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영화 <곤지암>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쿠폰이 생겼다. 하도 무섭고 무서운 영화라길래 -물론 막내동생은 전혀 무섭지 않다고 했지만- 호기심에서 봤다.

 

언제부터 돈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된 것일까.

 

젊은이들 여럿이 호기롭게 세계 7대 미스테리 장소 중 하나인 <곤지암 정신병원>으로 다큐를 찍으러 간다. 사실, 난 다큐를 표방한 공포 영화를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 왜냐.. 지루하니까.

 

카메라가 돌아가며 가기 전 발랄한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다 점점 긴장감을 높여가다 카메라가 휙 휙 돌아가며 어디선가 물건이 쓰러진다든지, 사람이 끌려간다든지, 눈동자가 돌아가는 시선 끝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다든지... 일단 물건이 쓰러지는 단계까지 가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린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뭔가 몰아붙이긴 하는데, 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여백의 미(?)가 아니라 비어 있되, 비어 있지 않은 그 공간과 시간을 즐겨야 하는데, 이게 다큐 형식이다 보니 찍는 사람이 무서워서 그 쪽을 못 보거나 흐릿하거나 하니까 좀 답답하다. 그리고 그렇게 뜸 들이다 나타나는 건 뭐 좀 끔찍한 형체의 귀신이거나 그냥 비어있는 눈과 긴 머리를 가진 귀신이거나...

 

내가 제일 처음 본 다큐 형식의 공포 영화는 <블레어 윗치> 였다. 솔직히 지루했고, 좀 졸았고, 그래서 다시 봐야 했다. 그래서 마녀가 이 청년들을 다 끌고 갔습니다. 이런 건데... 가지 말라는 장소는 좀 가지 말고. 그런데 그 마녀는 왜 살아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걸까. 왜 그는 어린 아이들을 그렇게나 많이 죽여야 했을까. 분명 잘라져 버려진 이야기가 있을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틀림없이 슬프고 잔인할테지.

 

예를 들면, <주온>처럼 말이다. 사실, 그 귀신들은 가정폭력으로 살해당한 이들이 아니던가. 어느새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있는 불행한 현실.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 그 끔찍한 구속. 아니, 귀신이 되어서도 그 나쁜 놈한테서 못 벗어나는거냐고. 아.. 너무 가슴 아픈 일 아니냐고.

 

또 하나 <알 포인트> 역시. 그냥 이념이나 이런 거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휘말려서 죽었고, 또 다른 권력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고... 이유도 모른 채 이념, 전쟁이란 살육의 광기 때문에 죽어야 했던 영혼들이 얼마나 억울할거냐고.

 

어쩜 <아랑 전설> 같은 걸지도 모른다. 죽었지만 구해달라고.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무서우니 좀 구해달라고. 그래서 나타나는데, 하필 그들이 가진 이미지라는 게, 고통 받던 이들이라 끔찍한 모습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산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구할 수 있을까. 산 사람도 제대로 못 구하는데...

 

그래서 <더  셀> 같은 공포 영화는 재미있게 봤다. 무섭게가 아니라 재미있게, 그리고 슬프게. 꿈으로 들어가서 무의식에서 살인자를 치료하는데, 그 살인자가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나오니 가슴이 아프고, 부모가 되려면 꼭 부모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몇 년전까지 공포 영화를 안 봤다. 왜냐하면, 어느 날 한적한 산길을 드라이브 하는데 나도 모르게 드는 생각이 '여기서 사람 죽이고 버리면 아무도 모르겠는데?' 였기에. 공포 영화를 좋아해서 자주 보다보니 생각이 그렇게 드는거다. 거 참. 이건 좀 아닌데 싶어 한동안 공포 영화를 안 봤다. 그랬더니 제법 나왔네. 그래서 요번에 몰아서 달려볼까 한다.

 

몇 개 추렸는데, 재미있으면 좋겠다. 일단, <곤지암>은 안 무서웠지만.

 

아니, 돈이 그렇게 좋으냐... 그리고 막내 동생아... 삼계탕 귀신이란 말은 좀 그렇지 않냐. 불쌍하지도 않니, 딱 보니 생체 실험 비스무리하게 당한 거 같은데.

 

역시 산 사람이 제일 무서운 거였어.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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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리커버 에디션)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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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떠해야 할까.

 

내가 그동안 읽은 책들은 대부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을 던지고, 작가 나름대로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물론 내가 그 답을 잘 찾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나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렸다.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이 또 다른 평범한 삶을 파괴하고, 온화한 웃음으로 가족을 돌보던 가장이 직장에서는 무고한 생명들을 가스실로 던져 넣는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도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과 그들에게 협력하며 떵떵거리던 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나치 전범들에게 시효가 없는 유럽 국가들의 원칙에 따라 비시 정권 아래에서 '활약'한 모리스 파퐁의 재판이 열린다.

