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가시적 우주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는 온갖 제의와 의식을 통해 틀을 갖춘다. 제의 형식이 서고, 제물이 마련되며,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이 선택되는 일련의 절차가 확립된다.
이와 더불어 제의를 주관하는 공동체의 우월한 지도자와 제의 집행의임무를 띤 샤먼과 사제의 무리 같은 특권 집단이 생겨난다. 공동체의 안녕과 기복을 비는 제물로 바쳐질 희생양의 역할은 내부의 우두머리나 부족 간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들에게 할당된다. 개별존재가 아니라 불멸성을 향한 공동의 제의와 형식을 갖춘 인간 집단은 더 이상 자연과 운명의 힘에 취약하지 않고 비가시적 존재의힘과 호응하는 지상의 통제력을 누리게 된다. 제의를 위한 경제활동과 희생양 만들기의 형식은 모두 인간이 타고난 동물성을 일종의죄로 간주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기나긴 속죄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악은 이 속죄 과정의 불가피한 부산물일 따름이다.
악의 첫 번째 모습은 ‘인간 불평등‘이고, 두 번째는 ‘자연의 대상화‘이다. 원시의 평등주의적 공동체에서 널리 시행된 포틀래치 전통은 가시적 신을 욕망하는 집단적 욕구와 제의의 중앙집중화를 통해 특권적 집단이 권력을 누리고 대중들은 거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로 진화한다. 베커의 이 밑그림은 인간불평등이 권력과 압제를 행하는 계급과 국가의 성립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루소 및 그를 추종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과 다르다. 베커가 보기에 루소는 인간의 노예화가 주체의 의지와 무관한 구조적 - P319

권력에 있다고 명시하며,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표방해 온 정치적해방의 서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불평등의 기원인 사적소유와 특권계급, 그리고 국가의 폐지가 곧 인간해방의 기치로 정립된다.
베커는 이러한 명확한 정치적 의제가 현실에서 왜 실현 불가능할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미 실패한 프로젝트인지 비판하고자 한다. 베커에겐 인간의 예속성과 불평등 자체가 아니라 ‘자발성‘이 문제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 충동의 ‘내달림 drivenness‘
이다. 그가 마르크스주의 사상 및 당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표방한 의제들에 깊은 의구심을 표한 바탕에는 자기소외를 욕망하는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천착이 깃들어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자유롭다가 나중에야 자유롭지않게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공상적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로웠던 적이 없으며, 자신의 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지속적인 삶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속박을 지니고 있다.
랑크가 잘 알려주듯, 루소는 단지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을 이해할수 없었을 따름이다. 즉 루소는 "모든 인간 존재가 또한 똑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권위를 필요로 하며 심지어 자유로부터 감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본문 84~85쪽)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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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위해서 그러는 건데?"
……
나는 계속 그 질문을 떠올리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이 사건에 ‘주고받음‘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시나리오가 딱 한 가지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는 남편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게다가 지금 그를 깨울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대신 당신에게 말해 주겠다. 어쩌면 맨처음 내가 차에서 뛰어나간 건 나 자신을 던져 버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길 쪽으로 향하던 그때, 사방은 어두웠고, 강물처럼 어두웠고, 내안에 있던 어떤 오래된 감각을 충분히 휘저어 놓을 만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모르는 사람이 몸을 일으키게 돕고 있던 나는 어쩌면 어떤 영혼의 쌍둥이였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의 어느 날 밤, 어느 강변의 난간에 앉은 채 술에 취해 울고 있던 내 몸을 뒤로 끌어당겨 주었던 모르는 사람의 쌍둥이. 오늘 그 여자의 몸을 흔들면서, 어쩌면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예전의 내 몸을 흔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 속에는 어떤 등가성이,
어딘가 기이한 상호 관계가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을 향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어쩌면 슬픔과 고통에 잠긴 우리 모두를 향해, 그 여자의 고통을 향해, 그 남자의 고통을 향해, 그리고 나자 - P219

신의 고통을 향해, 마법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법은 드디어 제대로 작동해서, 이번에는 정말로 다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괜찮아졌을 수도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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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라이넨. 그것은 시대정신입니다. 나는 법을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회를 믿습니다. 결국 누가 옳은지 우리는 알게 될 겁니다." 늙은 변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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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레 - 가엾게 여기소서 토마토문학팩토리
최난영 지음 / 토마토출판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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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목구멍이 막혀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입을 크게 벌려 아무리 살펴도 목구멍을 막고 있는 이물질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왜 삼킬 수 없는걸까. 목구멍 속에 호두알 같은 것이 박힌 느낌이라 씹고 삼킬 수 없다는데, 도대체 왜?


