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생 순정만화 X SF 소설 시리즈 2
듀나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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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정만화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외숙모가 재밌다고 집 옆에 있던 만화방에서 빌려 준 책이었는데, 그 책이 한승원, 김동화 작가님의 <사랑의 에반제린>이었다. 그 뒤로 순정만화의 늪에 빠진 나는 닥치는 대로 읽다가 엄마한테 걸려 여러 번 혼이 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화책을 읽는 게 무슨 잘못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참 읽다보니 좋아하는 작가도 생기고, 작품도 생겼다. 내가 충격 받았던 작품들은 제법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르미안의 네딸들>이었다. 당시 그리스 신화와 역사를 좋아하던 터라 정말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완결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정말 충격 받았다. 아니, 왜? 여기서?


신일숙 작가님의 작품을 계속 찾았더랬다. <사랑의 아테네>나 <아르미안의 네딸들>, <리니지>, <라이언의 왕녀> 등등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 또 충격적인 작품인 <1999년생>이 있었다.


한참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이 왔을 때, 입에서 비명을 안 지르고 본 내 나이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순정만화라고 다 로맨스만 있는 건 아니었고, 다 지고지순함만 있는 건 아니었다. 리더십도 있었고 배짱도 있었고 무력도 있었다. 이미 그녀는 여왕이었고 장군이었고 전사였다. 그런 그녀에게 시련은 로맨스 뿐만 아니라 동료애에서 비롯되기도 하였다. 


사랑에 흔들리는 건 여자라고 편향된 시각이 존재한다지만, 저 먼 시대 달기나 포사 때문에 나라 망하게 한 사람도 있으니까. 소중한 상대를 두고 협박하는 건 어느 시대, 어느 성별에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지났지만, 그 당시에는 미래였던 시간대인 20세기 말.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외계인이 쳐들어왔고, 지구는 속절없이 당하다가 그들이 추위와 초능력에 약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특히초능력의 경우 1999년에 태어난 이들이 가진 초능력에 특별히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에 태어난 이들 중 뛰어난 초능력을 가진 이들은 갑자기 외계인과의 전쟁에 군인으로 투입되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전투에 내몰린 그들 중 크리스 정이 있었다. 특히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그녀는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로페스 교관이 있었다. 


이야기는 크리스와 로페스의 악연, 아니 자헬 킬레츠와의 악연이 절정으로 이끈다. 그러한 이유로 크리스는 그 사건 이후로도 지금까지 고통 받고 고통을 주고 있었다. 2023년생이 자라서 19살이 되던 2042년까지도 말이다. 


듀나 작가의 <2023년생>은 가루다 팀이 외계인 수석 중 한 명인 에이바 플래너건을 습격하다 캡틴인 수린을 잃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구인들은 이제 외계인 군단의 행성을 찾아내기에 이르렀고 가장 유력한 위치를 찾았다. 그곳은 '지옥'이라 불렸다. 캡틴을 잃은 가루다 팀은 충원이 필요했고, 다국적인들로 이루어진 팀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지옥'에서의 최후의 전쟁을 준비하게 되는데...


에이바 플래너건을 제거하면서 이제 남은 수석은 자헬 킬레츠 정도였다. 외계인 군단은 자신들의 군대가 죽어도 지원군을 보내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전히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지구에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고, 전후 시기를 저울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외계인과의 싸움에서 든든한 아군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처치곤란일 초능력자들의 처분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자신들의 힘만 믿고 민간인을 괴롭히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나 성폭력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10대들을 전쟁에 투입하는 건 옳은 일일까. 과거 소년 십자군처럼 어른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어린 나이에 자신들의 힘을 '살육'하는 데 써야 했다. 비록 외계인이라고는 하지만 살아있는 누군가의 생명을 꺼트리는 일은 참혹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통제하기 힘든 대상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 초능력자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초능력을 제어할 기술이 필요했다. 일전에 로페스가 사용했던 알코올이 든 목걸이처럼 말이다.


