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인터넷 짤이 하나 있다. 인간의 뇌 사진에 "이봐, 당신 주머니에서 방금 휴대전화 진동이 울린 것 같은데"라는 말이 적혀 있고, 아래쪽에는 "농담이야. 당신 휴대전화는 주머니에 있지도 않아, 멍청아"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은 21세기만의 독특한 위협이다.
다리의 순간적인 경련이나 떨림, 또는 무엇이 닿는 감각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데, 이 떨림의 주파수와 지속 시간이 휴대전화의 진동과조금이라도 비슷할 때면 뇌는 누가 전화를 걸어온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만약 30년 전이라면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파리가 내려앉은 탓이거나, 옷의 천이 움직인 탓이거나, 누가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스치고 지나간 탓이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해석도 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은 다양한 움찔거림을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바로 휴대전화이기 때문이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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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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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만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있다면, 나는 그 장치를 사용할까? 이런 장치가 있다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을 진 하늘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늘 노을이 진 모습을 볼 수 있고, 야외 수영장이 딸린 집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집 마당에 수영장이 있는 것처럼 꾸밀 수도 있다. 집 벽지 색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음식의 색을 더 선명하게 바꿀 수도 있다. 실제 대통령은 누구인데 내가 보는 세상 속 대통령은 내가 지지하던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다. 자신의 주름이 싫다면 피부과를 가는 대신에 남들이 자신을 더 젊고 머리숱도 풍성하게 보이게 할 수 있다. 마치 핸드폰에서 사진을 찍을 때 필터를 씌우는 것처럼 말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냈다. 과연 이런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아니면 모래성일까. 지금도 알고리즘이 나를 확증편향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데, 저런 세상에서 나의 선호는 과연 정말로 내가 원하던 바가 맞을까? 하지만 내용 중에 이거 하나는 갖고 싶은 능력이었다. 무장 경호원들이 총을 들고 나를 경호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 어떤 세상이든 약자에게만 강해지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첫 번째 이야기가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세상의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이야기인 <당신은 뜨거운 별에>는 한 개인이 개인적인 친밀감과 뛰어난 두뇌를 이용해 교묘하게 숨겨진 거대 기업의 만행을 세상에 까발리는 내용이다. 물론 통신이 끊긴 상황에서 우주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대적 고독의 순간은 덤이고 말이다. 거창하게 인류를 위한다거나 대의를 위해서라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저당잡힌 채 생명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에, 자신의 선택마저 자신의 의지가 아닐 거라는 두려움에서 우러나온 구조 요청이었다. 개인은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 앞에 늘 불리하기 마련이다. 수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성 탐사를 위해서는 탄산음료 회사와 무인 자동차 회사 중 한 군데를 선택해야만 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유인 우주탐사 계획은 동력을 잃었고, 미국 항공우주국은 민영화된 뒤 부문별로 분리되어 탄산음료 회사와 무인 자동차 회사에 팔렸기 때문이다. 기업은 기업윤리보다는 이윤극대화를 더 좋아하기에 비인간적인 비용 절감을 승인했다. 그 비용 절감의 방식 때문에 수정은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한 딸인 마리에게 구조 요청을 보내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순간, 세상에 혼자만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겪어내며 수정은 딸인 마리를 생각했다. 늘 자신의 관점에서만 마리를 보았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리는 수정의 메시지를 이해했고, 요구사항을 들어주었고, 엄마를 구하기로 했다. 지독한 고독의 순간, 수정은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리만큼 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던 마리를 떠올리며 힘차게 달린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자, 서로를 구원하는 존재이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생각나게 했다.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내용일까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이히만 재판 다음해인 196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 박사가 기억 세포인 '디그램 세포'를 발견하고 그 작동원리를 규명했다. 이 디그램 세포로 만든 체험기계는 대상의 체험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기계였고, 알래스카 내의 이스라엘, 미국 내 유대인들의 자치구인 앵커리지에 아이히만과 체험기계를 취재하기 위해 선별된 기자들이 도착했다. 아이히만의 동의 아래 나치에게 탄압 받은 유대인 한 명을 선발해 그의 기억을 아이히만에게, 아이히만의 기억을 선발한 그 유대인에게 이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발된 유대인은 에밀 벤야민으로 그는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아내와 딸을 잃었다. 


누군가의 기억을 체험하는 건 어떨까.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같은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느끼는 바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죽을만큼 힘들고 아팠다는 경험을 그대로 이식받는 건 형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험은 개인 본연의 것이니까. 역지사지도 정도껏이지, 이 정도의 극공감이 결코 좋게 보여지지만은 않았다. 


