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냉면 안전가옥 앤솔로지 1
김유리 외 지음 / 안전가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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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냉면을 좋아한다. 코로나가 있기 전에 남편이랑 나는 여름 휴가 때 서울에 있는 유명한 냉면집들에서 냉면을 먹고는 했다.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든 곳이 '을밀대'와 '필동면옥'이었다. 유명하다는 곳들을 다 가보지는 못해도 나름 다녀 본 결과 이 두 곳은 몇 번이나 갔었다.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에는 맛집을 다니기가 쉽지 않아 슬프게도 아직까지 냉면을 먹지 못하고 있다. 자매품으로 막국수도 좋아한다. 원주에 갔을 때 그냥 들어간 곳이 '남경 막국수'였는데 부산에 돌아와서 우연히 맛있다고 찾아갔던 막국수 집이 원주에 있던 '남경 막국수'의 따님과 사위가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두 분이 원주로 돌아가서 맛있는 막국수 집 하나를 잃었지만. 


첫 번째 소설, <A,B,C,A,A,A>는 처음엔 화가 나는데 점점 마음이 따뜻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읽다가 부곡동에 있는 냉면 맛집이라고 나와서 급하게 검색해 보기까지 했다. 검색 결과에 안 나와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나'는 77년생에 165cm의 키에 98kg의 몸무게를 가졌다. 반면에 남자친구인 'A'는 90년생에 188cm의 키에 초콜릿 복근을 가졌다. 'A'가 사귀자고 했고,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자고 했다. 그 뒤 그녀는 왜 나와 사귀는지, 나의 어디가 좋은지 묻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들어도 비참해질 것 같아서라고 했다. 실패한 연애들 후에 만난 'A'는 진짜 좋은 사람이거나 사기꾼일 것이다. 앞의 연애(B,C)가 실패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나'와 만난 남자들이 하나같이 '나'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감정 쓰레기통이나 힘든 일을 대신 해치워주는 사람이나 돈을 내 주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나'를 착취하던 사람들... 나쁜 놈들. 하지만 'A'는 무언가 달랐다. 옷을 사라고 돈을 주기도 하고, 어디서 옷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기도 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우울한 '나'에게 계획이라는 것도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로가 발전하는 관계. 너무 멋져 보였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 비해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을까? 부산에서 글쓰기 강습소를 운영하는 '나'는 수강생으로 'A'를 만났다. 대학교 4학년이었던 'A'는 자소서를 잘 쓸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나'와 만났고, 취직을 했고, 짜장면을 먹으며 사귀게 되었다.


냉면을 좋아하지 않아도 내색 없이 '나'를 따라다니며 같이 냉면을 먹었던 'A'. 상대가 좋아하니까 배려해 주고, 상대를 좋아하니까 상대의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여 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왜 나를 좋아하지?란 질문조차 주저하지만, 분명 함께 한 시간들은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다. 드디어 왜 나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하게 될 만큼 성장하게 된 '나'는 'A'의 대답에 또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나도 치유되는 것 같아...


<혼종의 중화냉면>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얼마 전에 읽은 <파친코>와도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나 할까. 엄마와 아빠의 국적이 다르면 그 아이는 혼혈이지, 잡종이 아닌데 말이다. 어디에나 혐오가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일상이 되어 어느 수준까지는 그저 감내하고 살아가는 그들이, 심지어 그들 내에서도 또 다른 혐오가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면서도 놀라웠다. 잡종이라고 놀림받는 사람이 베트남에서 온 라라에게 콘 가이(화냥년의 딸)라고 하는 장면은 악의가 가득했다. 


다들 외로웠겠지. 어딘가 속하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삶이란 것이 힘들고 외롭고 아플테다. 그 아픔을 똑같이 혐오로 풀면 안 되지 않을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의 악의 가득한 말에 상처 받으면서도 유를 좋아하는 라라도 안 됐고, 계속되는 엄마의 재혼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얻지 못한 '나'도 안 됐다. 하지만 '나'에게는 '언니'가 있었다. 왕시안.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가족 같은 언니.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이 사람이 없는 북극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처럼, 언니는 남극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생과 언니는 그들 간의 거리를 좁혀갈 수 있을까? 차별과 악의가 없는 세상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중화냉면이 중국 냉면도, 한국 냉면도, 일본 냉면도 될 수 없다고 비아냥대지만 사실 중화냉면은 그냥 그 자체로 중화냉면인 것인데.


