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ㅣ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남장 여자 이야기는 흔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제법 특별하다. 왜냐하면 미은이 남장을 하게 된 계기가 죽음이나 어떤 불가항력적인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호은이 약간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는 점이 불가항력이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상황 자체만으로 봤을 때 미은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진정 원하지 않았더라면.
집안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자은이 없다고 해서 망해가는 집안이 순식간에 폭삭 망하지는 않을 것이고, 미은이 자은을 대신한다고 해서 금방 집안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셋째이지만 첫째가 되어버린 호은의 성격이 우리가 보기에 상식적이지 않아 보여도 의외의 곳으로 열린 사람이기도 하지 않은가. 미은에게 죽은 오라비인 자은을 대신하라는 제안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하여 미은은 선택을 했고, 남자인 자은이 되기로 결정했다. 아마 그 결정 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보다 넓은 곳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이는 갖은 고생 끝에 자은이 금성으로 돌아오자 동생인 도은이 지은 표정이나 도은이 한 말로도 알 수 있었다.
자은은 여동생이 무척이나 함께 가고 싶어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언젠가 자신이 지었던 표정일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모든 일에서 소외되었을 때.
"이런 위험한 일을 벌이다니, 미쳐도 한참 미쳤다고. 그런데 이제 언니가 왜 그런 장단에 끌려들어갔는지 이해해. 왜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했는지. 큰물을 두 번 건넌 대가로...... 이름을 바꾼 대가로......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75-76쪽)
자은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죽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미은이 죽었고, 그렇게 미은은 자은이 되어 당나라로 떠났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기까지 많은 역경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들은, 심지어 당나라와도 싸웠기에 당나라에 유학 가 있던 신라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안 그래도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집안에서 유학 온 자은이었으니, 신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던 기간 동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더랬다. 먹을 것이 없어 내내 굶다보니 살이 너무 빠져서 달거리마저 하지 않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게 여자임을 숨길 수 있어 좋다고 자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겨우 사신단을 따라 금성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사건들이 자은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시작은 사신단과 함께 금성으로 돌아오는 물길에서였다. 배에서 상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동행했던 아내와 딸은 사라졌다. 사신은 설씨 가문을 알고 있었고, 자은에게 이 사건을 해결할 것을 명령했다. 자은은 배에서 만난 백제 사람인 목인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서글프고 우울한 사연을 품고 있었다. 한 나라가 망하면서 전리품으로 전락해버린 왕실 핏줄의 여인들 이야기라든지,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의 왕을 팔아넘긴 신하들 이야기라든지 말이다. 그렇게 자은은 범인을 찾을 듯 못 찾을 듯 사건을 해결하기는 한다. 자신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자은은 갈 곳 없는 인곤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손재주가 좋고 명민한 인곤은 식객이 되어 자은과 함께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아마 그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한가득 있을 것이다. 망한 나라의 백성일지, 귀족일지, 왕족일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사건은 진짜 자은의 과거와 함께 나타났다. 시장에서 자은을 알은 체 하던 여자는 산아였다. 미은이 모르는 여자였고, 자은과의 감정 교류가 꽤나 깊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그런 산아의 아버지인 독군 김무헌이 매소성 전투에서 돌아와 '업화'인지 병인지 모를 이유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단서는 손바닥에 있는 붉은 글자였으며, 이런 기이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산아는 자은을 찾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참으로 참혹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들에는 인간의 사악함이 대놓고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자은이 차라리 '업화'였으면 하는 것도 나와 비슷한 마음에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전쟁은 참전한 군인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전쟁터가 된 곳의 백성들도 모두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살아돌아와서 기뻐하는 가족들에게도 전염되고,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은 살아돌아 온 사람에게 자신의 염원을 투영한다. 김무헌이 끝내 밝히지 말라는 것도 슬펐고, 약야 스님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슬펐다. 그 전쟁에서 살아돌아 온 모두가 슬펐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도 모두 슬펐다. 그렇게 그 사건은 가슴 아프게 끝났다. 하지만 산아의 말처럼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로우니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단단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상대등의 아들과 결혼한 처지라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자주 나오지는 못하지만.