 

모리스 파퐁은 친나치 정권인 비시 정권 시절, 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자이다. 그는 자신은 그저 시키는대로 하던 공무원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악은 평범하다고 한나 아렌트가 그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재판은 교사이자 어릿광대인 아버지를 둔 '나'를 불러 온다.

 

언제나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나'는 가스똥 삼촌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그 시절, 젊고 무모했던 아버지와 삼촌의 이야기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많은 삶들을 부수고 찢고 묻어버렸는지. 그리고 용감하다 생각했던 일들이 가져 온 끔찍한 결과를.

 

반쯤은 호기로 레지스탕스에 들어 간 아버지와 삼촌은 두에 역의 변압기를 폭파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훌륭하게 그 일을 해냈다. 하지만 당시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질들을 처형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인 그들이 인질로 잡혀간다. 프랑스 헌병대가 응원하는 축구팀을 이겼다는 이유로 헌병대가 그들을 나치에게 넘긴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 외에 두 사람이 더해져 네 사람이 인질로 잡혀 산 채로 묻히게 될 구덩이 속에서 며칠을 굶주림과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진범인 아버지와 삼촌이 자백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풀려날 것이었지만, 아버지와 삼촌은 그러지 않았다.

 

구덩이를 지키던 독일군 병사, 베른은 오히려 적이었지만 인간적이었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서 두려움을 덜어 주었고, 먹을 것을 몰래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해서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라는 나치의 말을 따르지 말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나는 자네들이 진짜 범인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독일군의 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군에게 자네들 전부를 죽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거야. 자네들 스스로 희생양을 선택한다면 반인륜적 선택을 하도록 한 그들의 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꼴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도리어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고, 그들은 자네들에게 동정을 베푼 셈이 되는 거란 말일세.(pp. 79-80)

어찌됐든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죽음이 구해 준 삶들... 적과 아군, 피아의 구분이란 없었다. 삶은 언제나 혼자였고, 또 언제나 모두였다.

 

책 말미에 '나'는 피고의 이름은 기억 나지 않지만, 피해자의 이름은 기억하고 싶다고 한다. 모리스 파퐁이든 이완용이든 그들은 모두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들은 그들이 꺾어버린 수많은 생명들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랬듯 '나' 역시 어릿광대 복장을 하고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난하지도 않고, 교사라는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어울리지 않는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과거 베른이 자신에게 준 위로를, 죽음이 부른 삶이 자신에게 준 기회를 다른 이들에게 건네며, 그는 그에게 주어진 삶을 처절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포기하지도 외면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서 말이다. 

 

삶은...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 삶이 꼭 행복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 어릿광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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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잡는 책마다 단편이다. 이 책도 저 책도...

딘편이라지만 읽는 게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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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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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내가 벽을 드나들 수 있다면 뭘 하고 싶어질까... 사실, 게으르고 소심해서 벽을 통과하는 건 딱히 부러운 능력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우기에 뭔가 나쁜 짓을 하고 벽을 통과해 사라지는 것으로 책임을 피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벽을 드나들며 금기에 도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 뒤티유윌처럼.

 

소심하고 변화를 원하지 않는 그는 등기청의 하급직원이다. 그에게는 벽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처음에 그는 그닥 벽을 드나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퀴예가 상관으로 오면서 상황은 바뀌게 된다. 평화롭던 일상은 모욕과 질책으로 가득찬다. 일상의 불만은 그의 삶을 점점 거칠게 만들고, 그는 일탈을 감행하고 더 나아가 그 일탈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일탈 속에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때, 그 순간을 길게 누리지도 못하고 그 삶 자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벽이란 무엇일까. 그 벽을 드나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 때는 벽을 드나드는 능력이 쓸모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삶에 불만을 느끼게 되자, 그 능력은 곧 화풀이에 이용되었고, 자신을 과시하는데 쓸모가 있었다. 그리고 삶에 행복을 주는 열정을 찾아내자 그 능력은 꼭 필요해졌고, 사라졌다.

 

그 능력이 쓸모없을 때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효과가 있었다. 의사는 기계적으로 증상을 듣고 약을 처방해줬다. 벽을 드나드는 능력을 가졌다는데, 정신안정제가 아니라 벽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약을 말이다. 마치 고혈압이라는 병에 약을 지어주며 '식습관 고치고 운동을 병행하세요'. 라고 처방하는 것처럼, '이 약을 먹고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세요'. 라고.

