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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환담 - 아홉 작가의 한국 설화 앤솔러지
곽재식 외 지음 / 달다 / 2022년 3월
평점 :
제주에 있는 김녕굴엔 전설이 있다. 김녕사굴이라고도 불리는 그 곳은 말 그대로 뱀 요괴가 있던 곳이었다. 거대한 뱀은 마을의 신으로 군림하며 산제물을 받아먹다 한양에서 내려 온 관리에게 격퇴당하고 만다는 이야기인데, 제주처럼 바다와 같은 자연의 힘이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곳이라면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다. 그래서 기이한 굴에서 굴 안이라 기이한 소리가 나는 것을 신령한 힘 때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믿음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금기와 함께 내려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괴력난신보다는 현실의 삶에 초점을 맞춘 공자의 가르침을 숭상하는 관리가 봤을 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고, 모든 화는 자신이 받을 것이라 장담하며 뱀을 물리쳤다.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인 곽재식 작가의 <토지정신>이 빌려 온 설화이다. 고조선 중엽의 사람인 남사는 어찌어찌해서 아주 살기 좋다는 '심혈성'이란 곳에 가게 된다. 그는 지방을 돌며, 정확히는 섬을 돌며 중앙정부의 위엄을 보이고 법을 알리는 관리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한 일일 것이라 생각해 도망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심혈성은 듣던 대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했는데, 그 이유가 '정신'이 이 곳 심혈성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도대체 그 '정신'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 '정신'을 숭배하는 것인지 남사는 궁금했고 이유를 찾으려 했다.
때론 사람에겐 '사실' 보다는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살이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란 것이 있을까. 나의 상황과 너의 상황이 다르고 내가 속한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타인이 속한 사회가 지향하는 바가 다를 테니, 잣대는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무언가에 의지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그것이 거짓이니 내 살길만을 챙기는 것 중 어느 쪽이 옳다고 할 것인가.
백두산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산이다. 우리의 기원이기도 하고, 영산(靈山)으로 수많은 전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 중에 '천지 속의 용궁'이나 '용을 동여맨 돌기둥'이나 ''천지를 기운 돌바늘'이나 '천지(天地) 이야기' 등이 유명하다. '천지 속의 용궁'은 형인 장우가 아우인 바우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 하던 중 붉은 잉어를 구해주는데, 그 잉어가 장우를 용궁으로 안내하여 약을 주어 동생 바우의 병을 고치게 하여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용을 동여맨 돌기둥'은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말썽을 피우는 흑룡을 백두산 천지로 유배 보냈는데 흑룡이 죄를 뉘우치지 않고 계속 백두산 생명들을 해치자 옥황상제의 명을 받들고 온 지상총감에게 잡혀 돌기둥에 묶여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김설아 작가의 <거울 세계>는 이 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두산 어느 곳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장우와 바우 형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바우는 몸이 약했고, 장우는 그런 바우를 보살피느라 늘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와 먹을 것들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우는 잉어를 구해주고 용궁에 가게 되었고, 선물을 받아왔다. 하지만 바우는 잠깐 좋아지더니 다시 상태가 나빠졌고, 장우는 다시 용궁에 가기 위해 천지에 가지만 이번에는 흑룡이 사는 용궁에 가게 된다.
어머니가 미쳐서 폭포에 몸을 던진 후, 장우는 동생의 눈에서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검은 이채는 무엇이었을까. 바우의 눈에 비친 장우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미치광이풀에 취한 형이었고, 장우의 눈에 비친 바우는 늘 골골하며 아픈 동생이었다. 어쩌면 타인과 교류하지 않은 채 아픈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둘만 살아가는 삶이 장우를 미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서로를 도와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 등장하는 장면은 여지껏 나온 등장 장면 중에서 손꼽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영화 중반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수양대군을 보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자가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될 자로구나 싶어서였을까. 수양에게 양위하고 결국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귀양 갔던 단종은 노비의 손에 목이 졸려 죽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단종대왕신이라는 설화를 만들어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왕에 대한 슬픔의 발로일까. 세 번째 이야기 김성일 작가의 <단동이>는 이렇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종 폐위는 역사적 사실이라 의문점이 없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을 비추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아파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양이인 '단동이'는 그 동네 대장 고양이였고, 친위대를 거느렸다. 반면에 단동이와 같은 무늬로 단동이의 삼촌 고양이인 세동이는 비쩍 마른 채 단동이가 남긴 밥을 먹었다. '나'는 세동이가 불쌍해서 세동이의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힘이 생긴 세동이와 세조가 겹쳐지고, 친위대인 종냥이와 사육신이 겹쳐지고, 세동이를 따라다니는 맘 바뀐 냥이는 신숙주일테고, 비닐이 목에 감긴 단동이는 단종이겠거니.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소원을 들어주는 건 사랑받았기 때문일까.
