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철학 -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12가지 이야기
미하엘 쾰마이어.콘라드 파울 리스만 지음, 이지윤 옮김 / 재승출판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미하엘 쾰마이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었다. 이 책은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니어서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 때 아트리덴 가문의 저주도 알게 되었다. 그 덕에 괴테의 <이피게네이아>를 읽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났을 때 반가웠다. 또 얼마나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을 알려줄까 기대했다. 


이 책은 동화, 신화, 성경 등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모두 12가지의 이야기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게 한다. 호기심, 노동, 폭력, 복수,욕망, 비밀, 자아, 아름다움, 장인정신, 권력, 경계, 운명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짧지만 강렬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천지를 창조한 신이 여차저차한 이유로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기는 두려움과 호기심이란 모순된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거기엔 복종하거나 반항하거나 두 길 뿐이다. 뱀의 유혹은 어쩌면 인간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욕구와 맞아떨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최초의 죄는 무엇일까? 금기를 어긴 것이 최초의 죄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인가, 아니면 죄란 씨앗이 애초에 인간에게 있었기에 금기를 어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금기는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한 문이고, 인간은 그 문을 열 능력이 있으나 열어서는 안 되며, 결과는 그 문을 열어야만 알 수 있다. 모든 공포 영화가 호기심에서 시작하듯, 인류의 타락 역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저 문을 열고 싶다, 궁금하니까.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일까? 키에르케고르는 선악과 사건의 주된 의미가 먹으면 죽는다고 말한 신은 처음부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두려움과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자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혼란에 빠트린 질문이 '인간성이란 본디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이고, 금기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외부의 규범에 기준을 맞춘 것이라고. 신은 자유와 자아, 책임과 같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몰랐을 개념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금기를 만들었고, 그래서 도덕은 깨달음을 완강히 부정했다.(p.23) 그래서 니체는 모든 도덕의 첫째 계명으로 '깨닫지 마라'를 꼽았다고 한다. 