세 번째 사건은 길쌈대회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자은의 동생 도은은 산학에도 밝고 집안 살림도 맡아하고 길쌈도 잘 하는 등 다재다능한 여자다. 그런 도은이 소판 부인 쪽에 서서 북을 잡게 되었는데, 하필 도은이 베를 짜야할 차례에 누군가가 베틀을 망가트린 것이다. 도은은 울상이 되었고, 소판 부인은 놀랐고, 자은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소판 부인은 문무왕의 조카로, 안승의 처다. 안승은 결국 고구려도 보덕국도 다 포기하고 신라 왕실에 편입되었는데,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고구려 유민이나 보덕국인들의 표적이 되어 소판 부인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지내고 있었다. 그런 부인의 집에서 길한 행사인 길쌈 대회를 위한 베틀이 부서졌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대회는 많은 여인들이 그나마 바깥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금전(나라의 비단, 직물 관련 부서)의 모가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러니 이 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서라도 범인을 밝혀야 했다.
자은은 산아에게 도움을 청했고, 산아는 소판 부인과 반대편인 도철 부인 쪽이었지만 쓸만한 정보를 건네 주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것인지,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도 있었고 예순이나 먹은 남자가 십 대인 어린 여자를 처로 들이려고도 했고, 아름답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혼인을 거부한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도 있었다. 저마다 사연이 모두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들었다.
범인은 결국 밝혀지고, 기구한 사연들도 드러났다. 진실 앞에서 소판 부인 쪽 여자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닌 모두의 결단이었고, 길쌈 대회에 참가한, 그리고 앞으로 참가할 여자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월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자은이 신문왕을 만난 이야기이다. 왕이 자신의 곁에 둘 인재를 찾기 위해 여러 신하들을 월지로 불렀고, 그 안에 호은과 자은이 있었다. 그리고 산아의 남편인 진오룡도 있었다. 자은은 진오룡을 몰랐으나 진오룡은 꽤나 자은을 의식했다. 진골이고 상대등의 아들인 그가 육두품인 자은을 의식하는 것은 모두 산아 때문인데, 아무래도 산아와 자은의 관계는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 권에서 다뤄주었으면 좋으련만.
왕이 부른 자리에서 절대 눈에 띄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던 자은의 계획은, 그녀를 따라다니는 사건 때문에 실패한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상서로운 흰매의 사냥이 있었고, 사냥 이후 흰매를 돌보던 매잡이가 연못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누군가는 왕의 눈에 들기 위해, 누군가는 연적을 이기기 위해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나 결국 사건은 자은이 왕의 매가 되도록 이끌었다. 자은의 목젖을 더듬은 왕은 자은에게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다음 이야기가 시급히 나와야 할 것 같다.
미은이 자은이 된 후, 자은의 인생에 중요한 인물이자 이 책에서 중요한 인물들인 인곤, 도은, 산아, 호은은 각기 개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비밀을 안고 있는 백제 장인 인곤, 산학에 밝고 자은의 비밀을 알고 있는 도은, 자은의 옛 연인이며 단단한 성품을 가진 유부녀 산아, 정신세계가 궁금한, 우리 이야기의 결정적인 열쇠를 지닌 것 같은 호은. 자은과 이들이 만들어 갈 이야기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해도 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결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은이 만나게 될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도 궁금하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 미은일까, 자은일까. 정체성의 혼란이 올 그 시점에 한층 성장한 자은은 어떤 답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작가가 경주 월지에 갔을 때 입출구와 사출구를 보고 인상 깊어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나도 월지에 갔었고, 신나게 야경 사진을 찍었다. 같은 장소를 다녀오고도 누구는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누구는 사진만 남기는구나. 세상이 다 그런 것이련가.
신라 시대 때도 여자는 조신하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했을까. 산아가 그렇게 몸을 사릴만큼이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