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궁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시공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62년 나경언은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명목은 역모인데 그 안의 내용은 세자의 비행들이었다. 궁인들과 자신이 아끼던 후궁도 죽이고, 북한산성으로 몰래 놀러 나가고, 돈을 빌려서 갚지 않는 등 세자의 잘못을 영조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영조는 화가 났고, 세자를 불렀고, 여차저차하여 뒤주에 가뒀고 그렇게 세자는 죽었다. 임오화변이었다.


이 책의 시점은 1758년 2월. 현 의녀가 아무도 모르게 세자의 처소로 불려갔다. 그 곳엔 세자를 대신한 내관이 누워 있었고, 세자빈 홍씨가 옆을 지키고 있었다. 세자가 자리를 비웠고 세자빈은 영조 몰래 궁을 빠져나간 그의 부재를 덮기 위해 의원과 의녀를 부른 터였다. 그리고 혜민서에서 네 명의 사람이 죽었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이 이야기는 세자가 자리를 비운 그 밤, 혜민서에서 일어난 살해 사건으로 시작한다. 일단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현 의녀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수 의녀. 현 의녀는 정수 의녀가 범인이 아니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고, 세자가 궁에 없었단 사실을 알았지만 세자의 무죄를 증명할 사람을 알았고, 이 사건 외의 다른 사건까지 엮어 세자를 의심하는 종사관 어진을 알았다. 둘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의 속내를 떠보며 사건의 실마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수많은 억울함과 비탄과 욕망을 보고 말았다.


사실 이 사건 하나에는 여러 수많은 사건들이 숨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도세자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며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더 비극적인 사실은 끔찍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누군가였다는 점이었다. 


현 의녀는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쓸모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어머니 영빈 이씨와 애착 형성을 하지 못했다.(심지어 영빈 이씨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 현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미친듯이 노력하여 내의녀가 되었고,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아들에게 유독 편협했던 영조는 결코 아들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당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의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다. 두 사람의 삶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이라는 사람들 중 한 명은 꼭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아."

  내 아버지 같네. 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도. (P.68)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얼녀인 현과 한 나라의 왕이 될 적통 세자가 결코 같을 수는 없을테고,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지도 안다. 그리고 모든 이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왕이 내지르는 멸시와 시험은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체 건강하고 무예를 즐기는, 그리하여 공부는 소홀히 하는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권력 투쟁 틈바구니에서 비호받지 못한 채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영조가 보기에 모자라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세손은 너무나 영특하였고, 영조는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듯 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이는 의대증 같은 병증으로 나타났으며 급기야는 자신이 아끼던 후궁마저 살해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법적 어머니인 정성왕후와도 사이가 좋았고, 큰누나인 화평옹주와도 사이가 좋았으며, 형수인 현빈 조씨와도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영조로부터 보호해 줄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영빈 이씨나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도세자를 미워하는 화완옹주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개인사로 보면 사도세자는 강박과 충동조절 장애, 공포에 사로잡힐 만했다(하지만 어떤 것도 살인의 변명은 되지 않겠지만).   

 

평범한 사람의 일탈은 그 파장이 적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일탈은 수많은 사람의 생계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의 힘으로 많은 것을 무마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무력화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억울함은 또 다른 억울함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집요하게 한 사람을 겨냥했고, 이는 어쩌면 의로운 일이라는 이름 하에 저 높은 이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과연 이 일이 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실각은 누군가에겐 권력을 잡을 기회인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순수했던 목적은 불순한 이에게 이용당할 수 있었고, 어쩌면 불순한 이의 승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한 현과 어진의 승리일지도 모른다. 삶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늘 선택을 하며 사는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안온했던 이라면 그 선택이 보다 쉬울 것이고, 정서적으로 불행했던 이라면 그 선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계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잘못된 길도 바른 길로 돌아갈 길은 열려있는 법. 늘 깨어있도록 노력해야 할 이유이다.


