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김보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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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우주에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건 얼마나 큰 인연인 걸까. 그런 인연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하는 건 어떤 섭리에 따른 것일까. 그렇다면 그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성간 여행이 가능하고, 성간 이주가 가능하게 된 어느 가까운 미래,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친한 사람들을 초대한다. 결혼은 여자가 자신의 가족을 다른 태양계인 '알파 센타우리'로 이주시킨 뒤 지구로 돌아오는 때인 4년 반 후이다. 빛의 속도로 성간 여행이 가능한 때, 시간대를 맞추기 위해 남자는 '기다림의 배'에 올라타게 되고, 둘은 그 때부터 아주 긴 시간 동안 떨어진 채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며 절절한 편지를 쓰게 된다.


청혼 소설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총 3부작이며, 첫 편인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알파 센타우리로 떠난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가 탄 배가 다른 시간대를 타기도 하고, 여자가 탄 배가 구호 활동을 위해 시간대가 변하기도 하는 등의 이유로 시작해 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게 되고, 어느 순간 흘러버린 지구의 시간 자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 3D 프린트기로 만든 '밥통'을 가지고 돛단배 같은 작은 배에 올라탄다. 그 돛단배는 빛의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는 끊임없이 홀로 우주를 떠돌다 지구로 돌아와야 했고, 간간이 받은 여자의 편지를 위안 삼아 기다림를 이어간다. 


그 절대적 고독 앞에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기다릴 수 있을까? 처절한 원망도, 참담한 그리움도 모두 남자의 가슴 안에 가둬두고 미치기도 하고 제정신이 들기도 하면서 긴 시간을 감당한다. 그런 와중에도 남자는 모든 감정을 쏟아내듯 편지를 쓴다.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올 거라고 믿으면서.  


지구는 파괴되고, 문명은 몰락했으나 그들이 식을 올리기로 한 교회는 여전히 굳건했다. 그것은...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계시는 아니었을까. 몇 번이고 죽을 뻔한 위기가 있었으나 번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심지어 스쳐지나기도 했던 것은 그들을 연인으로 이어 준 '우연'이 '필연'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광활한 우주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를 만나기 위해 시간선을 여행하는 것은 어쩌면 축복 받은 일일지도 모른다. 

내 편지를 그럼 어쩔 거냐고 했더니 모스부호로 바꿔서 우주에 전송한대. 그러면 가까운 데 지나가던 배가 받아서 더 증폭시켜 날려 주고, 또 그걸 받은 배가 더 날려서 전해 준대. 내가 들으면서 와, 참 안전하겠군요, 왜 지금까지 우체부들이 차에서 차로 편지를 던져 전하지 않았나 몰라요, 했어. - P21

내가 여기에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자제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당신이 지금 어느 시대에 있든, 이미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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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리드 스티키 노트 -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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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다양해서 아무 때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게다가 너무 귀엽다. 오늘 할 일부터 책 속 메모까지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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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길상문연화루 - 하 길상문연화루 3
텅핑 지음, 허유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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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양촌에는 홍염각이라는 곳이 있고, 왕팔십은 그 곳에서 일하는 아주 불운한 사람이다. 부모는 어릴 때 다 돌아가시고, 증조모가 여덟 살인 그를 홍염각에 팔십 전을 받고 하인으로 팔아버렸으니 그 때부터 그는 왕팔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홍염각에서 일 하면서 모은 돈으로 결혼도 했으나 아내는 그가 키가 작고 못 생겼다고 이웃집 남자랑 도망 가 버렸다. 하지만 왕팔십은 그저 묵묵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또 나쁜 일이 생겨버렸다. 왕팔십의 집 대들보에 여자 옷을 입은 암퇘지가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었던 것이다. 딱 마침 그 곳에 있던 우리 이연화는 왕팔십에게 밥을 사 주게 되었고, 그 때 왕팔십의 집이 불타버리게 된다. 불운한 듯한 그이지만, 이번엔 다행이었다, 그가 없을 때 불이 나서. 그리고 백천리가 등장하며 소사가 나타났다. 


소사검은 검은빛이 도는 장검으로 그 검은빛에서 짙은 쪽빛이 은은하게 돌고, 검집에선 어두우면서도 매끄러운 윤기가 흘렀다. 이연화는 검자루에 애자(용의 아홉 아들 중 둘째)가 조각되어 있고 애자의 입에 검수(검자루에 달린 술)를 끼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십오 년 전 이상이가 교완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검자루에 한 장이나 되는 붉은 비단을 묶은 뒤 양주 강산소의 청루 지붕 위에서 취여광삼십육 검을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는 이 검이 적비성과의 싸움 때 적비성의 탄 배의 돛대를 부러뜨린 뒤 뱃머리의 쇠사슬 틈으로 떨어졌다가 갑판이 갈라질 때 튕겨나가 망망대해에 가라앉는 것도 보았다. 이연화가 이 검을 손에 쥐었을 때, 전운비의 말을 떠올렸다. "미련 없이 검을 버리는 이도 있지만, 일평생 저버리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신념이 다른 법이지요." 이연화는 자신이 저버린 것들 중 소사검에게 제일 미안했다. 


