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낙랑의 관계에 얽혀 제대로 피지 못한 그 사랑꽃의 기원은 아마도 한무제 때 그가 설치한 한 4군이겠지요. 중국 한나라의 한무제는 고조선에 굴욕적인 모욕을 안겨 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4군의 설치에 관해서는 중국, 일본, 남한, 북한 모두 입장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는 후에 무제란 시호가 붙을 만큼 군사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한무제는 한의 건국초기부터 골칫거리였던 흉노에 대해 그간 취해왔던 피동적이고 보수적인 방어정책에서 벗어나 그의 집권기간 동안 여러 차례 흉노와 전쟁을 벌이며 흉노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한고조를 시작으로 혜제와 문제, 경제를 거치며 쌓아온 국력과 무제의 군사적 야심, 명장(위청, 곽거병)의 활약, 흉노의 내부 동요 등은 한무제가 흉노를 누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간 한나라의 사회경제의 발전을 저해하던 흉노의 영향력은 한무제에 이르러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무제는 그 칼날의 방향을 동으로 돌려 고조선을 침략하였고, 남월을 평정하여 9군을 두고, 서남이를 평정하여 5군을 설치하는 등 흉노와의 전쟁 중에도 그의 무공업적을 드날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치세 말기 그는 전쟁을 계속하다가는 진나라처럼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하고 전쟁을 중단한 뒤 경제 발전에 힘썼습니다.

     한무제는 자신이 죽고 전한이 망하기 전까지를 그의 여운 시대라고 부를 만큼 많은 업적을 세운 황제였습니다. 경제면에서는 화폐 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 철, 술 등의 전매 제도를 택했습니다. 게다가 한왕조 창업 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취해 오던 무위의 노장사상에서 유위의 정치 체계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미 노장사상은 안정기에 들어선 한나라를 지탱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아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사상을 받아들여 독존유술 파출백가(獨尊儒術 罷黜百家)의 방침으로서 유학을 국가의 통치사상으로 만들고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백가쟁명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학은 20세기 초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중국의 통치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무제는 문학예술을 즐겼기에 문학가인 사마상여에게 높은 벼슬을 주는 등 문학예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나라 역사상 가장 높이 평가받을 만한 업적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장건과 실크로드일 것입니다.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월지국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던 한무제는 사자로 장건을 보냅니다. 장건은 월지로 가는 도중 흉노에게 억류되었고, 10년 동안 그곳에서 절치부심 자신의 사명을 다할 궁리를 하다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고생 끝에 월지국에 도착한 장건이었지만, 이미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고 속국까지 거느리는 월지국의 평화주의, 비동맹 정책으로 그의 군사 동맹 체결의 목적은 무산되고 맙니다. 귀국길에 오른 장건은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지만, 흉노의 내분을 틈타 무려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월지국과의 군사동맹 체결은 실패하였지만, 그의 보고에 의해 한나라는 서역의 정세를 보다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긴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익힌 장건의 지리적 지식 덕분에 그 후 한군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장건은 열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장건이 죽은 후 한나라의 실정을 몰랐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던 오손, 야랑, 대완 등이 자진해서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등 한나라의 위엄은 널리 서역까지 떨쳤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는 바로 한무제 때 장건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무제가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그의 치세에 오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에 여색을 즐기던 그였기에 그 당시 가장 박식한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사마천에게 죄를 주어 궁형에 처합니다. 사마천은 당시 사대부의 긍지대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신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고를 지키기 위해 치욕적인 삶을 참고 중국 역사상 첫 통사인 「사기」를 편찬합니다. 한무제는 또한 나이가 들어 미신에 빠졌는데, 그 일로 하여 한무제 치세 무고의 난이 끊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황태자였던 유거 역시 무고의 난에 휩쓸려 죽음을 당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황제라는 한무제. 그는 한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큰 힘을 썼으며 또한 그 결과를 누리다 죽은 황제입니다. 황제라 하더라도 아무나 지낼 수 없는 봉선을 지냈으며 흉노를 제압하고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국내를 안정시킨 그는 분명 훌륭한 황제라는 평가가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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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 21 - 완결
츠다 마사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10월
구판절판


「아아, 재밌었어. 이젠 피곤해-」라고 말하면서 죽는 게 꿈이야.
그래. 인생이 진짜 재밌어지는 건 지금부터니까.-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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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가 제대로 미쳤다. 일본의 우경화는 점점 극으로 치닫고, 한국은 제대로 대응을 하는지 마는지 뭐 모르겠다....

문민정부가 벌써 몇 년째인가... 김영삼 정부부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과거청산할 시간은 충분했건만, 여전히 묻어두고 은폐하고 반대하고... 도대체 뭐 하자는거야?

과거청산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가? 물론 그렇긴 하다. 과거청산을 하면 현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가 사라질 수도 있을테니. 그렇다면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고, 망언하고 하는 걸 비난하는 이유는 뭘까?

일본 역시 과거청산이 제대로 안 되었으니 저런 사람이 총리가 되어 보통국가 일본을 외치고 있는 거 아닌가?

며칠 전 보도연맹에 관한 다큐를 봤다. 2001년 「20세기 한국의 야만 1」에서 처음 알게 된 충격적인 민간인 학살극. 그 전국적인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은 여전히 곳곳에 묻혀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가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나의 작은 외할아버지도 21세 한창 나이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난 어제 그 사실을 알았다. 먼 남의 일 같던 그 학살극이 바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과거청산 및 피해자 신원 복구, 보상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이 꼴이지 않을까.

고이즈미 같은 사람들이 계속 정치를 한다고 생각해 본다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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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0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암리타 2005-11-0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부터 제대로 과거 청산이 안되고 있는데 일본에게 그것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죠!