그저 덧붙이자면, 조선 시대라는 한계와 신분 차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를 낳지 않는 방법 뿐인걸까. 인간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시대라지만 영조는 무수리 어미의 피를, 현은 기생 어미의 피를 이었으니 둘이 다를 건 또 무얼까. 


* 외국인이 쓴 책을 번역한 느낌이 났다. 잘 읽히는 것 같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드는 느낌. 다른 눈으로 보는 우리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의녀님, 저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궁에 들어왔습니다." - P66

나는 사라질 운명의 꿈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꿈을 떠나보낸다 해서 내 인생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원한다고 상상했던 삶을 놓아버린 것 뿐이었다. 처음에는 상실감으로 괴로웠지만 그마저 흐릿해졌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새로운 꿈이 싹을 틔웠다. - P35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4-19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미있게 읽고 허주은 작가의 다른 책도 사두었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고서야 사도세자가 살인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어찌나 충격이던지 ㅠㅠ

꼬마요정 2024-04-19 22:00   좋아요 0 | URL
이 책 다락방 님 땜에 읽게 됐어요!! ㅎㅎㅎ 재밌었어요!!

사도세자는 왠지 억울하게 죽임 당한 비운의 인물인 것 같잖아요. 그런데 영조의 학대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했다 해요. 의대증이라고 옷을 입으면 불안하고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느끼는데, 이게 옷을 갖추면 아버지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 그럴 수 있다네요. 그래서 미쳐서는 옷 입혀주는 궁인들 죽이고, 아끼던 후궁 죽이고, 심지어 혜경궁 홍씨에게마저 바둑판을 던져 눈을 다치게 했다고 하네요. 어휴... 슬프죠ㅜㅜ 왕통을 이을거면 좀 잘 자랐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허주은 작가 다른 책도 기대돼요!!
 
[eBook] 변호사의 결혼식 Mystr 컬렉션 388
Catherine Crowe / 위즈덤커넥트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이 엉망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함께 자란 두 청년이 서로를 미워하다 결국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 이야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 결백한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결혼식 전 죽은 그를 보게 된다. 신혼여행지에서도,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도 그를 보았다. 과연 억울하게 죽은 자가 살아돌아온 것일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4-04-14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꾸준히 책 읽으시고 기록하시는 요정님! 대단대단.^^ 얼마전에 의사 사무실에 클리닉을 하는데 다른 학생이 자기 남편이 주짓수(맞죠?) 하는데 하얀띠라고 해서 꼬마요정님 얘기했어요. 보라색띠라고. 그랬더니 여자가 보라색띠면 대단한 거라고. 그래서 괜히 제가 으쓱했더래요.ㅋㅋㅋ 여전히 다음 띠를 향해 운동도 열심히 하시는 거죠?^^

꼬마요정 2024-04-15 00:06   좋아요 1 | URL
라로님!!!!! 잘 지내셨어요? 너무 반가워요!!!^^ 요즘 미국에선 주짓수가 정말 핫하다고 하더라구요. 그 분은 하얀띠군요. 넵!! 저는 지금 보라색띠에 2그랄입니다. 그랄 2개 더 달면 다음 단계가 갈색띠에요. 시간이 띠의 색을 바꿔주네요. 라로 님 어깨가 으쓱했다니 저도 으쓱 합니다. 남편한테 자랑했더니 남편이 라로 님이 더 대단하신 분이라고 하네요. 제 어깨도 또 더 으쓱으쓱!! 어깨가 지붕 뚫으면 어쩌죠? ㅋㅋㅋ

라로 2024-04-15 12:44   좋아요 1 | URL
제가 졸업하기 전에 그럼 밤색을 따시는 겁미꽈??? 우와~~~~!! 기대할게요!!! 저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꼬마요정 2024-04-16 16:02   좋아요 0 | URL
우리 같이 열심히 해요!!^^
 