<남극낭만담>은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오마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급하게 그 책을 찾았는데, 그저 고대 존재(올드원)란 게 있다는 사실만 알기로 했다. 다른 작품부터 읽어야 하니까. 그리고 작가 후기에서 김수정의 <아기 공룡 둘리>의 오마주라는 말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둘리와 둘리를 둘러싼 고길동을 비롯한 많은 이들 사이에는 연민과 애증이 가득하며 뭔가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으니까. 외계 생명체에 의해 실험체가 되어 엄마와 떨어진 둘리와 그를 부양(?)하게 된 고길동은 우리 주변에 보이는 가족 같은 형태이지 않은가. 


남극이란 곳이 주는 장엄함과 고독이 올드원의 고기를 탐하는 미각(?)이랑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에 남극의 크레바스로 떨어졌을 땐,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걸 상징하는 건가 싶었다. 음, 어쩌면 먹고 싶은 음식이란 무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네. 아무튼 그런 큰 일들을 겪고 우 감독과 세연 씨는 보다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어떤 끈으로 연결된 듯 한결 가까워졌다. 미지의 그 곳에서 보는 오로라는 얼마나 인간을 작아보이게 만들까.


위의 세 편이 수상작이고 나머지 두 편은 초대작이라고 한다.


초대작 중 한 편인 <목련면옥>은 한 편의 스릴러 공포물을 보는 느낌이었다. 검은 어둠보다 짙고, 습지보다 축축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끈끈이에 발이 붙은 것처럼, 떨어진 목련이 짓이겨져 갈색의 더러운 물질이 된 것처럼 기괴한데 궁금했다. 


사채업자를 피해 일자리를 구하던 준민은 우연히 보게 된 목련면옥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다. 숙식까지 제공하기에 숨어지내기 좋다고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무언가 기괴한 느낌과 이상한 소리에 시달린다. 그리고 가게 자체도 이상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이 너무 많은거다. 어째서 사람들이 겨울에도 냉면을 먹으러 오는 건지, 사장이나 수희 아줌마는 '업'이란 이야기를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옛날 이야기에 무당들이 무구나 제물을 만드는 것들이 많은데 마치 현대에도 그것이 재현된 느낌이다. '돈'이라는 엄청난 신을 모시는 무당들 말이다.


<하와이안 파인애플 냉면은 이렇게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곽재식 작가의 단편으로 현실을 잘 꼬집어 준다. 나라에서 하는 사업과 도전을 하라면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잘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냉면과 MSG. 기회를 잘 엿보고 말 잘하고 실행력 있는 사람 옆에 있으면 뭐라도 하게 되니 좋은 것 같기는 하다. 어찌보면 사기꾼 같기도 하지만, 자신감 넘쳐 보이고 있어 보이는 모습도 재능은 재능이다. 사업할 때 꼭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고. 영란 선배 부럽소. 


조만간 냉면 먹으러 어디든 가야겠다.


*앤솔러지란 말 대신 작품집이나 작품선, 혹은 이야기들이라고 하면 더 좋을텐데.


어른이 되어 가며 알았다. 사람들과의 관계란 당연하다 여겨 온 것을 부정당하는 과정이었다.(43/236) - P43

"내 관점에서 빙저호 탐색에서의 오염 문제는 제국의 식민 지배 같은 건데 말이야. 바다 건너에서 찾아온 방문자가 온갖 오염 물질을 뿌리고는 실험을 하겠다며 동료들을 납치해 가니까."

"어쩜 김 박사님은 사람이 그리도 꼬이셔서."