인간이 금기를 깨트리고 얻은 것은 인류와 세상이다. 이제 낙원은 사라졌다. 그 낙원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헤겔은 원죄 사건의 결과로 인간이 비로소 영혼을 획득했으며 어울리지 않던 에덴 동산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원죄 사건을 통해 얻게 된 지각 덕분에 오직 그 지각 덕분에 인간은 사실상 신과 같아지게 되었다고 말한다.(p.24) 낙원을 버리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그 호기심의 대가를 치를만큼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노동에서는 다이달로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파시파에의 의뢰를 받아 나무로 아름다운 암소를 만들고, 미다스 왕의 의뢰로 미로를 만들고, 아리아드네에게 그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들 이카로스와 미로에 갇히자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그 곳을 탈출하는 그 다이달로스 말이다. 다이달로스는 선악이나 도덕에 구애 받지 않고 오로지 의뢰인의 요구에만 맞춰 무언가를 만든다. (자신이 이만큼 잘 만들 수 있다는 허영과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며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시하고 비판한 도구적 이성의 예시라고 말한다.(p.39) 또한 이카로스의 추락에서 볼 수 있듯이 기술에 대한 오만과 맹신은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임무가 맡겨지면 기술적 해법을 찾지만, 경고를 무시한 채 명령만을 따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할 수 있다. 시스템은 있을 때 지키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폭력이다. 슬픈 소녀는 그 슬픈 눈을 들어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다. 슬픈 눈망울로도 얻을 수 없다면 눈물을 흘리며 울어 버린다. 결국 그녀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주위가 황폐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슬픈 소녀가 흘린 눈물은 연민, 관심, 공감, 호기심 등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 소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만 슬픈 소녀가 원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도 알고 악함을 다스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악의로 가득 찬 슬픔은 폭력적이었다. 연민이라는 선의가 악의에게 잡히면 결과는 무참하다. 단지 선한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연민은 어떤 감정보다도 기만적일 수 있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그 연민 밑에 깔려 있는 악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네 번째 이야기는 복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로 손꼽히지 않을까. 신을 기만한 탄탈로스로부터 내려오는 그 저주는 수많은 피를 뿌리며 오레스테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사법제도라는 점이 의외였다.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복수한 오레스테스에게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 중 모든 여성은 유죄에, 모든 남성은 무죄에 투표했다. 표수는 동수, 이제 최종 판결은 아테나가 내리게 된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아테나는 모든 아버지는 모든 어머니를 우선한다며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비록 법률이 부당하다 해도 그저 복수로 점철된 난폭한 부당함보다는 낫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다섯 번째 이야기는 욕망이다. 어린 시절을 아주 유복하게 보낸 에기디우스 성인은 꿈에서 베드로 성인에게 이끌려 단테의 지옥에 다녀온다. 지옥을 보고 온 에기디우스는 모든 육체의 안온함을 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고통을 향한 욕망만이 에기디우스를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에기디우스는 무엇 때문에 고통 속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일까. 고통을 극복해가는 모습에 욕망을 느끼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함일까? 고통은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으니까. 에기디우스 성인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신만이 알지도 모른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비밀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네 전설과도 비슷하다. 구미호가 변신해서 막내딸 노릇을 하며 집안의 가축들을 잡아먹고, 가족들마저 도륙하는 이야기 말이다. 여기는 늑대 입을 가진 딸인데, 존재마저 감춰진 막내딸이다. 가정에 무관심한 아버지가 죽고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들 중 일곱 째만이 살았는데,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피해 도망가서 뭔가 라푼젤 같은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와 결혼하기 전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가 혼자 살아남아 다시 결혼 할 여자에게로 도망치지만 묘한 상태로 남게 된다. 한 쪽은 여동생에게 잡히고 다른 한 쪽은 결혼 할 여자에게 잡힌 상태. 그 어렵고 가혹한 모습을 보던 달이 말한다. "견뎌라" 비밀은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자아에 관한 것이다. 크리스티앙의 속내라는 이 동화는 신기하다. 크리스티앙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자를 죽이려는 남자를, 가족이 탄 비행기를 추락시키려는 바람을, 자신에게 찾아오는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해 느끼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현재를 보는 능력을 허리띠와 식칼과 바람과 과거, 미래에게 줘 버린다. 그런 뒤 과연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롯이 자신 안에서 자아를 찾았을까 아니면 자신만의 환상에서 사는 것일까. 그런 감각들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여덟 번째 이야기는 아름다움이다. 아테나 여신은 아울로스라는 관악기를 만들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는데 막상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은 추하기 그지 없어져서 아울로스에 저주를 내린 뒤 버린다. 그런데 하필 아울로스를 주운 게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였다. 원래 추하게 생겼기에 부르는 중에 추해지는 건 상관없고, 오히려 불기만 해도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니 신이 난 마르시아스는 자신이 아폴론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결국 아폴론과 시합해서 진 마르시아스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예술은 아름답지만 모든 면이 아름답지는 않다. 아름다움이 발현되기까지 들이는 노력이나, 감당해야 하는 일들은 마치 물 밑에서 백조가 발버둥치는 것과 비슷하다. 신화가 계속 나오는데 나올 때마다 신들이 너무 잔혹하다. 그래서 아름다운걸까.


아홉 번째 이야기는 장인정신이다. 지그프리트와 미메는 훌륭한 장인들이다. 세상을 보고 싶었던 지그프리트가 대장장이 집단에 들어오게 되고 미메는 그를 가르치며 불가능한 것만 같은 과제를 내 준다. 시행착오 끝에 미메를 뛰어넘게 된 지그프리트는 대장장이로 인정받게 되지만, 다른 대장장이들의 질투로 용의 계곡에 들어서게 되고, 자신이 만든 그물로 용을 물리친다. 하지만 용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기에 홀로 살아남은 보리수 나무는 그에게 복수한다. 마치 아킬레스처럼 용의 기름으로 온 몸이 갑옷을 입은 것처럼 되었으나 보리수 나뭇잎 하나가 등에 붙어 그의 약점이 된 것이다. 화살로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그 곳. 그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현대에서 장인이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저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과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교훈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열 번째 이야기는 권력이다. 욥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필 신과 루시퍼의 내기에 걸려서 온갖 고초를 당한 그는 끝까지 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는 더 큰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 내기로 인해 고초를 받은 건 멀쩡하던 소 떼, 양 떼, 식구들이 아닌가... 욥은 살아있지만 그를 괴롭히기 위해 나머지는 다 죽었다. 나에게 욥의 이야기는 너무 폭력적이라 좋아하지는 않지만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거리가 되기는 하였다. 신이 만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절대권력은 선도 악도 없다. 그저 절대적인 힘만을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신에게는 대항하지 못해도 인간이 인간에게는 대항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혹은 자연에게 행사하는 권력에는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열한 번째 이야기는 경계에 관한 것이다. 익시온과 아스클레피오스는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다. 인간과 신의 경계에 있는 이들은 그 경계를 넘어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신이 아니다. 익시온은 얼마 전에 읽은 보리스 비앙의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리와 겹쳐졌다. 복수를 위한 복수인가, 자기를 과대포장하여 생각하는 것인가.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은 자를 살려냈기에 신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나 신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공평한 죽음이라는 것을 파괴했기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은 경계인가 종점인가. 죽음이 종점이라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종점을 뒤로 밀어낸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대부분이 80살까지 사는데 소수의 특권층만 300살까지 산다면 어떨 것인가. 하데스가 말한 '모두가 아니면 아무도'란 원칙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경계를 소수에게만 개방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다.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종점을 소수를 위해 폐지하는 것은 더욱 치명적이다.(p.199)