[eBook] 권커니, 그대여 종일토록 취하시라
김인정 / 아작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성들의 고단함을 백 번 고하면 무엇하랴. 세자의 어미인 중전이 비호하고 편 들어주는 이 없는데. 하필 역모에 얽힐 것은 무엇이랴. 친구의 옳은 일을 거들어 주려 했으나 오히려 아내의 친척들까지 죽게 만들었으니. 눈이 오면 덜 춥지만 지붕이 내려앉을까 걱정이련다. 아내는 눈이 오니 밤에 눈빛으로 바느질을 하고 도성에서 온 손님은 매화가지와 술 한동이를 두고 갔다. 강이 얼어 뱃삯이 없어도 걸어 건널 수 있어 친구를 찾았으니. 매화가 시들고 술이 식어도 마음만은 그대로여라. 그대여, 부디 안식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안전가옥 오리지널 27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을까?


예전에 커다란 곰인형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 곰인형은 나만큼이나 컸고(물론 나보다 작았지만) 냥이들이 머리를 베고 잘 수 있게 다리를 내 주는 듬직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세탁기에도 들어가지 않아 더러운 채로 방 한 켠에 놓여있었고, 결국 커다란 쓰레기 봉지에 넣어 버려야 했다. 


사실 알고보면 그 인형도 어느 영혼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음, 그러면 이야기는 아마 처키 같아졌겠지. 건전지를 넣지 않아도 눈을 움직이고 말을 하며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대던 그 미친 인형 말이다. 


이 이야기는 야무시라는 곳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두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야무시에서 가장 돈 많고 명예가 높은 곳, 씨더뷰파크 야무.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도하가 살던 곳이다. 이 최고급 아파트의 대척점에 있는 가장 낡고 폐허같은 레인보우 아파트에는 화영이 살고 있다. 


씨더뷰파크 야무에 이사 온 어떤 사람이 독이 든 이사떡을 집집마다 돌렸고,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이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 때문에 화영은 그 곳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엄마를 잃었고, 도하는 아빠와 엄마, 잘난 사촌형을 잃었다. 그리고 화영과 도하, 도하와 도현 사이에 남은 해피 스마일 베어 곰인형. 화영은 떡을 싫어하는 엄마가 떡을 먹었을 리 없기에 야무시 최고 권력자인 한정혁이 엄마를 죽였을 거라고 믿었고, 떡 돌린 범인의 자살쇼에서 만난 청부살인업자의 말을 듣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한다. 사람을 죽이는 데 드는 비용, 청소년 할인가 2천만원. 그리하여 화영은 낡고 더러운 레인보우 아파트에서 영진 무리에 끼여 생활을 하며 학교도 그만둔 채 가짜 이력서로라도 정직한 알바를 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야무시 최대 권력자 한정혁의 아들 한도현은 잘난 아들이었다. 한정혁의 동생 한윤혁의 아들인 도하는 언제나 도현의 그늘 아래 살아야 했다. 도현보다 못하기에 늘 아버지에게 비교 당했고, 늘 위축됐다. 그래서 화영과 만난 옥상은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고, 해피 스마일 베어 눈 붙이기는 도하의 위축된 마음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도하는 화영을 모른 채 했고, 화영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도하의 가족이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


억울하게 많은 사람이 죽은 곳에 변변찮은 위령비조차 세우지 않고 묻어버린 자는 언제나 오만했고,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이 진실이라 생각했고, 자신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하의 영혼이 해피 스마일 베어에 들어갔다. 화영은 그 곰인형을 주웠고, 둘은 핏빛 복수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나 빛날 것 같지만 점점 그 빛은 꺼져가고 있을 수도 있고, 순식간에 불로 화해 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약한 촛불이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은은하게 빛날 수도 있다. 두 아이의 연대는 애처롭지만 따뜻했고 인간적이었다. 도끼를 든 어깨가 터진 곰인형과 깡말랐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여자 아이의 모습은 아슬아슬한 듯 해도 든든했다. 


