
WHEN YOU SCARED, YOU YELLOW
 
아플 때는 녹색이 되었다가                                               
WHEN YOU SICK, YOU GREEN.
 
또 죽을 때는 회색으로 변하잖아요.                                            
AND WHEN YOU DIE, YOU GRAY.
 
그런데 백인들은 왜 나를 유색인종이라 하나요?                         
AND YOU CALLING ME COL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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