성폭력과 살인을 자행한 이들은 강철불사조 팀이었다. 그들은 교수대에 매달리는 대신 전투에 투입되었고, 이제는 여성 군인들에 대해 음담패설을 나불거렸고, 외계인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화가 난 가루다의 예류가 가해자인 이동수를 잡으러 가면서 자헬 킬레츠의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렇게 수석들의 이름이나 외모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외계군단의 방해가 있었지만, 팀은 '지옥'으로 향했다. 과연 그들은 왜 지구를 침략했으며, 왜 그렇게 크리스를 괴롭혔을까. 예측한 장소에 '지옥'이 있을까.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초능력자들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외계군단과의 전쟁이 끝난 후 지구는 어떤 모습을 지닐까. 어떤 체제를 구성하고 어떤 사회를 지향할까. 큰 전쟁 하나가 끝나고 또 다른 다툼은 없을까. 인간은 다투기 좋아하는 존재라 또 어떤 꼬투리를 잡아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할지 모르겠다. 살육의 전장으로 내몰았던 초능력자들을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르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은 그저 꿈일 뿐인 걸까. <삼체>에서도 그랬지만 우주의 질서란 하나의 재앙을 또 다른 재앙으로 덮는 것은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 <르네상스> 독자들에게 그 반전은 폭탄과 같았다. ‘그 에피소드‘는 <르네상스> 독자들이 순정만화에서는 안전하게 여기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규칙을 깨트렸다. 허겁지겁 앞의 에피소드로 돌아간 독자들은 이 작업이 독자들의 눈앞에서 뻔뻔스럽게 윙크를 던지며 무자비하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부터 오직 그 결말만을 위해 달려온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순정만화‘라는 장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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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기담집 - 기이하고 아름다운 열세 가지 이야기
나쓰메 소세키 지음, 히가시 마사오 엮음, 김소운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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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도 움직이라고 우는 소리에

 무덤이 움직이고

 가을바람 밤새도록 불어

 새벽이 희미하게 밝았도다

 초저녁에 꾼 꿈의 흔적을 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새벽이 밝았도다.' (p.9)


1904년 경 나쓰세 소세키가 썼다는 <귀신이 곡하는 절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신체시의 일부이다. 이 절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시였다. 그리워하던 이를 떠나보내고 쓴 시일까, 사랑을 잃고 쓴 시일까, 지나는 길에 그저 빗소리와 곡소리를 듣고 쓴 시일까. 김소월의 <초혼>처럼 처절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내 기분 때문인걸까 생각했다. 죽음은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무덤이 움직일만큼 울어도, 밤이 지나지 않도록 붙잡고 싶어도 결국 새벽은 오고 떠난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피눈물이 흐를 정도로 미친듯이 울어서 얻을 수 있는 건 남은 이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무덤이 갈라지는 일(양산백과 축영대 설화 혹은 영화 '양축') 뿐이다. 날이 밝으면 세상은 어제와 같을 뿐, 나만 슬픔에 잠겨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환상문학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서양 작가인 찰스 디킨스나 코난 도일이 매료되었던 유령이 아니라 동양 작가인 그가 생각하는 요괴나 귀신은 어떤 존재이며, 그것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이 기담집은 총 13가지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긴 봄날의 소품>이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 일부를 발췌한 장도 있다. 신체시도 있고, 짧은 이야기들이 엮어져 있기도 하고, 아서 말로리의 <아더왕의 죽음>이나 세익스피어의 <멕베스>나 <해로가>와 같은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중 <취미의 유전>의 경우 러일 전쟁 승전 후 기차역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좀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아무래도 일제 강점기 시절 때문이리라. '만세'의 의미를 생각하며, 전쟁을 옹호하지는 않지만 드러내놓고 비판하지도 않으면서 친구였던 '고'를 떠올린다. 러일전쟁에서 죽은 친구 '고'와 '나'가 알지 못한 고의 여자와 고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유전'이란 단어보다는 '족보'나 '계보'가 더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취미로 알아 본 계보 혹은 호기심에서 시작한 계보 추적 이야기가 좀 더 우리에게 와 닿을 것 같다. 그리고 취미라고는 하지만 결말이 제법 다정해서 기억에 남았다.


<열흘 밤의 꿈>은 말 그대로 꿈 이야기이다. 꿈에서 여인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을 기다리라고 한다. 꿈에서 자신의 아이는 눈이 멀었다. 꿈에서 원수를 만나고 배에서 높이 뛰어 물로 뛰어든다. 꿈에서 100년 전에 죽인 원수를 만나고 여자에게 납치된 쇼타로를 구하지만 구하지 못한다. 꿈은 환상이고 무의식이다. 