선녀와 나무꾼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날개옷을 되찾은 선녀가 하늘로 올라간 뒤 나무꾼도 하늘로 간다. 하지만 나무꾼은 노모가 보고싶어 천마를 타고 내려왔다가 뜨거운 밥국을 흘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하늘로 돌아가지 못해 '밥국', '밥국' 하다가 뻐꾸기가 되었다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걸까, 사소한 실수가 운명을 바꾼다는 걸까. 나무꾼에게 은혜 갚은 노루는 선녀의 분노를 샀으니 말로가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하나의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을, 너와 나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 번째 이야기인 이경희 작가의 <파종선단>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얼개만 딴 새로운 이야기이다. 쇠락해가는 은하연대에서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개조해야 했고, 그 결과 하나 둘 유전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었다. 더는 인류라는 종을 분류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를 위기 속에서 인류를 존속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를 만들었던 이에게만 중요했다. 처음 인류를 존속시키고자 은하 연대 미래학자들 모두가 동의했을 때, 생식이 불가능해진 두 인간종 사이에 '미싱링크'를 만들어 생명의 고리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이 프로젝트가 바로 '유전자 징검다리'였다. 하지만 선녀는 자신의 이상형을 만들어 '웅'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단'이었다.
선녀가 남긴 편지에는 어찌할 수 없이 빠져드는 자신이 만든 단짝 유전자에 대한 사랑과 자식을 바라보는 사랑이 가득했다.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고 증오하는 인류가 과연 그런 편견과 혐오를 극복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선녀조차 자신이 만든 유전자의 후손들에게 빠져드는 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나라 설화 중 가장 기이한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여우누이전>이다. 살육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여우누이.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그는 왜 그런 살육을 벌이는 것일까. 본능인 걸까, 인간에 대한 혐오인걸까. 다섯 번째 이야기인 소렐 작가의 <매구 호텔>은 <여우누이전>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때 독일인 부부에게 입양된 동혁과 호정. 그들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을까. 서양인과 생김새도 생각도 다른 그들은 정말 자신들을 입양한 부모를 배신한 걸까. 아니면 그저 값싼 동정심으로 데려와 아래로 보는 이들에게 복수한 것일까. 이래저래 풀기 어려운 문제인 듯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매국노들 간이나 빼먹으렴.
여우와 관련된 설화 중에 좀 야한 것들이 있으니, 그 중 하나가 '여우구슬'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양반집 도령이 멀쩡하다가 시름시름 앓길래 알고 보니 매일 밤 웬 처녀와 입으로 구슬을 주고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도령의 구슬 내지는 생명을 차지하기 위한 하루를 남겨두고 여우는 스님이 써 준 부적 때문에 도망을 갔고 도령은 건강을 되찾았는데,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여우의 모습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우귀신의 모습인가 싶었다. 여섯 번째 이야기가 송경아 작가의 <여우 구슬>인데 이 이야기는 입으로 왔다 갔다하는 구슬만 모티브로 삼고 있다. 24억 년 전쯤, 앙클레인들은 퀘이사 3C 273에 관측용 나노머신 발사기를 설치했고, 퀘이사가 방출하는 에너지를 타고 수많은 나노머신이 우주를 떠돌다 행성에 정착했다. 생체형 안드로이드 3641과 9217은 그렇게 지구에 도착했고, 지구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성체 문명이 나타나길 기다렸고, 인류 문명이 우세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일련의 사건들을 지나면서 둘은 이 행성과 이 행성의 우세종에 대해 토론했고, 결국 아무리 봐도 지구인의 생태는 알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토론을 끝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안드로이드 3641이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의문을 던졌고, 9217은 이해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체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며 이상한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여우 구슬'이 등장한다. 자기공명 가속기록장치를 지구인들의 몸에 넣어 뇌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내 저장했는데, 이 장치를 몸에 넣는 방식이 바로 타액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수 억년의 세월을 지구와 함께 한 안드로이드들이 서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고, 인간들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안 다른 지성체들은 더 발전된 과학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좋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허해지지만 때론 자연을 정복했다고 교만해지기도 한다. 그런 인간의 이중성이 어쩌면 이런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구를 누비고 있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겸손해지고 삶의 지혜를 배워야겠지.