"달리 말하면 외계에서의 방문이라고 할까? 화성 침공 같은 거 말이야. 이게 나쁜 일만은 아니야. 우 감독 듣기에는 내 성격이 꼬여서 나온 말로 느껴지겠지만 어떤 학자들은 생명의 기원에는 우주 너머에서 지구로 떨어진 운석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고. 외부에서의 침략 그건 내부의 변화를 강제하고 진화로 이어지는 큰 동력이야."(113/236) - P113

"좀 답답하네요. 그렇게 도전적인 살업에 도전해 보라고 열심히 홍보를 해 놓고, 막상 정말 도전적인 사업을 하려고 하면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실패하면 큰일 나니까.‘라고 못 하게 한다는 게."(204/236) - P204

내 자신이 그 영화 속에서 금붕어를 담고 있는 봉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09/236)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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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5-16 06: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회냉면 가장 좋아해요. 근데 얼마전 갔더니 ₩13,000 ...게다가 회의 양도 현저히 줄어서 ㅠㅠ
요정님은 평양냉면을 좋아하시나보네요.
냉면을 소재로 한 이 책 재밌을거 같아요 ㅎ

꼬마요정 2022-05-16 12:36   좋아요 2 | URL
저는 평양냉면 좋아해요^^ 그런데 13,000원이라구요? ㅜㅜ 냉면 넘나 비싸요ㅠㅠ
물가가 올라서 아무래도 예전 같은 느낌은 아니겠네요. 슬픕니다.
이 책 은근 재미있습니다. 냉면으로 이렇게 삶을 그려내다니, 정말 대단해요!!

새파랑 2022-06-10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꼬마요정 2022-06-10 11:19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햇살이 참 좋습니다. 맛있는 점심 드시구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singri 2022-06-10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꼬마요정 2022-06-10 21: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6-10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기쁘고 여유로운 주말되세요~~

꼬마요정 2022-06-10 21: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맛있는 저녁 드시구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6-1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06-10 22:3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행복한 꿈 꾸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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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는 존재들과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이야기들. 가스라이팅, 환경 파괴, 가부장제 내의 심각한 폭력, 가족 간의 애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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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25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어제 읽었는데요, 이 책 읽고나서 ‘분명 꼬마요정 님은 읽으셨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안읽으셨다면 선물해드려야지, 하고 검색했더니 이렇게 꼬마요정 님의 별다섯 구매자평이 똭- ㅎㅎ

꼬마요정 2024-09-25 22:44   좋아요 1 | URL
하하하 이 책 제가 처음 읽은 조예은 작가 책이랍니다. 이 책 읽고 너무 좋아서 조예은 작가 책 잔뜩 읽었네요. 여전히 이 책 참 좋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드라마 단막극으로도 나와 있답니다. 드라마도 참 좋았어요.

다정한 다락방 님, 말씀 너무 고마워요. 다락방 님 제 취향 너무 잘 아시는 듯해서 더 기쁩니다^^ 만약 제가 안 읽고 선물 받았더라면, 읽고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췄을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책을 선물하고 싶네요, 다락방 님처럼^^
 
사물들(랜드마크)
박서련.한유주.한정현 지음 / 아침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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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난 몇 번이나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표현에 대해 둘째 동생은 살짝 비아냥거리긴 하지만. 늘 시장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가 늘 두리번거리며 시장 구경 하다가 엄마 손을 놓쳤다. 난 두 번 밖에 기억 나지 않는데, 몇 번을 엄마 손을 놓친 그 자리에서 울고 있어서 찾을 수 있었다 했다. 한 번은 울고 있으니 어떤 언니가 나를 파출소에 데려다줬다. 지금 생각하면 난 운이 참 좋았다. 그 다정하고 착한 언니가 파출소에 데려다줬으니까. 파출소에 갔더니 엄마 손을 놓친 애가 나만은 아니었다. 나보다 덩치 큰 남자애는 정말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경찰 아저씨가 집주소나 전화번호 등을 아무리 물어봐도 울기만 했다. 나는 그 언니를 만난 후부터 울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도 뭔가 안도했던 것 같다. 경찰 아저씨가 나에게 물었다. 난 또박또박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곧 나를 데리러 온 엄마랑 할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크으, 그 때 영리해서 다행이야.) 그 와중에 단팥빵도 하나 얻어 먹었다. 경찰 아저씨들 고맙습니다.


