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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돌다리 밑에서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2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1월
평점 :
어릴 때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 늘 꿈결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요정 지니가 소원을 들어주고 마신 지니가 복수를 하고 양탄자가 날아다니고 마법 그물이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으면서도 환상적이었다. 거기엔 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나오고 인간이 마법을 부리곤 했다. 이 책 <밤에 돌다리 밑에서> 역시 이국적인 마법과 신이 존재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와는 다르게 이 책의 무대는 프라하이다. 16~17세기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고, 황제인 루돌프 2세는 바보였다. 그리고 지독한 순정파라는 자신에게 취해 있는데다가 예술에 미쳐 있었고 회계에는 잼병이었다. 즉 아주 사치스러웠다.
이 시대 유대인들은 늘 그렇듯 고리대와 상업에 능했고, 특히나 모르데카이 마이슬은 황금이 따라다닌다고 할만큼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마이슬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인 에스터와 마이슬, 황제 루돌프 2세는 이 몽환적인 이야기의 핵심 인물들이다.
단편 열다섯 편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들은 시간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처음 시작은 유대인 마을에 페스트가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이었다. 위대한 랍비가 여차저차하여 간음한 죄인을 벌하라는 신탁을 받아 돌다리 밑에서 서로를 휘감고 있는 로즈메리와 장미 중 로즈메리를 떼어내 강에 던진다. 간음한 여인의 영혼은 로즈메리에서 떠났고 루돌프 2세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간음은 둘이 저질렀는데 왜 로즈메리만 죽어야 했을까. 읽는 내내 나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건 로즈메리가 아니라 장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에겐 위대한 랍비의 술법도 통하지 않는 건지, 역사적으로 루돌프 2세가 살아있어서였는지 에스터만 죽었다. 이 아리송한 관계는 한참 뒤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는데, 황제와 마이슬의 인연이 엮이는 것도 제법 흥미진진했다.
20세기 마이슬의 먼 후손이 한탄하며 재산 한 푼 못 받은 사연을 풀어놓는 것 역시 처량한 구석이 있었다. 마이슬이 최고권력자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의 인생에서 사라진 빛이 돌아오지 않기에 복수가 씁쓸하고 허무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황제 옆에 붙어 그를 등쳐먹던 자들의 말로를 보면 마이슬의 복수가 그리 헛되지는 않는 듯 했다.
루돌프 2세가 죽고 프라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옹호하지만 결국 30년 전쟁에서 패하고 보헤미아는 혼돈과 격랑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황제도, 위대한 랍비도 사라진 세계는 더 이상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