 

지어준 약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체력을 소모하라는 데 눈길이 갔다. 체력을 소모한다. 열정을 가지고 육체를 혹사한다. 그럼 왜 벽을 벽으로 느끼게 되는걸까. 그가 탈옥을 하고, 미워하던 상사를 놀려먹을 때에도 벽이 벽이 아니었는데, 열정에 휩싸여 사랑을 나누고 난 뒤에는 그 벽이 벽이게 되는 걸까.

 

사람을 놀리고 자신을 과시하고 다른 이를 헛수고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에 힘을 쏟는 건 진짜 내 힘을 쓰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을 던져 사랑을 하는 것이 내 힘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라는 걸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2. 인류의 미래는 어떠할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미래가 아름다워질까. <생존 시간 카드>를 읽는 내내 커트 보니것이 쓴 <2BR02B>과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시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구가 너무 많아 혹은 인구가 너무 적어,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하며 통제하는 시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절대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전체로 치환되어 국가가 정해주는 대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생존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일이란 것을 정하는 것도 국가가 한다. 그러나 사람은 전체로서만 살 수 없다. 결국 암시장은 이 제도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대단하다. 개개인이 이 제도에 불만을 느껴서 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고자 불의에 맞선 게 아니라, 사람의 탐욕과 자본이 이 제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작가인 쥘 플레그몽은 한 달 중 보름만 살 수 있다. 절반은 살아있는 채로, 절반은 죽어있는 채로. 아카데미 회원들은 불멸의 존재라 한 달을 온전히 살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어느 곳이나 특혜를 받는 자들은 늘 있고, 불합리는 늘 존재하는가보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쩌면 죽어있는 것이 더 짜릿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상관없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플레그몽을 보며 삶이란 무엇인지, 그저 살아있는 것이 삶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3. 어릴 때 동생 숙제를 대신해 준 적이 있었다. 철사로 조형물을 만드는 건데, 없는 손재주로 그네 타는 사람을 만들었다. 내일 가져가라고 막내한테 줬는데, 마침 변기를 고치던 아빠가 왠 '철사 덩어리'냐 하며 냉큼 가져다 변기 고치는 데 쓰셨다. 동생은 킬킬대며 자기가 다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속담>은 좀 마음이 아렸다. 자코탱 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도 아니다. 성실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그런 그가 아들에게 자신이 잘났다는 걸 보여주려다 삼천포로 가 버리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래도 애써 글을 썼는데, 그 글이 퇴짜 맞으면 참 가슴이 아플테다. 그나마 아들이 아버지와는 달리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또 과연 배려일까 의문이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하고 그 결과 역시 자신의 것이어야겠지.

 

4. 한 번에 칠십 리를 가는 장화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칠십 리는 27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다. 한 번에 칠십 리만 갈 수 있다면 먼거리용으로만 쓰겠지만, 칠십 리 내에서 거리 조절이 가능하다면 아주 유용할테다. 마치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칠십 리 장화>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가진 자들의 갑질에 견뎌야 하고, 어떤 때에는 투명인간처럼 소외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제르멘은 미혼모에 가난하지만 아들인 앙투안과 행복하다. 앙투안 역시 엄마와 함께 사는 삶이 행복하다. 그렇지만, 또래들끼리 하는 놀이 중에 사고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삶이 특히나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작지만 큰, 크지만 작은 거짓말을 하고 만다. 멋지고 부자인 빅토르 삼촌의 또다른 이름은 혹시 '신'이 아닐까.

 

그 고물상 주인과 새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 새는 제르멘에게 기회를 줬을까. 진짜 가치 있는 것들을 고물상에 모아놓고 합당한 가격을 붙였지만 그 가격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만큼 값비싼 물건을 다시 싸게 제르멘에게 준 이유는 무엇일까.

 

비싸고 화려하고 많은 수의 초를 바친 부자보다 가난한 이가 내민 단 한자루의 초가 더 가치 있다고 했던 석가모니의 일화가 떠오른다. 진실로 서로를 걱정하는 그들이었기에 그 장화를 얻을 수 있었던 걸까.

 

4.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이야기이다. 내가 베푼다고 생각한 선행은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들이 많다. 지금 이렇게 안 하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럼 그건 과연 진짜 선한 일일까. 내 처지와 아무 상관없이 진실로 상대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한 것은 죄가 될까. 군인이 전쟁터에서 적을 죽인다든지, 경매업자가 파산한 이의 집을 경매에 붙인다든지, 사형 선고받은 죄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간수라든지 말이다. 누군가의 목숨, 재산을 빼앗는 일이지만, 사회가 만든 법에 의해 정당화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전쟁 같은 경우는 정당방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일이 결국 다른 이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집달리는 천국에 갔지만, 과연 그 한 가지 일로 수많은 눈물들이 사라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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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9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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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 프랑스어를 잘 한다면 의미를 좀 더 잘 알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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