부러진 창날, 금엽 명패, 붉은 콩, 꼬깃꼬깃 접힌 종이... 이 사건은 근친과 치정이 얽힌 끔찍한 사건이었다. 강절 최고의 무림성지 만성도 총단의 총맹주 봉경과 관련된 추악한 사건은 금원맹의 후신인 어룡우마방의 일품독 청량우와 봉소칠의 사랑, 가짜 소사검, 만성당 제자 소소오가 얽혀 있었고, 일련의 살인들을 목격한 증인의 증언과 태아의 시체, 그리고 진짜 소사검으로 인해 밝혀졌다. 


봉경은 어떻게 이연화에게 소사검을 내 줄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 이연화가 파사보로 봉경의 혈도를 찍어 그를 무력화 시킨 뒤 백천리 등과 함께 검을 빼앗았겠지. 아니면 상이태검이라는 절세무공으로 그를 제압했든지... 하지만 그 일을 보지 못한 방다병은 믿지 못할 밖에...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이상이가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워졌다.


이제 사건은 막바지로 치달아간다. 봉소칠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종이는 청량우의 것이었는데, 종이에 풀을 붙여 만든 육면체로 모서리마다 자르는 선이 그어져 있고, 안 쪽에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연화는 이 물건이 청량우가 구하려던 사람과 관계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고 방다병은 그 동안의 반항이 부질없게 부마가 되기 위해 전신 스물여덟 곳의 혈도를 짚인 뒤 경덕전으로 끌려간다.  


경덕전은 황궁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황제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이제 황궁까지 왔다. 첫 사건인 푸른 창의 살인귀부터 목을 매단 돼지 사건까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결국 이연화가 황궁까지 오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극락탑'은 천하를 손에 쥐고 싶어 한 각려초의 비장의 무대이자 마지막 무대가 될 터였다. 


십삼 년 전 어느 날 밤 황제 형징이 궁중에서 술을 마시는 데 신선이 나타나 궁에 피어난 우담화를 안주 삼아 지붕에서 술을 마셨다. 우담화 서른 세 송이가 질 때까지 앉았다가 검을 들고 떠났다고 한다. 흥이 다하자 훌쩍 떠나버린 그 초연함에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동경했다고. 그리고 십삼 년 후인 이 날, 황제 형징이 있는 지붕 위에서 방다병에게 전음입밀로 사건의 진상을 알려준 이는 이연화였다. "닮았구나"라고 중얼거리는 황제는 몰랐다. 그 신선이 이상이였다는 것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황제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고 그 증거를 제시하여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일련의 일들 또한 무시무시했다. 만약 황제가 조금이라도 무도하거나, 자격지심이 있거나 한다면 이연화는 물론이고 방다병과 그 집안의 구족까지 몰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슬기롭고 총명했으며 대범했다. 황궁 시위 중 가장 강한 어사천룡 양윤춘과 함께 금원맹의 삼맹(염제백왕, 사상청존, 염라심명) 중 한 명인 사상청존을 잡았다. 그는 관리가 되어 있었고, 많은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이연화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린 채 사건의 진상을 모두 듣기 위해 그와 대결했는데, 내력이 부족한 이연화였으나 너무나 멋진 장면을 연출해버렸다. 


유가화는 사상청승도 열 개를 동시에 날려 이연화가 열 개를 동시에 막느라 정신 없는 틈을 타 '십성일도참'으로 목을 누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연화의 검이 허공을 '한 번' 가르자 순식간에 암기 열 개가 튕겨져 나갔다. 이는 그가 휘두른 검이 두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가 첫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보다 빠르고, 세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가 두번째 암기를 베는 속도보다 빠르고, 이렇게 암기를 하나씩 쳐 낼때마다 베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마지막 열번째 암기를 쳐 낼 때는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암기 열 개가 찰나의 간격도 없이 동시에 튕겨나갔고, 검신에서 터져나오는 울림 역시 열 번이 아닌 하나의 장음처럼 들렸다. 이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방다병과 양윤춘이 유가화를 제압하려 했으나, 얼음바늘 같은 검기와 머리카락도 베어낼 것 같은 예리함을 가진 일격에 모두 주춤했다. 그리고 그 일격을 받아낸 것은 이연화였다. 붉은 옷의 여자, 각려초는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고도 깔깔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이연화는 피를 토하면서도 유가화에게 그의 스승이었던 옥접선자 완운낭이 자신의 검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유가화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 뒤 학정홍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방다병은 부마가 되었다.


