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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어렸을 때 2층집에 살았다. 2층에는 두 가구가 살 수 있었고, 복도 끝에 화장실이 있었다. 나는 동생과 중학생 언니들이 있는 방에서 곧잘 놀았고, 놀다가 책상에 입을 부딪혀 앞니가 깨지면서 피를 철철 흘리는 바람에 그 뒤로 언니들과의 놀이는 끝났다.(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2년 가까이를 앞니 빠진 개우지로 살았다...ㅠㅠ) 언니들의 엄마가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내가 놀러간다고 우리 엄마한테 한소리했기도 했고. 지금도 그 언니들이 떠오르는데, 생김새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도 고맙고 좋은 언니들이었다. 그 때 언니들과 무서운 이야기도 곧잘 했는데, 언니들 방문을 열면 복도벽이랑 거의 닿을 듯 했다. 그래서 활짝 열지 않고 복도벽과 직각이 되도록 열면 복도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날, 우리는 열심히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무언가 하얀 것이 지나가는 것 같았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하얀 것을 보았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귀신이 사는 집은 어떤 느낌일까.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지박령에 관한 이야기들이 보통 집에 붙어 있는 귀신 이야기가 많다. 물론 귀신이 붙박이 된 곳이 집이 아니라 우물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지만 보통 집에 붙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야기가 많다. 적의 재산이었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이야기 역시 귀신이 사는 집 이야기임과 동시에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2020년대 현운주는 남편 우형민과 함께 외증조모가 남긴 적산가옥에 살게 된다. 외증조모의 유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1940년대 현운주의 외증조모인 박준영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호남지방 지주와 농민들에게 땅을 빼앗아 그 땅에서 난 곡식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사치품 무역에 뛰어드는 등 손대는 것마다 성공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무역상 가네모토가 이 붉은담장집의 첫번째 주인이었다.
가네모토가 이사하던 날, 박준영은 피처럼 붉은 1인용 벨벳 소파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소파에 앉아서 어울리는 사람은 가네모토의 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 박준영은 그 집에 꼭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온갖 보물들이 가득하다는 그 집에 가난한 식민지 조선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준영에게 입주 간호 제안이 들어온다. 붉은담장집이었다. 그리고 준영은 그 곳에서 기괴한 소년 유타카를 만났다. 살아있는 것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뒤집어 쓰거나 자해를 하여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쓰는 소년은 작고 가늘었다. 준영은 그런 유타카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양아버지인 가네모토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알게 되자 연민을 느끼며 유대감을 쌓아갔다.
현운주는 일본에서 돌아와 남편과 이 집에 들어온 후 이상한 꿈을 꿨다. 계속되는 꿈 속에서 그녀는 현운주인지 박준영인지 알 수 없었다. 희뿌연 조명 아래 서 있는 것마냥 시야는 늘 탁했고 몽롱했다. 남편이 다정하게 차를 타 주고 끼니를 사 오거나 차려주면서 돌봐주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깨어있을 때면 별채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고 가 보면 아무도 없었다.
피와 비명이 가득한 채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와 식지 않은 재가 시간을 삼키면서 그 집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듣고 싶은 목소리와 부드러운 땅콩빵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하면서도 애달픈 시도였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고 작가는 말한다. 죽은 뒤에 한 말뿐 아니라 죽기 전에 한 말마저 곱씹게 만드는 호러의 힘은 무엇일까. 죽은 자의 억울함이 모두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공포일까, 약자라 여겨졌던 이의 마지막 발악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버지는 내가 죽일거야."(p.94)
박준영은 유타카의 이 말을 정말 한참 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유타카의 마지막 목소리는 증손녀인 현운주를 위해 남겨뒀다. 외증조모의 안배에 운주는 어떤 선택을 할까.
유타카가 살았고, 준영이 살았고, 운주가 살았던 그 집은 두 번 타올랐다. 적절한 때에 맞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