난 그 기억을 떠올리면 '그' 약국이 떠오른다. 국제시장에 있는 그 약국을 지나서 파출소로 갔으니까. 나에게 내 삶의 사물들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한다면 '천우사 약국'은 꼭 들어갈 것 같다. 그 때 그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파출소에서 울다가 전화번호를 말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박서련 작가는 어린 시절 장소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정말 집과 학교, 교회만 왔다갔다 했다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을지 짐작도 안 가지만(사연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한 멋진 글이 나왔다. 블러바드라는 단어와 달리 폐허 같은 그 모텔은 좀비와 미션을 수행하는 '나' 뿐이다. 그리고 방 하나 하나 탐색하며 목적인 듯 목적 아닌 목적 같은 '그래니 온 그래니'를 찾는다. 그냥 미션이니까 찾는다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나 앞에 '소냐'가 나타난다. 좀비가 출몰하는 세상에서 딸을 찾는다는 그녀와 함께 하게 된 나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삶이란 것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처럼, 죽음이 목적이자 끝이라면 사는 동안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허망하지 않을 것 같다. '나'가 마체테를 습관처럼 휘둘러 사는 대로 살아버려 불안해 하는 모습은 결코 좋아보이지 않았으니까.


한유주 작가의 수많은 6월들은 여행 같았다.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는 내가 자주 보던 미드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너무 많이 보았던 그 곳. CSI:NY에서, 블루블러드에, FBI 에서 보던 곳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난 가보지 않은 곳의 여행자가 되어 다리와 지하철과 히잡 쓴 남자를 상상한다. 


홍콩은 우산혁명이 일어나기 전 갔었다. 시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더 이상 응급실이든 어디든 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던 그 때, 홍콩 가는 비행기 표를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트도, 장국영이 뛰어내린 만다린 오리엔탈도 보았다. 슈퍼마켓에서 과일도  사 먹었고, 항구에서 페리도 기다렸다. 그렇게 읽는 내내 추억을 더듬었고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도 느꼈다.


로마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이번 생에 더 이상 해외여행을 갈 수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로마의 피제리아는 어떨까. 여행자에게 낯선, 그래서 들뜨게 하는 이 도시들은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지나간다. 이야기는 그렇게 거주민들에게는 가혹하고 여행자들에게는 설레지만 동시에 무섭게 느껴지는 도시들을 노래한다. 그리고 서울, 무너진 다리를 추모한다.


한정현 작가의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은 가슴 아프게 읽었다. '코타르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자신이 죽어 영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는 그 병에 걸린 이모, 박덕자 씨는 자영이란 이름의 영혼이 되어 자신의 지난 날을 증언한다. 평생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는 영혼이 되어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강남의 커다란 백화점이 무너지던 때,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끝내 다 들어주지 못했기에, 평생을 소외된 사람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뻔하디 뻔한 통속극 같은 위장 취업한 대학생 남자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같은 그런 상황이 사실은 뻔하지 않았다. 성별이 어떻든 한 쪽은 자신의 위선에 죄책감을 느꼈고, 다른 한 쪽은 모르겠다. 나오지 않으니. 하지만 둘은 함께일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서로를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 


삼풍 백화점과 관련한 에세이는 좀 생소했다. 나나 내 주위 사람들은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은 당연히 백화점 사장 및 경영진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니까. 그 곳에 여자들이 명품에 미쳐서 혹은 돈 쓰러 가서 죽었다며 백화점을 이용한 사람을 욕하지 않으니까. 먼저 빠져나간 사장놈들이 미쳤다며 욕 하니까. 그 처참한 현장에서 도둑질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니까. 


서울, 강남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사건이 된다는데, 지방에 사는 내겐 삼풍 백화점이 강남에 있는 줄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야 삼풍 백화점이 서울에 있었던 것을 알았다. 나 역시 이제 강남을 생각하면 삼풍 백화점을 떠올리게 될까.