극락탑 사건을 해결한 이연화는 연화루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누군가 찾아왔고, 소사검으로 그를 찔렀다.


각려초는 적비성을 사랑했고, 이상이를 미워했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를 잠시나마 차지했다. 칼에 찔린 채 각려초에게 사로잡힌 이연화는 탈출했고, 적비성을 구했다. 오랜 적이나 서로를 잘 아는 둘은 거리낌없이 서로의 목숨을 내맡겼다. 그리고 금원맹이든 어룡우마방이든 무너졌다. 오래도록 준비한 백천원의 첩자가 속죄와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짠 계획에 자신들의 힘을 보탠 것이다. 운피구는 각려초의 신임을 얻어 치미전 등 어룡우마방 본진에 기관들을 설치했고, 설공공을 죽였다. 그리고 오명을 쓴 채 죽으려고 했고, 이상이가 나타났다. 


결국 모든 인연을 매듭지었다. 이상이가 죽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던 운피구는 가장 늦게, 그리고 참혹한 속죄 끝에 용서 받았다. 적비성은 상이태검과 다시 한 번 겨루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초자금은 드디어 온전한 아내를 얻었으며 이상이에 대한 자격지심을 털어냈다. 


이상이를 흠모하던 방다병은 끝끝내 이연화를 찾아냈고, 속았다고 화를 냈던 시문절은 드디어 이연화를 알게 됐다. 어쩌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 옛날 오만하고 도도했던 이상이가 배신에 고통스러워하고,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강호를 호령하던 사고문 영패마저 팔아야 할만큼 처지가 비참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명예나 권력보다 자유가 더 소중함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정의를 외치며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부질없음을 말이다. 지난 사건들을 돌아보면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믿어 행하는 것들이 때론 추악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많지 않았는가.


그토록 잊히고자 했으나 결코 잊히지 않았던 이상이는 도리어 이연화라는 인물까지 잊히지 않도록 만들었다. 부존재(不存在)하는 이 하나가 존재(存在)하는 다수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건 그가 그토록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가 품은 양주만(揚州慢)이 양주만이라는 이름인 것은 남송 때 시인인 강기의 시 '양주만'에 흥망성쇠의 슬픔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흥한 것은 쇠하기 마련이니,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울 때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밀려오는 불행을 받아들이고 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 않았나. 가장 순수하고 조화로운 심법, 어쩌면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을까. 


이연화는 정말 미쳐버렸을까?     

이연화가 돌연 진지하게 물었다. "날 죽이는 것 말고 다른 계획은 없어? 가령 금원맹의 부흥이라든가. 은원맹, 철원맹, 금앙교, 금조방 같은 이름으로 말이야. 아니면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 청루를 차리고 아내를 얻는다든가."
"왜 아내를 얻어야 하지?" 적비성이 반문했다.
이연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는 다 그러니까."
적비성이 우습다는 표정으로 이연화를 흘긋 보았다. "너는?"
"나도 아내를 얻었었지. 아내가 재가를 했을 뿐……" 이연화가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 "십이 년 전 모두에게 약속했지. 완만이 혼인하는 날 희당을 나눠주겠다고. 완만이 자금과 혼인하던 날, 난 무척 기뻤어. 완만이 더이상 불행하지 않을 테니까."
횡설수설하는 이연화의 얘기를 적비성은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적비성이 마지막 술 한 모금을 입에 털어넣은 뒤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여자 하나일 뿐."(376/490) - P376

이연화는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아미타불, 시주님의 그런 생각으로는 평생 아내를 얻을 수 없습니다."(376/490)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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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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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밤의 약국에는 많은 방문객이 있다.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비록 꿈이지만 문어도 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소란스럽기도 하고 진저리가 나기도 하지만 또 훈훈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 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는 많은 존재들이 함께 살아간다. 그런 세상일을 작가는 섬세하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담담하게 이야기 한다.

밤이 깊다.
아직 잠들지 못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p.279)

먼저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사야 할 책을 검색한다. -> 그러다가 온갖 링크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실제로는 유한하겠지만 알고 보면 무한한 책들의 미로를 헤맨다. → 그러면서 동시에, 손에 잡히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는다. -> 담을 만큼 담은 후, 결제한다. -> 주문한 책들의 목록을 보며, 꼭 사려고 했던 가장 중요한 책은 정작 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오히려 기뻐하며 다시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다시 사야 할 책을 검색한다. 또다시, 온갖 링크를 타고 돌아다닌다. -> 아까와 같은 공간이지만 완전히 달라진 책의 미로를 헤맨다. -> 그러면서 또 다시금 장바구니에 책을 담는다.→ 책값을 결제한다. 이번에도 또, 꼭 사려던 책이 빠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 다시 인터넷서점에 들어간다. -> 위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 → 마침내 무한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 P170

