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오디세이 - 뉴욕의 사계절과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나선 이방인의 여정
이철재 지음 / 이랑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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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최신 뉴스를 옮긴다. 

 

 

'미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

10일 코로나보드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15분 기준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45만5615명이고, 사망자는 1만6074명이다. 이는 압도적인 세계 1위다. 2위 스페인, 3위 이탈리아, 4위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특히 뉴욕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이날 뉴욕에서 799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로써 뉴욕의 누적 사망자는 7067명이 됐다. 뉴욕의 확진자는 15만9937명이 됐다. '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20041007198021920&outlink=1

 

 

코로나 참상의 절정을 이끌고 있는 곳 미국. 미국의 중심인 뉴욕. 뉴욕이라면 나도 한마디쯤 하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껏 여행한 지역 중 가장 열악한 곳이 뉴욕이었으므로.

 

'열악'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작년 6월에 보름 동안 뉴욕에 머물렀었다. 숙소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허름한 호텔이었다. 창문이 없는 작은 방에 더블침대가 3/5를 차지하고 작은 탁자와 기둥을 빼면 캐리어 두 개를 펼쳐놓을 공간도 남지 않는 방이었다. 세면실은 공동이용이었지만 다행히 문만 열면 세 개가 나란히 있어서 그닥 불편하지는 않았다. 비용은 하룻밤에 13~14만 원 정도. 그간 여러 나라를 30년 가까이 다녀봤지만 비용 대비 시설은 거의 최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물가가 비싼 나라를 여행하는 게 얼마나 재미없는 지를 알게 해준 여행이었다.

 

호텔이 위치한 차이나타운은 말 그대로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동네이다. 뉴욕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마치 중국의 어느 번잡한 동네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팍팍해보였다. 빨래방이 곳곳에 있어 3~4일에 한번씩 빨래를 하러 가곤했는데 가는 곳마다 현지 중국인들로 만원이었다. 겨우 세탁기 하나 차지하고 건조기까지 사용하면 시간이 훌쩍 흘렀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빨래를 하지 않는 것,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빨래를 하거나 빨래를 널 공간이 없어서 이런 빨래방을 이용하는 것이지 싶었다. 집이라고 해야 작디 작은 공간일 뿐이리라. 내가 묵었던 호텔처럼.

 

뉴욕시의 중심지 맨해튼에서 여행자들에게 제일 불편한 것은 화장실 부족이 아닐까 싶다. 그 수많은 지하철역사에도 화장실 하나 없고, 하늘을 찌를듯한 화려한 고층 빌딩에도 이방인에게 허용된 무료화장실이 매우 드물다. 아주 인색하다. 정 급하면 스타벅스 같은 곳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이용하던가 아니면 맥도날드에 가서 먹고 싶지 않아도 햄버거 하나 사서 입에 물던가 해야 한다. 어떤 맥도날드 매장에선 화장실이 있는 2층으로 가려면 계단 초입에 서서 통행을 체크하는 직원에게 영수증을 제시해야 한다. 그나마 센트럴 파크에는 무료화장실이 있어서 신기할 정도였으니. 여행 첫날 어떤 공원 옆에 있는 유료공중화장실에 동전을 넣고 들어갔다가 오물로 넘쳐흐르던 변기를 보고 일도 못보고 그냥 나온 적도 있었다. 하필이면 여행 첫날에.

 

화장실 다음으로 힘들었던 건 햄버거로 시작해서 햄버거로 끝나는 일용할 양식에 적응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는 것.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한식당을 여러번 이용했지만 그리 탐탁하지 못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는 겨우 입에 맞는 망고로 끼니를 때웠다. 다행히 가격은 저렴했다. 애플망고 한 개가 채 1달러도 안 되었다. 여행 중 이렇게 음식으로 고생한 적은 없는데 이 풍요로운 미쿡에 와서 이 무슨 고생이람, 한탄이 절로 나왔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는 병원에 가서 영양제주사를 맞고나서야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보름 남짓 경험한 뉴욕이 이러했다. 세계적인 미술관, 박물관을 둘러보고 유명하다는 명소도 두루두루 갔었지만 내 몸이 겪은 뉴욕은 열악하고 힘겨웠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살기에는 매우 팍팍하고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의 위력이 지배하는 곳은 결코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언제라도 홈리스로 추락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건 얼마나 살 떨리는 일일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내게 뉴욕은 그런 무서움을 일깨워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장실에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다.

 

 

 

 

위 사진은 광주광역시 시내의 화장실 안내판 사진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이런 친절을 왜 뉴욕에선 기대할 수 없을까. 그 잘 사는 나라에서. 이번 코로나 사태가 미국에서 절정을 이루는 건 이런 친절함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책 얘기.