꼬마요정 2005-11-0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오고,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ㅡ.ㅜ

꼬마요정 2005-11-0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리타님~ 안녕하세요~^^ 제 서재를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암리타 2005-11-07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님의 서재 자주 방문해서 좋은 글 읽고 있습니다.

꼬마요정 2005-11-0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선비는 둘 일 수 없다는 뜻으로 유방의 밑에 있던 소하가 한신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한신은 회음 사람으로 젊은 시절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는 진나라에 대항해 일어선 항우 밑에 들어갔는데, 그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도망쳐 유방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유방 밑에서도 변변찮은 대접을 받다 결국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려 사형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처형당하기 직전 대신 하후영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외쳐 간신히 처형을 면하였고, 하후영은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상 소하는 그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 밑에서도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한 한신은 자신을 알아 줄 이를 찾아 도망을 쳤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소하는 유방에게 알릴 시간도 없이 한신을 찾으러 따라갔고, 영문을 모르는 신하들은 소하가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알렸습니다. 놀라고 화가 난 유방은 이틀 뒤 돌아온 소하를 보며 왜 도망을 쳤는지 꾸짖었고, 소하는 한신을 좇아간 것이며 그는 국사무쌍의 인물이라 중하게 등용하라 말했습니다. 유방은 한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소하의 주청에 그를 대장군으로 삼았고, 결국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한신은 초· 한 전쟁 무렵에는 제왕에 봉해졌으며, 해하에서 항우를 격파하는 등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나라가 건국되자 초왕에 봉해졌으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가진 그를 두려워한 유방에 의해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후에 다시 모반의 죄를 쓰고 사형 당했습니다. 하지만 한신의 모반에는 여후와 소하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능한 장군인 한신이 설마 그의 사인의 아우에게까지 알 수 있도록 모반을 계획하였다는 것이 이상할뿐더러 고변한 자가 그저 사인의 아우라고만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 여후와 소하가 한신 같은 군사적 천재를 경계하여 희박하지만 모반의 죄를 씌워 고조가 없는 사이에 죽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난세에 걸출한 영웅이었던 한신은 여후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세 개의 고사성어를 남깁니다.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국사무쌍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다다익선(多多益善), 교토사 주구팽(狡兎死 走拘烹) 즉 토사구팽입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그 말을 고스란히 겪었던 한신에 대해 사마천은 이렇게 말합니다.〈젊은 시절 어머니의 장례를 지낼 비용조차 없었던 그였지만, 지금은 높고 넓은 땅에 묘지를 만들어 1만호를 들어설 수 있게 했다. 그런 그가 겸손을 배웠더라면 주공, 소공, 태공의 공훈에 비하였을 것이며 나라의 제사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통일 후 반역을 기도해 멸족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신이 혁혁한 공을 세운 뒤 모반죄로 죽었다면, 여후는 유방이 죽은 뒤 그 진가를 드러낸 여인이었습니다. 여걸이었던 그녀는 유방의 조강지처로서 유방이 한나라를 창업할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호탕하지만 여자를 좋아했던 유방은 한고조가 된 뒤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고, 특히 척부인을 총애하였습니다. 여후는 뒷방 신세가 된 꼴이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방이 죽을 때 여후는 승상의 재목에 대해 물어봅니다. 소하 다음에는 조참을, 그 뒤에는 진평과 왕릉에게 승상을 맡기라는 유방의 대답에 여후는 그 뒤에는 어찌 하냐는 질문을 합니다. 유방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려고 그러느냐며 입을 다물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승상은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인 만큼 여후는 유방의 말대로 하여 자신이 죽은 뒤까지 자신의 아들인 효혜제가 아무 어려움 없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여후는 유방이 죽자 개인적인 원한을 철저하게 갚습니다. 우유부단하고 심약하였던 효혜제는 그런 여후를 견디지 못하여 일찍 죽고 맙니다. 여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효혜제의 서자를 소제로 내세워 여전히 섭정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정권을 손에 움켜쥡니다. 유씨를 섬겼던 여러 신하들은 납작 엎드린 채 여후가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여씨 일족의 권세는 여후로부터 나왔으니 여후가 죽으면 자신들이 여씨 일족을 멸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후는 악독한 인물이라 자신의 아들을 일찍 죽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원한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후의 치세는 그리 암담하지 않았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뜨는데, 그것은 곧 새로운 왕조를 발족하는 단계에서 죽은 셈입니다. 뒤를 이은 혜제 역시 일찍 죽었으니 새로운 왕조인 한의 기반을 다진 사람은 유방과 여후 이 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후는 사사로이 자신의 일족을 위해 유씨 일족을 살해하였으나, 유방이 만들어놓은 예악이나 승상 소하가 정비해놓은 법률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소규 조수), 한대 초기의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국가 정책을 고수하였고 그것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어 역사가들은 당시 상황을 의식은 풍족하고 형벌은 줄어들고 천하는 평온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여후는 황제 자리와 왕, 제후들의 자리를 놓고 일종의 집안싸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씨 일족은 여후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것이지요. 여후가 죽은 뒤 다시 유씨 일족이 권력을 잡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여후의 업적이나 그녀의 사생활, 그녀의 성격을 철저하게 부정적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권력을 잡았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악녀였으니,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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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1-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여후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한 건 그녀가 남자였기 때문이겠지요...어제 술마시다가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꼬마요정 2005-11-0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여후가 남자라구요??
아마도 여권이 신장되다보니 기존에 권리를 가지고 있던 남성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거겠지요..그러니 여자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더 있나요.. 사실, 있는 자들의 부를 없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면 있는 자들이 반발하는 것처럼, 그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
 

『쉬운 삶을 추구하기란 어렵다.

-윌리엄 쿠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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