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부리 > 상대를 잘못 택한 진중권

KBS에서 하는 <책을 말한다>라는 프로,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면서도 난 그 프로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책은 말하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고루한 생각 때문은 물론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프로가 방영되는 목요일 밤 10시 경에는 언제나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방송의 <느낌표>를 한번밖에 안본 이유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느라 안보고, 그러다보니 술을 안마시고 집에 있는 날에도 그 프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랬던 내가 지난 목요일날 <책을 말한다>를 보게 된 이유는 라주미힌님이 올려놓은 글로 인해 장하준 박사가 나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주제였는데, 상대편으로 진중권 씨가 나오는 것도 흥밋거리였다. 그날따라 늦은 퇴근을 했지만 다행히 밤 10시에는 TV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 책을 읽음으로써 박정희의 경제발전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었다. 난 진중권이 이런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경제발전에 있어서 박정희의 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진중권이 장하준의 논지를 멋지게 격파하기를 더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기대였다. 미학자로서는 탁월한 진중권이 경제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잘 모르면서도 반박을 하자니 어거지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전문가인 장하준과 장하준이 천재라고 부러워하는 정승일의 논리정연한 말들이 더 빛이 났다.
-박정희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썼다고 하니까 진중권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들먹이며 핀잔을 줬지만, 별로 공감은 안됐다. 박정희가 사회주의자라는 얘기가 아니라 정책 자체가 사회주의적이라고 얘기한 건데 무슨 헛소리?
-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자는 장하준의 말에 대해 진중권은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을 누가 하는 줄 아세요? 자유기업원이 합니다”
말인즉슨 자유기업원이 하면 다 나쁜 말이란 뜻, 이런 흑백논리는 딴지일보 김어준이 잘 정리해준 적이 있다. “알리와 포먼이 권투를 한다. 김일성이 알리를 응원한다. 너도 알리를 응원한다. 고록 너는 빨갱이다”
극우들이 잘 쓰는 전형적인 흑백논리, 세상에, 그토록 명석한 진중권이 겨우 이런 논리에 기대어 토론을 하다니. 조선일보 기사 중에도 진실이 있듯이, “자유기업원이 하는 말에도 맞는 게 있습니다”라는 장하준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였다.
-나중에는 이런 말까지 한다. “댁들, 그러면서 왜 좌파라고 합니까?”
황당해진 장하준은 정승일을 돌아본다. “우리가 좌파라고 했나요?”
정승일, “(웃음) 아니요”
이때 알았다. 진중권이 왜 그렇게 허황된 주장을 하는지. 경제학을 모르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테마가 된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책의 서문에, “남들은 우리를 좌파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극우라고 한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그간 ‘쾌도난마’였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본질을 꿰뚫은 그의 언변에 의해 박살이 나곤 했다. 유머와 냉소, 비아냥 등을 동원한 그의 말들은 그 자체가 예술이었다. 하지만 그의 칼날은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캠브리지 교수인 세계적인 경제학자, 그리고 천재로 알려진 정승일, 그 둘의 논리 앞에 진중권은 너무도 무력하기만 했다. 그렇다. 그는 상대를 잘못 고른 거였다. 그가 쓴 방법은 무식한 극우들과 싸울 때나 효과가 있는 것이지, 이번에는 아니었다. 아무리 잘 드는 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써야 한다는 것을 내 스승 진중권은 <책을 말한다>를 통해 잘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