‘나‘는 ‘뇌‘가 아니라 ‘(뇌를 포함한) 몸 전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순전히 나의 강아지들 덕분이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마토는 내게 생명의 불가역성, 그 빛나는 유일함을 일깨워줬다. 품에 안은 강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서서히 식어갈 때, 난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에 맞닥뜨렸다. ‘살아 있다는 건 뭘까?‘ 그리고 칸토와 매일 산책하면서 나는, 움직이고 걷고 뛰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나 자신이 곧 ‘살아 있음‘이라는걸 알았다. 만약 슈퍼컴퓨터가 있어서 거기에 나의 뇌를 온전히 업로딩한다 해도, 그게 결코 ‘나‘일 수 없음을, 이렇게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업로딩된 내가 영원히 살며 세상의 모든 지혜와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해도, 그 존재는 산책하며 나뭇잎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따뜻하고 북실북실한 칸토의 털에 얼굴을 파묻지도 못한다. 뇌(혹은 의식, 누군가는 이것을 영혼이라고 표현하겠지만) 몸을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현대의 새로운 종교이며, 죽으면 영혼만은 천국에 올라가 영원히 산다고 믿었던 오래전의 이원론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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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31 0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70쪽 인용문!!!ㅋㅋㅋ
저것은 우리의 모습인 거잖아요?ㅋㅋㅋ

꼬마요정 2023-07-31 08:40   좋아요 2 | URL
맞아요!! 무한에 빠진 우리의 모습이죠!! ㅋㅋㅋ 저 부분 읽으면서 어찌나 웃기면서 공감했는지 몰라요 ㅋㅋㅋ 어멋, 이건 나잖아!! 이러면서요 ㅋㅋ 살 책을 안 샀는데 오히려 기뻐하며 다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간다… ㅋㅋㅋㅋ 작가님 맘 내 맘 책나무님 맘 ㅋㅋㅋ 이렇게 책에 깊이 공감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에요 ㅋㅋㅋ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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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그는 어디서든 《불안의 책》을 보기만 하면 얼른 지나쳐 갔다. 두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 일은 둘이 헤어질 때까지 앙금이 남아 있던 온갖 사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이 굉장한 책이 저한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시몽이스가 책의 가격을 계산기에 찍으며 이어서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다는 느낌이에요." - P97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 가운데 하나였다.299

그레고리우스는 목록에 사랑이 빠졌다고 말했다. 조르즈의 몸이 뻣뻣해졌다. 잠깐 그는 술이 완전히 깬 듯했다.
"아마데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소.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피했지. 그는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 편안함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소. 이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했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소.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는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지‘라며.
그는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지. - P305

난 늘 그곳에, 먼 시간의 저편에 있다. 결코 그곳을 떠난 적이 없다. 과거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거나, 그곳에서 출발하며 산다. 이 과거는 단순하고 짧은 일화 형태로 반짝이는 기억이 아니라 현재다. 시간이 몰고 온 수천 가지 변화는, 시간을 초월하는 현재의 이 감각과 비교하면 꿈처럼 덧없고 비현실적이며 환영처럼 우리를 매혹한다.
이 변화들은 고통과 걱정거리를 안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마치 완벽한 자신감과 용기를 지닌 의사라고 믿게 한다. 불안에 떨며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신뢰감은, 그들이 내 앞에 있는 한 나 스스로에게도 이것을 사실로 믿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환자들이 나가자마자 난 소리치고 싶다. 난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학교 계단에 앉아 있는 소년일 뿐이라고, 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이렇게 거대한 책상 앞에 앉아 환자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정말 하찮은 일이고 사실은 거짓이라고, 우리가 같잖은 천박함으로 현재라고 부르는 현상에 속지 말라고………….
우리는 시간상으로만 광범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단조로운 바퀴 소리가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가면-그 여정이 아무리 짧더라도-우리는 스스로에게 가까이 가고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 P338

"난 가끔 오빠의 영혼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멜로디가 말했다. - P432

"걸인은? 존엄한 걸인이 있을까?"
에사가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있었다면 아마 가능할 듯싶군요.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편에서 있다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면 말입니다."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도 존엄에 속한다. 그래야 갈릴레오나루터처럼 공개적인 혹평을 품위 있게 극복할 수 있다. 그들뿐만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과 맞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 P512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이란 없고, 읽힐 뿐이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한다. - P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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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7-29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본 책 읽었던 시간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문장들이 참 좋았었어요.^^

꼬마요정 2023-07-30 10:13   좋아요 1 | URL
그죠… 아마데우의 삶은 슬픈데 문장들은 참 좋았어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와같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