뉴욕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글이라서 궁금했다. 뉴욕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싶었으나 뉴욕보다 뉴욕주에 관한 이야기여서 내가 기대한 바와 촛점이 달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맨해튼은 뉴욕시의 일부분이고 뉴욕시는 뉴욕주의 일부분이라는 것'. 그러니까 뉴욕주 안에 뉴욕시가 들어가고, 뉴욕시 안에 맨해튼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뉴욕에 가서야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다시 책 얘기.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가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 책 날개에 소개된 글을 인용하면,

 

'뉴욕이 제국의 수도가 된 이유를 찾고, 맨해튼의 빌딩숲 속에 숨겨진 유서 깊은 호텔 앨곤퀸의 문화와 낭만을 소개하며, <라스트 모히칸>의 배경이 된 아메리칸 인디언의 발자취를 쫓고, 낙농과 와인의 산지를 찾아 하룻밤 머물고, 뉴욕 시골 마을의 오페라 축제를 즐기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한다......(이 책은) 일정을 길게 잡아 뉴욕주에 체류하며 돌아보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 이들에게도 좋은 관광 안내서가 될 수 있다.'

 

맨해튼에서 보름 동안 있어도 일정이 짧은데 글쎄 어느 정도 길게 잡아야 뉴욕이 아닌 뉴욕주에 체류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든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시간상 금전상 여유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이 책은 내게는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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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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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기, 혹은 제대로 따져보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제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원제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그림을 볼 때 명심해야 할 것.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그중 두어 개를 인용해본다.

 

 

한스 멜링 <허영> (출처: 네이버)

 

 

-60쪽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위선과 적반하장의 뻔뻔함을 본다. 점잖은 해석은 이제 그만.

 

 

-76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머릿 속에서 생각'만 해도 신선하고 유쾌하다. 여성 화가들이 남성 누드화를 그릴 수 없었던 건 시대적인 한계 상황으로 여성들에게 누드화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만약 허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적어도 위의 그림과 같은 위선적인 그림은 덜 허용되지 않았을까? 성불평등을 말할 때, 남자를 여자로 바꾸어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인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저항하겠지만. 마치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노라고 항변하겠지.

 

 

 

프란스 할스 <웃고 있는 어부 소년> (출처: 네이버)

 

-122

이 그림 속의 가난뱅이는 자신이 팔 물건들을 보여 주며 웃는다. (가난뱅이들은 이를 드러내고 웃지만, 부자들은 절대 이렇게 웃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 앞에서 웃어보인다.

 

하층계급의 생활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을 '장르화'라고 한다는데, 목적은 '이 세상의 덕성은 사회적이고 금전적인 성공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되지만 게으름뱅이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교훈을 나타낸다. 그러나 위의 할스의 그림은 이런 장르화의 성격과는 다른 것으로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나...그런 사실보다 부자들은 절대로 저렇게 이를 드러내며 웃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림을 생각하면서 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좀 더 공들여 읽어야 한다는 것만 짚고 넘어간다. 개념이 잡힐 듯 말듯 한 유화의 본질과 현대 광고와의 관계, 그리고 글래머glamour의 개념, 발터 베냐민의 이론 등. 1972년에 발간된 책인데도 과거시제로 읽히지 않는 책이다. 물론 내가 무지한 탓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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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um )

 

 

영화 <모리의 정원>을 보았다. 인천에서는 상영관이 없어서 덕분에 안산에도 가봤다. 극장안의 관객은 단 3명. 아무리 사회적 거리두기라지만 이 정도면 거의 폐업 상황이지 않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30년 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일본의 유명화가 쿠마가이 모리카즈 이야기이다. 그가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영화 <타샤의 정원>을 기억하는지라 이 영화에서도 멋진 정원을 감상하리라 기대했으나 이건 정원 얘기가 아니었다. 원제는 '모리의 장소'. 여기서 장소는 영어의 place이니 '공간, 곳, 장소'로 정원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모리의 정원'이라기 보다는 모리가 30년 간 머문 공간, '그 만의 공간' 쯤의 뜻이 된다. 영화 제목을 깔끔하게 뽑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줄거리는 검색만 하면 주르르 뜨니 생략. 인상 깊은 장면 두 개를 애기하련다.

 

하나.

어떤 남자가 모리카즈의 평을 기대하면서 어린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자녀에 대한 희망을 품기 마련. 대강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남자: 보십시오. 우리 아들이 천재가 맞지요? 잘 그렸습니까?

화가: 음..... 못 그렸네.

남자: (실망한다)......네?

화가: 잘 못 그려서 좋은 거야.

남자: (당혹해한다.)......네?

화가: 잘 그린 그림은 끝이 보여.

        잘 못 그린 그림은 작품이야.