이야기는 계속해서 목구멍이 꽉 막혀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영음이 어떻게 살아있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한다. 성인 여자 키가 167cm인데 몸무게가 35.7kg이라면 믿겠는가. 아이돌도 그보다는 몸무게가 더 나갈 것이다. 


영음은 고 2때 갑자기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유명한 무당은 집에 들여서는 안 될 것을 들였다고 했다. 일주일짜리 굿을 하던 중 마지막 날, 영음은 도망쳤다. 온갖 병원을 다니고 무속에도 기대어 보던 그들은 결국 사이비 종교에 빠졌고, 영음은 자신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기에 부모와 연을 끊고 서울에서 홀로 살았다.


그러던 중 자신이 먹을 수 있게 되는 때가 누군가의 죽음을 본 때라는 걸 알게 된 영음은 어느 순간 시체 옆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식욕을 거부하지 않고 먹었다. 그 시체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누군가의 죽음이 '그'의 죽음이어야 이 저주가 풀릴까, '나'의 죽음이어야 풀릴까. 죽음으로 해소될 수 있는 저주일까.


영음이 먹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 무의식 속에 갇힌 일화와 죄책감 때문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지 못한 채 방관자와 동조자가 되어버린 영음.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만큼 어른스럽지 못했고, 자신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미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 몰랐다고 한들 자라서 그 죄의 무게를 알게 되었을 때, 영음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


결국 가장 잘못한 자는 그 죄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살았을테고,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그녀는 죽지 못할 삶을 살았다. 협박을 한 것도, 강제로 추행을 한 것도, 의심으로 폭행을 한 것도 다 그들인데 어째서 피해자들이 손가락질 받는 걸까.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서 가해자인 브리오니가 잘못된 말을 하여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면 여기서는 해야할 말을 하지 않아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가엾게 여겨질 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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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9-18 2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추석 잘 보내셨나요?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일거 같네요. 왜 항상 더 고통받는건 피해자이고, 잘못을 아는 사람일까요? 그거 참 이상하죠.이상하면 바뀌어야 되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네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소설일거 같아요.

꼬마요정 2024-09-18 23:55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 님!!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입니다.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어요. 점점 오컬트 쪽으로도 좋은 이야기들이 많아져요!! 너무 좋습니다.

물론 내용은 말씀처럼 슬프지만요ㅠㅠ 잘못을 아니까 고통 받고 용서 받고 싶고 잘못을 뉘우치고 그러는데, 가해자들은 양심이 없는 건지 뇌가 없는 건지 정말 화가 납니다. 나쁜 놈들!!

서니데이 2024-09-18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추석연휴 잘 보내셨나요.
주말과 연휴가 같이 있어서 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날씨가 너무 덥기도 하고요.
연휴가 끝나면 9월도 후반이 되네요.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4-09-18 23:56   좋아요 1 | URL
연휴가 정말 화살처럼 바람처럼 훅 지나갑니다ㅠㅠ 심지어 9월인데 너무 더워서 깜짝 놀랐네요. 얼른 더위가 물러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벌써 9월도 후반이라니... 시간이 빠르긴 합니다.
서니데이 님, 더운데 건강 조심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희선 2024-09-20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에 문제가 없지만 먹지 못하다니... 그것도 힘든 일일 듯합니다 마음의 문제군요 어릴 때는 모르기도 하죠 나이를 먹고 그걸 알게 되면 참 마음이 안 좋을 듯합니다 왜 더 일찍 몰랐을까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은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더 잘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4-09-21 00:12   좋아요 0 | URL
마음이 아프면 몸도 영향을 받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힘들어지니까요. 건강한 마음과 몸이 정말 중요한 듯 합니다. 어릴 때는 그저 혼날까봐 말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죠ㅜㅜ 안타깝습니다. 가해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은 좀 별로긴 해요ㅜㅜ
 

"기술은 사람을 배제시키는 게 아니라, 살 길을 여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 P135

하지만 평생 결코 그런 집은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리라는 현실은 사람을 좌절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 P154

"뭐든 그 일을 하기에 딱 좋은 때라는 건 없는지도 몰라. 결정하고 헤쳐 나가야하는 순간들이 있을 뿐. 나는 시청에서 혼인 신고로 대신하는 것도 좋아. 가까운 사람들 불러서 밥이나 먹고."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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