둘 모두를 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한 믿음 또는 추억이 아니었을까.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 받지만 또한 사람에게 구원 받는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란 질문이나 사람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란 질문은 또한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끝끝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면 좋겠다. 어린 나이에 추악한 사회의 모습을 본 아이들이 그래도 사회의 좋은 모습도 겪으면서 살아가길 원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멋진 집단 숙소이자 사회주의가 나아가고자 했던 이상향의 기초인 ’구덩이‘. 구덩이는 여러 인간 군상들의 노동과 헌신으로 훌륭하게 완성되는 줄 알았으나 ‘집단화 정책’에 휩쓸려 ‘노동’이 아닌 ‘약탈’과 ‘폭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 이들에 의해 무덤이 되고 만다. 유토피아란 이 세상에 없음이니.

남은 시간 동안 보셰프와 다른 일꾼들은 다시 일하러 갔다. 해는 아직도 높이 떠 있었고, 새들은 떠들썩하지 않게, 그저 공간 속에서 먹이를 찾으며 밝은 공기 속에서 애처롭게 노래했다. 몸을 굽히고 구덩이를 파는 남자들 위로 제비들이 낮게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들의 날개는 피로에 지쳐 조용했으며, 궁핍으로 인한 땀이 솜털과 깃털 아래를 적시고 있었다.
그들은 동이 틀 무렵부터 자신을 괴롭히기를 쉬지 않고 처자식을 먹이기 위해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보셰프가 날아다니다 갑자기 죽어 땅에 떨어진 새를 집어 올렸다. 새는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보셰프가 그 몸을 보기 위해 깃털을 뽑자그의 손안에는 노동하느라 기진맥진하여 죽은 비참하고 빈약한 생물이 나타났다. 이제 보셰프는 몸을 아끼지 않고 단단하게 엉겨붙은 흙을 부수었다. 이 자리에 건물이 들어설 것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불행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살 것이고, 창가에 서서 밖에서 사는 새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줄 것이었다. - P38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에 대한 열정을 위해 삽니다. 보셰프동무! 당신은 이런 성향을 익힐 때가 됐소. 조합원 모두의 육체는 이 표어를 위해 불타야 하오!" - P80

"그런데 댁은 누구시오?" 존경심에 찬 얼굴을 그러모아 주의 깊은 표정을 만들며 노인이 물었다. "무슨 사기꾼이오, 아니면 그냥 부르주아 권력자요?"
"전 프롤레타리아 출신입니다."
치클란이 내키지 않게 대답했다.
"아하, 그럼 댁이 현재의 차르구먼.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지" - P82

그러나 나스탸는 보셰프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고, 보셰프는 소녀의 벌린 채 소리 내지 않는 입과 무관심하고 지친 몸을 보고 소녀를 살짝 건드렸다. 보셰프는 조용해진 아이 앞에 당혹해하며 서 있었다. 그는 이미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사회주의가 먼저 아이의 감정과, 확신에 찬 인상(印象) 속에 있지않다면 앞으로 대체 세상 어디에 있을 것이란 말인가? 진리를기쁨과 활동으로 바꾸어 주는 조그맣고 진실한 인간이 없다면 삶의 의미와 보편적 기원의 진리가 그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 P21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4-08 0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작가는 안톤 체호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정도밖에 모르기도 하네요 그래도 이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나중 작가군요 이 책을 옮긴 사람이 정보라 작가였네요 정보라 작가 책도 읽어본 적 없지만... 소설도 쓰고 러시아 말도 잘 아는가 봅니다 희망으로 여기고 판 구덩이가 무덤이 되다니...


희선

꼬마요정 2024-04-09 11:49   좋아요 0 | URL
정보라 작가가 러시아 소설들 번역을 제법 했더라구요. 소설도 쓰고, 번역도 하고 정말 능력자예요!! 러시아 작가는 아무래도 톨스토이랑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일 유명하겠죠? 이 작가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ㅎㅎㅎ 이 책 생각보다 재미있었어요. 물론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했지만요. 다들 잘 살려고 체제를 만드는데 어째서 더 힘들고 힘들어지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