<긴 봄날의 소품> 중 몇 가지 이야기를 발췌하여 실었는데, 그 중 '고양이 무덤'이 기억에 남았다. 살아있을 적 고양이의 신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죽고 나니 난리법썩을 떠는 모양새가 쓸쓸했다. 무덤에 좋아하던 밥을 가져다 둔들, 좋아하던 장난감을 놓아준다 한들 더 이상 그것들을 먹고 놀 고양이가 없으니 말이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관심을 주었으니, 하찮은 보상을 던져주고 죄책감을 덜 것인가, 애초에 무언가를 돌본다는 자신의 모습이 흡족해서 애정을 쏟는가. 인간이란 참 이상한 생명체임이 틀림없다.


<하룻밤> 속 여인은 누구일까. 그저 개미인가, 환상인가. 수염 없는 남자와 수염 있는 남자와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여자는 같이 있었을까, 같이 있었다는 환상일까, 그저 한 명이었을까. 졸린 사람들의 중첩된 세상일까. 아니면 그저 하룻밤의 꿈일 뿐인가.


<환청에 들리는 거문고 소리>는 제법 괴담 같은 이야기이다. 무슨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과 연락이 닿지 않는 여인과 갑자기 몸이 아픈 남자와 개 짖는 소리, 그리고 할멈. 그렇게 사람은 소문과 생각에 홀리고 어쩌면 모든 것은 너구리의 짓일지도 모른다. 


<런던탑>은 나쓰메 소세키가 런던에 있을 때의 경험을 살린 이야기이다.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구절을 불러온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렇게 에드워드 5세와 동생 리처드의 슬픈 사연이, 까마귀들의 날개짓이, 알아보지 못할 낙서를 읽어내는 여자가 저 구절과 만난다. 나쓰메 소세키가 만난 유령들은 그에게 몽환을 선사했고, 집주인은 잔인하게도 그 환상을 깨부수었다.  


<환영의 방패>는 지극한 사랑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섬기는 자가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배신해야 할 상대의 딸과 어떻게 사랑을 이룰 것인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그 '환영의 방패'에 답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답이 될까.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버리고. 끝없이 불타오르다가도 끝없이 어둠이 이어지고 검은 연기가 자욱한 그 세계에 모든 것을 남기고. 어쩌면 윌리엄과 클라라 둘 모두를 남기고.


<해로행>은 아서 말로리의 <아더왕의 죽음>을 모티브로 쓴 글이다. '해로가'는 만가(輓歌. 죽은 이를 애도하는 시가)이다. 랜슬롯과 기네비어를 위한 만가인가, 아더를 위한 만가인가, 랜슬롯을 사랑했던 여인들을 위한 만가인가. 끝내 성배를 조우하는 임무를 자신의 아들인 갤러해드에게 빼앗긴 랜슬롯과 다음 왕을 선택할 수 있는 지위를 잃은 기네비어는 각기 다른 곳에서 평생을 참회하며 지내야 했다.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아더는 배신자 모드레드에게 치명상을 입고 모르가나가 다스리는 아발론으로 떠났다. 


<맥베스의 유령에 관하여>는 정말 말 그대로 <맥베스>에 나온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다. 맥베스는 덩컨에 이어 뱅쿠오를 죽인 후 유령을 두 번 만나는데, 이 유령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를 말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두 번 나타난 유령이 모두 뱅쿠오라고. 확실히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며, 맥베스의 배경인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소세키 요괴 구절 모음집>은 말 그대로 소세키가 언급한 요괴글들을 모아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정말 요괴를 만났을까? 그들이 말하는 텐구나 설녀를 만났을까? 해골을 두드려 본 제비꽃은 누구일까. 


스산하고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아 요괴에게 홀린 것인지, 소세키에게 홀린 것인지,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기와지붕에서 새는 빗물 소리 고즈넉하고
슬픔 가득한 내 몸에 저승의 죽은 이가 왔도다. - P7

무덤도 움직이라고 우는 소리에
무덤이 움직이고
가을바람 밤새도록 불어
새벽이 희미하게 밝았도다
초저녁에 꾼 꿈의 흔적을 보니
잡초가 무성하게 새벽이 밝았도다. - P9

아무리 큰 태산이라도 작은 카메라 속에 담기고, 수소도 식으면 액체가 된다. 목숨을 건 달콤한 사랑을 한 점에 응축시킬 수 있다면-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강렬한 경험을 한 사람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윌리엄 뿐이다. - P270

무시무시한 쓰나미가 지나가자마자 닥친 장마
비 한 모금 마시고 객실을 빠져나가는 반딧불이인가 - P331

3
해골을 두드려본 제비꽃인가

9
인형 홀로 움직이는 긴 낮인가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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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4-11-17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때 열흘 밤의 꿈(그때는 ‘몽십야‘)라는 이름으로 묶인 단편집 되게 인상깊게 읽었었던 기억입니다. 환영의 방패도 되게 재밌었구요. 그때 그거 읽고 판타지 단편 써서 수업 과제로 제출했는데 B받고 좌절....