때론 범죄자가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전부를 이식하는 건 피해자에게 또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히만이 벤야민의 기억을 이식받으며 느낀 고통은 본인이 겪은 고통보다 클까, 적을까. 가해자가 나도 죽을만큼 힘들었다고 한다면 피해자의 고통은 상쇄되는 것일까. 또한 가해자의 고통을 이식받은 피해자는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신을 더 비극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네 번째 이야기인 <나무가 됩시다>는 짧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예전에 광합성 인간을 이야기한 소설이 있었다. 결국 빙하기가 와서 광합성 인간들은 광합성을 할 수 없어 죽었다로 끝난 이야기였다. 다행히 이 이야기에서는 대안들이 있었고, 빙하기도 오지 않아 괜찮아 보였다. 나무가 되면, 다이어트 걱정은 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인간이란 참 쓸데없고 헛된 걱정, 망상을 하며 쓸모있고 실재하는 생명체들을 괴롭히는 존재인가 보다. 그나마 기술이 발전하여 그런 인간의 행동을 줄일 수 있다면 이건 좋은 방향으로의 미래가 아닌가 싶다.


<사이보그의 글쓰기>는 어쩌면 누구나 겪을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내가 중학생 때 처음 캔커피를 마셨는데, 그 날 밤을 꼬박 샜더랬다. 그 뒤로 카페인 신봉자가 되었다. 이제는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 잠들 수 있다. 처음 커피를 마시고 한동안 커피는 최고의 각성제였다. 집중도 잘 되고, 잠도 안 오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효과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난 커피의 노예가 되었다. 기생충이 뇌를 조종한다는 헤어밴드는 각성제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인간은 어째서 스스로의 힘으로 뇌를 완전히 동원하지 못할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뇌가 활성화 되어 모든 인간이 뇌를 완전히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사람은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었을 때에야 진정으로 자신이 해낸 것이라 생각한다. 타고난 재능과 끈기 있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헤어밴드가 뇌를 자극하여 써낸 글은 누구의 글일까?


<아스타틴>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 <햄릿>, <멕베스>, <리어왕>의 글귀들을 인용했다. 진짜 이름이 없어 원소의 주기율표에 따라 란타넘족 원소로 이름 지어진 아스타틴 후보들은 서로가 남매인 동시에 경쟁자이면서 부활을 기다리는 자로 시민이 아닌 자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아스타틴은 시대정신이었다가 독재자였다가 초지능을 얻은 자이다. 아스타틴은 DNA 복제로 만들어진 후보들 중 하나를 정해 부활 기계에서 아스타틴머신과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기억과 경험이 이식되면 그는 이전과 동일한 존재인가 하는 철학적 의문이 남지만, 이곳 목성권과 토성권에서는 사회적 부활로 인정된다. 뇌와 새로운 육체가 부활하면서 그는 여전히 아스타틴이다. 


아스타틴 후보이자 부활 대상자인 사마륨은 남다른 행보를 했다. 마치 만들어질 때 케첩 한 방울이라도 맞은 것마냥. 자신의 유전자에 딱 맞춰진 에오스를 만나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왕좌(아스타틴좌)를 두고 형제자매들과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지만 그는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인간은 감정들로 이성을 마비시킨 후 몰락한다. 질투에 눈이 먼 오셀로는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였다.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 삼촌의 범죄를 인지한 햄릿은 머뭇거리다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 마녀의 예언으로 가슴 속에 자리한 탐욕을 분출한 뒤 타락한 멕베스는 어미의 배를 가르고 나온 맥더프에게 죽임 당한다. 아첨을 좋아하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 진심을 보지 못한 리어 왕은 온갖 모욕을 당한 끝에 사랑하는 딸 코넬리아를 지키지도 못하고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간다. 같은 유전자여도 경험은 개별적이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감정 또한 제각각이다. 초지능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이 개별적인 경험으로 얻은 것들은 복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마륨에게 기회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움'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적막한 우주의 공허함을 헤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을 수 있을까.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기술 발전이 별점이나 사주점의 자리마저 빼앗은 것만 같은 이야기이다. 오늘의 운세나 델포이 신탁이나 사주, 혹은 MBTI로 사람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형태나 예측 분석 알고리즘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하고 만나는 형태나 다를 게 무엇일까. 너는 양자리니까, 너는 INFP니까 이렇게 행동할 거고 결국 우리는 안 맞을거라고 말하는 것과 예측 분석 알고리즘에 따르면 너랑은 오년 이상 만날 확률이 10%라고 결국 우리는 안 맞을거라고 말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마치 신탁의 저주처럼 그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어떤 행동이든 결론을 정해두지 않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믿어줄 부분은 믿어주고 고칠 부분은 고쳐가며 상대를 만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너는 어떠하니까 반드시 이럴 것이라고 결과를 정해버리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확장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할 다른 무한한 경험들과 기쁨들을 미리 차단한 채 하나의 결론만으로 모든 행동을 해석한다면 너무 불행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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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9-24 0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기도 하는데, 그런 걸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더 안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9-25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이런 세상은 너무 왜곡된 세상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일테니까요. 과학 기술이 사람을 어디로 어떻게 데려갈 지 무섭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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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다 못해 불길하게 느껴지는 첫 문장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편안한 일상을 떠올리게 된다. 사소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밀과 행동을 하고 사소하지만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만끽하는 일상 말이다. 하지만 사소하게 보여 지나친 것들이 점점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가족과 한지붕 아래 살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축복임을, 가족이 아니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여 정을 나눈 이들과 함께하는 것 역시 축복임을 알게 되면서 말이다.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임을.