열두 번째 이야기는 운명이다. 운명하면 오이디푸스가 떠오르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다이다. 유다는 여러 면에서 오이디푸스와 닮았다. 처음에 정해진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살면서 내가 선택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끝이 정해져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길로 간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다른 선택을 한 인생의 길을 가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면 끝이 왔을 때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제목은 만만한 철학이었으나, 어느 이야기도 만만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자에게는 그 깨달음의 대가를 빠짐없이 받아내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 P25

시스템이 무너진 다음에 경고를 떠올리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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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07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책이 만만하다는 말을 달고 있는 것부터 뻥치고 시작하는거죠. ㅎㅎ
그래도 꼬마요정님 소개를 보니 재밌게 읽을 수는 있을거 같아요. ^^

꼬마요정 2022-11-07 22: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뻥이었어요 ㅎㅎ 재미는 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요 ㅎㅎㅎ ㅠㅠ

scott 2022-11-13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리뷰 읽다 보니 이 책은 동화, 신화, 성경 속에 나오는 호기심, 노동, 폭력, 복수,욕망, 비밀, 자아, 아름다움, 장인정신, 권력, 경계, 운명이라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민, 고난 등이 전부 들어가 있네요
절대 만만하지 않은 인생철학이 담긴 책인 것 같습니다 ^ㅎ^

꼬마요정 2022-11-14 14:0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렇게 인간 세상 모든 문제와 고민과 고난이 다 들어있는데 심지어 두껍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만만하다네요? 저 머리 터지는 줄 알았어요 ㅎㅎㅎㅎ
 
[eBook] 알케스티스 지만지드라마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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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아폴론이 키클롭스를 죽인 일이 있었다. 아폴론이 사랑한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로 죽은 사람까지 살려서 하데스가 다스릴 사람이 없어지자 제우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여버린 것이다. 아폴론은 화가 나서 벼락을 만들어 준 키클롭스를 죽여 버렸다. 제우스에게 반항하고 제우스의 아들들을 죽인 죄로 아폴론은 올림포스에서 도망쳤는데, 누군가는 아폴론이 제우스에게 벌을 받아 인간인 아드메토스 밑에서 일해야 했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아드메토스가 도망친 아폴론을 친절하게 맞아들여 자신의 목동으로 위장시켜 주었다고도 한다. 어떻게 된 것이든 아드메토스는 아폴론을 신으로 대우하였고 감동받은 아폴론은 아드메토스의 명이 짧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운명의 여신에게 부탁해 죽음을 피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은 아드메토스 대신에 죽을 사람만 있으면 아드메토스는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드메토스는 자신 대신 죽어 줄 사람을 찾게 되는데...


이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이 희곡의 시작이자, 대부분이다. 나 대신 죽어 줄 사람이 있으면 내가 살 수 있다고 해서 당당하게 나 대신 죽어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공평한 게 있다면 바로 누구나 죽는다는 것인데 그것을 엎어버린다고?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가 디스토피아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돈으로 생명을 사는 이야기의 최초일지도 모른다. 물론 아드메토스 대신에 죽어 줄 사람은 돈을 보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드메토스의 부모님도, 아드메토스가 다스리는 테살리아 페라이 성의 백성들도 아무도 대신 죽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알케스티스는 남편 대신 죽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자신이 죽으면 아이들은 엄마 없는 신세가 될테니 아이들을 후처에게 맡기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드메토스는 아내가 대신 죽는다고 하니까 막 울면서 다시는 결혼을 안 하느니 엄마 없는 아이들은 어쩌느니 하면서 막 슬퍼한다. 