당사자만이 아는 슬픔, 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낯설었다.자신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라고 확신하는 병이라니... 그로부터 이모가 요양병원에 들어가기까지 1년여를 나는 자신을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죽은 이모와 함께 살았다. 자칭 영혼, 죽은 이모. 아니, 죽었지만 산 이모.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모는 그제야 자신의 ‘생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 P105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애틋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삶은 기억만으로 이뤄지는 건 또 아니다. 비록 이모의 마음에서 이모는 죽었겠지만, 현실에서 이모는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니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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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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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란 드라마를 아시려나 모르겠다. 성유리가 백제의 공주로 나오는 그 드라마는 내용보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라는 대사로 더 유명하다. 망한 나라의 공주가 힘겹게 살아가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죽음의 문턱에서 천 년 후의 세상으로 넘어온다. 비슷한 이야기로 ‘비천도’도 있다. 그 이야기는 결은 좀 다르지만 중요인물이 현대로 넘어오고, 일본과 관련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 책을 읽는데 문득 부여주가 떠올랐다. 무술을 잘 해서 멋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장희’ 역시 무술을 아예 못하지는 않는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빠르다. 한 마디로 능글맞지만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반면 ‘한수생’은 좀 멍청하지만 우직하고 곧이곧대로인 인물이다. 큰 욕심이 없고 정직하게 일을 해서 태평성대를 만났다면 아무 탈 없이 적당히 행복하게 살았을테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태평성대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서기 861년이면 신라가 망해가고 있을 즈음이다. 장보고가 큰 뜻을 품고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들로부터 신라인들을 보호하다가 점점 권력에 빠져들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듯, 신라 자체도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장보고 밑에 있던 장희는 장보고가 죽은 지도 15년이나 지난 뒤에 돈이 떨어져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서 한수생을 만난다.

“항해만사”
무슨 문제든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데, 막상 맡은 일이라는 게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개미와 베짱이도 아니고, 열심히 일해서 가을에 수확하여 먹을거리를 마련한 한수생과 학문을 닦고 눈을 높인다며 매일 서라벌 구경을 하는 바람에 먹을거리가 다 떨어진 마을사람들 사이에 다툼(?)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 있었던 거다. 베짱이는 여름 내내 갈고 닦은 노래 실력으로 가수가 되어 떼돈을 벌었다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리 서라벌 구경을 다니면서 돈 벌 기회도 잡지 못해 남의 것을 탐하다니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게 비슷하다.

여튼 한수생은 도망을 치고 장희는 그를 돕는 듯 아닌 듯 돕게 되면서 한바탕 모험이 시작된다. 백제가 멸망한 게 외우기도 쉬운 660년이니까 벌써 200년도 전에 사라진 나라다. 그러니 백제부흥운동이니 풍 태자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백제 왕실의 핏줄이라는 공주가 있다니… 저기 그 쪽도 타임슬립 했을까나? 작은 섬에 공주도 있고 장군도 있고 부마도위도 있구나.

명분이라는 게 참 중요하다. 여기 이렇게 백제 공주까지 상징적으로 모셔두고 정부를 구성했다 한들, 풍 태자가 보물이랍시고 ‘그것들’을 만들든 나라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900년에 세워진 후백제가 더 어엿한 나라가 아니던가.

풍자와 해학이 있고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 있고 멋지진 않지만 모험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부정부패와 함께 몰락해가는 나라가 있는 이야기. 하하하 즐거웠다.

장희와 백제 공주 너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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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22-05-10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기적인 사람들과 부정부패와 함께 몰락해가는 나라가 있는 이야기.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것 같아요,
특히 오늘은.... 이런 생각이 더 드는 날이네요.

꼬마요정 2022-05-10 10:47   좋아요 1 | URL
어쩌면… 국민에 의해 철저히 견제 당하는 정부를 만들어 볼 지도 모르죠, 우리가.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에 있던 혐오들이 드러났잖아요. 보다 살기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해 겪는 시련일거라 믿어봅니다. 지난 5년이 그리울 거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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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제법 크지만 투명해서 크게 느껴지지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 딸기꽃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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