꼬마요정 2024-11-18 11:22   좋아요 0 | URL
음.. 교수님 많이 옛날분이셨을까나요. 저 그 판타지 단편 궁금합니다. 올려주시면 무조건 A+ 드립니다!!
 
라이프 트렌드 2025 : 조용한 사람들
김용섭 지음 / 부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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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이어져 온 트렌드들이 어느새 꽃 피우고 열매를 맺은 듯. 이제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기후위기와 끝나지 않은 전쟁, 트럼프의 당선이 우리의 삶에 끼칠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다. 거기다 AI의 영향력까지 더해 우리는 보다 개인적이고 어디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꾸려가게 될 것이다. 개인은 움직이지 않아도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면 어느새 알지 못하는 곳에 다다른다. 돌아보면 알게 될 그 곳은 어디일까.

2013년에 시작한 이 책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주의 문화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마침내 2025년에는 ‘조용한 사람’들이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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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도윤 지음 / 한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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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화재로 가족을 모두 잃은 이준은 신을 믿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신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던 중 한사람 마을로 발령이 났다. 폐쇄된 마을로 들어간 그는 곧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


굽었던 허리를 펴주고, 잃었던 목소리를 찾아주고, 마을을 홍수에서 구해주는 등의 기적은 무엇을 대가로 얻었던 것일까. 사람의 생명은 공평하고 동등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내 목숨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신'은 소원 하나와 대가 하나를 교환했다. 그 신에게 소원과 대가는 동등했다. 소원과 대가의 가치를 재는 건 인간이었다. 인간의 탐욕은 돈과 명예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인간은 결핍된 모든 것에 욕망을 일으켰다. 


대가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소원을 빌었을까? 아마 이 의식을 주관하는 이장은 자신이 마을의 질서와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은 어떠한가. 


누군가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더 광기에 휩싸이게 되고 더 열심히 빌었다. 더 신선한 고기를 찾으려 했고 정성스레 자신의 소원을 빌며 이루어지길 소망했다. 경쟁자를 원하지 않았기에 이 비밀은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폐쇄적인 장소, 금기를 가진 사람들, 기적이든 저주든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 오컬트적 요소를 모두 갖춘 이 이야기는 점점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소원만 이루어준다면 그 '신'이 누구이든 상관없을까. 종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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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0-30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라는 걸 신은 이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결국 자신이 이뤄야죠 그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여야 하는군요 다른 건 어렵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10-31 16:20   좋아요 1 | URL
희선 님 말씀이 맞아요. 결국 자신이 이뤄야겠죠. 죽은 가족이 살아돌아오면 좋겠지만 그건 정말 이루어져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을테니까요. 노력해서 다 이룰 수는 없어도 노력해야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겠죠. 어렵습니다.
 
라비헴 폴리스 2049 순정만화 X SF 소설 시리즈 1
박애진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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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강경옥 님의 작품은 제법 많다. 없는 책을 찾는 게 빠를 것이다. <노말시티>와 <설희> 정도 외엔 다 가지고 있다. 심지어 <퍼플하트>도 있다. 완결 나지 않은 그 작품을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많은 이야기들 중 <라비헴 폴리스>는 정말 멋진 작품이다. 하이아와 라인이 만들어 가는 미래 SF 이야기인데, 가벼운 듯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순정만화는 로맨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시대 독보적이었던 많은 만화가들이 보여줬는데, <라비헴 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비헴 폴리스> 속 주인공인 하이아와 라인의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생각, 가치관, 삶의 방향,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등을 시대가 반영된 시선으로 알아갔다. 미래 그 시대는 과학이 발전했더라도 여전히 부조리와 불합리가 겹쳐 있지만, 과학이 발전하여 생긴 또다른 따뜻함과 다정함이 인간과 함께 공존했다. 우리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당연히 살면서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쉽게 가슴 뛰게 하고 좋은지 아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란 감정이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위치한 사회적 맥락이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라비헴 시티(만화책으로는 2025년, 웹툰으로는 2045년이라고 한다.)에서 하이아는 20세기 여성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여성 경찰이고, 라인은 어느 정도 20세기에 있을 법한 냉미남 스타일의 남성 경찰이다. 시대가 흘러도 남성은 잘 변하지 않는 것인가 싶다가도 라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여자에게만 다정한 모습은 확실히 순정만화의 주인공이었으나 상대에게 무관심한 듯 하면서도 알아야 할 것들이나 '배려'할 것들을 세심하게 잡아내는 모습은 좀 더 미래지향적인 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만화의 뒷 이야기가 소설로 태어났다. 웹툰 기준으로 2045년 이후의 이야기로 2049년을 다루고 있다. 여전히 하이아와 라인은 라비헴 시티의 경찰이다. 그리고 미래 도시이자 독립된 도시 국가이자 번영하는 곳인 메가시티 라비헴의 이면에는 메가슬럼 라마스 지구가 있었다. 어디에나 화려함 뒤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라비헴이 품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라마스 지구로 모이면서 라비헴 시티 입장에서는 라마스 지구 문제가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 