심지어 아드메토스는 부모님이 자신 대신 죽어주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부모도 아니라며 막말을 하며 부모를 쫓아낸다. 이거 코메디인가? 자기가 죽기 싫으면 남도 죽기 싫은 거고, 누구도 대신 죽어 줄 의무 따윈 없는데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아드메토스 대신에 알케스티스가 죽겠다고 하자 아드메토스는 생기를 되찾고, 알케스티스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린다. 도대체 알케스티스는 왜 대신 죽겠다고 했을까.


어떻게 보면, 알케스티스는 고귀하고 의무를 다한 사람일테고, 아드메토스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일테다. 당시 테살리아 지방이 전쟁에 시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드메토스 아버지도 살아 있고, 자식들도 있으니 왕권이 심하게 흔들린다거나 하지도 않은 듯 하다. 게다가 아폴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굳이 아드메토스가 있지 않아도 나라가 막 망할 지경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다른 어떤 이유를 들기 보다 아드메토스 본인이 죽기 싫어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이 맞겠다. 물론 아내를 대신 죽이고(?)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방문한 헤라클레스를 극진히 대접한 까닭에 감동한 헤라클레스가 타나토스를 물리쳐주긴 했는데.


결국 아드메토스는 알케스티스를 돌려받아 그를 대신해 죽은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럼 지옥의 사자는 분명 아드메토스를 방문하게 되겠지. 자, 그건 언제일까? 그 때도 과연 알케스티스는 대신 죽어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 처음에 아폴론은 아드메토스 뿐 아니라 알케스티스까지 구하려고 타나토스와 흥정한다. 하지만 실패하게 되고, 알케스티스는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도 할 수 있고,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 신의 개입으로 알케스티스가 살아돌아올까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원인제공자인 아드메토스의 생떼를 보며 내 마음 속에는 분노가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괜히 알케스티스는 어리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상황은 열 두 과업 중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 트라키아로 가던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면서 더 어이가 없어진다. 어수선한 가운데 혼자만 흥겨운 그를 보며 아드메토스에게 또 화가 나게 된다. 일부러 헤라클레스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왜 말을 안 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언동을 하게 하느냐 말이다. 아드메토스는 솔직히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아내를 대신 죽게 하는 상황이 말이다.


결국은 행복한 결말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행복한 결말일까. 한 번 죽음의 공포를 맛 본 알케스티스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 과연 신에게 감사하며 살아갈까 아니면 이런 죽음의 공포를 자신에게 떠넘긴 남편을 증오하게 될까.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사랑하니 신에게 감사하니 하는 아드메토스이지만, 곧 다시 나타날 타나토스에게 누구를 떠넘기려고 하게 될까. 


내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최악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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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환상기담집 : 석아산(夕?山) 콩트집 - 짧고 아찔한 이야기들
석아산 지음 / 좋은땅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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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폰 아우젠베르크라는 귀족이었고, 그 전생의 전생엔 우이첼족의 제사장 라몬이었던 사람이 온갖 환각 속에서 보았던 이야기들. 암시와 갖가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 작게는 인간의 모순을, 크게는 우주의 신비를 살짝 엿본다. 그래서 ‘허세’와 그 허세를 실현할 ‘돈’이 있다는 건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번역 세탁기와 경매장 망치는 정말 웃겼고, 우리나라 아파트를 넣으면 원 노트 후크송이 나온다는 기계도 재밌었다. 하얀 아이는 불쌍했고 베르비안교의 신 베르무트는 그럴싸했다. 부두교의 저주는 진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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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싹한 경고장 소원잼잼장르 1
정명섭 외 지음, 박은미 그림 / 소원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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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이상한 물건은 함부로 사지 말고, 유혹하는 낯선 이를 조심해라! 오래된 물건은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말고, 낡은 놀이터에서 말 거는 사람을 조심해라!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고 어른들을 믿는다고 괴롭히지 말자! 동물도 괴롭히지 말자! 천 년 묵은 지네랑 쥐는 그냥 성불 좀 하고. 신선이 되던가.

