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극장에서 본 영화다. 당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때문에 이 영화 본 사람 많을텐데(나!), 극장을 나올 때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만 떠올랐던 듯 하다. 넷플릭스에서 12월 1일부터 볼 수 없다고 하길래, 다시 봤다. 거의 20년 전에는 정말 잔인하다 생각했는데, 지난 시간 살아온 동안 잔인하고 어이없는 것들을 많이 봤는가보다. 생각보단 덜 잔인했고, 생각만큼 부끄러운 과거(나 말고 뉴욕이)를 그리고 있었다. 파이브 포인츠, 이민자가 토착민이라고 유세를 떨며 뒤이어 오는 아일랜드인들을 무시한다. 결국 두 세력은 맞붙고 빌 부처가 이끄는 토착파가 승리하고 아일랜드 이민자를 이끌던 사제의 아들인 암스테르담은 복수를 다짐하는데… 결말이 예상과 달랐고 마음에 들었다. 멋있게 싸우다 죽었으면 뭔가 미화되고 결국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게 정당화될 것 같았는데, 시대의 흐름이 그들의 운명을 선택한 느낌이라 좋았다.
눈, 코, 귀, 입이 있어도 마음이 없다면 선악 판별이 안 되어,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도 좋았다. ‘절개’라는 게 스스로가 정한 것을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지키는 거라면 남녀 구분 없이 멋진 듯 하다. 그런 확신이 멋지다. 조선 사람들도 지금 우리랑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옷차림이 허름하다고 무시하다가 혼쭐 나는 선비나, 까치가 정남향에 둥지를 지으면 승진한다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나, 꾸준히 노력하여 달인이 된 임성정이나 모두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 하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에게 고맙다. 그가 <천예록>이나 <청파극담>의 이야기들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편하게 보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여전히 재미있다. 그런데 관우가 한 번씩 나와서 한양도 구해주고 그러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서 그런걸까. 옛날 사람들도 귀신 이야기를 참 좋아했나보다.
"이야기의 허물을 찾지 말고, 그 교훈을 배우라." - P32
옛날 이야기들을 각색하기도, 새롭게 만들기도 한 기이한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어느 시대든 사연 없는 이가 있겠냐만은 평범하다고 여긴 이들의 사연일수록 더 기구한 듯 하다. 게다가 어린 아이를 주술의 도구로 이용하는 건 정말 천벌 받을 짓이다. 어린 아이를 대나무통에 넣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배고픈 아기가 강렬한 젖 냄새에 팔을 뻗을 때 그 팔을 잘라 도구로 삼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열녀문 역시 마찬가지. 슬프게도 어디든 약하고 약한 상대를 짓밟는 짐승 같은 것들이 있다. 굳이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사회상을 보여주거나 듣는 이가 공감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네가 그린 그림들을 보니 하나같이 기이하거나 괴기스러운 이야기뿐이구나. 주막에서 일하면 보고 듣는 것이 많을 텐데 어째서 특별히 이런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 건지 물었다.""그, 그건…."선노미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일상에선 좀처럼 볼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는 언제나 선노미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그리고 있을 때면 주막집 허드렛일을 하는 자신의 신분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네가 그린 이야기는 지식을 알려주지도, 충효를 가르쳐주지도 않 - P357
는다. 백년 묵은 여우나 처녀 귀신 같은, 어찌 보면 황당하고 뜬구름잡는 얘기지. 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지?"선비는 선노미를 질책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에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선노미가 간신히 대답했다."저는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할 때 사람들은 울고 웃었습니다. 저도 먼발치서 이야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같이 기뻐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니 황당하고 뜬구름잡는 얘기라도 얕잡아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 P358
여전히 재치있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계속 된다. 거들먹거리며 무례한 벼슬아치를 골탕먹이는 건 즐거웠다. 그리고 기이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귀신 이야기, 신선 이야기, 어진 왕을 만나 높은 관직에 오른 이들까지 재미있었다. 다만 ‘진짜 무당’ 이야기는 짤려서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