애초에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실패했을 때 엄청나게 차이 난다. 부자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가난한 자는 실패 한 번으로 남은 생 전부를 빚 갚기에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다. 이는 중산층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모두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로봇들은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했고,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라마스 지구로 내몰렸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을 만들다 멈춰진 상태로 폐허가 된 라마스 지구는 마치 홍콩의 구룡성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고 살기 위해 필수적인 상하수도라든지 전기 공급이라든지 치안 문제는 라마스 지구에서도 극소수에게 할당되었다. 밑바닥으로 내몰렸다 생각했는데, 그 밑바닥에도 계층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동성매매나 마약 같은 범죄에 이용되었다. 


라비헴 시장이 이곳을 쓸어버리고 대규모 공연장을 짓자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중 라마스 지구에 대규모 화재가 일어난다. 화재는 방화로 규정되었고, 라마스 전담반은 라마스 지구 사람들을 범인으로 몰아가려 하는데... 경찰마저 진압로봇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선택을 해야 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 결과는 어느 쪽이나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시대에나 정치와 기업, 부와 권력은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 하지만 그 유착을 부수고 싶어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니 이 라마스 지구를 품고 있는 라비헴은 디스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로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디스토피아는 필연적인 것일까. 국가가 약자들을 외면할 때,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 행동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여전히 하이아의 아버지인 리안 박사는 하이아의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게 했고, 결혼식은 언제 할 거냐는 고리타분한 말을 한다. 어쩐지 라비헴 폴리스 만화를 계속 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웃음이 났다. 몬스타 국장이 라마스 전담국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하이아와 라인에게 어쩌다 긴 대사를 칠 때면 머리에서는 김이 나지만 추워지는 것 같아서 괜히 팔을 쓰다듬었더랬다. 이렇게 라비헴 폴리스 뒷 이야기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것에 대한 환상 또는 뼈를 깎을만큼 노력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어설픈 관대함에 대한 것을 드러내 주었다.  


<1993년생>과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뒷 이야기도 무척 궁금해졌다. 이 기획이 계속 되어 김혜린 님의 <아라크노아>도 뒷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나 말고도 <라비헴 폴리스>를 원할 작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선점해야 했다. <라비헴 폴리스>로 하고 싶었다. <라비헴 폴리스>여야 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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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0-28 0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나오기도 했군요 순정만화와 SF 소설이라니... 순정만화가 본래 SF였군요 본래는 2025년이었다니, 곧 2025년이에요 몇 달만 지나면... 꼬마요정 님은 이 만화도 보셨나 보네요 머리카락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그냥 한 말인지...


희선

꼬마요정 2024-10-28 23: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왔던 SF 소재 순정만화를 소설로 이어가자는 기획인가 보더라구요. 첫 번째가 <라비헴 폴리스>고 두 번째가 <1999년생>이고 세 번째가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라고 하더군요. 세 번째 책은 펀딩 진행 중이더라구요.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완결이 안 나서 더 기대가 되네요. 그래서 김혜린 님의 <아라크노아>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ㅎㅎㅎ 저는 다 봤는데 다 좋습니다. 정말 예전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이 많았네요. 멋집니다.

머리카락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니구요, 그냥 하이아 아버지인 리안 박사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해서 그런 거랍니다. 그래서 하이아도 체념하고 아버지 말을 들어주는 거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