 

절망과 희망을 왔다갔다 하는 남자의 표정도 볼 만하지만 늙은 화가의 한마디 한마디가 절묘하게 마음을 울린다.

 

둘.

모리카즈와 그의 아내의 대화.

 

화가: 다시 태어나고 싶어, 당신은?

아내: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화가: 왜? 살아있는 게 좋지 않은가?

아내: 피곤해서 싫어.

 

화가는 허구헌날 집 앞 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에서 벌레를 관찰하거나 오솔길에 누워있거나 연못 속의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생을 만끽한다. 밤에는 '학교'에 간다며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밥은 누가 해주나? 그의 아내다. 아내는 허구헌날 빨래와 밥을 하며, 수시로 들이닥치는 손님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역할을 맞바꾼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 는 대사로 이어지면 영화가 진부해지려나.....

 

 

일본 이름을 발음하려면 혀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지만 화가역의 야마자키 츠토무, 아내역의 키키 키린을 기억해야겠다. 영화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이 있을만큼 연기가 탁월하다. 볼 만하다.

 

 

코로나19로 자가격리, 가택연금...의 시절에 30년 동안이나 집 안에 콕 박혀있던 화가의 생애를 엿보는 맛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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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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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읽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의 저 유명한 단편 <대성당>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몇 년 전에도 이 단편을 읽긴했는데 바쁜 와중에 대충 읽느라 미처 음미해볼 틈도 없어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잘 쓰인 단편은 한 편의 시와 같아서 곱씹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이번에 택한 방법은 원서 읽기와 오디오북으로 듣기.

 

 

 

굳이 원서를 구입하지 않고도 구글에서 간단하게 다운로드하면 된다. 오디오북은 유튜브로.

 

 

 

여러 개의 영상이 있는데 그중에서 청중을 앞에 두고 낭독하는 게 더 흥미롭다. 잠들기 전 자장가삼아 듣다보면 중간중간에 웃음을 터뜨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웃음은커녕 약만 오른다. 이 장면에서 왜 웃는거야?

 

<대성당>은 쉬운 단어로 쉽게 쓴 글이다. 문장만 보면 밋밋하고 멋진 표현도 별로 없다. 그런데도 꼼꼼히 읽다보면 이 자체로 완벽하다는 걸 알게 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문장들이다. 긴 문장보다 짧은 문장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나 그것 또한 톡 쏘는 맛이 있다. 여러번 읽어도 뜻이 명확하지 않을 땐 김연수가 번역한 위의 책을 참고하면 역시 김연수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그건 덤으로 얻는 기쁨이다.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소설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느낀 감흥은 남겨두고 싶다.

 

화자로 나오는 '나'는 속 좁고 찌질한 남자다. 십 년 동안이나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는 아내와 친구(the blind man)에 대한 질투심, 그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조급함, 장애인과 흑인에 대한 편견, 꾸준히 시를 쓰는 아내에 대한 몰이해 등 도무지 잘난 구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먼저 시각장애인에 대한 못마땅함.

And his being blind bothered me. My idea of blindness came from the movies. In the movies, the blind moved slowly and never laughed. Sometimes they were led by seeing-eye dogs. A blind man in my house was not something I look forward to.

 

 

시를 쓰는 아내를 두고 있지만 시에는 관심이 없음.

I admit it's not the first thing I reach for when I pick up something to read.

(뭘 읽으려고 할 때 내가 시집을 펼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만은 인정한다.)

 

집으로 오는 친구를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아내에게 하는 말.

"I don't have any blind friends," I said.

"You don't have any friends," she said. "Period. Besides," she said. "goddamn it, his wife's just died! Don't  you understand that? The man's lost his wife!"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Was his wife a Negro?" I asked.

"Are you crazy?" my wife said.

 

장애인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연민.

....what a pitiful life this woman must have led.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며 즐거워하는 아내에 대한 질투심.

I saw my wife laughing as she parked the car. I saw her get out of the car and shut the door. She was still wearing a smile. Just amazing.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물어보는 찌질함.

"Did you have a good train ride?" I said. "Which side of the train did you sit on, by the way?"

"What a question, which side!" my wife said. "What's it matter which side?" she said.

"I just asked," I said.

 

저녁식사 전 올리는 감사기도는 이런 식으로.

"Now let us pray," I said, and the blind man lowered his head. My wife looked at me, her mouth agape. "Pray the phone won't ring and the food doesn't get cold," I said.

 

그들 사이의 대화에서 자기얘기도 좀 나왔으면 하는 기대.

They talked of things that had happened to them - to them! - these past ten years. I waited in vain to hear my name on my wife's sweet lips: "And then my dear husband came into my life" - something like that. But I heard nothing of the sort. More talk of Rober.