할머니가 그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누누이 말했다. (p.84/206) - P84

증오는 거리 같은 건 상관하지 않으니까. (p.66/206)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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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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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던져 두었더랬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짧길래, 아주 짧길래 읽어보자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짧으니 망정이지, 긴 이별 저 책도 그냥 읽지 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유명한 작가가 쓴 글이니 줄거리의 해체니, 선입견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지만, 가끔씩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잔 앞에 혼자 않아 있었다. 이렇게,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생각할 능력이 없는 몽롱한 상태로도, 그는 그 장소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의 다리와 몸통만 보였을 뿐 그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pp.31-34/94) 이 문장을 읽자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나도 이런 현상을 겪은 적이 많으니까. 저런 몽롱한 상태는 수업 중에 실컷 졸다가 일어나면 느낄 수 있으니까. 순간 내 영혼이 몸을 떠났다가 온 듯한 느낌... 작가도 졸다가 일어났나... 


이 이야기는 말 그대로 12월의 어느 날, 어느 작가의 오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정서적으로 외딴 집에 사는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오후에는 글 쓰는 작업을 마치고 외출을 한다. 그런데 이 외출이라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작가는 현실이 소설인지, 소설이 현실인지 구분하기 싫어하는 듯 보인다.


'걸을수록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p.24/94) 이 문장을 읽을때는 정말 작가가 환상 속에 살거나 미쳤거나 강박에 사로잡혔거나 애정을 심하게 갈구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작가가 산책을 나온 곳은 현실이 아니라 그의 소설 속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여름에 겨울이 배경인 이야기를 상상하며 고양이에게 장난삼아 눈덩이를 던지려고 했다는 대목에서는 아, 작가가 미쳤구나! 싶었고.


이 작가의 오후를 따라가다보면 뭔가 이상한 일들이 많다.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작가만의 상상으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나 할까. 여기다 조금만 덧붙이면 훌륭한 첩보물이 될지도. 왜냐면 당신은 유명한 작가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넷을 준 이유는 나도 모르게 작가에게 막 말을 하게 된 것과 마지막 때문이었다. 무슨 문장만 나오면, 작가가 미쳤나?, 작가가 졸았나?, 작가가 어디 아프나?, 작가 정말 유명하구나? 이런 말들을 막 내뱉었다. 그게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작가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망상에 시달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집이 주는 편안함을 느꼈고, 다음 날에는 다를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깨달은 것이 느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p.45/94)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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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10-28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오디오북이 아니라 이북으로 수정했더니 좋아요 눌러주신 게 사라졌어요ㅠㅠ 죄송합니다.ㅠㅠ

scott 2022-10-2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시 👆눌렀습니다 좋아요❤ㅅ❤

꼬마요정 2022-10-28 17:34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Falstaff 2022-10-28 1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흠. 너무 어렵.....어려운 건 독자 책임이 아니라 작품을 쓴 작가가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합니닷!
어려운, 말고, 헷갈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원.... 그죠? 그죠? 에잉, 쐬주나 한 병 까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22-10-28 23:2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이건 작가가 반성해야 한다구요!! 당췌 뭔 말인지… 진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 아닐까,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는 건 아닐까, 작가란 이렇게 극한 직업인걸까 했습니다. 그래도 반려동물 밥 챙겨주는 거 보고 나름 정상인이군 했어요 ㅎㅎ 쐬주는 조금만 드셔용^^ 안주는 페터 한트케인가요? ㅎㅎㅎ

2022-10-29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30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2-10-29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넷을 준 이유에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ㅎㅎ
그래도 짧으니 다행이네요.

꼬마요정 2022-10-30 10:34   좋아요 1 | URL
네! 짧아서 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다 못 읽었을 거에요 ㅎㅎㅎ 그래도 마음껏 무슨 소리야 이러고 읽었습니다.

새파랑 2022-10-29 16: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책은 다 어렵더라구요 ㅋ 그래도 한트케 작품은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ㅎㅎ

꼬마요정 2022-10-30 10:35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은 잘 읽으실 것 같아요. 이 책은 짧으니까 이 책부터 시작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