장영실은 뛰어난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조선 태종, 세종 대에 활약했으며,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파직되었다. 신립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왜군에게 패해 죽었다. 이 때 신립이 귀신에게 원한을 사 죽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신립이 젊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산을 헤매다 어느 기와집에서 신세 지게 되었는데, 이 집에는 고운 처녀 한 명만이 있었는데 사연인즉 종놈 혹은 황금 닭이 처녀를 노리고 온 가족을 해치고서는 오늘 밤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신립은 그 종놈 혹은 황금 닭을 죽인 뒤 처녀를 두고 떠나려 하자 처녀가 자신도 데리고 가 달라고, 은혜를 갚게 해 달라고 했지만 신립은 거절했다. 그러자 처녀는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신립이 집에 돌아와 장인에게 말하자, 장인이 나무랐다고. 생각해보면 꼭 결혼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살 길을 열어줄 수 있었을텐데 신립이 너무 융통성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신립은 그 처녀의 아버지로 분한 원혼이 알려준 계책대로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며, 해학이 넘치는 정승이었다. 담대하여 귀신의 한을 풀어줬다는 말도 있고,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이한 작가의 <구서담(舅壻談)>이다. 장인과 사위가 서로 골탕먹이는 민담과 신립의 민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야기는 신립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데, 황금 닭은 또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고, 요물인 줄 알았던 구슬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립이 아니었으니, 장인인 권율이나 사위인 이항복이나 서로를 놀리는 재미가 톡톡한 이야기였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모두가 알테다. 소를 치는 견우와 베를 짜는 직녀는 서로 너무 사랑해서 일을 소홀히 하였고 옥황상제의 분노를 사 둘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지게 된다. 이를 불쌍히 여긴 까치와 까마귀가 다리를 놔줘서 둘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일을 하지 않으면 벌이가 없으니 살아가기 힘들다는 교훈을 주는 건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면 독립을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천상 세계에서는 집도 주고 먹을 것들도 풍부할테니 그들이 일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설마 천계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해야 하거나, 배급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일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터인데, 노동의 가치가 점점 희석되는 현대사회에 울림을 주는 건 어떤 부분일까. 여덟 번째 이야기는 문녹주 작가의 <견우도 직녀도 아닌>이다. 이 이야기를 보다보면 견우와 직녀는 반체제 인사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미래의 어느 날, 세상은 쪼개져서 도시들이 연합하고 도시 밖은 위험하며 도시 안에서 모두는 평등한, 그런 미래의 어느 날 현우는 옆집 이웃인 견에게 납치 당한다. 식량 생산기 때문인데, 이 시대 '밭'을 하늘로 올려 식량 생산에 성공한 도시는 이 식량 생산기로부터 도시민들의 먹이를 얻는다. 정확히 신분이 이번 회기 기술위원회 대표 정치위원인 현우는 신분이 생산시설분과 시설관리실 소속 기술위원인 박견에게 납치된다. 박견은 모든 것이 정상으로 표현되는 도시가 싫어 비정상이 난무하는 도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식량 생산기를 훔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자면 모든 차별의 철폐가 어쩌면 이미 차별이 이루어진 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들은 모두를 그저 다를 뿐이며 차별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까마귀는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일까. 얼굴에 반점이 있고 흉터가 있으면 그것을 지우고 치료하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냥 두면 큰일나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이 사는 도시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래도 모든 것에 편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틀린 것일까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견우와 직녀 아니 현우와 견은 해냈다.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재벌집 아들 혹은 딸이 상속권을 포기하고 가난하지만 당찬 연인을 따라간다고나 할까. 약물로 감정을 제어해서 편견이 없는 것이라면, <1984>와 다를 게 무엇일까. 제일 앞서 나왔던 <토지정신>과도 닿아있는 이야기 같아서 흥미로웠다.
단양 죽령에는 산신당이 있다. 이 산신당은 죽령산신을 모시는데, 죽령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산적이 출몰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자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 소굴에서 산적들이 다 자면 '다자구야' 외치고, 안 자면 '덜자구야'라고 외치기로 관군과 짰다. 산적 두목의 생일날 산적들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쳤고, 산적들은 소탕됐다. 그 이후 나라에서는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아홉 번째 이야기인 전혜진 작가의 <내가 만난 신의 모습은>은 이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대 배경은 6.25 전쟁 때였고, 전쟁이 발발할 당시 열 다섯이었던 삼준은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끔찍한 일들을 목도하게 된다. '적'은 누구인가. 당연히 인민군, 중공군이겠지만, 때론 국군의 총부리는 그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쌀을 준다기에 가입한 보도연맹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열 살짜리 소년은 정말 빨갱이였을까.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이 없는 가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해방 이후 우리네 역사는 피가 가득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을 수색하기 위해 막사를 지은 마을에서 삼준이 속한 부대는 먼저 도착해 막사를 지은 어린 소대장과 병사 두어 명을 만났다. 류 중사와 소령은 자주 부딪쳤고, 류 중사는 계급을 무시했다. 삼준이 속한 부대에 있던 류 중사는 살인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고, 수틀리면 사람을 죽여댔다. 그런 그에게 보도연맹원들 사살 명령은 좋은 구실이었다. 보도연맹과는 상관없는 사람을 죽이고서는 빨갱이로 몰았는데, 소령이 뭐라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있는 암자의 공양주라는 할머니가 나타났다. 신은 피아(彼我)가 없었고, 죄 없이 내몰린 생명들을 가엾게 여겼다. 곽재식 작가의 <멋쟁이 곽 상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같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 앞에 개인은 제대로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개인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것이 신의 도움이든 인간의 도움이든.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