 

이와 대조적으로 the blind man 는 한층 여유있고 유머감각도 있으며 마음도 열려 있다.

"It's fine me. Whatever you want to watch is okay. I'm always learning something. Learning never ends. It won't hurt me to learn something tonight. I got ears," he said.

(난 좋아, 자네가 뭘 보는지 상관없어. 나는 항상 뭔가를 배우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오늘 밤에도 뭘 좀 배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내겐 귀가 있으니까.)

 

마침내 TV에 나오는 대성당을 the blind man 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나'. 눈을 감고 있다.

My eyes were still closed. I was in my house. I knew that.

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It's really something,"(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I said.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앞을 못 본다고 못 보는 것도 아니다. 앞을 못 보는 the blind man은 이미 마음이 열려있어서 보지 못하는 것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지만 육체적인 눈만이 전부라고 믿는 '나'는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야 이 만남을 통해서 눈 뜬 장님이었던 '나'는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나'는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뜬다.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고, 알지 못하던 세상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놀라움을 나타내는 단 한 문장, "It's really something,"

 

쉬운 문장으로 쓰여진, 소설가 카버의 역량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다. It's really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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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2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화가다 - 페미니즘 미술관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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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출처: daum)

 

사진2.  (출처: daum)

 

사진1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 사진이고, 사진2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 이탈리아)의 자화상이다. 많이 닮았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초록색 드레스가 특히 그렇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여성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설정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오로지 내 무지의 탓이라는 것을 <내가 화가다>라는 책을 읽고 깨달았다.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

수잔 발라동

유디트 레이스테르

마리 로랑생

마리 바시키르체프

로자 보뇌르

마리 드니즈 빌레르

베르트 모리조

매리 커셋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라비니아 폰타나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

타마라 드 렘피카

그웬 존

 

이 중 프리다 칼로, 케테 콜비츠, 마리 로랑생 정도만 알고 있다는 건 거의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툴루즈 로트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와 관계가 깊은 수잔 발라동을 몰랐다는 건 툴루즈 로트렉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반쪽에 불과하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사진2를 그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 대해서.

 

-120쪽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술 역시 여성에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에서도 여성 화가에 대햔 서술은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푸대접 속에서 젠틸레스키는 1970년대에 시작된 페미니즘 미술사 연구의 이정표가 되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그녀는 아버지의 동료 화가이자 미술 선생이었던 열다섯 살 연상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재판에서 젠틸레스키가 겪은 고통과 수치는 성폭행의 끔찍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진술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타시와 대결 심문을 받으면서 '시빌레'라는 손가락 고문과 두 차례의 치욕적인 처녀막 검사를 강당해야 했다.

 

당시 여성에게 강요되고 억압된 많은 금기를 깨고 젠틸레스키는 꾸준히 예술에 매진하여 이름을 남겼다.

 

-138쪽

  능력 있는 화가 아버지에게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로 성공한 젠틸레스키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여성 화가들에 비하면 매우 운이 좋았다. 물론 아무리 좋은 운도 노력과 치열함이 없다면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법! 그녀가 불멸의 여성 화가로 재조명될 수 있었던 답이 그녀의 자화상에 담겨 있다.

 

바로 사진2가 '그녀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사진1은 젠틸레스키에 대한 오마주로 봐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수잔 발라동(1865~1938, 프랑스) '보란 듯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던 여성. 이 당당한 여성이 그간 툴루즈 로트렉보다 저평가된 건 부당하기 이를 데 없다. 인생도 그림도 당당하다보니 남성들의 질투심으로 도외시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여성 화가 유디트 레이스테르(1609~1660).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인정받는 화가'였으나,

 

 

 -71쪽

  발라동과 레이스테르는 남성들이 만든 전통에 도전했다.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던 발라동은 나이들어서도 아무런 장애 없이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었던 레이스테르는 동료화가 얀 몰레나르와 결혼한 후 활동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정규 미술교육을 거치지 않고 화가로 입문한 발라동은 다듬어지지 않았음에도 '여자'라는 '특별함'을 살려 유명해진 반면 레이스테르는 '여자'라는 '특별'함 때문에 오랜 세월 조명받지 못했다.

  두 화가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결혼'이었다. 발라동은 이혼을 선택한 후 자유롭게 살았으나 레이스테르는 결혼을 통해 남성의 질서에 구속되고 말았다. 수많은 여성 화가들이 레이스테르와 같은 이유로 잊혀졌다. 근대 이전, 아니 지금까지도 결혼은 많은 여성들의 재능을 매장하는 무덤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에서 이름이라도 남긴 여성 화가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 참고: 미국의 국민 화가 에드워드 호퍼 뒤에는 신음하는 조 호퍼가 있었다.

 

https://blog.aladin.co.kr/nama/1134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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