클레어 키건은 작중 인물의 감정을 마치 내가 느끼듯 따라가게 한다. 나는 펄롱이 되었고 그의 만족감과 실망감을 고스란히 느꼈다.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편하게 침묵할까, 힘들어지겠지만 용기를 낼까. 하지만 결국은 발을 내딛어야만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겠지.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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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22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책 읽었어요. 클레어 키건 책 중에서 저는 이 책이 제일 좋았어요. 요정님 말처럼 작중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게 하는 글쓰기 좋네요.

꼬마요정 2024-09-23 01:08   좋아요 1 | URL
오~ 바람돌이 님도 오늘 이 책 읽으셨군요!!! 우리 통했어요!!!! 책 정말 좋더라구요. 아까워서 천천히 읽었어요. 참 마음이 불편했지만 펄롱 응원해요^^

희선 2024-09-24 0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도움 받은 적이 있으면 자신도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희선

꼬마요정 2024-09-25 22:32   좋아요 0 | URL
이 책 너무 좋았어요. 모르는 척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또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펄롱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가시적 우주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는 온갖 제의와 의식을 통해 틀을 갖춘다. 제의 형식이 서고, 제물이 마련되며,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이 선택되는 일련의 절차가 확립된다.
이와 더불어 제의를 주관하는 공동체의 우월한 지도자와 제의 집행의임무를 띤 샤먼과 사제의 무리 같은 특권 집단이 생겨난다. 공동체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의 역할은 내부의 우두머리나 부족 간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들에게 할당된다. 개별존재가 아니라 불멸성을 향한 공동의 제의와 형식을 갖춘 인간 집단은 더 이상 자연과 운명의 힘에 취약하지 않고 비가시적 존재의힘과 호응하는 지상의 통제력을 누리게 된다. 제의를 위한 경제활동과 희생양 만들기의 형식은 모두 인간이 타고난 동물성을 일종의죄로 간주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기나긴 속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악은 이 속죄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일 따름이다.
악의 첫 번째 모습은 ‘인간 불평등‘이고, 두 번째는 ‘자연의 대상화‘이다. 원시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에서 널리 시행된 포틀래치 전통은 가시적 신을 욕망하는 집단적 욕구와 제의의 중앙집중화를 통해 특권적 집단이 권력을 누리고 대중들은 거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로 진화한다. 베커의 이 밑그림은 인간불평등이 권력과 압제를 행하는 계급과 국가의 성립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루소 및 그를 추종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과 다르다. 베커가 보기에 루소는 인간의 노예화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구조적 - P319

권력에 있다고 명시하며,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표방해 온 정치적해방의 서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불평등의 기원인 사적소유와 특권계급, 그리고 국가의 폐지가 곧 인간해방의 기치로 정립된다.
베커는 이러한 명확한 정치적 의제가 현실에서 왜 실현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인지 비판하고자 한다. 베커에겐 인간의 예속성과 불평등 자체가 아니라 ‘자발성‘이 문제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 충동의 ‘내달림 drivenness‘
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사상 및 당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표방한 의제들에 깊은 의구심을 표한 바탕에는 자기소외를 욕망하는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천착이 깃들어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다가 나중에야 자유롭지않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공상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으며, 자신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지속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속박을 지니고 있다.
랑크가 잘 알려주듯, 루소는 단지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을 이해할수 없었을 따름이다. 즉 루소는 "모든 인간 존재가 또한 똑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권위를 필요로 하며 심지어 자유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본문 84~85쪽)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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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위해서 그러는 건데?"
……
나는 계속 그 질문을 떠올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이 사건에 ‘주고받음‘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딱 한 가지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는 남편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게다가 지금 그를 깨울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대신 당신에게 말해 주겠다. 어쩌면 맨처음 내가 차에서 뛰어나간 건 나 자신을 던져 버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길 쪽으로 향하던 그때, 사방은 어두웠고, 강물처럼 어두웠고, 내안에 있던 어떤 오래된 감각을 충분히 휘저어 놓을 만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모르는 사람이 몸을 일으키게 돕고 있던 나는 어쩌면 어떤 영혼의 쌍둥이였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의 어느 날 밤, 어느 강변의 난간에 앉은 채 술에 취해 울고 있던 내 몸을 뒤로 끌어당겨 주었던 모르는 사람의 쌍둥이. 오늘 그 여자의 몸을 흔들면서, 어쩌면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예전의 내 몸을 흔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 속에는 어떤 등가성이,
어딘가 기이한 상호 관계가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을 향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어쩌면 슬픔과 고통에 잠긴 우리 모두를 향해, 그 여자의 고통을 향해, 그 남자의 고통을 향해, 그리고 나자 - P219

신의 고통을 향해, 마법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법은 드디어 제대로 작동해서, 이번에는 정말로 다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괜찮아졌을 수도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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